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홈 하나 없는 인간이라면, 내가 실수한 적 없는 인간이라면 얼마나 좋을까를 요즘 많이 생각한다. 나의 어떤 과거 혹은 과거의 어떤 발언이나 행동들은 누군가에게 말하기가 너무 부끄러운것들이라 그것이 세상에 드러날까 두렵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또알게 되면서 가장 견딜 수 없는 건, 과거의 나 자신이다. 여성 혐오적인 발언을 일삼던 나...... 물론 그때도 나는 늘 당당했고 내가 하는 말에 자신이 있었으며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는 참기보다 말하는 사람이었다. 남자아이들과 싸우기도 많이 싸워서, 내가 나를 알기 전부터 난 이미페미니스트였다는 사실을 최근에 깨닫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때 괜찮은 인간이었던 것은 아니다.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이었는지, 여성 혐오에 일조하는 인간이었는지를, 영화 〈델마와 루이스>를 다시 보며 깨달았다. - P150

나는 고등학생일 때 반 아이들 몇 명과 이 영화를 봤다. 그때의나는 델마(지나 데이비스)와 루이스(수잔 서랜든)가 자신들을 성희롱하는 남자의 트럭을 폭발시키는 장면을 보고 "어휴~ 아무리 그래도그렇지, 뭘 저렇게까지 해"라고 말했다. 그러자 우리 반 반장(여고으므로 당연히 여자였다)이 화를 내며 "저게 왜 심하다고 생각해? 저남자가 잘못했는데?"라고 내게 따졌다. 나는 지지 않고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 트럭까지 터지게 하면 어떻게 해"라고 말했던 거다. 지금돌이켜보면 우리 반 반장은 페미니스트였던 것 같다. 내가 지금 깨닫고 공부하는 많은 것을, 그 애는 그때 이미 알았으니,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아주 얌전한 아이를 보고 내가 무심결에 "여자 중에 여자"라고 표현한 거다. 그러자 반장이 내게 물었다.
"여자다운 게 뭔데?" - P151

"나는 어느 지점을 이제 지나온 것 같아. 다시는 돌아갈 수 없어."
아 그녀는 이제 그녀로서 자리한다. 갇히고 억압받는 그녀가아니고 온전히 그녀가 되었다. 그전까지는 그녀의 삶의 모든 패턴과 방향을 다른 사람이 대신 결정해줬다면, 이제부터는 그녀가 직접 결정한다. 이것이 맞고, 이것이 옳다. 그녀는 이 모든 일, 지금의위기가 자신 때문에 일어났음을 깨닫고 루이스에게 사과한다. 그때 루이스가 그런다.
‘내가 말했잖아. 이건 네 잘못이 아니라고."
그때, 바로 그때, 루이스가 그렇게 말한 그때, 그제야 갑자기 내가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아, 맞다! 이게 왜 델마 잘못이야? 이게 왜델마 잘못이냐고, 그런데 나도 무의식적으로 델마를 원망하고 있었잖아, 맙소사! 델마를 강간하려는 남자가 없었다면, 그들의 돈을 모두 훔쳐간 남자가 없었다면, 그랬다면 그들의 인생이 이렇게 절벽으로 향하진 않았을 텐데! 애초에 그녀를 어릴 때부터 강압적으로 가둬두고 살았던 남편이 없었다면?
- P155

시종일관 등장하는 거의 모든 남자가 그랬다. 그랬는데, 그게지금 우리의 삶이다. 강압적인 남편과 강간하려는 남자, 피해자인여자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경찰, 돈을 뜯어가는 남자, 아무렇지도않게 성희롱을 일삼고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보는 남자. 루이스의남자 친구는 그중 ‘나은‘ 남자였는데,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뜻대로 상황이 돌아가지 않자, 테이블 위의 모든 것을 거칠게 손으로 쓸어버리는 폭력적인 성향을 보인다. 여자를 때리진 않았지만,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거칠게 변하는 남자를 좋은 남자라고 할 순없을 것이다.
친구와 나는 영화를 보고 나온 뒤에 영화에 대해 계속 얘기했다. 나는 아직도 내 안에 여성 혐오가 남아 있는 것 같아 너무 괴로웠다. 갈 길이 멀었다는 생각에 아득해졌다. 그렇게나 공부하고 주의를 기울이는데도 아직도 갈 길이 멀다니.. 아직도 많이 부족하구나, 나라는 인간 친구와 나는 이번 여행에서 <델마와 루이스〉를함께 본 시간이 가장 좋았다고 얘기했다. - P157

‘홀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누군가와 침대를, 화장실을, 부엌을 함께 사용하지 않음을 의미한다면, 홀로 살아간다는 것은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불 꺼진 집에 돌아가 내 손으로 불을 켜고 내 손으로 보일러를 돌리고, 내 손으로 침대의 시트를 갈아치우는 일들이 간혹 외로움을 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누군가에게는 오히려 더 자유롭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홀로 살아간다는 것‘이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 나 혼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그런 삶이라면,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하기가 무척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그레이브스조차 도시로거처를 옮겨 다른 이들과 함께하기를 원하니까. 내가 비명을 지르면 옆에서 누군가 들어줄 수 있는 그런 곳. 내 공간에 내가 비록 혼자일지언정, 문을 열고 나가면 얼마든지 다른 누군가를 볼 수 있는그런 삶을 그가 원하니까 - P223

가족이라서 멀쩡한 아버지의 요강을 어머니가 비운다는 말, 같은 가족인데도 요강을 비우지 않는 아들. 이 집은 대체 어떤 집인가 나는 다른 사람들의 사랑이나 연애, 혹은 결혼에 ‘난 반댈세‘
를 외치고 싶지는 않다. 다 저마다의 사연과 사정이 밖에서 보았을 때는 절대 알 수 없는 아주 많은 것이 거기 담겨 있다고 생각하므로, 그렇지만 평생 아버지의 요강을 비워온 어머니와 그 상황에한 점의 의심이나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 이 가족 구성원을 보노라니, 나나에게 ‘이 결혼 반댈세‘를 외치고 싶어졌다. ‘부부‘여서 왜아내가 남편의 요강을 비워야 하는가. 왜 남편은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지 않는가.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는가. 지랄 맞은 경우가 아닌가. - P238

시간이 지나 소설 속에서는 아내가 자신에게도 자신의 시간이있는 거라며 남편의 제안을 거절하고, 남편은 ‘아내에게도 아내의시간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받아들였다는 것은 다행이지만,
사실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 진작 일어났어야 했고. 사랑해서 결혼했다고 해서 같은 꿈을 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설사 그렇다 해도 우리에겐 상대의 의견을 물어보는 게 반드시, 꼭 필요한 법이다. 이건 기쁜 일,
축하할 일, 마땅히 좋아해야 할 일이니까 네 의견을 묻지 않아도 당연히 좋아하겠지, 라는 생각은 정말이지 오만하지 않은가. - P244

변방에 남겠다는 김경미 시인의 시가 생각났다.



나는야 세컨드 1


누구를 만나든 나는 그들의 세컨드다
,라고 생각하고자 한다
부모든 남편이든 친구든
봄날 드라이브 나가자던 자든 여자든 - P247

그러니까 나는 저들의 세컨드야, 다짐한다
아니, 강변의 모델의 주차장 같은
숨겨놓은 우윳빛 살결의
세컨드, 가 아니라 그냥 영어로 두 번째,
첫 번째가 아닌, 순수하게 수학적인
세컨드, 그러니까 이번, 이 아니라 늘 다음, 인언제나 나중, 인 홍길동 같은 서자, 인 변방, 인
부적합, 인 그러니까 결국 꼴찌,


그러니까 세컨드의 법칙을 아시는지
삶이 본처인 양 목 졸라도 결코 목숨 놓지 말 것
일상더러 자고 가라고 애원하지 말 것
적자생존을 믿지 말 것 세컨드, 속에서라야
정직함 비로소 처절하니
진실의 아름다움, 그리고 흡반, 생의 뇌관은,
가 있게 마련이다 더욱 그곳에
그러므로 자주 새끼손가락을 슬쩍슬쩍 올리며
조용히 웃곤 할 것 밀교인 듯

나는야 세상의 이거야 이거 - P248

나는 동물을 키우지 않고 앞으로도 키울 생각이 없다. 그러므로 E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아는 E는 사람보다 고양이를 더 좋아한다. 관심의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고양이다. 함께길을 걷다가 한 어린 아이가 엄마 뒤에 따라가면서 소리 내어 우는걸 본 적이 있다. 아, 저 아이 왜 울지? 라고 나는 계속 그 아이를 봤는데, E는 내가 보지 않는 곳으로 뛰어가서는 길고양이한테 먹이를주더라. 그때 내가 에게 말했다. 우린 이렇게 다르구나, 같은 길을걸으면서 나는 우는 아이를 보는데 너는 고양이를 봐. E는 내가 사람을 예뻐하는 만큼 고양이를 예뻐하고, 내가 사람에게 위로받는만큼 고양이로부터 위로받는다. 그러니 E에게 고양이가 심각하게아픈 것은, 나에게 내 사랑하는 사람이 아픈 것과 다를 바 없다, 라고 나는 다만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그러니 나는 E의 고통을 공감한다기보다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뿐이다. - P265

동물 학대는 인간에게서 나온다. 그토록 끔찍한 짓을 하는 게인간이다. 그러니 독미나리 술이나 먹을까 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바가 아니다. 지긋지긋한 인간들, 내가 그런 인간들 중의 하나라니. 그러나 세상에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알리고 싶어 하고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도 인간이다.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자고 노래하는 것도 인간이다. 아픈 동물을 끝까지 최선을 다해 돌보겠다고 하는 것도, 동물 해방을 주장하는 것도 역시 인간이 하는일이다. 그렇게 우리는 아슬아슬하게 이 지구를 버텨가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동물을 학대하는 사람들과 동물 실험을 하는사람들 또 동물 해방을 주장하고 돌보는 사람들, 그 경계선에 자리하고 있는 걸까? - P270

게다가 남자들에게 강인함을, 냉정함을, 객관적임을 주입하는 순간 ‘여자들은 그렇지 않다‘와 동시에 ‘그래서 열등하다‘가 되어버리니까. 이 책에도 나오지만, 여자들은 남자들로부터 보호받기를 원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약하니 우리를 보호해줘, 를 주장하는 게 아니다. ‘너네, 폭력을 쓰지 마!‘를 말하는 거지.
토니 포터는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이 사회에서 차별을없애고, 여성에 대한 폭력을 없애는 길은, 남자의 사회화 자체가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는 것도 분명히 알고 있고. 토니 포터같은 사람이 알고 있고 또 여러 사람에게 얘기하기를 선택했다는것은 분명히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할 것이다. 백 명이 듣는다고 백 명이 다 바뀌는 건 아니겠지만, 그중의 일부는 그동안 자신이 ‘선한 남자로서‘ 폭력이 행해지는 것에 어떻게 일조했는지를인지할 테고, 잘못을 뉘우칠 것이며 그러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할테니까. 그런 사람이 점차 많아지면 저자가 바라는 것처럼 더 나은세상이 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길 바란다, 나도. - 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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