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랑 그런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사랑에 푹 빠졌을 때, 우리가 일상을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간신히 회사에 앉아 있는 일들의 연속이었음을. 중요한 일을 업무 시간 내에 하는 것조차힘겨웠음을, 누군가를 ‘너무‘ 혹은 ‘아주 많이 좋아하는 것이 우리의 이성을 얼마나 앗아가는지를. 우리가 문자 메시지를, 전화를, 이메일을 얼마나 기다리는지를. 그런 것들을 내가 보낼 때면 어떤 단어를 선택할지 고심하는 것도, 심지어 보내는 시간조차 지금이면될까 망설이던 순간들을. - P67

될까, 생지독한 사랑에 빠진 나는 마치 뇌가 혹은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똑똑하다는 말을 듣던 나도, 재치 있다는말을 듣던 나도 없어졌다. 이런 행동은 옳지 않아, 하며 평소에 하지 않던 일들까지 저질렀고, 말문이 막히는 일이 많아졌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나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행동도 제대로 못하는 멍청이 그 자체였다. 그러니 아니 에르노의 저 한 줄 한 줄이 다 내얘기였다. 내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내 얘기이며 지독한 사랑에 빠진 모든 여자들의 얘기였다.  - P67

그 글을 보노라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한결같은 고민을, 항상 하고 있었다고. 그리고 남자들이 혹여 술집 포스팅을 쓴다면 ‘화장실이 안에 있어서 좋다‘는 글을 쓸까? 하는 궁금증도 생겼다. 여성 전용 화장실, 여성 전용 주차장, 여성 전용 휴게소를 두고역차별이라고 주장하는 남자들이 있다는 걸 안다. 그것들이 ‘왜‘ 있는지 전혀 모르는 걸까?
어제는 내내, 앞에 인용한 레베카 솔닛의 문장이 떠올랐다. 남자들아, 밤에 돌아다니지 마,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 P118

늦은 밤에 아이를 데리고 걸어가는 길이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한이장 할머니는 얼른 본인의 일을 마치고 차를 몰고 태우러 오지 않았는가. 이런 공감, 이런 배려를 실행에 옮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볼 수 있고, 어려움이 있다면 도우려고 하시는 분이다 보니 이장 역할도 매우 잘해내실 거라고 믿는다. 이 책의 저자는 그간 이장 뽑는 제도가 잘못됐다고 생각했고 못마땅하다고 여겨서 기권했는데, 그 사이에 누군가는 ‘잘못된 걸 바로잡겠다‘ 는 생각으로 행동에 옮겼다. 이 얼마나 근사한 사람인가! 불평과 불만을 가진 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개선해 나가려고 하다니, 나는이 이장 할머니에게 반해버리고 말았다. - P131

할아버지는 손녀를 어떻게 협박해야 하는지 잘 안다. 이건 우리 둘 다 행복해지는 거라고, 내가 너를 너무나 사랑해서 그러는 거라고 네가 밖에 나가서 이상하게 말해도 아무도 네 말에 귀 기울여주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말비나 역시 알고 있다. 그래서 기절할지경이 되면서도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심지어 말비나가 어릴때부터 이 부당한 폭력에 노출됐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할머니는 죽어가면서 이 어린 소녀에게 유언까지 한다. 할아버지를 곤란하게 만들지 말아달라고. 이제 남자 친구가 생기고, 자신의 이름이
‘권리‘를 뜻한다는 걸 새삼 되새긴 말비나는 깨닫는다. 할머니가 자신을 사랑한 게 아니었다. 자신이 할머니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해서도 안 되었다. 그것이 할머니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서도 안되었다. 이것이 착한 아이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는 것을. - P133

내게 일어났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건 아주 오랫동안 나 스스로 나를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다. 어릴 적의 나는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는 내게 일어나는 일이 무언지 분명하게 인지하지 못했고, 그것을 인지하는 나이가 되었을 때는 내 안의
‘음탕함‘이 싫었다. 내가 싫다고 계속해서 분명히 말했다면, 도망쳤더라면 그 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내가 미적지근하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으므로 그 일이 반복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그것은 내 안의 음탕함이 되었다. 어린년이 음탕했다고, 나는 나를 그렇게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볼까 봐 두려워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혹여 어릴 때부터 음탕했다는 말을 듣게 될까 봐 나는 정말로두려웠다. 그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그 일을 당했다는 것, 그게 어린 나의 음탕함 때문이라는 것, 그게 나를 미치게 했다. 그래서 누르고 눌렀다. - P134

언젠가부터 나는 그 일을 입 밖으로 내기 시작했다. 입 밖으로내면서, 어릴 적에 울지 못했던 것들을 나중에야 울게 되었다. 여러명의 여자들과 함께 모여 이 일에 대해 얘기했을 때 내가 놀란 건, 그 자리에 있던 여자들이 대부분 나랑 비슷한 일을 당했다는 거였다. 그들 대부분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고, 그들이 당한 일을 주변 어른들에게 말했을 때 그들이 들은 대답은 말비나와 내가 들은말과 똑같았다. "네가 예뻐서 그렇지." 그들은 더는 누구에게도 그일을 말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 P134

다른 많은 여성들이 어린 시절 성추행당한 일을 말하지 못하고가슴속에 담아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더 많이 말하기 시작했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녀들은 자신이 당한 일을 입 밖으로 꺼내며 울었다. 어린 그들을 만지고 더 심한 행동을 한 사람들은 그 위치도 다양했다. 할아버지, 아빠 친구, 옆집 아저씨, 사촌 오빠 등등.
모두들 그저 말하지 못한 채로 살아왔다. 누가 먼저 말하기 전까지는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한번은 친구에게 나의 속마음까지 얘기했다. 나 스스로 어린 게 음탕했다는 생각을 했다고, 무엇보다 그게 나를 너무 힘들게 한다고 그때 내 이야기를 들어주던 친구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음탕하다는 말은 초등학생에게 쓰는 단어가 아니야." 그 말을 들은 나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줄줄 눈물을 흘렸다. 그간 내가 어린 나를 미워하고 원망했다는 게 미안해졌다. 또 언젠가 술을 마시며 친구들 앞에서 얘기했을 때, 그 친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건 네잘못이 아니야." - P135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어쩌면 아주 많은 사람이 어린 날의 상처를 안고, 그것이 자기잘못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나는 표현하고 드러내고 주변에 좋은 친구가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바깥으로 드러내 말을 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같이 울고 화내고 욕하면서 풀어낸덕분에 지금 건강한 생활을 해나간다. 이런 나와는 달리 자신의 상처를 안으로만 삼키는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어린 시절의 상처를 비밀로만 간직한 탓에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을여전히 듣지 못한 채 자기 자신만을 원망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건 정말이지 결코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당신은 더 반항할 수 없었고, 당신은 음탕하지 않고, 당신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혹여 이걸 모르는 채로 여전히 세상의 잔인한 소식들에 울며 가슴을칠 사람이 있을까 봐 이 말을 해주기 위해 이 글을 썼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정말 그렇다. 당신 잘못이 아니다. - P139

아주 갈길이 멀지만 위에 언급한 노르웨이처럼, 사회적으로 아빠가 육아휴직을 받는 분위기를 만들고, 그렇게 육아를 함으로써 나라에서 지원을 받는다면 많은 것이 점차적으로 달라지지 않을까. 이렇게 쓰고 있지만 특히 한국에서는 그렇게 되기까지 아주 아주 멀다는 걸안다. 멀기만 할까? 실현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그렇지만 누구나 다 아는 아주 기본적인 전제는 아이를 낳기만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나라가 아이를 키우는 데 대체 뭘 얼마나 해준다고 자꾸 아이를 낳으라, 낳으라고 하는가. 가임기 여성 분포도‘ 같은 걸 뿌려대는 나라에 과연 어떤 답이 있을까. 지금 내가 아빠와 엄마가 함께 육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 지점과 가임기 여성 분포도를 뿌려대는 그 지점의 간극은정말이지 얼마나 어마어마하게 먼가. 이건 무슨 우주에 혼자 떨어진 느낌 같은데,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혼자 우주에 남겨진 앤해서웨이의 기분이 이런 걸까.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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