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2020년 4월 11일이다.
미국 인문 기행을 쓰기로 한 이상, 아무래도 불가피하게 다뤄야만 하는 주제가 있다. 현재진행형으로 전 세계를 위협하고 있는 코로나19라는 재난에 대해서. 뉴욕 거리는 지금 무시무시한재앙의 한복판에 있다. 불과 수개월, 아니 몇 주 전만 해도 상상할수 없던 일이다. 거리는 인적을 찾을 수 없이 텅 비었고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을 비롯하여 영화관과 미술관도 모두 문을 닫았다. 너무나 적막해진 센트럴 파크에는 텐트로 만든 임시 병동이설치되었다. 죽어가는 사람이 점점 늘어간다. 보도에 따르면 4월10일 현재, 미국의 누적 사망자수는 1만8586명에 이르러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수를 기록하던 이탈리아의 1만8849명에 육박했다고 한다. 전 세계 감염자수는 150만 명을 넘었고, 사망자는 9만명을 웃돌았다. 중세 유럽을 휩쓸었던 페스트의 재앙이다시 찾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나는 수세기의 시간을 건너뛰어, 그 시대로 내던져진 듯한 느낌에 빠진다. - P125

인공호흡기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살아날 가망이없다는 판정을 받은 환자에게서는 호흡기를 떼어내고 있다고 한다. 병원의 처리 능력을 벗어난 희생자의 시신은 냉장 트럭에 쌓이고, 장례식도 치르지 못한 채 땅에 묻힌다. 이러한 사태는 앞으로, 특히 개발도상국에서는 점점 악화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일상화된 ‘지옥‘을 보게 될 것이다.
14세기 이후, 페스트가 석권한 유럽에서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경고가 말버릇처럼 사람들의입에 오르내리곤 했다. 하지만 북방 르네상스 화가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el (1.52.5~1569)이 그린 「죽음의 승리」는 그저 자연재해로서의 역병만을 묘사한 작품이 아니다. 이 그림은 다름 아닌 전쟁의 암유다. 재난과 역병은 저 홀로 사람들을 덮치지 않는다. 인간이 고통이나 비극을 배가한다. 인간은 재난과역병에 의해서만이아니라, 인간 스스로에 의해 살해당하는 존재다. - P127

시간이 지난 후 ‘아, 그런 일이 있었지.‘하며 되돌아볼 날이 올지, 아니면 ‘아, 그때가 대재앙의 서막이었어‘라고 되뇌게 될지 지금은 예측하기 힘들다. ‘대재앙‘은 비단 역병만을 가리키는 것이아니라, 이 혼란에서 시작되어 자기중심주의와 불관용의 정신이만연하고 파시즘이 대두하는 그런 시대를 일컫는다. 이미 일본을 포함한 세계 여기저기서 불길한 조짐이 고개를 들이밀고 있다.
그런 와중에 ‘인문 기행‘을 써 내려간다는 것 자체가 솔직히 - P127

어렵다. 시시각각 들어오는 정보를 따라가는 것만으로 마음은착해지고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간다. 그럼에도 나는 이렇게 무엇이라도 계속 쓰고자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쓴다는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스스로에게 거듭 물어가면서.
지금 내 머릿속을 스치는 이는 브뤼헐을 비롯하여 카라바조 Michelangelo da Caravaggio (1571~1610)나 미켈란젤로 MichelangeloBuonarroti (1475~1564), 『데카메론」을 쓴 보카치오 Giovanni Boccaccio(1313~1375) 같은 르네상스 시기 예술가부터, 18세기 작가 대니얼디포 Daniel Defoe (1660~1731)나 20세기의 카뮈Albert Camus (1913~1960)로 이어지는, 역병의 참상을 작품화한 사람들이다. 평소라면 그다지 쓰지 않는 ‘위대한‘이라는 형용사를 굳이 이들에게 바치고싶다. - P129

그 위대함은, 먼저 참화 한가운데서 철저하게 이를 응시하며기록하고자 했던 정신에서 기인한다. 만약 인류 전체가 죽음으로절멸한다면 그 기록은 누가 보게 될까. 아무도 보지 않는다면 쓴다는 행위(그린다는 행위)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들은 이런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있는지는 차치하고 일단 용감하게 맞섰다. 이는 ‘인간‘의 가치를 주장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참혹한 역병 속에서 이를 묘사해낸 이들의 정신이 위대하다 - P129

면, 그 두 번째 이유는 단적으로 말해 ‘죽음‘, 자기 자신의 ‘죽음‘마저도 똑바로 마주했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죽음을 면할 수 없는존재라면 무엇을 위해 쓰고 그리는가? 인간을 둘러싼 물음이 ‘죽음‘과 깊이 결부된 이상, 이 시점에서 쓰고 그리는 일은 우리에게주어진 복잡하고 곤란한 상황 속에서 ‘인간‘을 다시 바라보게끔하는 정신적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요컨대 ‘인문학‘의 기본이라고해야 할 정신이다. 휴머니즘(인문주의)의 발전과 심화가 페스트의 참화와 함께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새삼 이렇듯 당연한 사실을 떠올리면서 나는 내 나름의 ‘인문기행‘을 계속 써 내려갈 작정이다. 독자 여러분은 이번 장을 읽으면서 아마 세 단위의 시간대를 왕복할 것이다. 첫째는 말할 것도없이 얼마 전 미국을 찾았던 2016년이다. 또 하나는 그런 내가 때때로 회상에 빠지는 1980년대, 그리고 여기에 현재(2020년)라는시간이 추가된다.
그러면 다시 2016년으로 되돌아가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 P131

동아시아의 제국주의 국가 일본은 근대 이후, ‘문명화(유럽적보편주의)‘를 구실로 삼아 자기중심적 국가주의(초개별주의)에 입각한 침략을 거듭해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일본적 보편주의, 즉 천황제를 최고 가치로 하는 세계 질서를 그들은 ‘팔굉일우온 천하가 하나의 집이라는 뜻)‘라고 칭했다. 중국과 조선 등아시아 민족은 이러한 보편주의에 따라야만 한다고 주장하며, 피지배민족의 독립 요구를 ‘민족주의적 편견‘으로 취급하며 탄압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1945년 일본의 패전과 함께 근본적으로부정당해야 마땅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천황제가 존속되었듯, ‘일본적 보편주의‘ 또한 살아남았던 것이다. 코스타리카 대학강연에서 나는 이 점을 지적했다.
코스타리카를 떠나기 전날, 우리 부부는 C교수의 안내로 수도산호세 근교의 이라razú 화산을 보러 나섰다. 화산국가 일본 - P139

에서 온 우리에게는 특별히 새로운 구경거리는 아니겠지만 코스타리카를 찾은 관광객에게는 반드시 안내하는 코스라고 했다.
눈이 부실 만큼 활짝 갠 열대다운 날씨였다. 표고 1200미터가 넘는 고산지대라서 그리 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운전사가가이드를 겸해 도중에 여러 가지 설명을 해주었다. 일찌감치 지쳐 있던 우리는 설명을 흘려듣곤 했지만 어떤 한마디가 마음에걸려 귀를 기울였다. ‘죽음의 산‘이라는 말이 들려왔던 것이다. 차를 갓길에 세운 운전사가 계곡 쪽을 가리키며 "저기가 죽음의 산이에요."라고 말했다. 파나마로 통하는 도로 건설에 동원된 노동자가 많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다고 했다.  - P141

희생자는주로 자메이카에서 건너온 흑인 노예였다. 카리브해 제도의 기후에 익숙해 있던 그들은 한랭한 고산기후와 중노동을 견디지 못하고죽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깊숙한 아프리카 대륙에서 대서양건너로 끌려온 뒤 카리브해 지역에서 다시 이 깊은산속으로 연행되다시피하여 목숨을 빼앗긴 셈이다.
햇빛이 드는 아름다운 마을을품은분지 저편으로 첩첩이 이어지는 산맥이 보였다. 나는 그 산줄기가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저멀리 일본 규슈나 홋카이도까지 이어지는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도와 광산에서 힘겨운 강제 노동에 쓰러진 조선인의 유해가 - P139

묻힌 죽음의 산까지 말이다. 지구 도처에서 식민주의의 폭력으로희생된 사람들이 원통함과 분함 속에 묻혀간죽음의 산이 이어지고 있다.
코스타리카에서 일주일을 보내는 동안 미국 대통령 예비선거가 진행되어 공화당에서는 도널드 트럼프가 가장 유력한 후보로 자리를 굳혔다.(2017년 1월, 트럼프는 미합중국 제4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트럼프는 이민에 대한 과격한 중상모략을 반복했고, 특히 멕시코 이민자 중에 마약 밀매자나 강간범이 섞여 있다고 비난했다.
"멕시코인 대부분은 범죄자이니까 벽을 세워 범죄자가 들어오지않도록 조치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강간범과 다름없다." - P143

트럼프가 내뱉은 일련의 배외주의적 발언은 미국 내에서 비판받기는커녕 오히려 인기를 불러일으키는 듯했다. 뉴욕 거리를걷고 있으면 여러 인종과 문화가 혼재하여 도시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느낀다. 일반적으로 생각한다면 이 다양성을 억지로 파괴하고 단일문화사회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불가능한 프로젝트를 굳이 실행한 것이 나치 독일이었다. 결과는 ‘홀로코스트‘라는 대재앙이었지만 사람들은 그 역사로부터 배움을 얻지 못했다. 똑같은 일이 미국에서 재현되지 않으리라고 안심 - P143

할 이유는 없는 셈이다. 게다가 나치 독일의 잔학함과 냉혹함을그 증거로 내놓는다 해도 지금은 누구도 진심으로 충격을 받거나슬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치 패망 이후에도 이와 동등한 잔혹과 냉혹함이 세계 도처에서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 P145

‘선한 아메리카‘과 ‘악한 아메리카‘ 사이의 투쟁에는 긴 역사가 있으며, 이 투쟁은 앞으로도 길게 이어질 것이다. 예술에 전쟁을 억제하는 힘이 있는지, 나쁜 권력을 타도하는 힘이 있는지는여전히 의문이다. 하지만 예술은 언제나 어떤 악몽의 시대에도 관용 연대, 공감을 추구하려는 인문정신이 살아 있음을 가르쳐준다. 예술에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모마는 어떤 층도 항상 관객으로 가득하지만 「별이 빛나는밤」 앞은 더욱 많은 사람이 몰린다. 고흐의 작품은 네덜란드 고흐미술관이나 크뢸러밀러 미술관을 비롯하여 세계 각지에서 볼 수있지만 「별이 빛나는 밤」을 실제로 보기 위해서는 모마를 찾아야만 한다. 30년 전, 내 예비지식은 빈약했지만 처음 대면한 「별이빛나는 밤」에게서 받은 감명은 각별하여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선명하다. 고흐라는 화가에게 깊이 끌리게 된 것도 그날의 만남이 하나의 계기였다. - P157

도판이나 영상으로 얼마든지 볼 수 있겠지만 「별이 빛나는밤」을 실물로 접하는 것은 전혀 다른 체험이다. 예전에 화가 지인이 "고흐의 그림은 특별해요. 밤에 곤충이 등불에 홀리듯 보는사람을 끌어당기는 빛을 발하는 작품이에요."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고흐는 이 그림을 생레미드프로방스의 정신병원에서 그렸다. 밤하늘에 소용돌이치듯, 미친 듯 넘실거리는 붓 터치는 고흐 - P157

자신의 마음속을 그린 것이리라. 혹은 화가의 눈에는 정말 그렇게보였을지도 모른다. 같은 시기 고흐는 사이프러스를 모티프로 한작품을 몇 점인가 그렸다. 사이프러스는 고흐에게 단순한 나무라기보다 지상에서 천상을 향해 활활 타오르는 불꽃 같은 의미를가진다. 「별이 빛나는 밤」이나 「사이프러스」는 포스터, 그림엽서,
어린이 대상 그림책에도 자주 사용되어 나도 실물과 만나기 전까지는 어쩐지 가벼운 느낌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실제 작품에서는 깊은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림 앞에 모여든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 중에는유명하고 무척 비싼 그림이라는 정도의 예비지식밖에 없는 사람도 많았겠지만, 조용히 이 불꽃을 응시하고 있으면 분명 인생과생명에 대한 미칠듯한 상념 속으로 이끌렸을 것이다. 어쩌면 불꽃으로 달려드는 벌레처럼 죽음에 끌어당겨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 P159

고흐의 동생 테오는 부유층사이에서 유럽 회화가 인기를 끌던 미국으로 이민을 갈까 고민했다. 사업 기회를 찾아 고객층을개척하고자 했던 것이다. 의욕 넘치고 능력 있는 화상으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당시 가장 잘 팔리던 인기 화가 중 하나가 코린ean-Baptiste Camille Corot (1796~1875)였다. 코로식 풍경화는 조상의 출신지인 유럽에 대한 콤플렉스가 뒤섞여 있던 미국 부유층의 노스탤 - P159

지어를 강하게 자극했으리라 생각된다. 미국 동해안의 주요 미술관이라면 ‘반드시‘ 코로의 작품을 소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당시 철강이나 석유 등으로 급속하게 재산을 늘린 이들이 유럽 미술 작품을 사 모았고, 그 컬렉션을 기반으로 미술관이 건립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테오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형 빈센트는 테오의 미국행에 반대했다. 실제로는 자신을 유일하게 이해해주는 아우와 유대가 끊어질까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동생에게 버림을 받으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형의 반대가직접적인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테오는 미국행을 단념했다.
빈센트는 1890년 오베르쉬르우아즈마을 보리밭에서 피스톨로 자살했다. 주머니에는 다음과 같은 유서가 남아있었다. - P161

가능한 한 좋은 그림을 그리려고 마음을 다잡고 꾸준히노력해온 결과, 전 생애의 무게를 걸고 다시 한번 얘기해두자.
너는 단순히 코로를 취급하는 화상과는 다르다. (ㆍㆍㆍㆍㆍㆍ) 너는내가 아는 한 그런 화상이 아니다. 나는 네가 현실에서 인간에대한 사랑을 지니고 행동하면서 그에 따라 방침을 정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건만, 그런데 너는 어떻게 하겠다는것이냐? - P161

진심으로 재능을 인정하던 형이 이런 말, 이를테면 ‘평생토록짊어졌던 무거움‘에 짓눌린 말을 남기고 자살했다면 그는 무엇을할 수 있었을까. 테오는 형의 유작전을 실현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형이 죽고나서 반년 후 신경쇠약으로 세상을 등졌다.
모마의 컬렉션 중 가장 유명하다고 말해도 좋을 「별이 빛나는 밤」에는 그저 아름답다기보다는 이렇게 어두운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나는 두 형이 옥중에 있었을 때도, 30년이나 지난 지금도,
"너는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라는 "가차 없는 고발" (사카자키오쓰로, 「고흐의 유서」, 『그림이란 무엇인가』, 가와데쇼보신샤, 2012년(초판 1976년))에 몸을 내던지는 심정으로 이 그림 앞에 서 있다. - P163

벤산은 보통 ‘사회적 리얼리즘‘ 작가로 불린다. 하지만 내가그의 작품에서 받은 인상은 소련, 동독, 혹은 중국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회화와는 많이 다르다. 따뜻한 색채가 특징이며, 현실의 충실한 재현이라기보다 마치 어린아이의 그림 같은 감촉과 조형감각을 보여준다. ‘어린아이의 그림‘이라고 말하면 오해하기 쉽겠지만, 감미롭고 아기자기하다는 뜻이 아니다. 얄팍한 치유의 의미를 담았다는 것도 아니다. 슬픔이나 노여움 같은 감정이 지닌 본질을 이렇게 따뜻하게 전할수 있다니……. 그것이 내가좋아하는 벤샨만의 독특함이다.
그 대표적 사례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제작된 작품「해방」을 꼽고 싶다. 기울어진 건물, 겹쳐 쌓인 기와와 자갈더미를통해 전쟁으로 황폐해진 모습을 그렸다. 화면 중앙에 회전 놀이기구를 타는 아이들의 표정에는 어린이다운 웃음 대신 공포와 불안이 서렸다. 언제 멸망할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우리 인간은 회전기구처럼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다는 뜻일까. - P167

‘전통적인 아메리카‘를 수호하자고 주장하는 세력과 백인지상주의자가 대두했다.
트램프가 등장한 지금의 상황과 무척 비슷하다.
검사는 두피고의 징병 기피 이력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이 나라를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을 반복했다. 이에 대해 사코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전쟁이란 무엇인가. 전쟁이란 자유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큰 부자가 되기 위한 짓거리다. 우리에게 서로를 죽일 권리가 있는가? 나는 아일랜드인을 위해 일했다. 또한 독일인 친구들과도일했고, 프랑스인과 그 밖의 다른 사람들과도 함께 일했다. 내 아내를 사랑하듯, 나는 이들이 좋다. 어째서 내가 이런 사람들을 죽이러 나서야하는가? 나는 전쟁을 신뢰하지 않는다." - P175

1921년 7월 사코와 반제티가 유죄 선고를 받자 미국과 유럽에서 항의 운동이 번져갔다. 벤샨은 여행지였던 파리에서 이 운동을 접하고 미국으로 귀국한 뒤, 이들에게 연대하는 의미로 사코와 반제티의 수난을 비롯하여 이들을 주제로 한 연작 제작에힘을 쏟았다.
결국 사코와 반제티는 1927년 8월 전기의자에 앉아 처형당했다. 1977년 매사추세츠 주지사는 두 사람의 무죄를 확인하는내용의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처형으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후의 - P175

일이었다.
1972년에 나는 교토에서 사형대의 멜로디」를 봤다. 영화를통해 그때까지는 표면적인 이해에 그쳤던 벤샨이라는 화가를 재발견했다. 그 무렵 두 형이 서울에서 군사재판을 받았고 그중 한명에게 사형이 구형됐다.(나중에 무기징역형이 확정됐다.)이 영화가 만들어지고 전 세계에 공개될 수 있었던 배경으로1960년대 일어난 베트남 전쟁 반대운동과 공민권운동이 끼친문화적 영향을 들 수 있다. 나는 그러한 문화적 자산의 은혜를 입은세대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 트럼프류의 자기중심주의에 대항해
‘선한 아메리카‘를 지켜내고자하는사람들도 같은 맥락을 이어받고 있다. - P177

일본은 새로운 ‘전쟁 이전‘ 시기로 접어들었다. 나는 종종언젠가 영화에서 본 듯한 장면을 떠올린다. 거리의 벤치에 앉은 여성(자세히 보면 예전부터 친했던 사람이다.)이 잰걸음으로 지나가는사람들을 향해 끊임없이 혼잣말을 하고 있다.
"당신은 전쟁이 일어나기전을 기억하고 있어? (....) 이렇게 급하게, 이렇게 끔찍한 일이 일어날줄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지. 모두 무관심하고 낙관적이었어. 아니, 낙관이라기보다현실로부터 눈을 돌렸던 거야.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거야.
그저 자기 생각만 한 채 뒤로 미루며 하루하루를 보내버리고서......."
나는 생각한다. 만약 그런 날까지 살아남는다면, 수많은아픔 속에서도 적어도 한 줌의 기쁨을 지닌 채 지난날을 회상할 수 있는, "사랑으로 가득 찬 기억을 갖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허무나 냉소에 휩쓸리지 않고 살아나가고 싶다, 싸워나가고 싶다. - P181

지금 봐도 「형제」는 너무나 의미 깊은 명작이지만, 벤샨이가장 만년에 흑백으로 제작한 판화 「사랑으로 가득 찼던 수많은 밤의 회상이 한층 가슴을 파고든다. 오른쪽에 그린 성별도 연령도불분명한 저 이는 무거운 병에 걸린 사람일까, 아니면 늙고 쇠약해진 노인일까. 머리카락이 다 빠진 모습에 유머가 담겨 있으면서도애절하다. 「형제」가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포옹이라면, 이쪽은
‘이별‘을 예감케 한다. 사람은 사람을 이렇게 부둥켜안는 것이 가능한 존재다. 저두 사람이 나눈 따뜻함이 내 속으로도 스며드는듯하다. 정말 벤샨다운 표현이다. 어떻게 이런 표현이 가능할까.
노미야마 교지는 이렇게 말했다.


아름다움은 쟁취해야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벤 샨은모든 이의 평안을 바랐기에 자신은 그렇게도 격렬하고 힘겨운싸움을 이어갈 수 있었으리라. 항상 자신을 그런 위치에 두고자했기에 도리어 그가 그린 연인은 서로를 그렇게도 따뜻이 - P184

위로하고, 아이들은 기뻐하며, 노동자는 평온한 한때를 보낼수 있음이 틀림없다. 예술가는 항상 오만함에 맞서는 기개와 시퍼렇게 살아있는 권력을 향한 모멸의 태도를 갖춘 자라고 벤샨은 이야기했다. (동거인 볜산」 「현대미술제1권 벤 샨, 고단샤.1992) - P187

벤 샨은 러시아제국의 영토였던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난 유대계 미국인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걸쳐 많은 유대인이 ‘포그롬(반유대 폭동)‘을 피해 해외로 이민을 떠났다. 아버지는 목공 어머니는 도공이었다. 사회주의 사상을 가졌던 아버지는 시베리아 유형을 가기도 했다. 시베리아에서 미국으로 탈출한 아버지를 쫓아 벤 샨은 1906년, 일곱 살의 나이로 어머니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만약 리투아니아에 남아 있었다면 두 차례 세계대전의 참화와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의 피해를 직접 겪었을 가능성이 높다.
벤 샨 가족은 뉴욕 브루클린에 살면서 아버지는 목수로, 벤은 석판화 장인으로 생계를 꾸려갔다. 이후 벤 샨은 육체노동자나 실업자 같은 사회 밑바닥층 사람들에게 공감하며 전쟁, 빈곤,
차별 등의 주제를 지속해서 다뤘다. 대공황 시대에는 미국 서민을 - P187

모델로 훌륭한 사진을 많이 찍었다. 디에고 리베라가 RCA 빌딩 대벽화를 작업했을 때는 조수로 일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반나치 선전 포스터 제작에 솜씨를 발휘했고, 전쟁이 끝난후에도 평화운동에 헌신했다. 이민, 빈곤, 노동이 벤 샨이라는 인물을 이루는 토대가 되었고, 세계대전과 대공황이 그의 휴머니즘을 확고한 신념으로 담금질했다. 이러한 인생이 그려낸 궤적자체가 내 눈에는 정말이지 ‘미국적‘인 특성으로 보인다. 벤샨이었기에 유럽도 일본도 아니라 미국에서 예술을 꽃피울수 있었다. 그야말로 ‘선한 아메리카‘의 예술을.
1969년 3월 14일 벤 샨은 뉴욕에서 심장 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일흔의 나이, 앞서 말한 도쿄 전시가 열리기 바로 한해 전이었다. - P189

『경계의 음악』은 에드워드 사이드가 1982년부터 시작하여죽음 직전까지 20년에 걸쳐 써나갔던 음악 평론을 정리한 책이다. 무서울 정도로 바빴고 난치병인 백혈병까지 앓았던 사이드가이렇게 부지런히 연주회장을 찾고 진심으로 즐기며 이 역시 타협 없는 지적 즐거움이다.) 음악을 접했다는 사실에 놀랄 따름이다.
팔레스타인계 아랍인이자 기독교인, 미합중국 국민이었던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 『문화와 제국주의』의 저자로서 문화연구 분야에서 전 세계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전문적인 고등교육을 받은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다. 미국의 유명 대학교수로 만족스러운 인생을 보내는 것도 가능했겠지만, 불공정속에 고통받으며 전 세계에서 끊임없이 무시당하는 팔레스타인민중 편에 서서 항상 싸웠다.  - P199

그에게 팔레스타인 해방 투쟁과 클래식 음악이 주는 즐거움은 별개가 아니었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음악 비평에서도 항상 자신이 지닌 복합적인 아이덴티티에 기초해 ‘내부 타자‘의 시선으로 ‘중심부‘의 독선을 선명하게 비판했다.
좋은 음악을 듣고 마음이 움직일 때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 - P199

누며 그 감명이 어디서 왔는지 파고들고 싶어진다. 하지만 좋은 대화상대를 만나기란 좋은 음악을 듣는 것 이상으로 무척 어렵다.
사이드 스스로가 이야기했듯 음악이라는 예술이 "가장 말이 없으며" "가장 닫힌" "가장 논하기 힘든 분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대화의 상대는 풍부한 감성과 자유로운 정신을 소유해야 할뿐 아니라 음악 이론에도 정통하여 음악을 문학이나 정치 같은 다른 분야와 관련하여 해독할 수 있어야 한다. 사이드야말로 그런 인물이었다. - P201

"오른손이 왼손에 호응하듯, 한 손가락은 다른 아홉개 손가락에 호응함으로써 전체가 그 깊숙한 곳에 자리한 하나의 혼에부응한다."라는, 글렌 굴드의 피아노 연주를 두고 했던 묘사. "모차르트는 (오페라의) 등장인물의 심정이나 의지가 초래하는 합의와는 관계없이, 사람들을 농락하는 어떤 추상적 힘을 구현하고자시도했다고 생각한다. 도덕적으로는 거의 불모나 다름없는 대본을 사용했다는 점이 그 증거다."라는 지적. "오늘날 바그너를 완벽히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현대 서양문화의 거의 모든 국면에 걸터앉거나 아무렇게나 벌러덩 누운 거인과도 같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음악은 음악에 대한 음악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점은 음악의 웅변성이 지닌 고유의 비극이다." 이런 문장을 - P201

보며 내 생각과 똑같다고 무릎을 치거나, 또는 머리가 멍해질 정도로 새로운 발견을 얻기도 했다. 나는 사이드를 읽으며 함께 음악을 논할 수 있는 기쁜 대화 상대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기회가 생기면 꼭 컬럼비아 대학의 에드워드 사이드 기념실에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캐나다의 천재, 혹은 기인 피아니스트라고 글렌 굴드의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의 연주 녹음을 들어본 것은 꽤 뒤였다. 1980년대의 어느 날, 나는 고베시의 번화가인 산노미야에있었다. 왜 그곳에 갔는지 이제는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그 무렵나는 점점 끓어 올라오는 어두운 상념을 주체 못하고 딱히 어디라는 목적지 없이 밤거리를 배회하곤 했다.  - P203

기억도 희미하지만 산노미야역 번화가 곁길의 건물 한편에 ‘모차르트‘라는 간판을 단 찻집을 발견하고 몸을 들이밀었다. 카운터 좌석만 있는좁은 가게였다. 선반에는 고상한 취향이 드러난 커피 잔을 늘어놓았고 클래식 음악이 조용히 흘렀다. 손님은 나 혼자였다. 과묵한 주인이심각한 표정으로 끓여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지금 걸어놓은 레코드는 뭐지요?"라고 물었더니 "골드베르크예요. 굴드가 연주한... "이라고 대답했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라면 그때까지 몇 번인가 들어 알고 있었고 좋아하는 곡이기도 했지만 졸 - P203

음을 부르는 잔잔한 곡이라는 인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찻집에 흐르던 음악은 인상이 전혀 달랐다. 다음 날 바로 레코드를 샀다. 그 레코드판은 지금도 내 곁에 남아 있으니 분명 꿈이 아니라 현실일 것이다.
글렌 굴드는 1955년에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처음 녹음했지만, 1981년에 새롭게 녹음한 레코드가 ‘불후의 걸작‘이라는 높은평가를 받으며 전 세계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고베의 수수께끼 같은 찻집에서 듣고 내 기억에 새겨진 연주는 분명 ‘81년 버전‘
이다. 음악 애호가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했고 찬반양론 간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지만 그때 나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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