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사람이 여행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뿐이다 아직도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오지뿐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여 떠나라 떠나서 돌아오지 마라 설산의 창공을 나는 독수리들이 유유히 나의 심장을 쪼아 먹을 때까지 쪼아 먹힌 나의 심장이 먼지가 되어 바람에 흩날릴 때까지 돌아오지 마라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람의 마음의 설산뿐이다
슬픔의 나무
살아서는 그 나무에 가지 못하네 그 나무 그늘에 앉아 평생 쉬지 못하네 그 나무에 핀 붉은 꽃도 바라보지 못하고 그 나무의 작은 열매도 먹지 못하네 내 한마리 도요새가 되어 멀리 날아가도 그 나무 가지 위에는 결코 앉지 못하네 나는 기다릴 수 없는 기다림을 기다려야 하고 용서할 수 없는 용서를 용서해야 하고 분노에 휩싸이면 죽은 사람처럼 죽어야 하고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다 받아들여야 하네 그래야만 죽어서는 그 나무에 갈 수 있다네 살아 있을 때 짊어진 모든 슬픔을 그 나무 가지에 매달아놓고 떠나갈 수 있다네
적멸에게
새벽별들이 스러진다 돌아보지 말고 가라 별들은 스러질 때 머뭇거리지 않는다 돌아보지 말고 가라 이제 다시 보고 싶은 사람은 없다 이제 다시 보고 싶은 별빛도 없다 아지랑이 이는 봄 하늘 속으로 노고지리 한마리 한순간 사라지듯 삼각파도 끝에 앉은 갈매기 한마리 수평선 너머로 한순간 사라지듯 내 가난의 적멸이여 적멸의 별빛이여 영원히 사라졌다가 돌아오라 돌아왔다가 영원히 사라져라
미소
부디 반가사유상처럼 미소 지을 수 있게 되길 바란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 위를 걸을 때나 바다에 넘어져 다시 일어나 흐느낄 때나 거친 삼각파도 위에 반가사유상처럼 고요히 앉은 자세로 평생에 단 한번 세상의 너와 나를 생각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턱을 손에 괴고 눈을 아래로 낮은 데로 더 낮은 데로 저 땅 아래에서 물 아래에까지 내려가 인간의 낙엽으로 다시 썩을 수 있게 되길 바란다 너를 향한 내 인간의 자세가 너를 향한 내 인생의 미소가
손을 흔든다는 것
잘 있어라 눈빛은 차마 너를 보지 못하고 잘 가거라 마른침을 삼키며 호스피스 병동 병실에 누워 마지막으로 너를 향해 손을 흔든다는 것 창가의 어린 나뭇가지를 향해 나뭇가지에 앉은 흰 눈송이를 향해 차마 슬프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천천히 손을 흔든다는 것 인간이 인간에게 마지막으로 말없이 손을 흔든다는 것 그것은 풀잎이 땅을 흔든다는 것 별들이 밤하늘을 흔든다는 것 그래도 어디에서든 그 어느때든 다시 만나자는 것
여행가방
너는 왜 떠날 생각을 하지 않니 언제까지 여기에 머물려고 그러니 이곳은 더이상 머물 곳이 아니야 어머니는 떠나시려고 하는데 아버지는 이미 떠나셨는데 너는 도대체 누굴 만나려고 머뭇거리고만 있는 거니 그동안 내가 무거웠다면 얼마든지 가벼워질 수 있어 떠나가는 동안에 가끔 노래도 부르고 배고프면 컵라면 하나 사 먹고 잠시 풀잎 위에 머무는 바람이 되면 돼 그동안 차가운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내 너를 위해 떠났지만 이젠 네가 나를 위해 떠나야 할 때야 제발 나를 이곳에 처박아두지 말아줘 떠나지 않으면 여행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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