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모 레비 
이탈리아, 1919.7.31-1987. 4. 11.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화학자. 제2차세계대전 때 파시즌에 저항하는 지하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당해 아우슈비츠로끌려갔다. 아우슈비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레비는 당시의 체험을 이것이 인간인가」에 담았다. 이는 현대 증언문학을대표하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1919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태어났고, 토리노 대학교화학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유대계였던 레비는 제2차세계대전 말 파시즘에 저항하는 지하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당해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며칠에 한 번씩 시체소각실에서 나오는 검은연기를 보며 지옥 같은 11개월을 보냈다.
1945년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아 토리노로 돌아왔고, 자신의 처절한 경험을 담은 「이것이 인간인가를 1947년 발표했다. 1963년 출간한 「휴전으로 제1회 캄피옐로 상을 수상했다. 1975년 주기율표를 발표했고, 1978년 멍키스패너 를 출간해 스트레가상을 받았다.
「멍키스패너」는 출간 후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에게 찬사를 받았다. 아우슈비츠 경험을 다룬 ‘지금이 아니면 언제?』는 1982년 비아레즈 상과 캄피엘로 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19861년에는 생애 마지막 저작이 된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자』를 출간했다.
아우슈비츠에서 밀라노로 돌아온 직후 실험실과 공장을 몇 군데 거친 뒤 니스와 에나멜을 생산하는 공장에 취직했는데, 작가로서 명성을 떨치며 활발하게 활동하면서도 그만두지 않았다. 1977년 퇴직할 때까지 총감독으로 일하면서 다양한 시와 소설을 남겼으나 1987년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프리모 레비는 1919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태어났는데, 중산층인 그의 부모는 스페인 종교재판을 피해 달아난 유대인의 후손이다.
1930년대에 이탈리아의 인종법이 레비의 학문 연구를 위협했고, 그뒤로는 독일의 인종차별 법안이 목숨을 위협했다. 졸업논문을 지도해준 한 동정심 많은 교수 덕분에 토리노 대학에서 학업을 마칠 수있었고, 그의 목숨을 구하게 될 화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3년 초에 친구 열 명과 함께 토리노를 떠나 산속으로 피신해반파시즘 저항운동 단체인 ‘정의와 자유‘에 동참하려고 했다. 그러나그해 12월 레비가 파시스트 민병대에 체포되며 계획은 무산되었다.
1944년 2월, 레비는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었다. 그곳의 화학 실험실에서 일했고 당장이라도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스스로 자기 인생의 "궁극적인 경험"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 P273

전쟁이 끝난 뒤에는 토리노로 돌아와 화학자로 일했다.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첫 번째 책인 것이 인간인가』를 1947년 출간하고, 이듬해에는 페인트 공장 실험실의 관리자가 되어 1977년 은퇴할 때까지 일했다. 1975년에는 「주기율표』를 출간했는데, 그는 그 책이 나오기까지 무엇보다 과학과 관련된 자신의 직업에 빚을 졌음을 인정했다. 이 무렵에는 이탈리아의 가장 중요한 작가로 인정받으며 시와 회고록, 소설, 에세이를 연달아 써냈다.
레비는 1987년 자살했다. 4층짜리 아파트 외부에 있는 대리석 계단 난간에서 몸을 던졌다. 그 아파트는 1919년에 그가 태어난 곳이며, 아내와 함께 아이들을 기른 곳이자 1985년 7월에 이 인터뷰를 진행한 곳이기도 하다. 인터뷰를 위해 방문했을 때 레비는 나를 서재로데려갔고, 우린 가죽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책상에는 컴퓨터가놓여 있었고, 레비는 컴퓨터가 소설을 쓰는 데 무척 유용하다고 말했다. 창문을 통해 움베르토 거리가 내다보이는 서재는 주인인 레비와 마찬가지로 몹시 깔끔하고 질서정연했다. - P274

글에서도 느꼈지만 직접 만난 레비는 겸손의 달인이었다. 부드럽지만 활발한 어조로, 후기 작품에서 점차 뚜렷해지는 풍자적 유머 감각을 드러내며 이야기했다. 츠베팅 토도로프의 언어이론과 이탈리아의 사회경제 구조, 그리고 모든 과학자에게 교육의 일환으로 윤리학을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 등 다양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프리모 레비는 목소리가 부드럽고 내성적이지만 강렬한 열정을소유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과학, 특히 과학의 간결성과 정밀성에 결부하여 자신의 예술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의 가족사이자 시대사를 표현한 『주기율표」는, 과학자에서 작가로 - P274

발전해가는 레비 본인의 역사이기도 하다. 소설에서는 그것을 탄소원자에 빗대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책의 마지막 장인 ‘탄소‘에서 레비는 자신이 다루는 중심 주제 중 하나를 제시한다. 한 생명체를 다른 생명체에, 그러니까 생명체 자체는 물론이고 생명체의 근원이 되는 물질에도 연결해주는 ‘보편적 끈‘을 묘사한다. 극미량의 물질인탄소 입자는 우주적 규모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띤다.
자살하기 바로 전해에 출간한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아우슈비츠 수감 생활로 겪은 고통과 자신을 줄기차게 괴롭힌 수치심,
그리고 그 만행에 가담한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것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느끼는 혐오감을 이야기했다. 그는 모든 사람은 다른 생물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고 믿었다. 도덕적 전통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인원이든 사과든 우리 모두는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 P275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간단하게 말씀해주시겠습니까?


프리모 레비 
고전교육을 받았어요. 글쓰기 훈련이 중요했지요. 묘하게도 이탈리아 문학 수업은 마음에 들지가 않았습니다. 화학이 좋았지요. 그래서 인문주의적 문학 수업을 거부했지만 문학은 저도 모르게 피부로 들어왔어요. 저는 선생들에게 일종의 반론을 폈는데, 그들이 문장의 구조 따위를 강조했기 때문이지요. 더욱 화가 났던 건문학 수업이 시간 낭비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찾던 건 별과달, 미생물, 동식물, 화학 등 우주의 의미에 대한 지식이었으니까요.
나머지 모든 것, 그러니까 역사와 철학 등은 제가 졸업장을 받고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넘어야 할 장벽에 불과했지요. - P277

레비 
아버지가 독서를 좋아하셨기 때문에 그다지 부유한 형편이 아니었는데도 아낌없이 책을 사주셨습니다. 지금은 번역이 됐건 안 됐전 외국 서적을 찾기가 쉽지만 그 당시에는 파시스트들이 무척 날카롭게 분류한 탓에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책은 괜찮고, 저 책은 안 된다는 식이었죠. 예를 들어 영국이나 미국 사회를 비판한 번역서는 허가했습니다. 탄광 생활에 대해 쓴 D. H. 로런스의 책들은이탈리아어로 출간되었을 뿐만 아니라 널리 배포되었는데, 영국 광부들의 처지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기 때문이지요. 이탈리아 광부들의 생활은 그렇지 않다는 암시였어요. 로런스는 파시즘을 낭만적인 모험으로 착각했으니, 그의 작품을 번역할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었던 셈이지요. 그렇습니다. 파시스트 검열관들은 나름대로 똑똑했지요. 어떤 것은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배제하고, 예를 들면 헤밍웨이가 그랬습니다. 헤밍웨이는 스페인에 있을 때 공산주의자나 다름없었지요. 헤밍웨이의 책은 전쟁이 끝난 뒤에야 번역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열두 살 때 프로이트를 읽게 하셨어요. - P278

허먼 멜빌의 작품은 체사레 파베세가 번역했습니다. 「모비 딕은 탐험물이었어요 정치적 함의가 없었지요. 저는 그 책을 스무 살에 읽었습니다.
소년은 아니었지만 멜빌에게 매료되었지요. 파베세는 정통파라고는 할 수 없지만 뛰어난 번역가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모비 딕을 이탈리아어에 어울리도록 다듬고 바꿨습니다. 파베세는 뱃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다를 싫어했어요. 그러니까 번역하기 전에 준비를 해야 했어요. 파베세와 알고 지냈는데, 그가 자살하기 전에 두 번 만났지요. 문학적 성공의 정점을 찍은 1950년에 호텔 볼로냐에서 불가사의한 이유 때문에 자살했어요. 모든 자살은 불가사의하지요. 성적인 문제가 있었지만 발기불능은 아니었어요. 성적으로 소심했다고나 할까요. 매우 까다로운 사람이기도 했고요. 작가로서 자기 작품에 만족한 적이 없었습니다. 정치적인 문제도 있었어요. 전쟁 중에공산주의를 신봉했지만 용기를 내서 저항운동에 가담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난 뒤 독일군과 싸우지 않았다는, 일종의 죄의식을 느꼈어요. 그런 것이 자살한 이유 가운데 일부겠지만 전부는아닐 겁니다. - P279

정신은 위험한 부분이 있지요. 이성을 통제할 수 있으니까요.


레비 
뭐랄까. 정신은 이성이 아니라 본능입니다. 이성은 비판의 도구였기 때문에 금지되었어요. 그들의 언어에서 정신은 매우 막연한것이었지만 선량한 시민이라면 적응해야 했죠. 조지 오웰이 『1984』부록에서 다룬 신어 Newspeak에 대해 기억하십니까? 그것은 전체주의를 모방한 것이었어요. 파시스트 치하의 이탈리아에서는 많은것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어요. 하지만 교육은 순조로웠지요. 그들은 용의주도하게 반파시즘 교사들을 처벌하거나 내치고, 열성당원인 교사들을 데려왔습니다. 그래서 파시스트의 신념이 쉽게 침투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물질이 아닌 정신의 탁월함을 주장한 것이였어요. 물질이야말로 제가 화학자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지요. 진실인지 거짓인지 증명할 수 있는 것을 제 손 안에 두고 싶었거든요. - P280

당신의 작품을 읽다 보면 과학과 윤리, 즉 도덕성에 대한 의문이 떠오릅니다.
과학자가 다른 직업 종사자보다 더 윤리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레비 
모든 사람이 윤리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탈리아나 미국에서 하는 과학교육이 특별히 윤리 의식을 일깨워준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야 하는데 말입니다. 전 대학의 자연과학학부에 들어온 젊은이들에게, 그들이 들어서게 될 이 직종에서 도덕성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하라고 엄격하게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처럼 페인트 공장에서 일하는 화학자와 독가스 공장에서 일하는 화학자는 다릅니다. 실생활에 미칠 영향을 자각해야 해요. 어떤 직업이나 일자리는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 P281

당신에게 음식을 준 로렌초에 대해 말씀해주시지요.


레비 
로렌초는 다른 경우였습니다. 문맹이나 다름없었지만 세심한 - P289

사람으로 성인과도 같았지요. 전쟁이 끝나고 이탈리아에서 만났을때 들어보니 저만 도와준 게 아니었습니다. 당사자에게는 말하지 않고포로 몇 명을 도왔어요. 우린 거의 말을 주고받지 않았지요. 매우과묵한 남자였어요. 고맙다는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빵받아요 설탕이요, 말은 필요 없습니다."라고만 할 뿐 제 말에 대답도거의 하지 않았지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죠. 나중에 제가 그를 도우려고 했을 때, 그의 관심을 끌거나 대화하기가 어려웠어요그는 무식했고, 그때까지도 글을 거의 쓰지 못했어요. 신앙은 없었어요. 기독교 복음도 몰랐지만, 본능적으로 사람들을 구하려고 했지요. 자만심이나 명예 때문이 아니라 선량한 마음과 인간적인 이해심때문이었지요. 한번은 매우 간결한 말로 제게 묻더군요.  - P289

 "우리가 서로 돕지 않는다면 왜 세상에 있는 거죠?" 그게 다였어요. 하지만 그는 세상을 두려워했어요. 아우슈비츠에서 사람들이 파리처럼 죽는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더는 행복할 수가 없었지요. 그는 유대인도, 포로도 아니었어요. 그러나 무척 민감한 성격이었고, 집으로 돌아온뒤 괴로움을 잊기 위해 습관적으로 술을 마셨어요. 토리노에서 멀지않은 곳에 살고 있어 찾아가서 술을 그만 마시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는 알코올에 중독되어 벽돌공이라는 직업을 관두고 고철을 사고팔았어요. 돈이 조금만 생기면 술 마시는 데 써버렸죠 왜 그렇게 사냐고 물었더니 서슴없이 말하더군요. "더는 살고 싶지 않아요. 인생이 지긋지긋해요. 그 무시무시한 원자폭탄을 보고 나니...... 볼 것을다 본 기분이에요." 그는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있었 - P289

던 곳이 어딘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어요. 아우슈비츠가 아니라 스위스와 비슷하게 ‘오슈비스‘라고 발음했지요. 지리를 혼동했어요.
그는 시간표에 따라 살지 못했습니다. 술에 취한 채 눈 속에서 잠들곤 했어요. 그러다가 결핵에 걸렸어요. 저는 그가 치료받도록 병원에 보냈지만 병원에서 술을 주지 않는다면서 달아나버렸지요. 결국 결핵과 술 때문에 죽었습니다. 사실상 자살이었어요.



페인트 공장에서 일할 때, 당신의 문학적 야망을 높이 평가한 상사가 있었죠.


레비 
그는 영리하고 지적인 사람이었는데, 우리 사이에는 암묵적인 이해가 있었어요. ‘당신, 프리모 레비는 여가 시간에는 글을 쓰되 공장에서는 절대 쓰면 안 됩니다. 그는 작가인 화학 감독관을 둬 자랑스러워했지만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었어요. 나중에 제가 퇴직을하고 연금을 받게 되었을 때 우린 친구가 되었고, 서로 점심 식사에 초대했지요. - P290

그러나 친애하는 독자여, 이 책은 아름답지 않다. 나는 이 책을 사랑하지 않는다. 증오한다. 그러나 이 책은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정권에 의해 비뚤어져 수백만 명을 죽인 살인자가 되고 말았는지를 여러분에게 가르해주므로 무척 중요하다.‘ 회스는 힘든 청년기를 보냈어요. 1차세계대전 동안 이라크에서 페다인 민병대와 싸워야 했지요. 어쨌든 그는 당신이나 나와 다른 물질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고, 타고난 범죄자도 괴물도 아니었어요. 그는 보통의 인간적인 성분으로 구성된 사람이 분명하지요. 그러나 국가주의를 주입하고 나치에게 교육을 받은 뒤, 예스맨이 되었지요. 언제나 ‘예스‘라고 말하면서 법을 준수하는 사람. 뵐의 말이 옳았어요. 회스는 전형적인 독일인이었지요 그시대에 회스는 법이 히틀러와 힘러의 말과 일치하는지 여부는 신경쓰지 않았어요. 자신과 동료 독일인들이 히틀러의 명령을 무시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했지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그들은 모든 종류의 명령을 또박또박 따르도록 훈련되었어요. 명령의내용을 판단하지 않고 그냥 복종하는 거죠. - P293

수전 손택
미국 1933 1.16-2004.12.28.


미국 자성계의 대모로, 문학, 연극, 영화, 음악, 미술 등 분야를가리지 않고 비평과 감상을 남겼다. 미국 펜클럽 회장을 지냈고, 2003년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 타인의 고통으로독일출판협회 평화상‘을 수상했다.


1933년 뉴욕 맨해튼에서 태어났다. 1955년 하버드에서 영문학과 철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뉴욕시립대학, 컬럼비아 대학 등에서 철학과 종교학을 가르쳤다. 1963년 첫 소설 「은인과 1966년 에세이집 ‘해석에 반대한다』를 발표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베트남 전쟁의 폭력성과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을 폭로했고, 1988년 펜클럽 회장 자격으로 서울을 방문해 구속 문인의 석방을 촉구하기도 했다. 살만 루슈디가 악마의 시로 사형선고를 받자 미국 문학계의 항의운동을 이끌어냈고, 1993년에는 사라예보 내전에 반대하면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전쟁통인 사라예보에서 공연하는 등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인간은 모두 관음증 환자다."라고 한 손택은, 사진작가로서 사회 비리를 고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활동하면서 느낀점을 타인의 고통에 담았는데, 백혈병으로 투병 생활을 하던 2003년에 발표한 이 책을 통해 전쟁과 폭력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비극으로 몰아가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주었다. ‘사진에 관하여」로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비평 부문을, 『인 아메리카로 전미도서상 소설 부문을 수상했다.

수전 손택은 맨해튼 서부 첼시의 어느 건물 꼭대기 층 가구가 간소한 방 다섯 개짜리 아파트에 산다. 책(무려 1만 5천 권이다.)과 종이가집 안 곳곳에서 눈에 띈다. 미술과 건축, 극장과 춤, 철학과 정신의학, 의학의 역사, 종교의 역사, 사진, 오페라 등을 다룬 책들을 대강 훑어보는 데만 평생이 걸릴지 모른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러시아 등의 다양한 유럽 문학은 물론이고 수백 권의 일본 문학과 일본관련 책들이 연대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미국과 영국 문학도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영국 문학은 『베어울프‘에서 시작해 제임스 펜턴까지 이어진다. 손택은 스크랩하는 고질적인 습관이 있어서 책에는 - P301

신문 스크랩이 가득 끼워져 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책마자 표시를 하며 뼈를 발라낸다‘고 한다. 추가로 읽을 책들의 제목을 휘갈겨쓴 쪽지들이 책장을 장식하고 있다.
손택은 대개 거실에 있는 낮은 대리석 탁자에서 글을 쓴다. 자그마한 공책에는 작업 중인 소설 인 아메리카에 관한 메모가 가득다. 쇼팽을 다룬 낡은 책이, 식탁 미녀의 역사를 다룬 위에 놓여 있다. 방은 어쩌면 모조품일 수 있는 귀여운 포니환하다. 피라네시의 판화가 걸려 있는데 건축을 소재로 한 만화는 손택이 열정을 쏟는 대상 가운데 하나다. - P302

손택의 아파트에 있는 모든 것이 그녀의 방대한 관심사를 입증한다. 그러나 여러 가지에 몰두하는 열정적인 기질을 증명해주는 것은 그녀와 나누는 대화와 마찬가지로 작품 그 자체다. 손택은 주제가 이끄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주제가 가닿는 한 멀리까지, 아니 그 너머까지 따라가려는 열망이 있다. 손택이 롤랑 바르트에 대해 한 말은 자신에게도 적용된다. "지식이 문제가 아니라 각성이 문제다. 일단 집중력이라는 물줄기 속으로 들어간 다음에는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할수 있는 내용을 깐깐하게 글로 옮기는 것이 문제다."
손택은 1994년 7월, 지독하게 더운 사흘 동안 맨해튼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인터뷰에 응했다. 사라예보를 여러 번 다녀온 뒤였는데 관대하게도 인터뷰 때문에 시간을 비워둔 것이다. 손택은 대단한 입담꾼으로, 박식하고 정열적이다. 솔직하고 허물없는 태도로 부엌 나무 식탁에서 매일 7~8시간씩 열변을 토했다. 부엌은 다목적실인데, 팩스와 복사기는 조용했다. 전화기만 아주 드물게 울렸다. 대화는 매우 다양한 주제를 아울렀지만 반드시 문학의 기쁨과 탁월함으 - P302

로 되돌아왔다. 손택은 창작의 메커니즘부터 소명의 고귀한 본질에이르기까지, 글쓰기와 관련된 모든 것에 관심이 있다. 손택에게는 수많은 임무가 있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로서의 소명이다. - P303

언제부터 글을 쓰셨나요?


수전 손택 
확실히는 모르겠는데, 아홉 살 무렵 자가 출판을 한 건 기억해요. 4쪽짜리 신문을 매달 펴냈는데, 매우 원시적인 방법이지만젤라틴판으로 복사해서 20부를 만들어 이웃들에게 5센트를 받고팔았어요. 몇 년 동안 계속 펴낸 그 신문은, 제가 읽고 있던 책을 모방한글로 채워졌죠. 단편소설과 시, 그리고 희곡 두 편은 지금도 기억나는데 그중 하나는 카렐 차페크의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 다른 하나는 에드나 밀레이‘의 「아리아 디 카포」Aria de Capo에서 영감을 받아 쓴 희곡이에요. 그리고 미드웨이 해전이나 스탈린그라드 전투 탓에 진짜 신문 기사를 충실하게 요약해 실었죠. 그때가 1942년 1943년, 1944년이라는 점을 기억해주세요. - P305

작가로서 역할 모델이 있었나요?


손택 
전 제가 작은 아씨들에 나오는 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조가 쓴 것을 쓰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러다가 마틴 이든‘에서 제가 동감할 수 있는 글을 쓰는 작가 주인공을 찾았기에, 그 뒤로는 마틴 이든 같은 작가가 되고 싶었어요. 물론 잭 런던이 그에게 부여한음울한 운명은 빼고요. 저 자신을 영웅적인 독학자로 여겼던 것 같아요. 글 쓰는 삶에 뒤따르는 투쟁을 기대했죠. 작가가 되는 것을 영웅적 소명으로 생각했어요. - P308

틀림없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 특이한 아이였겠어요.


손택
제가요? 전 티 안 내는 법도 잘 알고 있었는걸요. 저 자신에 대해서는 그리 많이 생각하지 않았고, 더 훌륭한 것을 알게 되어 무척기뻤어요. 하지만 다른 어딘가에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죠. 독서를 하면 행복하고도 확실하게 현실과 단절할 수 있었고요. 독서와음악 덕분에, 제가 다짐한 열렬함에 대해 전혀 신경쓰지 않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살 수 있었어요. 다른 행성에서 온 사람이 된 기분이었지요. 그건 그 당시의 만화책에서 빌려온 몽상이었어요. 만화책에도 중독되어 있었거든요.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의식하지도 않았어요. 실제로 사람들이 저를 의식한다고 생각해본 적이없었죠. 네 살 무렵 공원에서의 광경이 또렷이 기억나는데, 아일랜드인인 유모가 풀을 먹인 흰 제복을 입은 한 거인(어른)에게 "수전은 굉장히 신경질적이에요." 라고 말하는 걸 듣고는 ‘그거 재미있는 말이네.‘ 라고 생각했죠. 그게 사실일까요? - P309

지성인이라고 불리는 게 언짢으세요?


손택 
글쎄요 뭐든 수식어가 붙는 걸 좋아할 사람은 없지요. 그리고 그 단어는 명사보다는 형용사로 느껴져요. 물론 그렇더라도 점잖지 못한 괴짜라는 추정은 늘 존재할 것 같아요. 특히 작가가 여성이라면. 그래서 지배적인 반지성적 클리셰를 거스르는 제 논증법에 더매달리게 돼요. 가슴 대머리, 감정 대 지성 같은 클리셰 말이에요.



본인을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세요?


손택 
그건 제가 만족해하는 몇 안 되는 이름표 가운데 하나예요. 
그렇더라도...… 그건 명사인가요? - P312

중요하게 여기는 여성 작가들은 누군가요?


손택 
세이 쇼나곤, 제인 오스틴, 조지 엘리어트, 에밀리 디킨슨, 버지니아 울프, 마리나 츠베타예바, 안나 아흐마토바, 엘리자베스 비숍, 엘리자베스 하드윅...... 계속 나열하면 이보다 훨씬 많아요. 왜냐면 여성은 문화적으로 소수집단이고, 소수집단의 관점에서 전 언제나 여성의 성취가 대단히 기쁘니까요. 작가의 관점으로는, 존경할수 있는 작가라면 여성이건 남성이건 모든 작가의 성취가 기쁘고요. - P312

글쓰기에 시동을 걸도록 도와주는 것이 있나요?


손택 
독서죠. 제가 쓰고 있는 글이나 쓰고 싶은 글과는 상관없는 독서죠, 예술사, 건축사, 음악학, 그리고 수많은 주제를 다룬 학술서적을 읽는답니다. 물론 시도 읽지요. 시동을 걸어주는 건 부분적으로는 시간벌기, 그러니까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 것과 같은 시간벌기죠, 책과 음악은 기운을 북돋아주기도 하지만 불안하게도 해요. 글을 쓰고 있지 않다는 죄책감이 느껴지거든요.



매일 글을 쓰세요?


손택 
아니에요. 벼락치기로 써요. 닥쳐야 쓰게 되지요. 압박감이 커져야 머릿속에서 뭔가가 무르익고 그걸 글로 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거든요. 일단 글을 쓰기 시작하면 다른 일은 하고 싶지가않아요. 외출하지도 않고, 먹는 것도 잊고, 잠도 거의 자지 않죠. 굉 - P315

장히 체제 없는 작업 방식이고 다작에도 전혀 도움이 안 되죠. 하지깐 다른 수많은 것에 관심이 많으니 별 수 없어요.



예이츠는 사람은 삶과 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했죠. 그게사실이라고 생각하세요?


손택
아시겠지만 그가 실제로 한 말은 완벽한 삶과 완벽한 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거죠. 글쎄요, 글쓰기가 바로 삶인걸요. 무척 특별한 삶이죠. 물론 삶이라는 말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을 뜻한다면, 예이츠의 말은 사실이에요. 글쓰기는 지독한 고독이 필요해요. 제가 그 선택의 가혹함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해온 행동은 늘 글만 쓰지 않는 거예요. 전 외출하기를 좋아해요. 여행도 자주 하죠. 말하기를 좋아하고, 듣기를 좋아하고, 구경하고 관찰하기를 좋아해요. 어쩌면 ‘주의력과잉장애‘가 있는지도 몰라요. 제게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집중하는 거랍니다. - P316

문학의 목적이 교훈에 있다는 생각은 시대에 뒤떨어진 게 아닌가요?


손택 
글쎄요. 문학은 정말로 삶에 대해 가르쳐줘요. 책이 없었다면전 지금과 같은 사람이 되지 못했을 테고, 지금 알고 있는 것을 알지도 못했을 거예요.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위대한 질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생각하는 중이에요. 읽을 가치가 있는 소설은 마음을 단련시키지요.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지에대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인식을 확장시켜요. 문학은자기 성찰로 이끌지요.



에세이와 소설 쓰기는 당신의 각각 다른 부분에서 비롯되나요?


손택 
맞아요. 에세이는 제한된 형태지만 소설은 자유롭지요. 이야기를 들려줄 자유이자 산만해질 자유이기도 해요. 하지만 산만함과장황함이 소설이라는 맥락에 들어오면 의미가 아예 달라져요. 뜻이분명하게 표현돼요. - P321

돈 드릴로 
미국, 1936.11.20.~

현대문학의 대가이자 현대문명의 예언자로 불리는 돈 드릴로는 지적이면서 인간적인 인물을 통해 동시대 주요 이슈를 불핵유머와 아이러니 섞인 언어로 보여준다. 특히 9.11 사태 이후 그 예언적인 면모가 작품에서 더욱 부각되고 있다. 1999년에 미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이스라엘 최고 문학상인 예루살렘상을 수상했고, 현재 미국예술원 회원으로 있다.


이탈리아 이민 2세로 1936년 뉴욕 브롱크스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토마스 핀천과 함께 포스트모던 소설의양대 축을 형성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현대사회의 문화현상과 대중매체의 실상을 예리하게 묘사하는 것으로유명하다.
글 잘 쓰기로 소문난 폴 오스터가 "미국에서 돈 드릴로만큼 소설을 잘 쓰는 작가는 없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데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 한다."라고 극찬을 하면서 자신의 작품을 헌정하기도 했다.
전미도서상을 안겨준 화이트 노이즈』는 그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으로, 세계 여러 나라에서 번역되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발판이 되었다. 예술가, 테러리스트, 기자들의 이미지 조작을 다룬 풍자소설인 『마오 Ⅱ로 펜포크너 상을 수상했다. 로큰롤 스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미국 자본주의 현실을 돌아보는 ‘그레이트존스 거리』를 비롯해 『언더월드』, 『코스모폴리스」, 『추락하는남자』 등의 장편소설과 『데이룸』, 『발파레이소』 등의희곡을 썼다.

왜 작가가 되었다고 생각하세요?


돈 드릴로 
추측되는 이유는 있지만 확실하진 않아요. 아마 생각하는법을 배우고 싶었나 봐요. 글은 생각의 농축된 형태죠. 지금도 자리에 앉아 글을 쓰기 전에는 특정 주제에 대해 제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어요. 또한 더 엄밀한 사고방식을 찾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이건 제가 아주 초기에 썼던 글에 대한 이야기이자 청년기 말에 세상을 정의하고 혼란스러운 경험을 간결한 방식으로 정의하는 언어의 힘과 관련된 이야기예요. 글이 편리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가장 단순한 도구들만 있으면 되죠. 젊은 작가는1페니 값도 안 되는 종이 위에 적은 단어와 문장으로, 세상에 분명하게 자리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작가가 주변을 둘러싼 세력, 즉 길거리의 사람들과 그들의 압력으로부터 자기 자신을분리하기 위해 필요한 건 종이에 적힌 단어들뿐입니다.  - P347

십대 때는요?


드릴로 
처음엔 별로 읽지 않았죠 열네 살 때 『드라큘라』를 읽었어요. 파리는 거미에게 먹히고, 거미는 쥐에게 먹히고, 쥐는 고양이에게 먹히고 고양이는 개에게 먹히고, 개는 아마 누군가에게 먹히겠죠. 포식 단계 하나를 빼먹었나요? 「스터즈 로니건』 3부작‘도 읽었는데, 제 일상이나 주변의 것들이 작가가 탐구할 주제가 될 수 있다는 걸 가르쳐줬죠 놀라운 발견이었어요. 그러다 열여덟 살 여름에, 아르바이트로 유원지에서 일했어요. 유원지를 관리하는 건데 흰색티셔츠에 갈색 바지, 갈색 신발을 신고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야 한다더군요. 호루라기는 회사에서 지급했지만 나머지 복장은 갖추지못했죠. 전 청바지에 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채 호루라기는 주머니에 넣고 다녔어요. 놀러나온 시민인 척 공원 벤치에 앉아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와 『8월의 빛』을 읽었죠. 물론 돈은 받으면서요. 그다음에는 제임스 조이스를 읽었어요. 조이스를 통해, - P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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