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식사를 마치고 한 시간쯤 뒤 에스트라벤은 그래도 될 것같으면 스토브 열기를 낮췄고, 스토브의 조명을 껐다. 에스트라벤은 그러면서 짧고 아름답고 우아한 기도문을 암송했다. 내가 한다라에서 유일하게 배운 기도문이었다. "그리고 어둠을 찬미하고, 끝나지 않은 창조를 찬미하라." 에스트라벤이 말했고, 어둠이 찾아왔다. 우리는 잠을 잤다. 아침이 되면 같은 일과가 반복되었다.
50일 동안 그런 생활을 했다.
에스트라벤은 빙원을 지나던 시기에는 날씨와 그날 이동한 거리 말고 다른 것은 거의 적지 않았지만 그래도 날마다 일기를썼다. 이러한 기록 가운데에는 자신의 생각이나 우리가 나눈 대화에 대한 언급이 종종 있었지만 우리가 빙원에서 지낸 첫 달, 이야기할 힘이 충분했으며, 며칠 동안 폭풍 때문에 텐트에서 지내야 했던 당시 거의 밤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잠잘 때까지 나눈 심도 깊은 대화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쓰지 않았다. 나는 에스트라벤에게 비동맹 행성에서 마음의 언어 사용이 금지되어 - P335

있는 것은 아니지만 쓰지 않는 걸 기본으로 한다고 설명했고, 최소한 우주선에 있는 동료들과 그 문제에 대해 상의할 때까지 그것을 게센인들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에스트라벤은흔쾌히 동의하고 약속을 지켰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침묵의 대화에 대해서 절대 말하거나 글로 쓰지 않았다.
에스트라벤은 우리 세계의 문명과 외계의 존재에 대해 깊은관심을 보였으며, 마음의 언어는 그런 그에게 내가 알려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나는 끝없이 이야기하고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사실, 어쩌면 우리가 겨울 행성에 꼭 주어야 할 것도 그것뿐인지 몰랐다. 하지만나는 내가 문화 수출 금지령을 어긴 동기가 그에 대한 고마운 마음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에스트라벤에게 진 빚을 갚은 게 아니었다. 그러한 빚은 언제까지고 남아 있는 법이다. 에스트라벤과 나는 단지 우리가 나누어 가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나누는 단계에 이른 것뿐이다. - P336

우리는 자고 또 자고, 조금 먹고, 동상과 염증과 멍든 곳을 돌보고, 마음으로 이야기하고, 다시 잤다. 사흘 동안 계속된 비명과 고함이 수다로 바뀌었고, 이윽고 흐느낌이 되었다가 이윽고침묵이 되었다. 날이 밝았다. 열린 문밸브 사이로 하늘의 환한빛이 비쳐 들어왔다. 덕분에 마음이 가벼워졌지만, 너무 지쳐있었기에 가벼운 마음에 맞춰 재빨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우리는 텐트를 접고 그러는 데 거의 두 시간이 걸렸다. 두 사람 모두 노인처럼 꾸물거렸기 때문이다 출발했다. 내리막길이었으며, 가파르지 않았다. 설질은 스키를 타기에 딱 좋았다. 태양이빛났다. 아침 중반, 온도계는 화씨 영하 10도를 가리켰다. 움직이기 시작하자 힘이 나는 듯했으며, 빠르고 쉽게 앞으로 나아갔다. 우리는 그날 별이 뜰 때까지 이동했다. - P364

나는 이 마지막 며칠 동안의 여정을 자세히 설명할 수가 없다.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굶주림은 지각을 날카롭게 하지만, 극도의 피곤함과 겹쳐졌을 때는 그렇지 않다. 당시에는 내 모든 감각이 아주 둔해졌던 것 같다. 굶주림 때문에 경련이 일어난 기억이 나지만 그 때문에 고통스러웠는지 어땠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해방감과 황홀감이랄까, 그 너머의 감정이랄까를 몽롱한 속에서 계속 느꼈으며, 또한 끔찍하게 졸렸던 기억도 난다. 우리는 안네르 포스세, 즉 12일에 육지에 도착했고, 마침내 얼어붙은 해안을 넘어, 바위와 눈투성이인 황량한구센만 해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우리는 카르히데에 있었다.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배고픈 성취감에 가까웠다. 배낭이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착을 축하하기 위해 뜨거운 물로 건배를 했다. 이튿날 아침, 도로와 마을을 찾아 출발했다. 이곳은 황량한 지역으로, 우리는 지도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 P367

그날은 안네르 오드오르니로, 여행을 시작하고 81 일째 되는날이었다. 우리는 에스트라벤이 짠 일정보다 열하루 늦었다. 에스트라벤은 날짜에 정확히 맞춰 식량을 준비했다. 많아야 78 일치였다. 썰매 계량기에 표시된 거리에 마지막 며칠동안 이동한 거리를 어림짐작한다면 840 마일을 온 것이다. 그 거리 가운데 상당 부분은 헤매며 낭비한 거리였으므로, 만약 우리가 정말로 이동해야 할 거리가 800마일이었다면 절대로 해내지 못했을것이다. 제대로 된 지도를 손에 넣었을 때, 우리는 풀레펜농장과 이 마을 사이 거리가 730마일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긴 거리와 시간 동안 우리는 집도 없고 사람도 없는 황량한 곳을 가로질러 왔다. 바위와 얼음과 하늘과 침묵만이 존재하는 곳, 81일 동안 우리 둘 말고는 아무도 없는 곳을 가로지른 것이다. - P368

에스트라벤이 간신히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영지의 환대를 부탁드립니다."
소란, 웅성거림, 혼란, 놀람, 환영.
"저희는 고브린 빙원을 넘어왔습니다."
더 큰 소란, 더 많은 목소리들. 질문들. 그들이 우리 앞으로 몰려왔다.
"제 친구를 돌봐주시겠습니까?"
나는 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에스트라벤이 한 말이었다. 누군가 나를 앉혔다. 그들은 우리에게 음식을내주었다. 우리를 돌보아주었고, 받아들였으며, 환영했다.
그들은 가난한 땅에 사는 아는 것 없고, 토론하기 좋아하고,
열정적이며, 무식한 시골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호의 덕분에우리는 힘든 여행을 멋지게 끝맺을 수 있었다. 그 사람들은 우리 - P369

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었다. 아까워하거나 계산을 따지지 않았다. 그리고 에스트라벤은 그들이 우리에게 주는 것을 영주 무리 속의 영주처럼, 거지 무리 속의 거지처럼, 자기 동포 속에 있는 사람처럼 편안히 받아들였다.
오지 중의 오지인 이곳 마을, 인간이 간신히 살아갈 수 있는이 대륙의 거주 한계점에 사는 어부들에게 정직은 음식과 마찬가지로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 정직하게 행동해야만했다. 서로 속일 만큼 풍족하지 않았다. 에스트라벤은 이를 알고 있었고, 하루 이틀이 지나자 그들은 우리 주위에 몰려와 시프그레소를 갖춘 조심스럽고 신중한 태도로, 왜 한겨울에 고브린병원을 헤맸는지 물었다. 에스트라벤이 즉시 대답했다. "침묵을 지켜서는 안 되겠지만 거짓말보다는 낫겠지요." - P370

"고귀한 분들은 추방당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렇다고 그런 분들의 그림자가 줄어들지는 않습니다."
온식 가게 요리사가 말했다. 그는 이 마을에서 촌장 다음의 서열이었으며, 그의 가게는 겨울 동안 영지 사람들에게 일종의 사랑방 구실을 했다.
"한 명은 카르히데에서 추방당하고 다른 한 명은 오르고레인에서 추방당했다고 할 수 있겠군요." 에스트라벤이 말했다.
"사실입니다. 한 명은 자기 부족에 의해, 다른 한 명은 에르헨랑에 있는 왕에 의해."
"왕은 누구의 그림자도 줄어들게 하지 못합니다. 시도는 할 수있겠지만요." 에스트라벤이 의견을 말했고, 요리사는 만족한 듯 - P370

보였다. 만약 에스트라벤이 그 자신의 부족에 의해 추방되었다면 의심스러운 인물이 되었겠지만 왕에게 비난을 받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한편 나로 말하면, 외국인이자 오르고레인에서 추방된 자가 분명했지만, 그건 기껏해야 내 신망과 관련이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쿠르쿠라스트에서 우리 이름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에스트라벤은 가명을 쓰는 걸 무척 꺼려했지만 진짜이름을 밝힐 수는 없었다. 어찌되었든, 이들이 했던 것처럼 에스트라벤에게 먹을 것과 옷가지를 주고 묵을 곳을 제공해주는 건고사하고 말만 걸어도 범죄였기 때문이다. 구 해안의 벽촌에도 라디오는 있었으므로 추방령을 몰랐다고 시치미를 뗄 순 없었다. 하지만 손님의 정체를 정말로 몰랐다고 한다면 변명의 여지가 있었다. 내가 미처 생각하기 전부터 에스트라벤은 이들이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운 듯 보였다.  - P371

하지만 에스트라벤은 언덕을 내려갔다. 에스트라벤은 스키솜씨가 뛰어났고, 이번에는 나를 위해 속력을 늦추지 않았다.
에스트라벤은 길고 빠르게 곡선을 그리며 눈 위의 그림자들을헤치고 쏜살같이 언덕을 내려갔다. 그는 나를 떠나 국경경비대의 총부리를 향해 곧장 나아갔다. 아마 경비대가 경고를 하거나멈추라고 외쳤을 것이다. 어디선가 불빛이 반짝인 듯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어쨌든 에스트라벤은 멈추지 않고 울타리를 향해 번개처럼 나아갔고, 경비대는 에스트라벤이 그곳에 닿기 전에 총을 쏘았다. 경비대는 음파 마비총이 아닌 약탈용 총을, 금속 조각을 발사하는 고대의 총을 쏘았다. 경비대는 에스트라벤을 사살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뒤틀려 벗겨진 스키는 눈에 꽂혀 있었으며, 그는 큰 대자로 뻗어있었고, 가슴은 총알에 의해 반쯤 날아간 상태였다. 나는 그의머리를 팔에 안고 말했지만 그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그에 대한 내 사랑에 대답하듯, 침묵의 잔해와 마음의 동요를 헤치고,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한 번, 또렸하게 외쳤을 뿐이다. <아렉!> 그뿐이었다. 나는 죽은 그를 끌어안고 눈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경비원들은 내가 그렇게 하도록두었다. 이윽고 그들은 나를 일으켜 어딘가로 데려갔다. 그는다른 곳으로 데려갔다. 나는 감옥으로 끌려갔고,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P384

고브린 빙원을 건너는 동안 에스트라벤이 쓴 일기 가운데에는자신의 동행이 왜 우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길까라고 쓴 대목이있다. 만일 그때 내게 물었다면, 나는 수치심이 아니라 두려워서울 수가 없었다 말했을 것이다. 이제 나는 사시노스 계곡을지나, 그가 죽은 저녁을 지나, 두려움 저편에 누운 추운 지방으로 가고 있다. 거기서라면 마음껏 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울어도 소용없는 일이다.
나는 다시 사시노스로 끌려와 감옥에 갇혔다. 국법을 어긴 자와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아마도 나를 달리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심지어 에르헨랑으로부터 명령이 오기 전부터 그들은 나를 정중히 대해주었다.  - P385

나는 자살이란 말을 하면서 이들 세계에서 자살이 얼마나 비열한 짓으로 간주되는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들에게 자살은 우리의 경우처럼 선택이 아니었다. 이들에게 자살은 선택의 포기이자 배신 그자체였다. 카르히데인이 우리 경전을 읽는다면 유다의 죄가 그리스도를 배반한 데에 있는 게 아니라 절망을 봉인하고 용서와 변화와 생명의 기회를 거부한 행위, 즉 자살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에스트라벤을 반역자로생각하지 않습니까?"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에스트라벤에게 가해진 비난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아이 씨."
하지만 나는 그 말에서 그 어떤 위안도 얻을 수 없었으며 변함없는 고통 속에서 이렇게 외쳤을 뿐이다. "그렇다면 왜 그자들 - P387

은 에스트라벤을 쓴 겁니까? 왜 에스트라벤을 죽인 겁니까?" 이질문에 의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나는 공식적인 신문은 받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풀레펜 농장에서탈출해 카르히데까지 왔는지, 그리고 내가 자기들의 무선 송신기로 보낸 암호 메시지의 목적지와 의도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나는 사실대로 말했다. 그 정보는 에르헨랑에, 왕에게 곧장 전달되었다. 우주선 문제는 비밀로 붙여진 게 분명했지만, 내가 오르고레인의 감옥에서 탈출해 겨울에 고브린 빙원을 넘어와 지금은 사시노스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은 자유롭게 보도되고 논의되었다. 하지만 이 일에 대한 에스트라벤의 역할은 라디오에서 일체 언급되지 않았고, 그의 죽음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았다. 카르히데에서 비밀이란 지극히 신중하고 합의되고 양해된 침묵의 영역으로, 질문의 생략일 뿐 답의 생략은 아니다. - P388

에르헨랑에 들어서는 순간 힘이 나고 정신이 맑아지는 걸 느꼈다. 그 전까지 나는 온몸이 낱낱이 흩어져 있는 느낌이었다.
편한 여행으로도 지친 몸이었지만, 이제는 생기가 도는 느낌이었다. 대부분은 습관의 힘이었으리라. 마침내 내가 아는 곳으로, 내가 1년 넘게 살고 일하던 낯익은 도시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거리와 탑, 궁전의 어두침침한 안뜰과 길과 외관을 알았다.
이곳에서 내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러므로, 내 친구가 죽고 처음으로, 친구가 죽으면서까지 이루려한 일을 마무리해야한다는 생각이 또렷이 들었다. 나는 아치에 쐐기돌을 놓아야만했다. - P390

"배신이 아닙니다. 에스트라벤은 어느 한 국가가 먼저 에큐멘과 동맹을 맺으면 다른 곳이 자연히 그 뒤를 따르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시스, 페룬테르, 다도해 역시 뒤를 따를 겁니다. 그리고 통일이 이루어질 겁니다. 에스트라벤은 자기 나라를 무척 사랑했습니다, 폐하. 하지만 카르히데나 폐하를 위해 봉사한 게 아닙니다. 에스트라벤은 제가 섬기는 주인을 섬겼습니다."
"에큐멘?" 아르가벤이 놀라 말했다.
"아닙니다, 인류입니다."
말을 하면서도 나는 내가 진실을 말하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고, 진실인 면이 있었다. 에스트라벤의 행동은 그의 개인적인 성실성과 한 인간에 대한 책임과 우정에서 우러나왔다고 말하는 것 또한 진실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완전한 진실이라고는 할 수 없을 터다. - P395

사시노스에서 동행한 의사가 들어왔다. 그의 조용한 목소리와 젊고 진지한 얼굴, 남자도 여자도 아닌 인간의 얼굴을 보자안심이 되었다. 낯익고 올바른 얼굴을 보고 나서야………. 그는나를 침대에 누인 뒤 약한 진정제를 주고 말했다. "당신의 동료특사들을 보았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별에서 사람들이 오다니. 그것도 제 살아 생전에 말입니다!"
그 말에서 나는 다시 기쁨과 용기를 보았다. 이것이야말로 카르히데인의 정신에서 그리고 인간의 정신에서 가장 훌륭한 요소였다. 비록 그것을 그와 함께 나눌 수는 없었지만 그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혐오받을 것이었다. 나는 진심은 아니었지만 절대적인 진실을 말했다. "새로운 세계로 새로운 인류를 만나러 온다는 건 그 사람들에게도 역시 놀라운 일입니다." - P400

나는 카르가프를 가로질렀다. 이번에는 아래쪽 길로, 남해 해안 위쪽으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로 갔다. 나는 3년 전 호르덴섬에 착륙한 나를 데려다주었던 어부가 있는 맨 처음 묵었던 마을을 방문했다. 그 화로 주민들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전혀 놀라움 없이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나는 엔스 강 어귀에 있는 커다란 항구 도시인 사세르에서 일주일을 보낸 뒤, 초여름에 케름 랜드를 향해 도보 여행을 떠났다.
나는 동남쪽으로 걸어, 울퉁불퉁한 바위산과 녹색 언덕들이들어차 있고 큰 강과 외딴 가옥들이 있는 험한 시골을 지나 얼음발 호수로 갔다. 호숫가에서 남쪽 언덕을 바라보니 낯익은 빛이보였다. 깜박이는 빛, 하늘에 넘쳐흐르는 하얀 빛, 언덕 위에 길게 누워 있는 빙하의 광채. 얼음이 거기 있었다. - P401

나는 위안을 찾을 요량으로 이곳에 왔지만 헛걸음이었다. 위안은 없었다. 친구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을 본다고 해서 뭐가달라지겠는가? 어떻게 공허함이 메워지고 회한이 달래지겠는가? 이제 와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에스트레에 온 것은 또 다른 목적이 있어서였다. 그리고 그것은이룰 수 있었다.
"아드님이 숨질 때까지 저는 몇 달 동안 함께 있었습니다. 아드님이 숨을 거둘 때도 저는 함께 있었습니다. 아드님이 적은 일기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같이 있던 당시에 대해 뭐든 궁금하신 게 있으시면......."
- P404

노인의 얼굴에는 이렇다 할 표정이 나타나지 않았다. 평온함이 조금도 흩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아까의 젊은이가 어둠을 뚫고 창문과 화롯불 사이의 쓸쓸하고 거북한 빛 속으로 튀어나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에르헨랑에서는 아직도 사람들이 그분을 반역자 에스트라벤이라 부릅니다."
노영주는 그를, 이윽고 나를 바라보았다.
노영주가 말했다. "이 아이는 소르베 하르스일세. 에스트레의 상속자이자 내 아들의 아들이지."
이곳에선 근친상간이 금기가 아니며, 나는 그것을 잘 알았다.
다만 테라인인 내게는 그것이 낯설 뿐이었으며, 어둡고 험상궂고 소박한 시골 젊은이에게서 친구의 영혼을 힐긋 보았을 때 그묘한 느낌 때문에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침내 내가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왕은 그 명령을 철회할 겁니다. 세렘" - P404

은 반역자가 아닙니다. 바보들이 에스트라벤을 뭐라고 부르든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노영주는 천천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아."
"고브린 빙원을 함께 건너오셨죠? 그분하고 같이요." 소르베가 물었다.
"그랬지요."
"그 이야기를 듣고 싶군, 아이 특사." 에스반스 노인이 아주온화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소년, 세렘의 아들이 더듬거리며말했다. "그분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말해주시겠어요? 그리고 별들 사이에 있는 다른 세계와...... 다른 종류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삶에 대해 말씀해주시겠어요?" - P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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