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유난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네요. 더군다나 원자폭탄과 인터넷이 등장하고, 수많은 종들이 지구상에서 급속도로 사라지는 시대에 말이지요. 그렇지만 작가들이 쓰는 글이 ‘문학‘이라는 높은 담장 안 정원에만 갇혀 있지 않고 세상 밖으로 나가 영향을 미치고 결과를 낳는다고 가정해보세요. 그러면 상상력의 사제가 자신의 특권이라고 주장하며 무시해왔던 윤리, 책임, 그 비슷한 귀찮은 것들에 대해 논의를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사제‘라는 단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까요. 사제가 단순히 의식을 거행하는 숭배자는 아니지 않나요? 백성의 목자이자 신과 인간의 중재자 아닌가요? 제임스 조이스의 스티븐디덜러스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주인공-옮긴이)는 "내 영혼의 대장간에서 내 민족이 아직 창조하지 않은 양심을 버리기 위해 나아갑니다. "양심", 도덕적 의미로 충만한 단어지요. 만약 작가에게 정말 그런 힘이 있다면, 그 힘을 휘두르는 사람(작가)과 당하는 사람(나머지 사람들)이란 측면에서 이 문제를 살펴보는 게 어떨까요? - P147

누구도 작가만큼 작가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개인으로든 직업군으로든 가장 악랄하고 경멸스러운 작가의 초상을 만날 수 있는곳은 작가들이 직접 쓴 책이지요. 하지만 누구도 작가만큼 작가를사랑하지도 않아요. 과대망상증과 편집증은 작가와 한 거울을 공유하지요. 파우스트로서의 작가는 거울을 보며 거만하고 사악하 - P147

고 초인적인 메피스토펠레스이자, 마술의 대가이자, 운명의 지배자를 마주합니다. 그들에게 다른 인간들은 끈으로 조종할 수 있는인형이거나 자신들의 마음과 내밀한 비밀을 그의 손바닥에 맡긴바보 같은 존재들이에요. 하지만 메피스토펠레스로서의 작가는같은 거울 속에서 떨고 있는 한심한 파우스트를 발견합니다. 영원한 젊음과 끝내주는 잠자리, 엄청난 부를 갈구하는 동시에 자신이 보잘것없는 끼적임과 유치한 말장난(그래놓고 뻔뻔하게 "예술"이라부르지요)으로 이런 바람을 짠하고 현실로 만들 수 있다는 한심한망상을 필사적으로 움켜쥔 파우스트 말이에요. - P148

아래는 A. M. 클라인이 현대 시인의 수치스런 존재감 상실에대해 노래한 시입니다.


우리가 현실 사회에서 알 수 있는 건
그가 사라졌다는 것, 중요하지 않다는 것뿐.
흔적이 남아 있다면 고작 통계자료,
이를테면 누군가의 투표, 아마도 갤럽 여론조사에서
누군가 던진 비웃음, 정부 위원회의 점 하나.
하지만 소리치는 군중, 누군가의 한숨에서 그는
느껴지지도, 눈에 띄지도 않는다. - P150

오, 자신의 두루마리에서, 왕자의 인용문에서연단에 퍼지는 큰 울림에서 우리의 문화를 펼쳐냈던 그,
한 이름으로는 천국을,
다른 이름으로는 일곱 고리의 연옥을 노래하던 그그가 지금도 존재한다면, 숫자이고, 미지수일 것이다.
익명의 길 잃은, 누락된호텔 장부의 어떤 스미스 씨일 것이다.  - P151

참고로, 이런 정신적 상처는 주로 남성들이 입었지요. 여성 작가들은 낭만주의 시대에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으며, ‘천재‘라는메달을 별로 걸어본 적도 없습니다. 사실 ‘천재‘라는 단어와 여성‘이라는 단어는 영어에서 보통 어울려 다니지 않아요. 남성 ‘천재들이 하는 기이한 행동을 여성이 하면 보통 ‘미쳤다‘는 꼬리표가 붙거든요. 심지어 ‘재능 있는‘ ‘대단한‘ 같은 단어들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사회에 실제로 영향을 끼쳐놓고도 수많은 여성 예술가들이 자신의 야심을 시인하지 않았지요. 그러다 보니 오늘날여성 작가들은 그들의 힘이 감소했다거나 세계 무대에서 위신이낮아졌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과거보다 더 잘하고 있다고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렇기에 걸출했던 여자 선배들과 비교해 자신들이 아주 허약하다고 여기지 않지요. - P151

지금부터는 고상하게 예술지상주의를 추구하는 정체성을 대체할 또 다른 정체성들과 그것들을 둘러싼 자기 인식의 위기에 대해 논하려 합니다. 그중 하나는 예술과 돈과 권력이 엇갈리는 독특한 교차점과 관련이 있고, 나머지 하나(이것도 앞의 것과 무관하지 않지요)는 ‘도덕적 책임‘ 아니면 ‘사회적 책임‘이라 불리는 것과 관련이 있지요. 사람들이 예술 활동을 통제하며 예술가에게 간섭하는지점은 ‘돈과 힘‘이라고, 예술가가 예술 활동으로 사람들에게 간섭하는 지점은 ‘도덕 및 사회적 책임‘이라 이름 붙일 수 있습니다.
돈과 권력에 대한 질문은 아주 짧게 압축할 수 있습니다. 시장에 영혼을 팔았는가? 만약 그랬다면 얼마에 팔았고, 누가 샀는가?
영혼을 팔지 않았다면 누가 예술가를 껍질 무른 게처럼 짓밟는가? 영혼을 판 대가로 예술가가 얻고자 하는 건 무엇인가? - P152

작가는 도덕적 법 위에 있을까요? 그러니까, 지루하고 우둔하고 재능 없는 지극히 평범한 대중은 지켜야만 하는 평범한 규칙을 작가는 전혀 적용받지 않는, 니체가 말하는 초인인 걸까요? 한편 글쓰기가 예술 작품으로서 그 자체가 아니라 실은 작가 자신을 표현한 것이라면, 살인을 창조해낸 작가가 드러낸 건 어떤 자아일까요? 별로 훌륭한 자아는 아니라고 생각할 겁니다. 기껏해야 부도덕한 자아, 최악의 경우엔 타인의 고통을 즐거워하는 괴물이라고 여기겠지요.
하이 모더니즘과 하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섬기는 최고 사제인수전 손택은 초기에 쓴 자신의 반전통적 에세이에 대해 훗날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 P154

나는 강렬한 자기 모독을 저질렀다. (...) 그 에세이들은 근엄했을뿐 아니라, 확실히 금욕적이었다. 마치 내가 내 상상력의 관능성을 믿지 않기라도 한 것처럼, 길을 잃을까봐 두려웠던 것 같다. 나는 그저 선한 것들, 사람들을 바로잡는 것들을 지지하고 싶었을뿐이었고, 그건 내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내 사고의 틀은 언제나 도덕적이었기 때문이다! - P155

"사람들을 바로잡는 것" 아 그렇습니다. 모든 부모가 예술의 그런 유익한 기능을 간절히 원하고, 북미의 모든 교내이사회가 그기능에 동의하고, 그중 일부는 그런 합의를 검열의 구실로 사용하지요. 하지만 어떻게 "사람을 바로잡는다"는 걸까요? 그리고 어떤사람을, 어떤 방식으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걸까요? 그러니까 사람을 바로잡고, 또 일부 사람들이 유해하다고 여기는 것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한다는 걸까요? - P155

하지만 예술가의 눈이 차가운 데는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 <감옥에서>의 마지막 부분을 볼까요.


이 눈은
울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시선은
얼굴 위로 눈물이 흘러내려도
절대 흐려져선 안 된다

그것의 목적은 명징함이다
어떤 것도
잊어선 안 된다  - P176

작가는 보편적 인류와의 관계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정말로 권력이 주어진다면, 권력의 사다리 어디쯤에 자리 잡아야할까요? 선택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말했다시피 나도 모릅니다.
하지만 몇몇 가능성과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잠재적 위험들, 그리고 난제들은 짚어보았습니다. 그래도 젊은 작가에게 꼭 조언을하라면, 앨리스 먼로의 말처럼 "원하는 대로 하고 결과는 스스로 감수하라"고 말하겠어요. 아니면 "이야기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라"고, 혹은 "공들여 쓰다 보면 사회라는 문제는 절로 해결된다"고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에요. 비밀을 말하자면 (아무 토론회에나 가서 써먹어도 상관없습니다), 작품이 사회적 의미를 지니는지 아닌지를 정하는 것은 작가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걸 정하는 건 작가가 아니라 독자예요. 그리고 바로 그 독자가 다음 장에서 다룰 주제입니다. - P177

그러니 만약 독자들께서 이 작품이 현 시대, 아니 어쩌면 헬리오가발루스 시대에 만들어진 최고의 요리 원칙을 엄격히 고수했다는 걸 알게 되시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 그 말인즉, 앞서 언급한 위대한요리사가 나리들의 식욕을 돋우어주었던 것처럼 독자들께서도 이 책을 영원히 읽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게 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 헨리 필딩, <톰 존스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 곁에 있다. 심지어 이야기를 읽는 사람도 이런 동료애를 나눈다. 하지만 소설을 읽는 독자는다른 어떤 독자보다도 고립되어 있다. (..) 이런 고독 속에서 소설의독자는 누구보다 악착같이 책을 붙든다.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준비가, 이를테면 걸신들린 듯 집어삼킬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 발터 벤야민, <이야기꾼>

데틀레프 폰 릴리엔크론의 운율에는 빈정거림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말했다. 시인은 명성을 얻지 못하기가 힘들다. 살아생전 대중의환심을 사지 못하면, 후대가 굶어 죽어간 그의 영웅적 행적을 칭송할테니, 한 마디로, 판다는 것은 영혼까지 전부 팔아치운다는 것을 뜻했다.

- 피터 게이 <쾌락 전쟁>

우리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진술이다. 그렇기에 적은 관객을 기대할수 있다.

-그웬돌린 매큐언, <선택>>

그는 형편없는 대형 신문사의 눈에 띄면서 칭송받고, 성유 부음을 받고, 왕관을 쓰게 됐다. 마치 뚱뚱한 안내원이 지팡이로 꼭대기 의자를 가리키기라도 한 것처럼 공개적으로 왕좌에 배정받았다. (...) 어쩌다 보니 순식간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엄청난 파도가 무언가를 휩쓸어버렸다. 그 파도가 내 작은 관습의 제단과 그 위에 놓인 반짝이는 양초와 꽃을 쓰러뜨리고 텅빈 거대한 사원을 세워 올려버렸다.
닐 패러데이가 세상으로 나온다면 그건 그가 살아 있는 동안일 터였다. 그리고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 불쌍한 남자는 끔찍한 시대속으로 쑤셔 넣어질 운명이었다.

- 헨리 제임스, <유명인의 죽음

나는 봉투를 찢는다. 나 지금 방콕이야
(...) 너는 네모난 봉투에서 이 푸른 사절들을 쏟아낸다.
널 세상에 잃었다는 느낌이 들 때,
계속 따라가기 힘들 때,
너의 엽서가 이렇게 말한다
"날 기다려줘."

- 앤 마이클스, <마사에게 온 편지

시인이었던 나의 한 대학 은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작품에나 공통으로 던질 수 있는 진짜 질문이 딱 하나 있는데,
바로 그 작품이 살아 있는가, 아니면 죽어 있는가‘라고요. 어쩌다보니 그 말에 동의하긴 했는데 시가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는어떻게 결정될까요? 생물학적 정의를 보면 살아 있는 것들은 성장하고 변화하며 자손을 낳을 수 있는 반면, 죽은 것들은 아무 활동성도 띠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텍스트가 성장하고 변화하고 자손을 낳을 수 있다는 걸까요? 독자가 작가와 시공간상으로얼마나 떨어져 있든 상관없이, 오직 작가와 독자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닙니다."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 야한 시를 베끼는 한 우체부가 시인 파블로 네루다에게 하는 말입니다. "시는 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이에요." 그게 정답입니다. - P200

그보단 녹사에게 친근하게 관심을 표하지요. 아래는 러시아 시인 푸시킨 <예브게니오네긴>이라는 시의 말미에서 독자에게 멋지게 작별인사를 고하는 부분입니다.


독자여, 당신이 누구든,
친구든 적이든 간에,
정답게 헤어지고 싶다네.
잘 가시게, 이제 끝이 났으니.
이 조잡한 글에서 무엇을 찾아냈든,
격정적인 추억이든,
고생 끝의 휴식이든,
그냥 문법적 오류든, - P204

생생한 묘사들, 떠들썩한 재담이든.
당신이 이 작은 책에서
감동이나, 재미나,
꿈이나, 잡지의 논쟁에 필요한 것이나,
조금이라도 얻어가기를 바라네.
이쯤에서 헤어지세. 그럼 안녕. - P205

하지만 그는 중요한 사실을 모릅니다. 꿈속의 그 인간들이 바로이라는 것을요. 그들이 책의 인간적인 요소라는 것을요. 그의카에 신의 음성이 들립니다. "여기에 책은 없다." 하지만 그는 그말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후반부가 되면 그가 수집한 모든 책이생명을 얻고 그에게서 등을 돌리지요. 지금까진 그로 인해 죄수처럼 개인 서재에 갇혀 있었으나 이젠 자신들의 메시지를 자유롭게퍼트리고자 하는 거예요. 앞서 말했듯 책은 독자로부터 독자에게로 이동해야 살 수 있으니까요. 이윽고 그는 책에, 그리고 자신의몸에 불을 지릅니다. 화형, 그것이 이단자의 운명이지요. 책이 불타기 시작하자 책 속의 글자들이 그가 창조한 ‘데드 레터 오피스를 탈출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 P208

때로 책은 작가의 개입 없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아래는 제이 맥퍼슨이 쓴 <책>이라는 간단명료한 제목의 시입니다. 여기서의 책은 말하는 책인 동시에 수수께끼이지요. 물론 답은 제목에 있습니다.


친애하는 독자여, 당신 같은 인간이 아니기에나는 그대처럼 사랑할 수 없고, 그대도 나처럼 사랑할 수 없다 - P208

하지만 그대처럼 큰물로 나가서
보잘것없는 배로 사나운 바다를 이기려 하나니.

개울 수면을 젖지 않고 덧없이 떠가는 물방개도
나보다는 가냘프지 않고
흥분된 눈으로 심해를 살피는 고대의 고래도
나보다는 대단하지 않도다.

비록 창조자의 의지로
공기, 불, 물, 땅을 가로지르지만
내 부피가 그대의 손에 짐이 되지는 않는다.

나는 꽃피운다. 그대가 보는 데서, 그리고 그대를 위해서.
그를 섬기지만 나는 인간과 씨름하길 주저하지 않으니
붙잡히고 삼켜져도 그를 축복한다. 독자여, 받아주기를  - P209

이 작은 책은 배이며, 고래이며,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에게 축복을 내린 천사입니다. 아울러 성찬식에서 섭취되는 대상으로서,
삼켜지지만 파괴되지는 않는 음식입니다. 또한 축제에 온 손님의영적인 부분은 물론이고 스스로도 새로이 거듭나게 하는 축제이지요. 천사는 드잡이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동화되고 결국그의 일부가 됩니다. - P209

오 위대한 신이여, 밤의 왕자들이여,
빛나는 존재여, 불의 신 기발이여,
지하세계의 장군이라이여 (...)
점을 칠 때 제 곁에 계시길.
제가 바치는 이 양이
진리를 드러내기를 비옵니다!

ㅡ메소포타미아 기도

그런 뒤 죽음의 배를 지어라,
망각으로 가는 가장 긴 여행을 떠나야 하니.
그리고 죽음을 죽어라,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과거의 나와 새로운 나 사이에 놓인 (...)

오 죽음의 배를 지어라, 너의 작은 방주에
음식과 작은 케이크와 포도주를 채워 넣어라
망각으로 내려가는 어두운 항해를 위해

- D. H. 로런스, <죽음의 배>

겨울은 컴컴한 우물 위에 걸려 있고,
내 등은 하늘을 향해 있으니,
그 암흑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지,
반짝이는지, 눈을 깜박이는지 보기 위해서다

아니, 나는 바닥으로부터
잃어버린 모든 것, 빛나는 모든 것과 누워서
하늘의 흰 빛을, 내 눈동자를 올려다본다
나의 겨울은 죽은 자들과 함께다

진리의, 이미지의, 말의 우물.
저 아래 오리온이 놓인 자리극점의 웅덩이가 계단이 되는 게 보인다.
성좌가 뜬다.

-제이 맥퍼슨, 〈우물〉

같은 공간을 차지하고서
움직이고 살아 있는 것
그들을 건드린 것을 만지는 것은
그들 덕분이니 (…)

영이 된 뼈들과 하나가 된 흙에
무릎까지 박고 서서
고고학의 태양을 받는다 (...)

해질녘 마을,
교차하는 어둠의 강물에
가슴까지 담그고 서 있으니,
말 없는 사냥꾼들과
어두운 불 위로 몸을 숙인 여자들,
나는 그들의 낡은 자음을 듣는다 (...)

- 알 퍼디, <인디언 마을의 유적 > 

내양 손바닥에서 기쁨을 취하라
약간의 꿀과 햇빛을,
페르세포네의 벌이 우리에게 명한 것처럼.

- 오시프 만델슈탐, <내 양 손바닥에서 기쁨을 취하라> 

죽은 자의 땅으로 가서 저세상 사람을 산 자의 땅으로 데려오는것. 이것은 인간의 아주 깊숙한 욕망이자, 아주 엄격히 금지된 행동입니다. 하지만 글을 씀으로써 죽은 자에게 일종의 생명을 부여할 수 있어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단테에 관한 아홉 편의에세이"에서 흥미로운 이론을 제시합니다. 단테가 《신곡》, 그러니까 ‘지옥 편‘ ‘연옥 편‘ ‘천국 편‘ 세 편 전부를, 그 모든 방대하고복잡한 세계를 만들어낸 까닭은 죽은 베아트리체를 어렴풋하게나마 보기 위해서, 그녀를 자신의 시 속으로 불러내기 위해서라는거지요. 그가 그녀에 대해 글을 쓰고 있기에, 그녀에 대해 글을 쓴다는 그 이유만으로, 베아트리체는 작가와 독자의 마음속에 다시살아 숨 쉴 수 있습니다.  - P238

죽은 자들은 피를 구합니다. 앞서 말했듯 그들은 허기와 갈증에시달리지요. 그들에게 피를 제공한 대가로 시인은 천리안을 얻고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완성합니다. 오래된 합의 방식대로지요.
모든 작가들은 죽은 자들로부터 가르침을 얻습니다. 계속 글을 쓰는 한, 작가는 앞서 글을 썼던 작가들의 작품을 끊임없이 탐구하게 됩니다. 동시에 그들에게 평가받고 질책당한다고 느끼지요. 하지만 작가는 작가로부터만이 아니라, 모든 형태의 조상으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죽은 자들은 과거도, 이야기도, 특정한 진실(지하세계로의 여정을 다룬 윌프레드 오언의 시 <이상한 만남>에서 "감춰진 진실"이라 부르는 것도 모두 통제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므로 이야기를 마음껏 탐닉하려면 결국 지나간 시간에서 온 사람들과 거래를해야 합니다. 그 지나간 시간이 겨우 어제라 하더라도 과거는 과거이지요.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이 아니라. - P246

가장 믿을 만한 출처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곳에 가는 건 쉽지만 돌아오는 건 어렵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면 모든 이야기를 돌에 새겨야만 합니다. 운이 좋아 올바른 독자를 만나면 돌이 말을할 겁니다. 돌이 혼자 세상에 남아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마지막 말은 시인 오비디우스에게 넘기겠습니다. 그는 쿠마에의 무녀 시빌에게 발언을 허락해주었죠. 그녀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추측컨대 오비디우스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모든 작가들의 희망과 운명을 위해서.


하지만 운명이 내게 목소리를 남겨놓아,
사람들이 그 목소리로 나를 알아보게 될 겁니다.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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