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망의 강한 맥박이
나의 모든 혈관 속에서 요동치고 있다.
그 순간, 흐르는 피는
내면의 내밀한 상처를 누설한다.
-샬럿 브론테 - P557

나는 눈앞에서 나의 인생이 이야기 속 초록빛 무화과나무처럼 가지를 뻗어나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모든 가지 끝에서, 통통한 자줏빛 무화과처럼, 찬란한 미래가 손짓하며 윙크했다. 어떤 무화과는 남편이고 행복한 가정과 아이들이었다.
어떤 무화과는 유명한 시인이었고, 다른 무화과는 뛰어난 교수였으며, 어떤 무화과는 에제, 그 대단한 편집자였다. [...]
어떤 무화과를 선택해야 할지 결정할 수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나는 나 자신이 무화과 나무 둥치에 앉아서 굶어 죽어가는 것을 보ㅡ았다. [..] 그리고 내가 결정하지 못하고 거기 그대로 앉아 있자 무화과들은 쭈그러들더니 까맣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씩 하나씩 땅으로, 내 발치에 툭 하고 떨어졌다.
ㅡ실비아 플라스

고통이 있다ㅡ 너무 지독한ㅡ
그것은 본질을 꿀꺽 삼킨다ㅡ그리고 심연을 몽환으로 덮는다ㅡ기억이 그 주변에서ㅡ 횡단하여 ㅡ그 위를ㅡ밟고 다닐 수 있도록ㅡ
마치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이ㅡ안전하게 가듯이ㅡ그곳에서 뜬 눈은ㅡ
그를 떨어뜨리리ㅡ뼈 하나하나를
ㅡ에밀리 디킨슨

샬럿 브론테는 본질적으로 무아지경에 빠져 글을 쓴 작가였다. ‘모든 사람이 왜 내가 눈을 감은 채 글을 쓰는지 의아해했다.‘ 고 그녀는 자신의 로헤드 [기숙학교 시절] 일기에서 언급했다.‘
위니프리드 제린이 지적하듯이, 초고의 들쑥날쑥한 행들은 브론테가 눈을 감고 글을 썼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제린에 따르면 브론테가 눈을 감고 글을 쓴 것은 ‘신체의 환경을 차단해 내면의 시야를 더 선명하게 하기 위한 의도적인‘ 습관 때문이다. 내면의 풍경이라는 낭만주의적 수사학은 제린뿐 아니라 브론테의수사학이기도 하며, ‘사고의 무아경과 정신의 고양‘이라는 워즈워스의 말뿐만 아니라 ‘경외심을 품고 눈을 감아라‘라는 콜리지의 말을 상기시킨다. 같은 일기에서 브론테는 ‘요즘 내내 나는반은 절망적이고 반은 황홀한(방해받지 않고 그 꿈을 끝까지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절망적이고, 아주 생생하고 현실감 있 - P558

게 지옥의 세계[어린 시절 꿈꾼 환상 속 세계인 앵그리아]의 한계를 보여주기 때문에 황홀한) 꿈속에 살고 있다‘고 고백한다.
이는 확실히 낭만주의적이다. 독특하게 여성적이기도 하다. 브론테의 어휘와 상상력 대부분은 그녀가 몰두했던 19세기 초의작가들(워즈워스, 콜리지, 스콧, 바이런)에게서 나온 것이지만, 그녀가 무아지경이 될 정도로 빠져서 썼던 반복적인 주제와 은유는 우선 자신의 젠더에 의해, 즉 험난한 자신의 성적 운명에대한 의식과 세계 속에 처한 이상한 ‘고아 같은‘ 위치에 대한 불안에 의해 결정된 것 같으니 말이다. - P559

에 의해서지만)그렇다면 브론테가 문학에서 (앵그리아 이야기와 『교수』에서)남성으로 분장한 일과 우리가 도취적 글쓰기라고 불렀던 ‘여성적‘ 성향 사이에 어떤 중요한 관계가 있는가? 우리가 살펴보았듯 남성이 지배하는 문학적 전통에서 글을 쓰는 많은 여자들은 처음에는 남성을 모방할 뿐 아니라 은유적 남성으로 분장함으로써 자신들의 모호한 상황을 해결하려 한다. 마찬가지로샬럿 브론테가 자신의 반항적인 충동을 실천하는 동시에 회피하는 행위을 묘사하기 위해 이 말을 사용한다면) 도취적 글쓰기는 분명 여성이 작가가 되는 것에 대한 불안을 덜기 위한 시도다.‘ 그러나 도취적 글쓰기와 남성 분장은 둘 다 문학적 불안을 해결하는 방식이라는 공통점 외에도 훨씬 더 깊은 연관이 있다. 우선 남성적 사회에서 여성의 연약함을 여성이 의식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는 여성 작가는 남성으로 분장함으로써 그런 평가를 더 쉽게 내릴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여성작가는 남자로 가장함으로써 중요하고 권력을 가진 타자가 여성 작가를 보는 것처럼 자신을 볼 수 있다. 또한 남자로 분함으 - P565

로써 여성 작가는 자신의 금지된 환상을 벌할 수 있게 되며 환상을 실행할 수 있는 남성의 권력을 얻는다. 특히 마지막 사례는 브론테가 이중적인 감금-탈출 이야기를 (이 이야기는 자신의 표면상 도덕을 은밀하게 전복시키고 있다) 몽유병 환자처럼 반복하면서 써나간 것이다. 이런 영향은 도취 속에서 글을 쓰는작가의 꿈같은 문장으로 퍼져나갈 것이며, 마찬가지로 자신의절망을 완전히 인식하고 있는 예술가의 문장으로 퍼져나갈 것이다. 왜냐하면 여성을 전업 작가로 내모는 ‘야망의 강한 맥박‘
은 종종 ‘비밀스러운 마음의 상처‘를 드러내고, 그 상처에서 흐르는 피는 복잡한 방어, 분장, 회피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 P566

「교수를 단지 역할과 억압 면에서만 논한다면, 그것은 어떤의미에서 첫 장편소설로 이뤄낸 젊은 소설가의 성취를 하찮게 만드는 것이다. 이 소설이 작가가 희망했던 대로 현명하며 ‘분명하고 평범한‘ 교양소설이 아니고, 숨겨진 의도의 복잡성에 플롯이 늘 부합하지도 않긴 하지만, 이 작품은 샬럿 브론테의 작가 전체 이력에 걸쳐 점점 중요해질 주제를 처음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하다. 은유적으로 눈을 감은 채 글을 쓴브론테는 여기에서 자신의 소명과 상처를 탐색했고, 완전성을향한 다른 길을 발견하려고 마치 꿈속에서처럼 더듬거리며 노력했다. 결국 우울증에 시달리는 젊은 크림즈워스는 처음에 프랜시스 앙리에게 끌린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좀 더 창백한변형인 듯 그들 둘 다 부적응자이기 때문이다. 히스클리프의 박탈이 캐서린의 상처받은 추락과 병치되는 것처럼 크림즈워스의 병은, 실비아 플라스의 「튤립」의 시구를 인용해보자면, ‘[프랜시스의] 상처에 말을 걸고, 상처는 응답한다.‘ - P595

거울을 보고 있는데 끔찍한 얼굴(짐승의 얼굴)이 갑자기 내 어깨 위로 나타나는 꿈을 꾸었다. 나는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버지니아 울프 - P597

걱정 마. [...] 어느 날 갑자기, 네가 예상도 못하고 있을 때 나의 짙은색 외투 안에 감추어둔 망치를 꺼내 너의 작은 머리통을 달걀 껍데기처럼 부숴줄 테니까. 네 머리는 달걀 껍데기처럼 부서져서 피와 뇌수로 흥건해질 거야. 언젠가, 언젠가. [...] 언젠가 내 옆에서 걷고 있는사나운 늑대가 너에게 달려들어 너의 징그러운 내장을 찢어버릴 거야. 언젠가, 언젠가. [...] 지금, 바로 지금, 부드럽게, 소리 없이, 소리없이
-진리스

나는 나의 영혼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말했지ㅡ그녀는 말했어, 줄은 다 끊어졌고ㅡ활은 산산조각났다고ㅡ
그녀를 고치기 위해 ㅡ나는 일을 했지
다음 날 아침이 될 때까지ㅡ
-에밀리 디킨슨

「교수가 샬럿 브론테 자신이 인식하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더 그녀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던 갈등과 주제에 대한 흐릿한 몽환의 진술이라면, 『제인 에어』는 완전함으로 도피하는 데 대한앵그리아적인 환상인 분노로 물들어 있는 작품이다. 버니언의남성적 『천로역정』에 나타난 신화적인 탐색 (그러나 독실한 신앙에 대한 내용이 아닌) 플롯을 빌렸지만, 이 소설에서 젊은 소설가는 그녀의 내적 현실과 그녀를 에워싼 (감금, 고아 신세, 굶주림, 분노에서 광기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현실에 확실히 눈을 뜬 것처럼 보인다. ‘과거에 자신을 구속했던 사슬을 부수고나온‘ 에너지 넘치는 여성을 상징하는 불같은 이미지의 루시아가 교수에서는 축소된 모습이었지만, 『제인 에어』(1847)에서 이 인물은 영웅이자 거리낌 없이 드러난 열정적인 반항의 상징이 된다. - P598

빅토리아 시대 평론가들은 『제인 에어』의 조악함이나 섹슈얼리티 때문에 충격을 받았다기보다 (그들은 이 책에 나오는 이런 요소를 싫어했다) 사회조직과 관습, 그리고 사회규범을 거부하는 이 작품의 ‘반기독교성‘ (간단히 말해서 이 작품의 반항적인 페미니즘) 때문에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은 충분히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평론가들은 로체스터의 거만한 바이런적인 성적 에너지 때문이 아니라 제인의 바이런적인 자존심과 열정 때문에,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 사이에 일어난 반사회적인 성적 동요 때문이 아니라 여자 주인공이 사회적 운명에 순종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엘리자베스럭비는 ‘그녀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 중에서 가장 나쁜 죄인 교만의 죄를 최대한도로 물려받았다‘고 선언했다. - P600

다시 말해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이 경악한 것은 제인의 분노였다. 또한 이 책에 대한 당대 비평가들의 반응은 최근의 비평가보다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억압된 분노를 신화화하는 것과 억압된 섹슈얼리티를 신화화하는 것은 유사할지라도, 억압된 분노를 신화화하는 것이 사회질서에 훨씬 더 위험하기 때문이다. 검은 눈썹의 바이런풍 남자 주인공을 사랑하는 특별한 여성은 소설이나 응접실 안에 수용될 수 있는 존재다. 반면 응접실과 가부장적인 저택에서 완전히 도망치기를 열망하는 여자는분명히 수용될 수 없는 존재다. 제인 에어는 매슈 아널드, 엘리자베스 릭비, 모즐리 부인과 올리펀트 부인이 의심했던 대로 그런 여자였다. - P601

수식어 처럼 보인다는 필요한 단어다. 제인이 마시엔드에서 친척을 찾음으로써 순례의 끝에 이르렀다고 할지라도, 자아를찾기 위한 제인의 순례 여정은 추상적인 ‘원칙과 법‘이 자기 존재의 가장 심오한 원칙과 법과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을배울 때까지 완성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초기에 템플 선생의 가르침이 자기 본래의 생명력에 단지 덧붙여진 것일 뿐이라고 제인이 인식한다는 점이 이미 위 사실을 암시한다. 제인이 템플 선생의 교훈을 철저히 이해한 것은 세인트 존 리버스를 만난 뒤다. 많은 비평가들이 주목했듯 리버스 가족 세 명은 무엇인가를 암시하는 상징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다. 에이드리언 리치에 따르면, 제인의 진정한 ‘자매들‘인 다이애나와 메리는 사냥의 여신 디아나와 동정녀 마리아의 이중적인 면을 지닌 위대한 어머니를 연상시킨다.  - P643

그러나 처음에 세인트 존은 제인에게 로체스터가 제안한 삶의 방식에 대한 실행 가능한 대안을 제공한다. 로체스터는 그이름의 유래처럼 방탕한 쾌락의 삶, 화려한 장미꽃 길(숨겨진가시가 있지만), 정열적인 결혼을 제공하는 듯 보인다. 반면 세인트 존은 원칙의 삶, 가시밭길(숨겨진 장미가 없는), 정신적인 결혼을 제공하는 듯 보인다. 세속적인 미인 로자몬드 올리버(매우 진한 여운을 남기는 또 하나의 인물)에 대한 세인트 존의 금욕주의적 거부는 정열적이고 바이런적인 제인에게는 혼란스럽다. 하지만 적어도 세인트 존은 위선적인 브로클허스트와는 달리 자신이 설교한 것을 최소한 실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인트 존이 설교하는 내용은 노동을 통한 자기실현이라는 칼라일적인 가르침이다. ‘오늘이라고 부르는 동안에 일하라, 일할 수 없는 밤이 오리니. 그의 말을 따른다면 제인은 손필드에서 섬겼던 주인을 성스러운 주인으로 대체하고 사랑을 노동으로 대체해야 할 것이다.  - P644

무엇보다 브론테는 ‘굶주림, 반항, 분노‘로 『제인 에어』를 썼고, 그것을 존 버니언의 비전에 대한 ‘반종교적인‘ 재정의이자 거의 패러디로 만들었다. 이는 결국 브론테가 자아 부정의 십자가를 거부했다는 의미다.  미스 럭비가 정확하게 ‘갱생되지 않은, 미숙한 영혼의 화신‘으로 보았던 평범한 제인 에어는 동등성을 향해가는 놀라운 순례의 결과, 에밀리 디킨슨이 15년 후에 묻게 되는 쓰라린 질문(‘나의 남편이 여자들은 말한다/선율을 타면서-/이것이-길인가?) 에 답변하고 있다. ‘아니다!‘ 제인은 손필드에서 도망치면서 선언한다. 그것은 길이 아니라고. 이것이, 펀딘에서 진정한 마음으로 결합한 이 결혼이 길이라고 제인은 말한다.
제인의 길이 제한되고 고립되어 있긴 해도, 그것은 적어도 희망을 상징한다. 샬럿 브론테는 이후 다시는 이런 낙관주의에 젖지못했다. - P653

나는, 인간이기에, 홀로 태어났다.
나는, 여자이기에, 단단히 포위되어 있다.
나는 돌에서 쥐어짜 얻은
적은 영양분으로 산다.
ㅡ엘리너 와일리

음식을 얻기 위해 투쟁하는 굶주린 사람들을 보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면, 자신의 주위 사람들이 빠져 있는 니힐리즘을
반격하고자 하는 샬럿의 광적인 노력에 반대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리베카 웨스트

가장 극단적인 상징의 시대에
벽은 매우 얇고,
거의 투명하다.
공간은 주름진 아코디언,
거리는 변한다.
그러나 또한, 창자는 납작해지고
우리는 굶주린다.
ㅡ루스 스톤

제인 오스틴, 메리 셸리, 에밀리 브론테의 소외당한 인물들을괴롭혔던 굶주림과 똑같은 배고픔을 묘사하는 가운데, 샬럿 브론테는 여성들이 그들 자신이 고안한 소설을 지속시키는 것에굶주려 있는 만큼, 음식에도 굶주려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따라서 소설을 시작할 때 폭식하는 목사들의 ‘비낭만적인‘ 장면을보여주면서 화자는 ‘식탁에 놓인 최초의 음식은 착한 가톨릭 신도가 (심지어 영국국교회 신도라도) 수난주간의 성 금요일에먹을 만한 음식이 되어야 한다. 즉 구운 양고기가 없고 쓴 허브가든 이스트를 넣지 않은 빵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1장] 물론헨리 필딩부터 존 바스까지 소설가들은 독자들 앞에 그들의 입맛이 물리거나 감질나는 식사를 차렸다. 그런데 『셜리』에서 브론테는 입맛 떨어지는 첫 번째 코스로 식사를 시작하고 있는 것 - P658

이다. 브론테는 목사들의 향연이 왜 여자 주인공들의 단식으로이어지는지 고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디킨슨의 말로 하자면사실상 『셜리」에서 브론테는 어떻게 여자의 배고픔이 ‘창문 밖사람들의 방식‘인지 설명할 뿐만 아니라, 왜 ‘[창문 안으로들어가는 것이‘ 욕망을 ‘없애버리는‘ 방식인지 설명한다.[579편] 그 이유는 남자를 유지해주는 음식과 허구가 정확하게 바로 여자를 병들게 하는 음식과 허구이기 때문이다. ‘사도‘ 목사들이 내뱉는 말은 바로 여자들이 굶주려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리하여 브론테는 여기에서 성경에 나오는 낙원의 신화에 대한 페미니즘적인 비판을 암시한다. - P659

네가 발견한 대로 그 문제를 받아들여라. 질문하지 마라. 항의도 하지 마라. 그것이 최고의 지혜다. 너는 빵을 기대했지만 돌을 얻었을 뿐이다. 그것으로 너의 이를 부러뜨려라. 비명도 지르지 마라. 신경은 순교했으니까. 너의 정신적인 위장이 만약 네가 그런 것을 가지고 있다면) 타조만큼 강하다는 것을 의심하지 마라. 돌도 소화할 것이다. 너는 달걀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지만, 운명은 너의 손 안에 전갈을 놓았다. 놀라지 마라. 그 선물을 너의 손가락으로 꼭 쥐어라. 전갈이 너의 손바닥을 찌르게 놔두어라. 상관하지 마라. 시간이 지나면, 너의 손과 팔이 부어오르고 고통으로 오래 떨린 다음, 전갈은 짓눌려 죽을 것이다. 그러면 너는 울지 않고 견뎌내는 방법이라는 위대한 교훈을 배울 것이다. 네가 이 시험에서 살아남으면 (어떤 사람은 이 시험에서 죽기도 한다) 남은 인생 동안 너는 더 강해지고 더 현명해지고 덜 예민해질 것이다. [7장] - P664

너에게 이미지 하나를 보여줄게. 희미한 파도 속에서 나타나는 설화 석고처럼 아름다운 이미지를. 우리 둘 다 머리를 길게기르고 거품처럼 하얀 팔을 들어 올린 채, 별처럼 빛나는 타원형의 거울을 보고 있어. 그것은 점점 더 가까이 미끄러지듯 다가오지. 사람의 얼굴을 또렷이 볼 수 있을 정도야. 너와 똑같은형태의 얼굴, 창백함이 그 반듯하고 순수한 (이 말을 쓰는 것을양해해줘. 이 표현이 적절하거든) 생김새를 손상시키지 않는 일굴이 우리를 바라보는데, 그건 너와는 다른 눈이야. 나는 그 교활한 눈길에서 초자연적인 유혹을 느끼겠지. 그것은 손짓해 부르고 있어. 우리가 남자라면 그 신호에 벌떡 일어설 거고, 그 차가운 유혹자에게 가려고 차가운 파도도 무릅쓸 거야. 그러나 우리는 여자니까,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안전하게 서 있겠지.[13장] - P67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