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오공은 어째서 석가여래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했을까?
간단히 말하면, 이 대결은 유위법과 무위법의 대결이라 할 수 있다.
손오공은 철저히 물질과 문명, 곧 유위법의 화신이다. 변신을 하고불멸을 쟁취하고 하늘을 지배하고..... 이것은 자아의 무한증식을의미한다. 이 유위의 회로를 밟는 순간 누구도 멈추지 못한다. 인류역사가 그 산 증거다. 진시황을 비롯하여 모든 제왕들은 제국을정복, 통일한 이후 불로장생을 갈망했다. 모두가 실패했지만 이욕망은 결코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자연을 탐구하고 과학을발전시켜 온 것이다. 그걸 활용해서 무기를 만들고 다시 세계를정복하고, 그 다음엔 또 불멸을 시도하고, 할리우드 영화가주구장창 반복하는 패턴이 이것 아닌가. 세상을 내 손 안에 넣고영원히 쥐락펴락하고 싶은 욕망! - P83

반면 석가여래는 이 세계의 근원적 무상성을 터득한 존재다.
마음에는 자성이 없다. 돌원숭이에게 근본이 없듯이, 그것은불현 듯 생겨난 곧 특별한 인연조건의 산물일 뿐이다. 아울러 이우주의 모든 것은 생성·소멸한다. 불멸은 없다. 불멸하는 건 ‘모든것이 변한다‘는 사실뿐이다. 그래서 무상하다. 이 무상의 방법적표현이 무위다. 하지만 마음이 자연으로부터 분리되는 순간,
그때부터 인간은 무위법을 거부한다. 자아에 대한 집착과 증식, 이것은 결국 모든 타자들을 먹어치우면서만이 가능하다. 먹는 자와먹히는 자. 이것을 멈추게 하려면 유위법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하늘나라의 온갖 고수들이 다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거기에있다. 석가여래는 대단한 능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무위법을 온전히 터득한 이다. 유위법은 결코 무위법을 이길 수 없다. - P83

하지만 이건 서곡에 불과했다. 장안을 출발하여 양주 땅에 도착하자 황제의 칙령에 의해 강제소환을 당할 처지에 놓인다.
하지만 그는 이미 돌아갈 수 없었다. 결국 법을 어기고 국경을 넘는다. 불법佛法을 위해 불법을 감행한 것. 하지만 그것이 도다. 도와 진리에는 국적도, 국경도 없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걸어야 할 보편적인 길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의 장면은 정반대다. 삼장법사는 당태종과 의형제를 맺고, 온갖 혜택을 다 받은 다음 제자 둘에 백마 한 필까지 제공받는다. "고향의 한 줌 흙은 그리워할지언정 타향의 황금 만냥을 탐하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하지만 국경에 이르렀을 즈음,
삼장은 마음이 급해졌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달빛을 보며 나아가다 갑자기 발을 헛디뎌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들소, 곰, 호랑이요괴들의 소행이었다. 덕분에 두 제자는 졸지에 요괴들의 밥이되었다. 81난 가운데 첫번째 고난을 맞이한 것. 결과적으로 실제의 현장법사와 다를 바 없는 처지가 되었다. - P90

여기서 알 수 있는바, 버려야 떠난다는 것, 떠나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는 것. 당태종이 아무리 위대하다 한들 이 길을 대신 갈수는 없다. 군대를 풀어 엄호해 줄 수도 없다. 이것은 제국의 통치력,
그 너머에 있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하여, 이 길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것은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부처는 마음이요 마음은 부처니"
"오는 것도 가는 것도 돌아오는 것도 아니라." "버리기도 취하기도 바라는 것도 어렵도다."(2권 97쪽)이 불가사의한 매트릭스로 들어가려면 삼장법사 스스로 길을 열어 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걱정마시라! 관음보살을 비롯하여 천지만물이 그를 엄호해 줄것이고, 또 손오공과 저팔계, 사오정 등 요괴 출신의 세 제자들이끝까지 그와 함께할 터이니. - P91

마지막으로 삼장법사. 스승이자 리더지만 별 활약이 없다. 일단세상물정에 어둡고 분별력, 판단력 모두 제로다. 요괴들이 속임수를쓰면 100퍼센트 넘어간다. 난관에 봉착하면 일단 징징거리거나운다. 저팔계의 이간질에 쉽게 놀아나서 제자들을 분열시킨다. 참, 이렇게 무능하기도 힘들다. 실제의 현장법사는 팔방미인이라가는 곳마다 찬사를 받았다는데, 작품 속의 이 ‘짝퉁‘은 달라도이렇게 다를 수가 한편 따져 보면 지극히 당연하다는 생각도 든다. 현장법사는 ‘고독한 솔로‘였지만 삼장법사는 ‘밴드‘로 움직인다. 밴드로 움직이려면 힘이 한쪽으로 쏠려서는 곤란하다.  - P107

그렇다면 실제 현장법사의 출중한 능력을 세 제자가 나누어 가졌다고 보아야하지 않을까. 그러니 삼장법사는 ‘저런‘ 수준이 될 수밖에. 엉뚱한 논리 같지만, 능력과 힘에도 질량 불변의 법칙이 있는 셈이다.
더 중요한 사항 하나. 어떤 조직이건 리더는 좀 ‘빈‘ 구석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다른 멤버들이 개성을 펼칠 수 있다. 특히 이 제자들은 요괴 시절에 지은 죄가 많아서 무수한 공덕을-쌓아야 한다. 또 그들이 지닌 기예 - 손오공의 72가지 변신술,
저팔계의 36가지 변신술, 사오정의 항요장降妖杖: 둥글게 두 갈래로 갈라진창 등- 는 일종의 테크닉이지 도가 아니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면 자신의 기량을 부지런히 발휘해야 한다. 아낌없이 쓰고 또 씀으로써 ‘탐진치‘의 번뇌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것. - P108

요괴들이 삼장법사를 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십세를 돌며 수행을 한 몸이라 ‘원‘을 고스란히보존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살‘을 먹으면 불로장생을 얻을 수있단다. 그런 점에서 삼장법사는 ‘텅 빈‘ 듯하지만 한없이 ‘충만한‘
신체다. 즉, 천지만물을 생육시키는 우주적 흐름과 연동되어 있는것. 하여, 그에게는 어떤 결핍도 간극도 없다. 요괴들은 그의 살을
‘먹음‘으로써 이 충만함을 맛보고 싶은 것이다. - P110

"지옥으로 가는 길은 호의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이 나왔을까. 나를 적대시하는 이들은 나를 궁극적으로 분발시킨다. 하지만 나에게 무한한 호의를 베푸는 이들은 나를 하나의 고정된 영역에 묶어두고자 한다. 내 안에 있는 능력을 독점하고 싶어서다. 수행자들이
최후에 마주치는 함정이 여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삼장법사와아이들‘은 이런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 저팔계만이 매번 우왕좌왕하지만 그 역시 정착해서 부귀를 누리기보다는 스승과두 형제들을 따라가기를 선택한다. 그런 점에서 모든 구도는 유목이다! 구도와 유목이 마주칠 때, 그때 비로소 윤리가 탄생한다.
정착민은 결코 상상할 수 없는 고귀하고 유쾌한! 강렬하고 유연한! - P113

삼장법사는 십세토록 원양을 보존해 왔지만 사람의몸을 지니고 있는 한 결코 81난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이 인간의운명이다. 세 명의 제자들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앞에서밝혔듯이, 이들은 ‘탐진치‘의 화신들이다. ‘탐진치‘를 덜어내고무상과 자비를 터득하려면 끊임없이 싸우고 또 겪어야 한다.
그래야만 ‘탐진치‘로 향하는 기질과 습관이 덜어지기 때문이다. 즉, 이들에겐 전투와 환란이 곧 공부이자 수행인 것. 따라서 이싸움은 요괴와의 싸움이자 동시에 자신과의 대결이기도 하다. - P116

그렇다 해도 여전히 의아한 점이 있다. 그렇게 펄펄 날다가도 요괴들은 왜 주인만 오면 맥을 못 추는 것일까. 그 정도의 술법이면 주인하고도 ‘맞짱‘을 뜰 만한데 말이다. 이치는 간단하다. 스스로 터득한 능력이 아니라 주인의 것을 훔쳐왔기 때문이다. 그 경우엔ㅈ스스로 생성하고 창조할 능력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술법은 주로 부정적 파괴적 힘으로만 작용한다. 졸개들을 거느리고
‘나와바리‘를 점령하고 길을 막는 것. 다시 말해, 타인의 능력을 빼앗는 데는 능하지만 뭔가를 창조하고 생성하기엔 역부족이다.
그래서 ‘반자연‘이다. 니체가 말한 노예의 도덕이 이런 것일 터.
아무리 거대하고 강하다 한들 자신이 생성한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아니고, 아무리 작고 미미한 것일지라도 스스로 터득한 것이라면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다. 이것이 자연의 원리다. 그래서 자연에는대/소, 강/약의 척도가 아니라 스스로 생성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만이 적용된다. 주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노예가 될 것인가?
요괴와 구도자의 차이도 여기에 있다. - P125

적이면서 동시에 나의 분신이고, 영웅이면서 원수이며, 천하에몹쓸 요물이면서 동시에 보살의 현현이다. 안에 있는가 하면 밖에있고, 밖에서 오는가 싶으면 어느새 나의 심연을 차지하고 있다.
전후좌우 그 어디에도 있고, 또 그 어디에도 없다. 이것이 요괴들의정체다. 그런 점에서 요괴란 일종의 ‘화두다. 깨달음에 도달하기위해 반드시 던져야 하는 존재와 우주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 화두!
삼장법사와 세 제자들은 이 화두를 붙들고 끊임없이 씨름한다.
그러므로 요괴를 만나지 않고서 도를 깨치는 건 불가능하다!
- P126

선을 행하고, 공양을 올리고, 수행을 하고, 경전을 낭송한다.
이게 다야? 라고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이게 다다.
기독교의 천국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거기가 천국이 되려면 한없이 담백하고 평화로운 삶이 펼쳐져야 한다. 하여 모두가 수행자이자진리의 순례자가 되어야 한다. 그뿐이다! 아마 사람들은 이런식으로 천국이나 극락을 상상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 P127

삼장법사 일행은 능운도를 거쳐 ‘바닥 없는 배를 타고 피안에이른다. 강을 건너는 동안에 삼장법사는 마침내 몸의 태를 벗고해탈의 경지에 오른다. 그러자 삼장법사는 세 제자들에게 감사를표한다. 손오공의 답변, "사부님이나 저희나 모두 감사할 필요없습니다. 서로가 모두 돕고 의지한 것이니까요. 저희들은 사부님덕분에 해탈하고, 불문을 통해 공을 닦아 다행히 정과를 이루게되었습니다. 사부님께서도 저희들의 보호를 받아 불법의 가르침을지켜 다행히 세속의 태를 벗게 되셨습니다."(10권, 212쪽. 오, 놀라워라!
이 ‘콩가루 밴드‘가 ‘모든 존재는 서로 돕고 의지한다‘는 인연법의오묘한 경지를 깨치게 되다니. 과연 여기가 서천임이 분명하다. - P128

‘긴고테를 풀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삼장법사가 말한다. "예전에는너를 통제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런 법력을 써서 너를 다스렸던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미 부처가 됐으니 벌써 저절로 없어져버렸느니라. 아직까지 그 테가 머리 위에 남아 있을 리가 있겠느냐?
한번 만져 보아라."(10권, 284쪽 누군가 풀어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스스로 풀렸다. 그렇다! 자신을 구원하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다! - P131

돈키호테는 ‘보통명사‘다. 스페인어를 몰라도 아니 그게스페인어라는 걸 모르는 사람도 돈키호테가 뭔지는 안다. 명성에 관한 한, 돈키호테의 꿈은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내용이 ‘무데뽀로돌진하는 또라이‘, ‘대책 없는 몽상가 등이라는 걸 안다면? 다시금투구를 쓰고 애마 로시난테를 달려 창을 휘둘러 댈까? 그렇지 않을것이다. 왜냐고? 죽기 직전 정신을 차렸기 때문이다. 기사도에 미쳐날뛰던 그가 기사도 책들을 불태우고 저주하면서 죽은 것이다.
그의 묘비명이 그 증거다. "미쳐서 살고 정신 들어 죽다" - P135

‘미치면 살고 정신 차리면 죽는다‘는 뜻인가? 그럴 수도 있다.
삶은 광기고, 죽음은 그 치유다, 고 읽어도 될까? 역시 무방하다.
그럼 광기란 대체 무엇인가? 또 삶과 죽음은? 이처럼 이 묘비명,
아니 돈키호테의 행적은 수많은 독해가 가능하다. 파면 팔수록 새로운 질문들이 생성된다. 이런 작업을 일러 고고학이라고 부른다.
그렇다. 돈키호테는 광기에 대한 고고학적 탐색이다. 하지만 그작업에 동참하려면 우리도 여행을 해야 한다. 돈키호테와 함께 엉뚱발랄, 좌충우돌, 황당무계한 여행을내가 이 여행을 주목하게 된 건 『열하일기』로 인해서다.
『열하일기』를 통해 세계의 모든 여행기를 섭렵하고자 하는 야망(?)을 품게 되었는데, 그 야망에 더더욱 불을 지핀 이들이있었으니, 루카치·푸코·보르헤스 등이 그들이다. 이들의 대표작에는 돈키호테』가 빠지지 않고 꼭 등장한다. 이 지성사의 거장들은 왜 - P135

한결같이 『돈키호테』에 심취했을까? 이 미스터리를 꼭 풀고 싶다!
내가 선택한 번역본은 민용태 번역의 『돈키호테』 1‘2(창비,2005.
이하 이 장에서 이를 인용할 때에는 권수와 쪽수로 표시한다)다. 이 책의 미덕은 주석의 깊이와 세밀함이다. 아울러 작품의 묘미 가운데 하나가 돈키호테의 고상한 말을 산초가 늘 ‘싼티 나게‘ 비슷한 발음의 다른 언어로 옮기는 장면인데, 이걸 스페인어로 직역을 하면 실감이 떨어진다. 그래서 역자는 그에 상응하는 우리말로 과감하게 의역을 시도한다. 예컨대 ‘재판‘에는 ‘개판‘으로, ‘일식, 월식‘에는 ‘해와 달의 질식‘으로, ‘풍년‘에는 ‘횡년‘으로, 기타 등등. 이런 언어유희를 음미하는 맛이 참 쏠쏠하다. - P136

생몰 연대가 보여 주듯, 세르반테스(1547~1616)와 셰익스피어(1564~1616)는 동시대인이다. 나이로는 후자가 훨씬 어리지만,
사망한 해는 물론 날짜까지 같다(1616년 4월 23일. 이 두 작가를 기려유네스코는 이날을 세계 책의 날‘로 지정했다고 한다). 유럽문학의거장이자 라이벌이 같은 시대에 활동한 것이다. 물론 작품의성향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또 셰익스피어는 햄릿 못지않게명성이 높지만, 세르반테스는 그렇지 않다. 하지만 작품의 차원에선셰익스피어의 어떤 명작도 ‘돈키호테』를 능가하지 못한다. 그런점에서 세르반테스의 라이벌은 셰익스피어가 아니라 자신의
‘의붓자식‘인 ‘돈키호테‘인 셈이다. 하지만 막상 인생 역정을살펴보면 세르반테스의 인생이 돈키호테의 모험과 광기를 압도한다.
- P136

삶의 현장은 몸이다. 몸의 생리와 무관한 심리는 없다. 생리와심리의 흐름이 삶의 동선을 만들어 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의 신체적 특징은 이렇다. 골수가 말랐고, 늘 팔뚝 힘을과시하지만 하체는 엄청 부실하다. 잠이 거의 없고, 식욕도 최소수준이다. 그의 광기와 이런 신체성은 어떻게 연결될까? 주석을보면, "세르반테스와 잘 아는 우아르테 박사의 사상이론으로 해석하면, ‘마르다‘는 ‘지혜롭다‘는 뜻"으로, "속물들의 눈에는 돈키호테가 책을 읽다 돌아버린 것이고, 신의 눈에는 그가 참공부를 하고 신비로운 눈을 갖고 다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럴싸하지만 왠지 석연치 않다. 무엇보다 이런 식으로는 몸의 상태를 파악하기 어렵다. - P140

『동의보감』에는 이런 증상이 다반사로출현한다. 양생의 기본척도는 수승화강水昇火降: 물은 올라가고 불은내려간다는 뜻이다. 그게 잘 안 될 때의 증상을 ‘음허화동陰虛火動이라고한다. 음이 고갈되어서 화가 망동한다는 뜻. 그 불길로 인해 골수가 말라 버리고, 그러면 머릿속이 온통 망상으로 가득 차게 된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심하면 자신이 보고싶은 대로만!‘ 보게 된다. 또 시선이 오로지 밖을 향하는 탓으로 인정욕망에 불타게 된다. 망상과 명예욕의 긴밀한 유착!
이 불의 세기를 조절해 주는 것이 물이다. 물을 주관하는장기는 신장이다. 고로, 신장의 물은 ‘존재의 평형수‘에 해당한다.
평형수가 마르고 불이 치성해지면 존재의 무게중심이 위로 떠버린다. 세월호 참사에서 사무치게 확인했듯이, 무게중심이올라가면 삶의 복원력을 잃어버린다. 돈키호테가 바로 그런 - P140

케이스다. 무게중심이 솟구치다 못해 완전히 ‘공중부양‘된 상태다.
그 결과 책과 세계의 관계가 전도되어 버렸다. 처음엔 세상을이해하기 위해 책을 보다가 이젠 책이 곧 세상이 되어 버린 것.
현대인들에게도 흔한 증상이다. 기사소설 대신 게임, 주식, 쇼핑, 야동 등으로 종목이 바뀌었을 뿐. 하여, 현대인들 역시 ‘음허화동‘을주기적으로 겪는다. - P141

돈키호테의 진짜 저자가 누구야? 이 물음의 의미를 모른다면 당신은 아직 책을 읽지 않은 것이다. 작품 속에는 수많은 저자들이 등장한다. 일단 원작자는 아랍인 ‘씨데 아메테 베넹헬리‘다.
기독교의 이상을 구현하는 게 기사소설인데, 무슬림이 저자라구?
이것부터가 세르반테스식 풍자요, 아이러니다. 원작자가 아랍인이면 그걸 번역한 사람이 있다는 뜻인가? 그러면 역자는 누구인가? 그와 세르반테스의 관계는? 파고들수록 헷갈리기만한다. 그렇다. 이 작품에는 ‘다중적‘ 목소리가 흘러넘친다.
돈키호테는 자신이 그려 놓은 동그라미 안에서 뺑뺑 돌지만, 세르반테스의 화법은 텍스트를 사방으로 분사한다.
지성사의 거장들이 돈키호테』를 주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돈키호테』를 르네상스와 고전주의 경계에 있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이것이 인식론적 차원의 접근이라면, 루카치의 찬사는 역사철학에 근거한다. "세계문학 최초의 위대한 이 소설은 바야흐로 기독교의 신이 세계를 떠나기 시작하는 시대의 초엽에 서 있다." 즉, 돈키호테」는 ‘영원한 내용과 영원한 태도도 그 시간이 끝나버리면 의미를 잃어버린다는 사실‘에 대한 ‘깊은 멜랑콜리‘이다. 게오르크 루카치, 『소설의 이론 - P150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다! 돈키호테에게는 꿈이지만 사실은 연극이었다. 하지만 돈키호테는 눈꼽만치도 의심하지 않는다. 책에서 본 대로 믿는 정도를 넘어 이젠 믿는 대로 본다.
"보면 알게 된다" 가 아니라 "아는 대로 본다"는 경지에 도달한 것. 가히 전도망상의 진수다. 요컨대, 1권에선 허공을 향해 하이킥을 날리더니 이젠 아득한 동굴 안에서 일장춘몽에 빠져 버렸다.
허공에서 심연으로! 그런 점에서 비상과 추락은 한 쌍이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고 했다. 뒤집으면 비상을 꿈꾸는자만이 추락하게 된다. 높이 날아오르거나 아니면 깊이 침몰하거나,
그 사이를 정신없이 오가는 것이 광기다. 그래서 한 번도 현실에발을 딛지 못한다. 삶은 비상도 추락도 아니고, 걷는 것이다. 한걸음씩 앞을 향해 걷는 것, 그것이 삶이요 길이다. - P161

하지만 먼저 세르반테스는 길 위에서 인생의 모든 것을 배웠다.
라틴어와 수학, 별을 보고 시간을 헤아리는 법, 철학과 문학 등등.
길이 곧 대학이요, 강의실이었다. 더 중요한 건 화술이다. 온갖이야기를 주워듣는 귀동냥과 그걸 자신의 스타일대로 쏟아낼수 있는 입담을 터득한 것이다. 알제리로 팔려가서도 그 지역의통치자인 하산 파샤의 측근이 되어 특급 대우를 받았다. 그 이유는다름 아닌 그의 말솜씨였다. 세금징수원임에도 지역의 서민들과깊이 교감할 수 있었던 것, 종교재판을 받기 직전 극적으로 구출된것 역시 다름 아닌 그의 말솜씨 덕분이었다. 그 말들이 실개천처럼흘러들어 50대 후반 감옥의 한 독방에서 『돈키호테』라는 도도한 강을 이루었다.
그렇다! 반전의 포인트는 역시 ‘말‘이다. 이 말에는 행동과 덕이 - P175

수반된다. 그래서 로고스다. 로고스란 ‘말과 진리‘, ‘말과 지성‘의직접적 일치를 뜻하는 낱말이다.


『돈키호테』는 소위 정통소설과는 많이 다르다. 저자와 번역자, 작중 화자가 수시로 교차하는 것도 그렇지만 스토리 라인도 ‘기승전결‘의 스텝을 밟지 않는다. 또 ‘소설은 부르주아 시대의 서사시‘라는 루카치의 정의대로 주인공이 고향을 떠나 갖은 고난을 거친 다음 성숙한 존재에 이른다는 성장소설의 유형과는 더더욱거리가 멀다. 중간중간 이야기들이 마구 끼어든다. 1권에선 ‘미친 에로스의 화신‘들과 ‘막장 남녀‘들의 이야기가, 2권에선 각종 연극, 인형극, 가면극이 들뢰즈Gilles Deleuze와 가타리 Félix Guattari가 말한
‘리즘‘이 연상시킬 정도로 얽히고설킨다. 그래서 돈키호테』에 대한 평가 역시 다중적이다.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이것을 최초의 ‘근대적‘ 작품이라 평했지만, 20세기 후반에 이르면 중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의 선구로 추앙받기도 한다. 근대와 탈근대를 동시에 넘나드는 아주 ‘기발한 작품이 된 것이다. - P176

말은 에너지고 파동이다. 한번 태어나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변이할 뿐! 생장수장生長收藏 만물이 나서 자라고 수확하고 저장하면서때론 어울리고 때론 맞선다. 돈키호테의 웅변과 산초의 속담 역시그러하다. 1권에선 전자의 카리스마가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2권에오면 상황이 달라진다. 후자가 전자를 ‘찜 쪄 먹는‘ 수준이 되어버린 것. 산초가 하도 속담을 가지고 ‘개똥철학‘을 떠들어 대니까돈키호테가 "자네 그 연설 끝났나, 산초?" "이러다 내가 죽기 전에제발 그 입 좀 막아야겠다"2권, 259쪽)고 애원할 지경이다. 하지만산초는 굽히지 않는다. 오히려 소인이 말을 하고자 할 때는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두"라고 맞선다. 돈키호테는 절규한다.
"이런 육시랄, 육만 악마가 와서 제발 좀 너와 너의 그 알량한속담을 가져가라고 해라! 그 놈의 속담을 한 시간 동안이나 줄줄이주워섬기면서 그 하나하나로 그야말로 내게 물고문을 하고 있구나. - P179

요컨대, 언어는 권력이자 용법이고, 배치의 산물이다. 그것이놓여 있는 조건에 따라 광기가 되기도 하고 지혜가 되기도 한다.
바보짓이 되기도 하고, 고매한 행위가 되기도 한다. 『돈키호테』가뿜어내는 다중성의 원천도 거기에 있다. 이런 설정을 더한층과격하게 실험한 작가가 보르헤스다.
20세기 지성사에서 보르헤스의 위상은 가히 독보적이다.
20세기 중후반의 모든 사유에는 그의 그림자가 깔려 있다고해도 무방할 정도다. 예컨대, 푸코의 『말과 사물도 보르헤스의분류법에서 시작한다. "보르헤스의 텍스트에 인용된 ‘어떤 중국백과사전‘에는 동물이 ‘ⓐ황제에 속하는 것, ①식용 젖먹이돼지, ⑧인어, ⑦신화에 나오는 것,
ⓝ멀리 파리처럼 보이는것‘으로 분류되어 있다."<푸코, 말과 사물, 7쪽. 여기에는 공통의 장소가없다. 하여, 통사법을 해체하고 통념을 전복시켜 버린다. 왠지돈키호테의 아우라가 느껴지지 않는가. 웃기면서 당혹스럽다는 - P189

점에서 하긴 그렇다. 같은 스페인 문화권인데 세르반테스의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할 노릇이다. 특히 그의 단편집픽션들』은 중남미 문학의 걸작에 속한다. 여기 실린 작품 가운데「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라는 단편이 있다.
제목대로 프랑스 작가 피에르 메나르는 뼈를 깎는 노력 끝에『돈키호테』라는 작품을 완성한다. 그럼 당연히 원작 『돈키호테』의
‘리메이크거나 아니면 새로운 시대적 버전이거나 둘 중 하나일거라고 생각한다. 한데, 둘 다 틀렸다.
진리진리의 어머니는 시간의 적이고, 사건들의 저장고이고, 과거의 목격자이고, 현재에 대한 표본이며 충고자이고, 그리고 미래에 대한 상담관인 역사이다." 이 대목은 세르반테스의『돈키호테』 1부 9장에 있는 내용이다. 보르헤스가 보기에 이 열거형 문장은 역사에 대한 단순한 수사적 찬양에 불과하다. - P190

그럼 메나르의 작품은? "진리, 진리의 어머니는 시간의 적이고, 사건들의 저장고이고, 과거의 목격자이고, 현재에 대한 표본이며층고자이고, 그리고 미래에 대한 상담관인 역사이다."
뭐야? 앞에 나온 거랑 똑같잖아? 그렇다! 세르반테스의돈키호테를 고스란히 베낀 것이다. 한데 저자는 이 작품이야말로원작에 비해 무한정할 정도로 뛰어나다"고 극찬을 늘어놓는다.
논거는? 세르반테스는 자기 시대의 언어를 구사한 거지만,
현대작가인 메나르가 쓴 것은 ‘17세기 스페인의 고어체‘라는것, 동시대에 『돈키호테』를 읽는 것과 전혀 다른 시간대에 다른장소에서 ‘돈키호테』를 읽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논법이다. 그러니원작과는 다른 아주 독창적인 작품이라는 것이다. 언어 자체가아니라 그 언어가 놓인 배치에 따라 의미와 효과가 달라진다는 - P190

것. 본질이 아니라 관계가 선행한다는 것. 『돈키호테』의 사상을 고스란히 재활용한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세르반테스에 대한 보르헤스의 오마주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오마주를 통해 보르헤스가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원본과 복사본, 주체와 객체의 경계란 대체 무엇인가? 또 언어와 시대, 언어와 주체는 어떻게 조우하는가?
등등. 그 질문들이 살아 있는 한, 보르헤스와 더불어 세르반테스역시 불멸한다. 하여, 저 17세기 초 스페인의 한 감옥에서 탄생한 돈키호테와 산초의 방랑과 모험, 그 길 위에서 탄생한 ‘로고스의 향연‘은 지금 이 순간도 계속되고 있다.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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