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기억은 원천적으로 날조다. 스스로에게 거는 주술이요, 판타지다. 사건은 끊임없이 흘러가는데 나의 시선은 한곳에 머무르려고 하기 때문이다. 뒤늦게 사건들이 흘러가버렸음을 깨닫고 소위 ‘진실‘을 뒤쫓지만 늘 뒷북이요, 변죽이다. 아, 그렇다고 절망할 것까진 없다. 이런 식의 날조와 뒷북이야말로 삶의 대가이자 인간의 숙명이므로 어쩌면 인간이란 사건과 기억, 주술과 진실사이의 ‘밀당‘을 즐기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밀당속에서 문득 예기치 않은 ‘길‘들이 출현하기도 한다. 이 책을 통해내가 하고자 하는 작업도 그렇게 출현한 ‘길‘들 중 하나다.
나의 기억으론 2008년부터였다. 우리에게 아주 낯선 세상이 펼쳐지기 시작한 것은. 더 디테일하게 말하면, ‘아, 우리가 정녕21세기에 살고 있구나!‘라고 느끼게 된 것은 그즈음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졌다. 그와 동시에 IMF 이후 우리 사회를 추동했던 동력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부동산, 주식, 벤처 등으로 대박을 꿈꾸던 시절이 끝난 것이다. 그때 비로소 실감하게 되었다. 그동안 우리가 누려 온 풍요가 대부분 채무경제였다는 것을.
말하자면 우리를 비롯하여 전 세계가 빚더미 위에서 축제를 벌이고있었던 것이다. 오, ‘일장춘몽‘一場春夢이 바로 이런 것인가? - P14

버블경제의 붕괴와 성공(행복)신화의 몰락. 그때부터인가한국사회에 인문학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도서관과 지역공부방을중심으로 명맥을 이어 오던 인문학이 전 사회로 확산되기 시작한것이다. 참으로 뜬금없는 현상이었다. IMF 이후 스펙문화가 확산되면서 인문학은 멸시천대를 받아 왔다. 심지어 인문학의 산실인 대학에서도 인문학을 추방하는 데 열을 올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갑자기 왜?
솔직히 아무도 모른다. 기술과 인문학의 융합을 외친 스티브잡스 때문이라는 ‘썰‘도 있고, 외부로 향했던 시선이 내면으로 향하게 되었다는 ‘썰‘도 있고, 그저 힐링의 대체물이라는 ‘썰‘도있고……. 물론 그 무엇도 답은 아니다. 분명한 건 사람들이이전과는 아주 다른 시선, 다른 방식으로 삶을 바라보기시작했다는 것. 영화 <설국열차>식으로 말하면, 문은 앞에만 있는것이 아니라 옆에도 있다는 것을 발견한 셈이라고나 할까. 한마디로 프레임이 바뀐 것이다. 프레임이 바뀌면 세상이 달라진다. 과연그렇게 되었다! - P16

요컨대, 생리와 심리, 그리고 물리는 서로 상응한다. 이걸 지도삼아 삶의 윤리를 찾아가는 것, 이것이 양생술이자 ‘도‘다. 이런 오래된 지혜가 우리 시대 인문학과 만나면 새로운 에콜로지가 된다.
인간과 자연의 이항대립을 넘어서는, 소통과 융합의 기예로서의 에콜로지! 하여 21세기의 화두는 단언컨대, 몸이다. 몸은 수많은 이분법적 대쌍들의 교차지대다. 거시와 미시, 정신과 물질, 개인과사회, 보편과 개별, 남성과 여성 등등, 한마디로 생명과 우주의 모든양상들이 ‘크로스‘는 실존의 현장이다. 고로, 몸을 보면 세계의흐름을 알 수 있고, 우주의 이치를 알면 내 존재의 심연을 탐사할 수있다. 몸과 우주, 그 대칭성의 눈부신 향연! 우리의 새로운 출발점은 바로 여기다. - P21

야생적 신체성을 동력 삼아 삶 전체가 우주적 순환에 참여할 수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핵가족의 문턱을 넘어야한다.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성공신화의 핵심기제는 핵가족(혹은스위트홈)이다.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도, 남보다 더 많이소유해야 하는 이유도 다 거기에 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이룬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핵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나 우주적 존재가될 수 있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그 다음엔 더 가열차게 달려야한다. 요컨대, 가족이 소유와 증식의 온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가족사이가 가장 위태로운 관계가 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스위트 홈‘은 더 이상 삶의 윤리적 척도가 될 수없다. 따라서 이젠 혈연과 가족을 넘어선 생명과 우정의 다양한 네트워크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소유를 향한 진격을 멈추고 생명의 대순환에 참여할 수 있는 길도 그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다. 이 ‘스마트한‘ 시대에 자꾸만 야생을 찾아 떠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게 아닐까? - P24

그렇다! 바야흐로 집의 시대가 거하고 길의 시대가 ‘래하고‘
있다. 정주에서 유목으로! 집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정주민에겐모든 것이 고정되어 버린다. 그래서 소유와 증식, 서열 및 위계가공고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길 위에선 반대다. 모든 것이 유동한다. - P24

국경, 세대, 성정체성, 노동과 화폐 등등 그 어떤 것도 절대적우위를 점할 수 없다. 가치의 고정성은 물론 척도의 절대성도사라진다. 상이한 방향의 힘들이 각축하고 서로 다른 윤리들이좌충우돌하는 것, 무엇이든 실험할 수 있고 늘 새로운 존재로거듭날 수 있는 것. 그것이 곧 유목이다.
유목은 유랑이나 편력이 아니다. 관광이나 레저는 더더욱아니다. 어디에 있건 그 시공간을 전혀 다르게 바꿀 수 있는능력이다. 유목민에겐 돌아갈 고향도, 도달해야 할 종착지도 없다. - P25

오직 자신이 서 있는 그 시공간이 삶의 전부다. 하여 온전히 누리고 즐기되 시절이 바뀌면 훌훌 털고 떠나간다. 비움과 채움, 머묾과 떠남의 이중주! 따라서 유목을 위해 반드시 초원이나 야생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 오히려 우리 시대의 유목은 도심 한가운데가 더 적당하다. 앞서도 밝혔듯이 21세기는 인간과 자연의 대칭성을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다. 그 대칭적 네트워크는 문명의 한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 문명적 대안이 될 수 있으므로, 문명 안에서 ‘문명의 외부‘를 사유할 수 있는 길, 그것이 곧 유목이다. 따지고보면 디지털 문명은 그 자체로 유동하는 신체다.
인터넷 안에선 모든 경계가 흔들리지 않는가. 또 SNS에선 중심도 방향도 없다. 접속과 변용만이 있을 뿐! 그렇다면 디지털이야말로 유목적 신체 아닌가. 문명의 첨단인 디지털과 야생적 신체인노마드(유목민)가 운명적으로 마주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 P25

그때 깨달았다. 디지털 세대에겐 국경이 없다는 것. 그들에게집을 떠난다는 건 국경을 넘는 곧 ‘월경에서부터 시작된다는것. 그때부터 신체는 전혀 다른 리듬과 강밀도를 지니게 된다는 것.
이를테면, 디지털과 신체, 문명과 야생, 주체와 타자 등 아주 낯선기호들이 융합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길 위에서 ‘길‘ 찾기를해야겠다고 작심한 건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그래서 시작된 비전이MVQ다. MVQ는 Moving Vision Quest의 약자로 고전과 여행을 다양한방식으로 접목하는 프로젝트다. - P27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다. 누군가 걸어가면 그것이 곧 길이 된다."
중국 근대문학의 대문호 루쉰의 「고향」에 나오는 구절이다. 좀다르게 표현하면, ‘길이 있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는 것이곧 길‘이라는 의미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늘 길 위에서 살아간다.
여기에서 저기로, 청년에서 중년으로, 탄생에서 죽음으로………….
천지만물이 생성소멸을 멈추지 않는 한, 사계절이 끊임없이돌아오는 한, 인간은 늘 길 위에 있을 수밖에 없다. 선택은 둘 중하나다. 이미 정해진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내가 길을 열어 갈것인가 다시 말해, 길 위에서 ‘정주‘할 것인가 아니면 길 위에서새로운 ‘길‘을 찾을 것인가.
길을 떠나려면 지도를 그려야 한다. 지도를 그리기 위해선 - P27

하늘의 별을 보라고 했다. 우리 시대의 별은 바로 ‘고전‘이다.
『열하일기』, 『서유기』, 『돈키호테』, 『허클베리 핀의 모험』, 『그리스인조르바』, 『걸리버 여행기 등등. 인생과 우주의 지혜를 담은 책들을고전이라고 한다면, 고전 자체가 ‘길‘에 대한 탐구인 셈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진짜 여행을 다룬 책들이 있다. 길 위에서 ‘길‘을 찾는 ‘길‘ 자체가 주인공이자 주제인 그런 책들. 이름하여 ‘로드클래식 (여행기 고전)! 위의 작품들이 바로 거기에 속한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겠지만 이 작품들은 각 문명권에서 최고로 평가받는, 그야말로 ‘별중의 별‘이다.
- P28

「톰 소여의 모험』의 자매편이라고 생각하면 눈이 확~ 떠질 것이다.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마크 트웨인의 작품이다. 대학 1학년 시절, 이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다. ‘로드클래식‘을기획하는 순간 바로 이 작품이 떠올랐을 정도니, 이거야말로 ‘내안에 너 있다‘의 진수 아닌가. 어디 나뿐이랴. 이 작품을 읽게 되면누구든 깊이 잠들었던 야생과 탈주의 본능이 되살아날 것이다.
『걸리버 여행기』의 여정은 한마디로 기상천외다. 무엇을 상상하든그 이상이다! 한데, 어디를 가든 걸리버는 인간의 역사와 본성을향해 지독한 ‘똥침‘을 날린다.
만약 이 ‘로드클래식‘의 주인공들과 여행을 한다면? 아마오대양 육대주를 다 넘나들어야 할 것이다. 연암 박지원, 돈키호테,
삼장법사와 그 제자들, 허클베리핀과 조르바, 그리고 걸리버,
이들은 대체 길 위에서 어떤 삶, 어떤 운명과 마주친 것일까? 그지도를 탐사하는 것이 이 책의 기본 콘셉트이다.
사족 하나, 길 위에서 ‘길 찾기‘를 하려면? 먼저 묵은 것들을흘려보내야 한다. 버블경제와 성공신화, 스위트 홈의 망상 등은말끔히 잊으시라. 비우는 만큼 길이 열릴 것이니. 이 ‘로드클래식‘과더불어 그 길을 탐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소유에서 자유로,
증식에서 순환으로 이어지는 ‘천 개의 길‘, ‘천 개의 삶‘을! - P29

이렇듯, 이 여행은 시종일관 정주와 질주가 격하게 교차하는이중주였다. 하지만 연암은 이 리듬에 휘둘리지 않았다. 거꾸로 그걸 능동적으로 활용했다. 발목이 묶일 때는 인정물태와 청문명의 저변을 훑고, 질주해야 할 때는 사유를 통해 ‘심연과 산정을넘나들었다. 고담준론과 깨알 같은 에피소드, 화려한 레토릭hetorics수사과 황당한 해프닝, 풍속과 역사 등 아주 이질적인 담론들이 매끄럽게 공존할 수 있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공간은 시간의 펼침이고, 시간은 공간의 주름이다. 시공의 펼침과 주름, 그것이 곧 리듬이다. 이 리듬에 고유한 강밀도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 여행은 곧 유목이 된다. 연암의 여행이 바로 그러했다. - P37

그렇다! 그들이 장사꾼으로 떠도는 건 스스로 선택한 삶이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이 천하를 떠돌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 바로장사였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 자본의 흐름과는 정반대다. 전자는정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후자는 오로지 자신의 영토를확장하기 위해, 소유와 정착으로부터 벗어나는 운동을 유목이라한다면 이때 수반되는 윤리가 곧 우정이다. 우정 없는 유목이란
‘앙꼬 없는 찐빵‘, ‘오아시스 없는 사막‘에 다름 아니다. 이들이 왜연암을 그토록 환대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이것이 연암이 타자들과 접속하는 기술이다. 탈주는 은밀하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슬그머니 궤도를 벗어난다. 하지만현장은 더할 나위 없이 유쾌하다. 이 매끄러운 리듬 속에서 술과웃음, 예능과 서사, 풍속과 윤리가 자유롭게 교차한다. 은밀하게 유쾌하게! - P42

그 저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장면이 바로 열하로 가는과정이다. 굶주림과 잠 고문 속에서도, 생사를 오락가락하면서도그의 신체와 사유는 더할 나위 없이 명징하였다. 이것이 바로니체가 말한 ‘위대한 건강‘이리라.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존재의무게중심을 잃지 않는 강철 같은 체력! 또 빛나는 명랑성!
예측불허의 상황 속에서 늘 반전을 야기할 수 있는 동력도 거기에있다. 고독한가 하면 왁자지껄하고, 위기인가 싶으면 순식간에 출구가 열리고, 백척간두가 곧 ‘깨달음‘의 현장이 되는 식으로 그렇다. 유목민에게 있어 길은 늘 반전의 연속이다. 여행이든 삶이든 인생도처유 ‘반전‘! - P46

원수라 해도 배울 것이 있다면 배워야 한다! 오랑캐의 나라는저토록 활발한데 중화를 표방하는 조선은 왜 이토록 무력한가?
학맥이나 당파로는 주류적 라인에 속했음에도 연암은 이 불편한진실을 결코 회피하지 않았다. "청문명의 장관은 기왓조각과 똥부스러기에 있다!" "이용이 있은 연후에야 후생厚生이 될것이요, 후생이 된 뒤에야 정덕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파격적테제들, 수레·온돌·벽돌 등에 대한 생생한 관찰 등은 다 거기에서비롯한다. - P48

무릇 천하의 일이라는 것은 비유하자면 양쪽에서 줄을 당기는것과 같습니다. 줄을 당기다가 줄이 끊어지면, 끊어지는 곳 가까이처했던 쪽이 먼저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서로의 힘이대등하게 겨룰 만하기 때문에 천하에는 거스르는 것과 순종하는차이, 즉 밀고 당기는 차이는 있어도 어느 쪽이 옳다든지 어느쪽이 틀렸다든지 하는 것은 없습니다. 박지원, ‘열하일기』 2, 김혈조 옮김,
돌베개, 2009, 419~420쪽.} - P49

천주교가 코스모스라면 티베트불교는 카오스다. 전자가 근대를 향한 빛의 유토피아라면 후자는 근대 ‘너머의 헤테로토피아다. 이 카오스는 기존의 표상에 포획되지 않기에 혼란스럽다. 하지만 동시에 지극히 황홀하다. 저 요술의 세계가 그러하듯이. 이처럼 연암과 열하의 마주침은 18세기 당대는 물론 지금 우리의 시선으로 보아도 낯설고 이질적이다. 카오스이자 판타지아인 세계, 이 매트릭스 위에서 어떻게 길을 찾을 것인가?
여행의 입구였던 저 요동벌판에서 외친 "인생이란 본시 어디에도 의탁할 곳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도는존재일 뿐"이라는 탄식이 열하라는 시공간을 만나 한층 더강렬하게 변주된 셈이다. 결국 연암의 시선에서 보자면, 인생이란 - P50

‘길 없는 대지‘(크리슈나무르티) 위를 걸어가는 여행이다. 길이 있어가는 것이 아니라 가는 곳마다 길이 되는 그런 여행!
이 ‘길 없는 대지‘ 위에서 잠들었던 말들이 웅성거리고 천지의비의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그때 길은 글쓰기의 향연이자 전장이 된다. - P51

18세기는 연암과 다산이라는 두 거성의 시대였다. 다산 정약용이양적으로 가장 방대한 업적을 남겼다면, 연암 박지원은 질적으로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연암으로 인해 한문은 ‘갈 데까지 갔다‘고들한다. 대체 어떤 경지이기에?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그의 글에는수많은 문체들이 범람한다. 그것은 고문도 아니고 금문도아니다. 정학正學도 아니고 소품체도 아니다. 고문과 금문, 정학과소품문‘사이‘, 이를테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글쓰기, 곧
‘연암체‘다. 타고난 자질에 일찌감치 과거를 포기하고 젊은 날을유람과 독서로 보내면서 갈고닦은 실력일터, 그 내공이 유감없이발휘된 작품이 『열하일기』다. 그러므로 『열하일기』는 단순한여행기가 아니라, 글쓰기의 ‘로드맵‘이다.
여행이 시작되자 연암은 말 위에서 수많은 ‘썰‘들을 풀어낸다.
"수십만 마디의 말이, 문자로 쓰지 못한 글자를 가슴속에 쓰고,
소리가 없는 문장을 허공에 썼으니, 그것이 매일 여러 권이나되었다."(박지원, 『열하일기 2, 471쪽.) 하여, 그가 가는 곳마다 ‘말과사물‘이 잠에서 깨어나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때론 화려한 수사와우아한 논리로, 때론 열정의 패러독스와 깨알 같은 유머로. - P55

그럼 이런 글쓰기는 기술지의 영역인가? 아니면 철학잠언인가? 왜 이런 우문을 던지느냐면 흔히 기술지는 글쓰기의 영역이 아니라 여기기 때문이다. 과학자나 의사들이 글쓰기와담을 쌓는 것도 그런 맥락이리라.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중요한건 대상 자체가 아니라 대상과 맺는 관계에 있다. "독서란묘석과의 열광적인 춤이다"(모리스 블랑쇼)는 말도 있듯이,
글쓰기의 역능 또한 사물들과 함께 춤출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솔직히 기술지만큼 글쓰기와 잘 어울리는 것도 없다(좋은예로, 『동의보감』은 의학적 임상을 다양한 방식의 이야기와 노래로표현한다). 자연의 물리적 법칙이 생활의 현장과 마주칠 때 그것을 일러 소위 기술이라 하고 문명이라 하지 않는가. 기술에도 윤리와철학이 필요하듯, 사물들도 ‘일상의 향연‘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 P66

"글자는 군사요, 글자의 뜻은 장수다. 제목은 적국이요 고사의인용은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다."(소단적치인騷壇) 이것이 연암의 글쓰기 전략이다. 글쓰기가 병법이라면 목표는 간단하다.
적을 제압하는 것. 그걸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
지형지물을 적극 활용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연암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가장 흔하게 쓴 전략은 ‘줍는‘ 것. 연암은 길 위에서 틈나는대로 ‘말들‘을 줍는다. 전설과 민담, 야담과 실화 등등, 연암은 닥치는 대로 주워서 한 편의 글로 버무려 낸다. 많은 글이 그렇게 탄생했다. - P67

‘하늘 아래 책을 읽고 이치를 탐구하는 것처럼 아름답고 고귀한일이 또 있겠는가?" 정조대왕의 말이다. 과연 호학 군주답다.
구체적으로 그 과정을 소개하면, 첫째, ‘고전을 통해 진리를 배운다.‘ 둘째, ‘탐구를 통해 문제를 밝힌다. 셋째, ‘호방한 솜씨로 지혜롭고 빼어난 글을 써 낸다. "이것이야말로 우주 사이의 세 가지 통쾌한일"안대회, [정조치세어록 푸르메 2011, 21~22쪽] 이라는 것. 글쓰기의 통쾌함이라! 그것도 ‘우주적 통쾌함‘이라니, 그건 곧 ‘도‘라는 뜻이 아닌가. 그렇다. 우리 시대야 글쓰기가 한낱 테크닉으로 전락했지만, 조선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때 글쓰기란 인간의 보편적 활동이었다. 성리학이 통치의 근간이 된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하여, 글쓰기의 비전은 언제나 우주적 이치 혹은 생사의 문제와 연동되어 있었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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