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는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백년 동안의 고독을 지은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그 책은 보기 드물게 문학적가치를 지닌 베스트셀러다. 가족 이야기를 다룬 소설로 사랑과 폭력과 광기가 가득하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사실만을 가지고 글을 쓴다. 그의 인물들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한없이 고독한데,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그들의 생각을 글로 옮기지 않는다. 작가 역시 "시와 유머, 고귀하고 마법 같은 언어로, 행위의 리듬을 따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광인, 시인, 혁명가, 망나니들, 예쁜 여자들, 이 모든 족속들에게서 " 넘어설 수 없는 고독감을 느꼈다. 시인 엘리아니 자구리가 훌륭한 번역을 해냈다. (포르투갈어에서 어떤 이국적 언어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는 책을 번역하는 동안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매순간 놀라운 책으로 366쪽에 예기치 못한 요소가 담겨 있다. 사비아 출판사에서 출간됐으며, 훌륭한 일러스트는 카리베의 작품이다.  - P397

충동, 그 이상은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그저 충동이었으나 하나의 충동은 아니다. 충동이 그 여자를 유지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유지한다는 것은 어떤 ‘상태‘임을 암시하는데, 충동이 계속해서 그녀를 움직이니 ‘상태‘를 이야기하는 건불가능한 것이다. 물론 그녀는 어딘가 도달하려는 버릇이 있으므로 그 충동에 힘입어 어느 곳 또는 어느 행동에 다다를 것이다. 바로 그 점이 충동의 자동사적 성질에 반하는 아주 작은 불편함을 일으킨다. 그러나 자동사적 성질을 말했다고 해서 충동의 무상성을 말하고자 함은 절대 아니다. ‘매매‘의 습성, 결론에도달해야 안도의 숨을 쉬는 행위에 익숙한 우리는 결론이 나지않는 것, 끝나지 않는 것, 흩어진 채로 있는 것, 중단된 것을 생각하기에 이른다. 사실상 충동은 늘 ‘어딘가로 향하게‘ 하는 것이었는데도 말이다. 그것은 다시 한번 거리에 대한 문제, 그러니까멀리 가려는 것인가 가까운 곳에 가려는 것인가, 또 어디로 가려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숙고하게 만들 수 있는데, 이때 우리는 조금 전에 말했던 충동의 실행과 충동 그 자체를 혼동할 때 생기는아주 작은 불편함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 P401

우리는 글쓰기에서 형식과 내용의 대립을 말한다. 우리는 내용은 좋지만 형식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럴 수가! 그러나문제는 한쪽에 내용이 있고 다른 한쪽에 형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랬다면 쉬웠을 것이다. 그것은 형식을 이용하여이미 자유롭게 존재하는 것, 내용을 말하는 것일 테니까. 그러나형식과 내용의 대립은 본래 생각 안에 있다. 내용은 형식을 갖기위해 투쟁한다. 사실상 형식 없이는 어떤 내용을 생각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오직 직관만이 내용도 형식도 필요로 하지 않고 진실에 이른다. 직관은 형체 없이 이뤄지는 가장 깊고 무의식적인성찰인 데 비해 형식은 나타나기 전에 애쓴다. 생각이나 글을 꼭두 국면으로 나눠야 한다면, 내가 보기에 형식은 내용이 준비된뒤에야 나오는 듯하다. 형식의 어려움은 내용을 구성하는 방식에서, 실제로 생각을 하거나 느끼는 데서 나온다-생각도 느낌도 때로는 독창적인 적절한 형식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 P417

무언의 소통

고독으로부터 우리를 구하는 것은 서로가 가진 고독이다. 때때로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 무슨 말을 하든 그들이 서로 나누는 것은 고독의 감정이다. - P421

더구나 제가 첫 책을 낸이후로 사람들은 제 ‘문장들‘에 대해서 말하지요. 그렇지만 의심하지 마십시오. 저는 신의 보살핌으로 문장 자체를 바란 게 아니라 문장을 통한 무언가를 바랐고 또 얻어냈으니까요.
‘언어 편중주의‘라 불리는 것은 감정의 언어에 가능한 한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고통스러운 의지입니다그것이 저를 놀라게 하는 부분이고요. 그리고 그것은 저에게 주는 것과 받는 것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거리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제가 준 것과 사람들이 받은 것이 무엇인지 저는 알고 있습니다. 상치아구단타스는 처음 이 책을 읽고 놀랐었지요. 그는 저에게 실력이 떨어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러고 난 후 그는 잠이 오지 않는 밤에 한번 더 그 책을 읽기로 했습니다. 그러고 저에게 경악하며 말했지요. "이건 당신이 쓴 최고의 책이잖아요." 그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루크레시아 네비스와 상제라우두의 말들을 깊이 이해했다는 점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아니요, 당신은 그 책을 ‘묻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당신도 역시 그 책을 ‘지었지요‘. 죄송하지만 상제라우두의 말들 중 한 마리처럼요. - P428

나는 어릴 적부터 개미들의 행렬을 책임졌다. 개미들은 인디언들처럼 줄을 서서 작은 나뭇잎을 들고 걷는데, 반대 방향에서오는 행렬이나 다른 개미들에게 뭔가를 말하기 위해 멈추는 행렬을 만나도 서로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다.
벌을, 특히 여왕벌을 책임진 이후로 벌에 관한 유명한 책을 읽었다. 벌들은 날아다니고 꽃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개미들은 크기가 매우 작은데, 어떤 개미든 매우 작으며, 개미 안에는 하나의 세계가 있다. 그것을 주의 깊게 살피지않으면 놓치고 만다. 그러니까 조직에 대한 본능적 감각, 인간의귀가 감지하지 못하고 자애심이라는 본능적 감정이 감지하지 못하는 초음파 언어가 개미들에게는 있다. 나는 어릴 때 개미를 책임졌다. 그리고 지금은 그 개미들을 너무도 다시 보고 싶은데 단 한 마리도 만난 적이 없다. 누군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랬다면 내가 알았을 테니까. 세상을 책임진다는 것은 커다란 인내심 역시 요구한다. 나를 위해 개미 한 마리가 나타나는 날을 기다려야만 하니까. 인내란 지각할 수 없을 만큼미세하게, 천천히 피는 꽃을 관찰하는 것이다.
나는 그저 아직 그것을 깨달은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 P434

어디서부터 시작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아는 것은 시작부터 시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은 동시에 써졌다. 모든 것은 거기 있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뚜껑이 열린 피아노의 시공간처럼, 동시에 울리는 피아노 건반처럼.
나는 커다란 주의를 기울이며 내 안에서 결성되고 있는 것을찾아 글을 썼고, 원고를 다섯 번째 본 이후로 그것을 지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말해지길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잘 이해하게 됐다.
내가 두려웠던 건, 내가 나를 이해하는 것이 느리다는 이유로일어나는 짜증 때문에 때가 되기 전에 서둘러 어떤 의미를 찾으려 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시간을 더 들일수록 해야 하는 이야기를 혼란 없이 할 수 있으리라고 느꼈다. 아니 확신했다.
매번 모든 것은 인내심의 문제이고, 사랑이 인내를 만들며 인내가 사랑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 P456

자라나는 일그러진 영혼은 부피가 커지는데, 사람들은 그것이 무언가의 기다림이 형성되어 세상에 나오는 것임을 전혀 알지 못한다.
힘든 기다림과 더불어 즉흥적이었던 최초의 시선을 조금씩글로 재구성하는 인내도 있다. 시선을 되찾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나는 글을 쓰지 못한다. 생각을 설명하지 못하고, 하나의 생각에 단어의옷을 입히지 못한다. 내가 쓰는 것은 과거에 했던 생각을 참조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의 생각이다. 적합한 단어, 대체할 수 없는 단어 또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로 이미 표면 위로 올라온 것 말이다. - P457

글을 쓰면서 나는 다시 한번 역설적이고 명백한 한 가지 확신을 느낀다. 글쓰기를 방해하는 것은 단어로 써야 한다는 것. 불편한 일이다. 그것은 내가 마치 더 직접적인 소통, 사람들 사이에서 때때로 일어나는 말 없는 이해를 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내가 나무 위에 그린 그림이나 어린아이의 머리를 만지는 손길또는 시골길 산책 같은 중간 단계를 통해 글을 쓸 수 있었다면,
나는 절대 단어의 길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글을 쓰지않는 모든 이가 하는 것처럼 했을 것이고, 글을 쓰는 사람이 느끼 - P457

세상의는 것과 정확히 같은 기쁨과 고통을 느꼈을 것이며, 달랠 수 없는깊은 실망을 똑같이 느꼈을 것이다. 나는 살았을 것이다. 단어를이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환영한다.


신문을 위한 글쓰기가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런 글은 가볍다. 가벼워야 하며 피상적이어야 한다. 신문을 읽는 독자들은 깊게 읽고 싶어 하지 않고 깊이 읽을 시간도 없다. 그러나 책을 위한 글쓰기는 분명히 우리가 가진 것보다 더 커다란 힘을 요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도 그렇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우리가 자신만의 작업 방식을 창조해야 할 때가 그렇다.  - P458

내가 열세 살에 의식적으로 글을 쓰고자 하는 의지를 인정했을 때 나는 어릴 적에 글을 썼지만 이 운명을 인정하진 않았다쓰기 의지를 인정했을 때, 갑자기 나 자신이 텅 빈 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텅 빈 곳에서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아무도 없었다.
나는 스스로 무無에서 일어서야 했다. 스스로 자신을 이해해야 했다. 결국 내 진실을 말하기 위해 스스로를 꾸며내야 했다.
나는 시작했지만 시작부터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종이는 저희끼리 서로 부닥쳤다- 의미는 서로 반박했고, 할 수 없다는 절망은 실질적으로 할 수 없게 하는 부수적인 장애물이었다. 그래서 나는 끝없는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헤르만 헤세의 「황야 - P458

의 늑대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다.) 그걸 간직하지 않은 게 얼마나 안타까운지. 나는 입문자의 거의 초인적인, 자신을 알아가려는 노력을 외면해 그것을 찢어버렸다. 모든 것은 비밀리에 이뤄졌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고통 속에서 혼자 살았다. 나는 일찌감치 한 가지를 짐작했다. 언제나 글쓰기를 시도해야 한다는 것. 글을 쓰기에 제일 좋은 순간을 기다리지 말 것, 그런 순간은 오지 않으니까. 내가 흔히 말하는 소명을 가졌다고 해도 내게 글쓰기는 늘 어려운 일이었다. 소명은 재능과는 다르다. 소명은 있어도 재능은 없을 수 있다. 그러니까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부름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 P459

우주에 대해 산발적이면서 당황스러운 생각을 해본 끝에 몇 가지 명백한 결론에 이르게 됐다.(명백함은 매우 중요하다, 명백함이 어떤 진실성을 보장해주니까.) 나는 일단 무한함이 있다는 결톤에 이르렀다. 수학적인 추상적 관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무한함 말이다.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유한을 바탕으로 고찰하는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다음으로 만약 우주가 유한하다면 다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유한함 다음에는 무엇이시작된다는 말인가? 그러다가 신은 무한하다는, 나로서는 매우 겸손한 결론을 내리게 됐다.  - P476

나의 횡설수설을 따라가다 보니 내가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나는 그런 점이 기뻤다. 그것은 희망의 기쁨이었다. 나는 내가 아는 얼마 안 되는 지식으로는 세상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러니까 내가 모르는 것에설명이 있을 수 있고, 나는 그것을 희망하며, 그 설명을 얻게 된다면 조금 더 알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무한함의 아름다움은 그것을 정의하는 데 쓸 수 있는 형용사가 하나도 없다는 데 있다. 무한함은 존재한다. 그게 전부다. 그저 존재한다. 우리는 무의식으로 무한함과 연결된다. 우리의 무의식은 무한하다.
무한함은 억누르지 않는다. 무한함에 대해서라면 ‘규모‘나 ‘약 - P476

분 불가능‘을 말할 수 없으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한함에 동조하는 것뿐이다. 나는 절대적인 것이 무엇인지 안다. 나는존재하고, 또 나는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나의 무지는 진정으로나의 희망이다. 나는 형용사화할 줄 모르고, 거기에 안전함이 있다. 형용사화는 질이다. 그리고 무의식은 무한함처럼 질도 양도아니다. 나는 무한함을 들이마신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나는 자신에게 취한다.
절대적인 것은 인간의 정신으로는 표현할 수도, 상상할 수도없는 아름다움이다. 우리는 그 아름다움을 열망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감정은 무한함과 우리가 맺는 관계이며, 우리가 무한함에 동조하는 방식이다.  - P477

분명 흔치 않은 일이겠지만, 무한함의 존재가 너무도 강렬하게 느껴지는 순간에 우리는 현기증을 느낀다. 무한함은 다가오는 것이다. 무한함은 시간에 의해 불가분한 현재다. 무한함은 시간이다. 공간과 시간은 같은 것이다. 내가 물리와 수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일인가. 그것들을 이해했더라면 이 의미 없는 횡설수설 대신에제대로 숙고하고 내가 느낀 것을 전달하는 데 적합한 어휘력을가졌을 텐데.
나는 우리가 누리는 풍요에 놀란다. 인간은 몇 세기에 걸쳐 시간을 계절로 나누게 됐다. 무한함을 날과 달, 해로 나눠보기도한다. 무한함이라는 것이 매우 숨 막히게 하고 심장을 옥죌 수 있으니까. 불안 앞에서 우리는 무한함을 의식의 영역으로 데려가고 인간적 형태로 단순화하여 조직한다. 그 형태 또는 조직된 모 - P477

든 다른 형태 없이도 우리의 의식은 광기만큼 위험한 현기증을느낀다. 동시에 인간의 정신에 무한성의 영원함은 쾌락의 근원이고, 우리는 그 점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해한다. 동의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살아간다. 우리 인생은 고작 무한함의 하나의 양식이다. 아니, 무한함은 양식이 없다. 의식이 무한함을 독식하는데 있어서 가장 적합한 형식은 무엇인가? 이미 말했듯이 무의식은 저와 무한함과 같다는 간단한 이유로 무한함을 인정한다. 우리가 원을 그린다면 우리는 무한함을 더 잘 이해하게 될까? 내가 틀렸다. 원은 완벽한 형태이지만 우리 인간의 정신에 속해 있어 인간의 본성에 의해 제한을 받는다. 사실상 무한함에 형용사는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연스러운 실수 중 하나는 무한함이 우리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로부터 보는 관점을 취하지 않고서는 ‘나는 존재한다‘라는 생각에 이르지 못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길을 잃었고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맞다, 무한함에 대해 바보 같은 소리를 적는 것 말고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지금은 점심시간이고가정부가 식사가 준비되어 있다고 이미 알렸다는 것. 내가 정말 멈춰야 할 순간이다. - P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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