그리고 그건스스로를 잠재적 작가라고 보는 사람들의 문제를 우회합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내가 그랬다면‘, ‘내가 그럴 수 있었다면‘, ‘내가 시간이 있었다면‘이라고 말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어쩌면 그건 사실 그들이 현실에서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겠지요."
"산문 또는 시를 쓰는 작가의 창작 과정과 비교했을 때 그림을그리는 과정은 어떨까요?"
"클라리시, 아마도 차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재료의 차이일것입니다. 화가는 색과 그림과 선을 이용하죠. 작가는 문장을 이용하고요. 그러나 창작자로서의 숨은 같은 것이어야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본질이 다를까요?" - P585

"자원은 같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저는 루시우 카르도주에게 무척 놀랐어요. 그는 아픈 이후로 더는 글을 쓸 수도, 불러줄수도 없게 되었지요. 실어증에 걸렸거든요. 그렇지만 왼손으로그림을 그렸어요. 오른손은 마비된 상태였죠. 왜 왼손으로 글을쓰지 않았을까요? 의사가 설명하길, 제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틀리지 않는다면, 뇌에는 글, 단어가 나오는 엽이 있다고 해요. 또 다른 엽에서는 그림이 나오고요."
"그가 글을 쓰듯이 그림을 그릴까요? 아니죠. 그림을 그리는것은 수공업이에요, 도구를 다룰 줄 알아야 하는 거죠. 단어를가지고 창작하려고 애쓰는 작가도 마찬가지예요. 단번에 그림을 완성하는 화가는 없어요. 문학에서는 그런 게 존재하나요?" - P585

"어쩌면 랭보는 그랬을 거예요."
우리는 잠시 침묵하며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기 전에 완성작의 모습을 머릿속으로이미 그리시나요? 아니면 그 작품의 특별한 세계를 한 발 한 발발견해나가시나요?"
"작품을 창작하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일입니다. 예술가는 자기 작품의 첫 번째 관객이지요. 앞선 해결책, 깨친 지식은 새 작품을 창작하는 데 쓰이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배웠던 것을 잊으려고 할 때에만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저는 이미 그린 그림들을 다시 그리는 데 시간을 다 썼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건 그저 복사, 복제품에 불과하지요. 네, 클라리시, 우리가 어떤 여행에 뛰어들 때 우리는 직관으로 무언가를 찾습니다. 나아가야 할 길을 정하고 목표 지점을 선택하지만, 그것이 도착 지점에 당도해야 밝혀지는 것들을 예단하는 일은 아니지요.  - P586

"어떻게 구상을 버리고 추상화가가 되신 걸까요?"
"저는 구상을 버리지 않았어요. 그저 변형시킨 것뿐입니다. 당신의 질문이 뛰어난 화가, 이름 있는 화가가 되기 위해 애썼느냐고 묻는 것이라면,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것에는 신경쓰지 않았어요. 오히려 사람들이 저를 거장으로 여길 때마다 무척 놀라는걸요.... 당신은 어떠신가요? 이름을 알리는 게 중요한가요?"
"아니요, 그건 사회적인 문제일 뿐이에요. 실질적으로 중요한것은 표현하는 단어를 기다리며 백지 앞에 있는 것이지요. 그때가 정말 중요한 순간이에요. 이베레, 주제를 바꿔보죠. 어떻게 - P587

실패가 당신 작품의 출발점이 되었을까요?"
"실패는 제 어릴 적 판타지이자 저의 장난감이었어요. 그것이제가 만든 작품에 상징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죠."
"인간의 얼굴에는 어떻게 관심을 두게 되셨나요?"
"화가의 관점으로 말하자면, 저는 인간의 얼굴에 특별한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으로서 얼굴은 그 사람을 비춰준다고 생각해요. 얼굴이 그 사람을 드러내지요. 저는 내면이 썩은사람은 외면도 썩었다고 생각해요. 클라리시, 그게 아니라면 특수효과를 내기 위해 배우들이 분장할 필요가 없겠지요."
"색깔은 어디까지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색깔만으로 화가가 느끼는 것을 표현할 수 있나요? 정확히 왜 붉은색 대신에 밤색을 쓰는 것일까요?" - P588

"저는 색이 문맥, 관계 속에서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립된 색이 차갑거나 따뜻하다고 한다면, 색의 강렬함은 다른 색과부딪치면서 그 정도가 결정되기도 해요."
"작품을 창작한 후에 어떤 상황에서 자신이 해방되었다고 느끼시나요? 작업을 잠시 중단하기도 하시나요? 혹은 즉각적으로창작하셔야 하나요?"
이베레는 깊이 생각했다. 나는 그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
"작품 하나를, 혹은 연작을 끝내고 나면 비워냈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러고 나서는 준비 작업이 시작되죠. 그렇게 창작 기간이다시 시작되는 거예요. 당신도 그런 경험을 하신 적이 있나요?" - P588

"비슷해요. 과장 하나 없이 절망이라 말할 수 있는 허무를 느껴요. 저는 더 심하죠. 새로운 작업의 발아와 준비에 몇 년이 걸리기도 하거든요. 그사이 저는 죽어 있는 거죠. 신인 화가들에게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나요?"
"잠시 생각을 좀 해볼게요." (그는 팔짱을 끼고 한동안 생각에잠겨 있다가 내게 물을 한 잔 마시겠다고 말했다. 그러고 돌아와서이 질문이 가장 어렵다고 말했다.)나도 역시 물 한 잔을 마시고 침묵 속에서 답을 기다렸다.
"너무 어려운 질문이라는 걸 아시나요?" 이베레가 말했다. "천천히 생각해보세요." 나는 대답했다. 마침내 이베레가 입을 열었다.
"자신이 그림을 창조했다고 믿지 말 것. 당신은요? 신인 작가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나요?"
"쓸것. 쓰고 또 쓸 것."
"야스퍼스는 새로운 세대는 손에 구멍이 나 있을 거라고 썼죠." 이베레가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베레가 인용했던 야스퍼스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 P589

세상에, 사랑이 얼마나 죽음을 방해하는지! 이해는 너무 제한적이기에 나는 내게 본능적, 직관적 삶을 살게 해준 나의 몰이해에 의지한다고 말하지만, 이 말을 통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나는 친구들을 잃었다. 그러나 죽는 것이 두렵진 않다. 나는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건 쉼일 것이다. 그러니까 마침내 요람에 들어가는 것. 나는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살아낼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내가 버지니아 울프와 비슷하다고 말하는 게 싫다. (게다가 나는 첫 책을 쓰기 전까지 그녀의 책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자살했다는 것을 나는 용서할 수 없다. 끔찍한 숙제는 끝까지 가는 것이다.  - P600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자기만의 현실을 사는 것이다. 진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덜 고통받기 위해서는 조금 무뎌져야 한다. 더 이상 세상의 고통을 책임질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다른 사람들이 무엇이며 또 무엇을 느끼는지를 온전히 느낀다면? 나는 ‘다른 사람들의 말에 따라 살지만 더 이상힘이 없다. 나는 조금은 ‘나를 위해‘ 살 것이다. 조금 더 무뎌질것이다- 내가 절대 하지 않을 말이 있다. 책에는, 신문에는 더욱이 하지 않는다. 세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한 남자가 내게 말하길 탈무드는 많은 사람에게 하지 못하는, 몇몇 사람에게만 할 수 있는 말을 한다고 했다. 나는 이렇게 덧붙인다. 나 - P600

는 내 자신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 나는 내가 몇 가지 진실을 알고 있다고 느낀다. 그렇지만 내가 그것을 정신적으로 이해하는지 모르겠다. 그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조금 더성숙해야만 한다. 난 이미 짐작하고 있다. 그렇지만 진실에는 단어가 없다. 진실들인가 진리인가? 내가 신에 대해 말할 거라고생각하지 말기를. 그것은 나만 아는 비밀이니까.
맑은 가을날이다. 해변에 부드러운 바람과 자유가 가득하다. 나는 혼자였다. 그때는 아무도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내가 느끼는 것을 누군가와 나눠야 하니까. 바다는 잠잠했고, 나도 역시 차분했다. 그러나 의심하며 경계했다. 그 고요함이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처럼. 아직도 곧 무언가 도래할 것 같다. 뜻밖의 일은 나를 매료시킨다. - P601

나는 이미 두 사람과 너무도 강렬한 대화를 나눠서 존재하면서도 존재하기를 멈췄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고? 우리는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상대였고 상대는 나였다. 그것은 말로 설명하기에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일은 너무도 어렵다. 너무도 조용하다.
두 영혼의 만남의 깊은 침묵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말로 하기 너무 어렵다. 우리는 서로를 뚫어질 듯 바라봤고 한동안 그 상태로 있었다. 우리 두 사람뿐이었다. 그 순간은 내 비밀이다. 이른바 완벽한 일치 상태가 됐다. 나는 그 순간을 행복의 예민한 상태라고 말한다. 정신이 끔찍하게 맑은 데다 보다 숭고한 차원의 - P601

인간성에 다다르는 느낌인 것이다. 그것은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가장 고귀한 순간이었다. 다만 그런 후에…… 그러고 나서 이사람들에게 그 순간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 분주했고 나는 혼자였다. 완전히 혼자였다. 그것은 깊을수록 말 없는 고통이다. 이제 나는 턴테이블을 고치러 온 사람을 맞이하기 위해 잠시 멈춰야 한다. 내가 어떤자세로 타자기 앞에 돌아올지 모르겠다. 나는 한동안 음악을 듣지 않았다. 나를 무감각하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번에는 영화 <잃어버린 전주곡>을 보면서 현행범이 되어 깜짝놀랐다. 음악이 흐르고 내가 울고 있었던 것이다. 운다고 부끄러워할 것은 없다. 내가 울었다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게 부끄러운것이지. 나는 글을 쓰고 돈을 받는다. 그러므로 써야 한다. - P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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