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집안일 외에 내가 많이 안다고 할 만한 유일한 일이고 그래서 내가 가르칠 능력이 있다고 느끼는 유일한 일이기도하다. 공개적인 가르침을 요청받을 때 나는 특별한 전문성이나 지혜가 없더라도 감정을 담아 정직하게 생각하려고 하면 도움이 될 주제만 이야기하려고 한다. 아니면 침묵하다가 부당한 편에 서는셈이 될까 봐 공개적으로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문제에만 나선다. 이 책에는 그런 글도 몇 편 있는데, 나와 달리 예술과 정치, 고급 예술과 저급 예술, 여성과 여성주의자 등을 딱 잘라 구별할 수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글들이 거슬릴 터이다. 나의 목표는 언제나 누구의 감정도 해치지 않으면서 최대한의 전복을 이끌어 내는것이기에, 독자들이 원하는 글을 찾고, 원치 않는 글을 피할 수 있는 체계를 고안해 봤다. 목차를 보면 각 글의 제목 옆에 작은 기호가 보일 것이다. 무엇을 기대하면 좋을지 알려 주는 작은 칼과 포크와 침대와 와인잔이 들어간 미슐랭 가이드나 AAA 안내서처럼말이다. 르 귄 안내서에는 각 글의 주된 성격이나 방향을 알려 주는 기호가 네 개 있다. - P10

오+(여성) : 페미니즘
○ (세계) : 사회적 책임
□ (책): 문학, 글쓰기
→ (방향): 여행


이 기호들이 각 글의 경향을 알려 줌으로써, 특정 경향에동조하지 않는 독자들이 피해 가는 데 쓸모가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무엇이든 주는 대로 받으려는 독자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이다.
필요한 경우에는 짧게 글을 쓴 때와 장소에 대한 머리말을넣었다. 보충 설명은 달기도 하고 달지 않기도 했는데, 글 뒷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각 글 앞에 들어간 숫자는 글을 쓴 연도이다.(그 연도가 발표 연도와 다를 때도 있는데, 덧붙이는 말에서 설명할 것이다.) 수록된 글이 처음 출간된 글과 다르다면 대개 내가 편집판이 아니라 내원고를 따르기 때문이며, 가끔은 이 책을 준비하면서 실수를 바로잡거나 결함을 메웠기 때문이다. - P11

폐경기 보다 매력 떨어지는 화제는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옛 터부의 조각과 잔재에 달라붙어 있는 몇 안 되는 주제라는 점에서 흥미롭기도 하다. 폐경에 대해 진지하게 말했다간 흔히 불편한 침묵을 만나게 된다. 폐경을 조롱하는 발언은 대개 한시름 놓은 웃음을 만나게 된다. 침묵과 웃음 둘 다 확실한 터부를 암시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오래된 표현인 "갱년기"를 의학 용어인 "폐경기"의 완곡한 표현이라고 생각할 테지만, 지금 그 변화를 겪고 있는 나는 반대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갱년"이야말로 너무직설적이고, 너무 사실적인 표현이다. "폐경은 어쩌면 이전에 계속되던 일이 멈출 뿐이고, 그건 사소한 일이라고 안심시키는 말일 수도 있다. - P15

나는 왜 이 기묘한 사람들을 창조했을까? 반쯤 가서 "왕이 임신했다"는 문장을 쓸 수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그 문장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말이다. 게센을 인류의 모델로 제시하려던 건 확실히 아니었다. 나는 인체의 유전 개조에 찬성하지 않는다. 현재의 이해 수준으로는 아니다. 나는 게센인의 성적 구조를추천하는 게 아니라, 이용하고 있었을 뿐이다. 스스로 발견하도록하는 학습법이며, 사고 실험이었다. 물리학자들은 사고 실험을 자주 한다. 아인슈타인은 움직이는 엘리베이터에 광선을 쏘고, 슈뢰팅거는 상자 안에 고양이를 넣는다. 실제로는 엘리베이터도, 고양이도, 상자도 없다. 머릿속에서 실험을 수행하고 질문을 던질 뿐이다. 아인슈타인의 엘리베이터, 슈뢰딩거의 고양이, 나의 게센인들은 단순히 생각의 수단이다. 이것들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다. 나는 SF의 핵심 기능 하나가 바로 이런 종류의 질문 던지기라고 생각한다. 습관적인 사고방식을 뒤집고, 우리의 언어에 아직 가리킬 말이 없는 것을 은유하고, 상상으로 실험하기. - P26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이 책에 담긴 세상이 유토피아일까? 내가 보기에는 분명히 아닌 것 같다. 근본적인 인간해부학의 변화라는 상상에 바탕하고 있기에, 현대 사회에 대한 실제 대안이 될 수가 없다. 이 책은 대안적인 관점에 마음을 열고, 상상력을 확장하려 시도할 뿐이지 새로운 관점에서 어떤 뚜렷한 제안을 내놓지는 않는다. 이 책이 말하는 바는 이렇다. 우리가 사회적으로 양성적이라면, 남자와 여자가 사회 역할에 있어서 정말로완벽하게 동등하다면, 법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동등하고 자유와 책임과 자존감 모두 동등하다면, 지금과 아주 다른 사회일 수도 있다. 그때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있을지야 누가 알랴, 문제가 있기야하겠지. 하지만 그런 사회의 핵심 문제가 지금 우리와 같지는 않을것이다. 착취 문제, 즉 여성에 대한 착취, 약자에 대한 착취, 지구에대한 착취 문제는 아닐 것이다. - P38

이건 윤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도덕이죠.
우리가 우리에게 맞는 현실적이고 여성적인 도덕성을 얻을수 있다면, 우리가 스스로를 믿고, 여자들이 원치 않는 아이나 지나친 대가족이 잘못됐다고 생각하게 내버려 둘 수 있다면……. 윤리적으로 잘못도 아니고, 규범에 어긋나지도 않지만 도덕적으로잘못됐다고, 완전히 잘못됐다고, 탈리도마이드 출산처럼 잘못됐고, 목이 부러질 게 뻔한 걸음을 잘못 디딜 때처럼 잘못됐다고 생각해도 되는 날이 온다면..… 우리가 죽은 윤리의 멍에에서 여성적이고 인간적인 도덕성을 끌어낼 수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도 생존으로 가는 길 어딘가에 오를 수 있을지 모릅니다. - P44

"처음이란 필연적으로 다른 것 다음에 오지 않고 그다음에다른 뭔가가 존재하거나 일어나는 것이다. 끝이란 필연적으로 또는 대개 다른 뭔가 이후에 존재하며, 그 후에는 다른 것은 필연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중간은 본질상 다른것 다음에 존재하고, 그다음에도 다른 것이 존재하는 상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서사란 사건들을 연결하며, 방향이 있는 공간 순서와 비슷하게 방향이 있는 시간 순서로 "사건을배열한다. 인과 관계가 암시되기는 하지만 정확히 명시되지는 않는다. "결과"라는 말은 원인의 결과를 의미할 수도 있고 그저 뒤따른 일을 의미할 수도 있다.) 내가 이해하기로 주된 연결은 시간순이다.(E. M. 포스터의 이야기 배열대로 "그리고... 그다음에...그다음에…) 그러므로 서사란 사건들을 시간에 따라 연결하는 데 쓰이는 언어이다.  - P73

서사는 필멸의 전략이다. 삶의 방식이며 수단이다. 서사는불멸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시간을 정복하거나, (서정시처럼 시간으로부터 도피하려 하지 않는다. 서사는 방향성이 있는 시간, 경험된 시간, 의미 있는 시간을 가정하고 긍정하며 그 속에 참여한다.
인간의 정신에 시간 스펙트럼이 있다면, 물리학자나 신비론자의 탈각(nirvana) 상태는 저 멀리 자외선 영역에 있을 테고 그 반대쪽인 적외선의 영역에 『폭풍의 언덕』이 있으리라. - P76

바꿔 말하면, 서사는 언어의 핵심 기능이다. 기원상 문화의산물이나 기술이 아니라, 사회에서 정상으로 기능하는 정신의 근본에 있는 공정이다. 말하기를 배운다는 것은 이야기하는 방법을배우는 것이다.
나는 언어를 구사하기 전에도 무의식 수준에서는 이야기하기가 계속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만, 말하기 이전의 마음이나비언어적인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말하기는 어렵다. 꿈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꿈을 많이 꾸는 단계인 REM(빠른 안구 운동) 수면 중에는 안구 움직임이 단속적으로 일어난다.  - P76

최근 몇 세기 동안, 영어라는 이 멋진 언어의 사용자들은영어 동사를 전적으로 직설법에만 몰아넣었다. 하지만 이 허울 좋고 오만한 확실성 추정 표면 아래에는 여전히 가정법의 오래되고흐리고 변덕스러운 힘과 선택지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직설법은그 앙상한 손가락으로 일차적인 경험을, ‘상황‘을 가리킨다. 하지만비유, 가능성, 개연성, 우연성, 인접성, 기억, 욕망, 두려움, 희망이라는 끈으로 그 경험들을 잇는 것은 가정법이다. 바로 이것이 서사 연결이다. J. T. 프레이저 말대로, 인간의 자유라고 할 수 있는 도덕적선택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가 과거와 미래, 또는 머나먼 땅에 가능한 세상과 불가능한 세상들을 설명할 수 있게 해 주는 언어 덕분이다. - P85

이런 파편 조각들로 제 폐허를 떠받칠 수도 있었겠지만, 예전에는 방법을 몰랐어요. 그저 미래를 만들려면 과거가 있어야만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제 조상들의 유럽 기반 문화에서 가져올수 있는 것들을 가져왔지요. 저는 대부분이 그렇듯 쓸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쓰는 방법을 익히고, 중국에서 착상을 하나 슬쩍하고인도에서 신을 하나 훔쳐와서 최선을 다해 기워 붙여 세계 하나를만들었어요. 하지만 아직도 수수께끼가 있어요. 제가 태어나고 성장하고 너무나 사랑하는 여기, 나의 세계, 나의 캘리포니아는 아직도 만들어져야 해요.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면 물론 오래된 세계로시작해야죠. 세계를 하나 찾으려면, 잃어버린 세계가 있어야 하는지도 몰라요. 잃어야 하는지도 몰라요. 부활의 춤, 세계를 만드는춤은 언제나 여기 세상 끝에서,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안개 낀해안에서 추게 되어 있었으니까요. - P92

제가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것 같은 제 옛날이야기를 왜 했을까요? 이야기 속에서 저 자신을 공주라고 부른 건 반쯤은 농담이고, 실제로 제 부모님의 영혼은 왕족이나 다름없어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 자신에게, 또 여러분에게 저는 특권층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이기도 해요. 저는 "뉴욕 시 최고의 낙태"
를 받았습니다. 낙태가 범죄였던 암흑시대에, 저희 아버지처럼 현금을 빌릴 방법이 없는 아버지를 둔 젊은 여성은 어땠을까요? 아니, 아버지가 수치심과 분노에 미쳐 버릴 게 뻔해서 말조차 꺼낼 수없던 여성에게는 어땠을까요? 어머니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여성은요? 지저분한 방에 혼자 가서, 직업 범죄자의 손에 몸과 영혼을맡겨야 했던 이들은요? 착취자였든, 이상가였든 간에 당시에 낙태를 하는 의사는 모두 직업 범죄자였으니 말이죠! 여러분은 그 여 - P143

성이 어땠을지 알아요. 여러분도 알고 저도 알죠. 그래서 우리가 이자리에 모인 겁니다. 우리는 그 암흑시대로 돌아가지 않아요. 우리는 이 나라의 누구도, 어떤 여성에게도 그런 힘을 행사하게 두지삶을 겁니다. 정부 밖에나, 안에나 그 암흑을 법으로 다시 불러오려는 막강한 세력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막강한 세력이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는 빛입니다. 아무도 우리를 끌 수 없어요. 여러분 모두가 언제까지나 찬란하게 꺼지지 않고 빛나기를 빕니다.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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