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곳 오르고레인에서는 사람들이 체면이나 자존심에 그리 얽매여 있지 않았으며, 질문을 하는 행위가 질문을 한 사람이나 질문을 받은 이에게 모욕이 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곧 몇몇 질문이 나에게 덫을 놓기 위한 것임을, 내가 사기꾼이라는걸 보이기 위한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런 질문들 때문에 잠시 당황했다. 물론 카르히데에서도 나를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지만, 일부러 믿지 않으려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에르헨랑에서 행진이 있던 날, 티베는 내 주장이 속임수라는 의견에 자신도 동조한다는 쇼를 공들여 했지만, 이제 나는 그것이 에스트라벤의 실각을 위해 꾸며낸 계략의 일부라는 것을안다. 사실은 티베도 내 주장을 믿었을 것이다. 어쨌든 티베는내가 게센에 올 때 타고 온 조그만 착륙선을 보았으며,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 우주선과 앤서블에 대해 공학자들이 작성한 보고서에 자유로이 접근할 수 있었다.  - P194

"좀 복잡하군요. 그런데 수도국에서 하는 일은 뭡니까? 예를들면요?" 나는 재빨리 사르프에서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헤인인이나 만사 걱정 없는 치페와르 사람이라면 슈스기스가 입밖에 내지 않은 말에 담긴 의미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달리 지구에서 태어났다. 그러고 보면 죄 많은 조상을 가지고 있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닌 듯하다. 방화범 할아버지는 후손에게 연기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코를 남겨주는 법.
이곳 게센에서 고대의 테라 정부와 유사한 정부 형태, 즉 군주제와 만개한 관료제를 발견한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롭고 환상적인 일이었다. 이 새로운 발달 형태 역시 환상적이기는 했지만 흥미는 덜했다. 덜 원시적인 사회일수록 더 못된 특징이 있는 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 P205

나흘 전 오르고레인의 넓은 황금빛 들판을 가로질러 미시노리 깊숙이 자리 잡은 밀실들을 향해 성공적으로 전진하기 시작한 이래, 나는 무언가를 놓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일까? 나는 격리된 느낌이었다. 요 며칠 동안 추위를 느낀 적이 없었다. 이곳 사람들은 방을 아주 따뜻하게 유지했다. 먹는 즐거움은 없었다. 오르고레인 음식은 무미건조했다. 하지만 해될 건없었다. 하지만 왜 내가 만난 사람들은, 내게 호의를 가진 이나그렇지 않은 이나 하나같이 모두 무미건조한 걸까? 그들 가운데에는 옵슬레와 슬로세, 잘생겼지만 혐오스러운 가움처럼 생기넘치는 인물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들에게조차 어떤 특징,
인간미가 부족했다. 그리고 그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종잡을수가 없었다.
마치 그림자 없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약간 과장된 사색은 내 임무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만약이런 능력이 없었다면 나는 모빌 자격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 P209

그의 둔함은 무지 때문이다. 그의 거만함은 무지 때문이다. 그는 우리에 대해 무지하고 우리는 그에 대해 무지하다. 그는 한량없는 이방인이고, 나는 그가 우리에게 가져온 희망의 빛에 가로질러 내 그림자를 드리우려 한 바보이다. 나는 몹쓸 허영심을 버려야 한다. 그가 갈 길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그가하는 바임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가 옳다. 추장된 카르케네의 반역자는 그의 목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 P214

모든 ‘개인‘은 직업이 있어야 한다는 오르고레인 법에 따라, 나는 제8시부터 정오까지 플라스틱 공장에서 일한다. 쉬운 일이다. 불에 달구어 말랑말랑해진 작은 플라스틱 조각들을 합쳐 작고 투명한 상자를 만드는 기계를 조작하는 일이다. 그 상자들을 어디에 쓰는지는 알지 못한다. 오후에는 무료함을 없애기 위해 로세레르에서 배운 옛 수련을 복습하고 있다. 도스 강화 기술, 비황홀경에 들어가는 기술을 잊지 않아서 여간 기쁘지 않다. 하지만 비황홀경에서 깨어나는 것은 아직 잘 되지 않으며, 부동의 자세를 취하는 기술과 단식은 아예 배우지 않은 것과 다를 바가없어 아이처럼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했다. 지금 단식하고 고작 하루가 지났는데, 배가 일주일, 아니 한 달은 굵은 것처럼 비명을 지른다! - P214

무신론자가 된다는 것은 곧 신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신의 존재도 비존재도 결국 증명에 있어서는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한다라 교인들은 ‘증명‘이란 단어를 그리 자주 사용하지 않는다. 한다라 교인은 신을 증명되어야 할 사실이나 믿음의 문제라는 식으로 보지 않는다. 그렇기에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다.
어떤 질문에는 답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우는 것. 그리고 ‘그러한 질문에 답을 하지 않는 것‘을 배우는 것. 이는 긴장과 어둠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기술이다. - P217

나는 그에게 좀 더 일찍 알려주었어야만 했다. 지금은 너무 늦었다. 공포가 그의 임무와 나의 희망을 다시 한 번 뒤흔들고 있다. 외계인이나 게센인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비현실적인 것에대한 공포다. 오르고레인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것에 공포를 느낄 만큼 섬세하고 민감한 이들이 아니다. 그런 게 존재하는지조차 모른다. 그들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을 눈앞에 두고 뭐라고 여기는가? 카르히데에서 온 간첩, 성도착자, 첩자, 자기들과 같은 시시하기 짝이 없는 정치집단만 떠올린다.
만약 그가 지금 당장 우주선을 불러오지 않는다면 영영 기회를 놓치게 될 터다. 아니, 이미 너무 늦는지도 모른다. 그건 내잘못이다. 나라는 사람은 뭐 하나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이다. - P228

메시는 시간의 중심이다. 메시가 만물의 모습을 뚜렷이 보기 시작한 것은 그분이 이 땅에 살기 시작한지 30년이 지나고서부터였다. 그 뒤 메시는 이 땅에서 30년을 더 살았고, 통찰이 그분 삶의 중심이 되었다. 통찰 이전의 모든 세대는 통찰 이후의 모든세대만큼이나 길어졌으며, 통찰은 시간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의 중심에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지나간 모든시간이 현재이고, 다가올 모든 일이 현재이다. 과거도 미래도아니다. 현재이다. 모든 것이 현재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P229

그곳에는 친절함이 있었다. 사람들은 나와 한 노인 그리고 심하게 기침을 하는 젊은이가 추위에 대한 저항력이 약하다고 여기고 밤마다 25명이 만든 덩어리의 중심, 즉 가장 따뜻한 곳에 넣어주었다. 따뜻한 곳을 차지하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밤이 되면우리는 어느새 그곳에 있었다. 인간이 잃지 않는 이런 친절함은굉장한 것이다. 그것이 굉장한 이유는 어둡고 추운 곳에서 발가벗겨진 채 있는 우리에게 남은 것이 그것뿐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부유하고 권세를 가진다 해도 우리에게 결국 남은 것은 그 작은 거스름뿐이었다. 우리가 줄 수 있는 건 달리 아무것도 없었다.
비록 밤마다 한데 뒤엉켜 지냈지만, 트럭 안의 우리는 서로 먼 존재였다. 어떤 이는 마약에 중독되어 있었고, 어떤 이는 선천적으로 정신박약이거나 사회부적응자인 듯했다. 모두가 학대받고 겁먹은 상태였다. 하지만 25명 가운데 단 한 명도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거나 심지어 욕을 하는 이조차 없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친절함과 인내가 존재했지만 그것은 침묵, 언제나 침묵 속에서였다. - P239

썰매에 짐을 다 싣고 나자, 에스트라벤은 힘을 비축하기 위해그날은 더는 아무 일도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러고는 텐트 바닥에 엎드리더니 작은 공책에 빠른 손놀림으로 앞 장에 있는 것과 같은 내용을 카르히데어로 세로로 적어갔다. 지난 달에는 여행을 하느라 일기를 쓰지 못했고, 그는 그걸 마음에 걸려했다. 에스트라벤은 꽤 꼬박꼬박 일기를 써왔었다. 내 생각에, 일기 쓰기는 에스트레 화로에 있는 자기 가족에 대한 의무이자 가족과의 연결고리인 듯했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을 나중에야알았고, 그때는 에스트라벤이 무엇을 쓰는지 알지 못했다. 나는앉아서 스키에 왁스를 바르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무심코 춤곡을 휘파람으로 불다가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에 중단했다. 텐트는 하나뿐이었으며, 서로를 화나게 하지 않고 한 텐트에서 지내려면 어느 정도의 자제심과 예의가 꼭 필요했다. 에스트라벤은 휘파람 부는 나를 바라보았지만(이해한다), 짜증내는 기색은 없었다.  - P287

그 덩어리 옆면에서는 짙고 검은 연기가 하늘로 1마일은 되어 보일 정도로 길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너머로 다른 것들도 보였다. 빙하 위로 뾰족한 봉우리와 검은 분석구들이 보였다.
얼음 위로 벌어진 이글거리는 아가리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내 곁에서 견인줄을 하고 서 있던 에스트라벤은 그 장엄하고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쓸쓸한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살아서 이렇게 멋진 광경을 보게 되다니 정말 기쁩니다." 에스트라벤이 말했다.
나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여행에서 가야 할 목적지가 있다는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결국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여행 그 자체인 것이다.
북쪽을 향한 비탈에는 비가 오지 않았었다. 협로부터 빙퇴석계곡까지 눈밭이 펼쳐져 있었다. 우리는 바퀴를 빼고 썰매 활주부의 덮개를 벗긴 뒤 스키를 신고 출발했다. 아래로, 북쪽을 향해, 흑백의 거대한 글자로 대륙을 가로질러 ‘죽음‘, ‘죽음‘이라 쓰인 저 광막한 불과 얼음을 향해. 썰매는 깃털처럼 가벼웠고, 우리는 기쁨에 겨워 소리 내어 웃었다. - P303

사네른 엡스, 계량기는 오늘 16마일을 끌었다고 가리킨다. 하지만 우리가 어젯밤에 야영했던 곳에서 직선 거리로 따지면 8 마일 정도에 불과하다. 우리는 아직도 두 화산 사이의 빙하 위에있다. 드룸네르 산이 분출을 했다. 바람이 소용돌이치는 화산재와 연기, 하얀 증기를 불어버리자 붉은 용암이 검은 비탈을 벌레처럼 기어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끊임없이 계속해서 들려오는쉿쉿 소리는 너무 크고 길어서 소리를 들으려고 걸음을 멈추면오히려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 소리는 온몸의 빈틈을 구석구석 채운다. 빙하는 발밑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우지끈 쿵 하는 소리를 낸다. 눈보라가 군데군데 만들어 놓았던크레바스 위의 눈다리는 빙하와 그 아래 대지의 진동 때문에 흔들리다가 모두 무너졌다. 우리는 썰매를 삼켜버릴 듯한 크레바 - P310

스가 끝나는 곳을 찾아 전진과 후진을 반복해 가고, 또다시 다음크레바스의 끝을 찾아 헤매며 북쪽으로 가려 애썼지만 어쩔 수없이 늘 동쪽 혹은 서쪽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머리 위 드레메골레 산은 드룸네르 산의 힘든 노역이 가엾기라도 한지 으르렁거리며 시커먼 연기를 토해낸다.
오늘 아침 아이는 얼굴에 심한 동상이 걸렸고, 내가 그를 바라보았을 때는 코와 귀. 턱이 완전히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동상에 걸린 부위를 주물러 회복을 시켰고, 다행히 손상된 곳은 없었지만 앞으로는 더욱 조심해야겠다. 빙하 쪽으로 불어 내려오는바람은 솔직히 여간 매섭지가 않다. 우리는 그 찬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썰매를 끌고 가야만 한다.
두 마리의 괴물이 포효하는 것 같은 이 빙하의 주름진 얼음 팔에서 어서 빠져나갔으면 좋겠다. 산이란 보는 것이지 소리를 듣는게 아닌 법. - P311

빛은 어둠의 왼손
그리고 어둠은 빛의 오른손
둘은 하나, 삶과 죽음은 함께 있다.
케메르를 맹세한 연인처럼,
마주 잡은 두 손처럼,
목적과 과정처럼. - P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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