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용한 답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예언가들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어. 충분한 답이 아니야, 아이 특사 그대의 가방과거기에 있는 그대의 기계도 그렇고. 그대가 타고 왔다는 우주선도 마찬가지야. 그 모든 것은 협잡꾼의 음모에 불과하지. 그대는 내가 그대의 이야기와 메시지들을 믿길 원하지. 하지만 왜 내가 그것들을 믿어야 하지? 왜 내가 그대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하지? 설령 저 밖에 괴물들로 가득 찬 세계가 8만 개가 있은들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우리는 그자들에게서 아무것도 원하지않아, 우리는 우리의 길을 선택했고, 오랫동안 그 길을 따라왔어. 카르히데는 새로운 시대, 위대한 신세계의 문턱에 와 있어.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갈 거야." 아르가벤은 논쟁의 실마리를 잃은 듯 허둥거렸다. 아마 처음부터 관심도 없는 논쟁이었으리라.
에스트라벤이 더는 왕의 귀가 아니라면 누군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만일 에큐멘 사람들이 우리에게 원하는 게 있다면 그대 혼자만 보내지 않았을 거야. 이건 말도 안돼. 사기지. 외계인들이 천 명은 있을걸."
- P73

나는 사형의 위협에 쫓기는 에스트라벤이 어떻게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궁금했다. 자동차를 쓸 순 없었다. 모든 자동차는 왕궁 재산이기 때문이다. 배나 육상보트가 그를 태워줄까? 아니면 가능한 많은 것을 꾸려 짊어지고 걸어가고 있을까?
카르히데 사람들은 대개 걸어다녔다. 짐을 실을 짐승도 없고,
비행기도 없었으며, 날씨 때문에 1년 중 대부분은 동력을 이용한 이동수단들을 쓸 수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도 서두르지 않았다. 나는 서쪽의 만을 향해 추방의 긴 여정을 따라 한 걸음씩 무겁게 발걸음을 옮기는 자부심 가득한 사람을 상상했다. 이 모든것이 붉은 모퉁이 저택의 문을 지나는 동안 내 머릿속에 떠올랐고, 에스트라벤과 왕의 행동과 동기에 대한 온갖 헛갈리는 추측들과 함께 뒤죽박죽으로 섞였다. 나는 이들과 더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나는 실패했다. 그럼 다음은?
- P76

나는 에스트라벤이 내게 경고한 것을 마침내 이해할 수 있었다. 믿을 수 없는 경고였지만, 무시할 순 없었다. 에스트라벤은 내가 이 도시와 궁을 떠나야 한다고 간접적으로 내게 말한 것이다. 무슨 이유에서인가 나는 티베 경의 누런이를 떠올렸다……. 왕은 내게 자유를 주었다. 그것을 최대한 활용해야 할 터였다. 그리고 나는 행동이 도움이 되지 않을 때는 정보를 모으고, 정보가 도움이 되지 않을 때는 잠을 자두라는 에큐멘 학교의 가르침을 따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졸리지않았다. 성채를 향해 동쪽으로 가리라. 그리고 예언자로부터 정보를 모으리라. - P77

고스는 내 안내인으로 행동하게 된 것을 기뻐했으며, 내가 알고 싶은 것을 원하는 대로 예언자들에게 물으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고스가 말했다. "질문이 정제되고 명료할수록 답 역시 더정확합니다. 모호한 질문은 모호한 답을 낳지요. 그리고 당연한얘기지만, 어떤 질문에는 답이 오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그런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내가물었다. 이러한 제한은 복잡하긴 하지만 낯선 것은 아니었고,
딱히 그의 답을 기대하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베 짜는 이들은 그 질문을 거부할 겁니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은 예언자 집단을 파멸로 이끄니까요."
"파멸로 이끈다고요?"
"쇼르스 영주 이야기를 아십니까? 아센 성의 예언자들에게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한 자이지요. 수천 년 전일입니다. 예언자들은 6일 밤낮을 어둠 속에서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독신자가 미쳐버리고, 광대는 죽었습니다. - P99

나는 내가 답을 모르는 질문을 선택했다. 내 예상과 달리 그어떤 결과에도 끼워 맞출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지닌 전문 예언가들의 예언이 아니라면, 이들의 답이 옳은지 그른지는 오직 시간만이 입증해줄 터였다. 간단한 질문은 아니었다. 오세르호르드 아홉 예언자들의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는 어렵고 위험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되고 나서는 비가 언제 그칠지 따위의 사소한 질문을 하겠다는 생각은 관둔 터였다. 질문자가 치러야 할 비용도비쌌다. 내 루비 두 개가 성채의 금고에 들어갔다. 하지만 답을하는 이가 치르는 대가는 더 비쌌다. 파세를 알게 되면 될수록,
그가 전문적인 사기꾼이라 말하기도 어려워졌지만 그렇다고 자기기만에 빠져 자신이 사기꾼인 것도 모르는 사기꾼이라고 생각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그의 지성은 내 루비처럼 단단하고 투명했으며 잘 연마되어 있었다. 감히 파세에게 덫을 놓을 수는 없었다. 나는 내가 가장 알고 싶은 것을 물었다. - P101

우리가 홀에 들어갔을 때는 오후였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곧잿빛은 처마 밑 슬릿창으로 사라졌다. 이제 희끄무레한 빛이 비스듬히 누운 환상적인 긴 돛과 기다란 삼각형, 직사각형을 이루며 벽으로부터 바닥을 지나 아홉 명의 얼굴을 비쳤다. 바깥, 숲위로 뜬 달이 보내는 희미한 빛 조각이었다. 화롯불은 꺼진 지 오래였고, 둥그렇게 모인 예언자들을 가로질러 얼굴과 손, 꼼짝하지 않는 등을 희미하게 비추는 가느다란 달빛 말고는 빛이라곤 전혀 없었다. 희미한 달빛 아래 춤추는 먼지 속에서, 잠시 나는 파세의 옆모습이 창백한 돌처럼 굳어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 P105

달빛이 조금씩 내려와 머리를 무릎 속에 묻고 바닥에 손을 대고있는 케메르 중인 자의 검은 머리를 비추었다. 그는 원 맞은편의광대가 어둠 속에서 돌을 두드리는 규칙적인 리듬에 맞춰 몸을떨고 있었다. 그들은 거미줄의 현수점처럼 모두가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원하든 원하지 않는 나 역시 그들과 연결되어 있다는걸 느꼈고, 파세를 통해 무언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걸 알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중심인 베 짜는 이 파세는 이를 정렬하고조정하려 애쓰고 있었다. 희미한 빛이 파편이 되어 동쪽 벽을 타고 올라갔다. 힘과 긴장과 침묵의 거미줄이 점점 커져갔다. - P105

"파세,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가는군요."
"음, 저희 대부분은 물어서는 안 될 질문이 무엇인지 배우기위해 성채에 옵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답을 하는 자들이잖습니까!"
"저희가 왜 예언을 하는지 모르시겠습니까, 겐리?"
"네."
"잘못된 질문에 대한 답을 아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비를 맞으며 오세르호르드의 어두운 숲 속을 걷는 동안, 나는 오래도록 생각에 잠겼다. 흰 두건에 감싸인 파세의 얼굴은 피곤했지만 평온했고, 얼굴빛은 창백했다. 그럼에도 파세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여전히 약간 경외감이 들었다.  - P112

파세가 맑고 상냥하고 솔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을 때, 그의 눈에는 마치 1만 3천 년의 전통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아주 오래되고 아주 잘 정립된 사고와 생활 방식이 담긴 시선으로, 아주 잘 확립되어 있고 총체적이며 통일성이 있기에 영원한 현재로부터 똑바로 당신을 바라보는 야생 동물, 거대하고 낯선 생물의 무아와 권위와 완벽함을 당신에게 전달해주는 시선으로 숲속에서 파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알려지지 않은것, 예견되지 않은 것, 증명되지 않은 것, 삶이란 바로 그런 것위에 서 있습니다. 무지는 사고의 기반입니다. 입증되지 않은 것은 행동의 기반입니다. 만약 신이 없다고 증명된다면, 신도 없고 종교도 없을 것입니다.  - P113

한다라도 없고, 요메시도 없고, 화토신들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또한 신이 있다고 증명되면 신이 있어도 종교는 없게 됩니다∙∙∙∙∙∙ 말해주십시오, 겐리.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무엇이 확실하며 무엇이 예견 가능하고 무엇을 피할 수 없습니까? 당신이 당신의 미래에 대해, 그리고 제 미래에 대해 알고 있는 가장 확실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는 죽는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대답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겐리,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인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영원히 우리를 괴롭히는 불확실성,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무지‘입니다." - P113

요리사는 그것을 알았다. 나는 그를 곧바로 돌려보냈지만, 그는 떠나면서 눈에 보이는 모든 음식을 봉지에 담아내가 사흘 동안 도망치며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주었다. 그 친절이 나를 구했고, 또한 내게 용기를 주었다. 길에서 그 과일과 빵을 먹을 때마다 생각했다. ‘나를 반역자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한 명 있어.
그 사람이 이걸 준 거야.‘
반역자로 불리는 게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지 나는 알게 되었다. 그게 어렵다니 신기한 일이다. 남을 반역자라 부르는 건 쉬운일이니 말이다. 대상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적응시키고 확신시키는 호칭. 나는 이미 반쯤 나를 반역자로 확신한 상태였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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