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 경험 속에서 제시의 여성 화자의 언어들, 그 목소리의 유령 화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제가 이전에 썼던 시들의 화자는 이런 유령 화자들이었습니다. 이승의그라운드에 발 디딜 데가 없는 바리공주처럼, 세 번이나죽임을 당했으나 다시 돌아온, 거절당하고 쫓겨난 바리공주처럼 죽임을 당한 화자들이었습니다. - P40
무당이 죽은 영혼의 억울함과 슬픔을 자신의 몸에 얹어 발설하는 것, 혹은죽은 이의 영혼에게, 목소리에게 가보는 것처럼 거절당한유령 화자가 시를 발설하는 거였다고, 이전 제시의 화자를 저 스스로 이해했습니다. 바리공주 신화는 죽음을 극복하는 이야기라기보다 죽음을 여행하는, 죽음을 넘나드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바리공주 신화를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여성, 시하다』에서 여성의 시학을 전개하는데 ‘비빌 언덕‘으로 삼은 것은 바리공주가 여자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체제로부터 거절되고, 추방되고, 헤쳐졌으나, - P40
다시 여자이기 때문에 작은 노동 행위들에 대한 신성을발견할 수 있었고, 종당에는 죽음(죽임)에서의 귀환을 도모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신화는 저에게 죽음이 일회적이고 직선적인 시간의 사건이 아니라 복수적이고 끝없이 귀환하는 생명의 사건임을 드러내주었습니다. - P41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그래서 제가 피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데요. 바로 변할 수 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지요. 영혼은 ‘있음‘과 ‘없음‘이라는 이분법으로 믿음의 틀안에 가둘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영혼이라고 명명하는순간, 이미 영혼이 아닌 것이 되는 게 영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저는 우리에게 ‘나‘에게 한 사람 또는 개인 - P41
의 것이라 명명할 수 없는 어떤 복수적이고 집단적인 무엇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있어서 우리는 연민하고 사랑하고 죽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을 영혼이라불러야 한다면 할 수 없지요. 이것은 저 나무와 저 돌과저 물과 저 동물에게 고루 번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한테만 있는 것이 아니겠지요. 그것으로 우리는 연결되어, 그것에서 나오는 감각들로 얽히고설키는 것이겠지요. - P42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개정판을 출간하기 위해 다시교정을 보면서 느낀 점이 있습니다. 물론 그 책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의 한국말과 20년 지난 후의 한국말이 많이변했다는 것도 있지만, 제가 바리데기의 세 번의 여행 (죽음 여행)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여행, 그러니까바리데기가 아버지의 권유를 뿌리치고 강을 건네주는 뱃사공이 되는 세 번째 여행을 너무 협소하게 해석한 것은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내용을 수정하거나 보태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만약 그 책을 지금 쓴다면, 그 세 번째 여행에서 바리데기가 강을 건네주는 역할을 맡은 것이 애도의 여행이었다는, 공감의 행함이었다는의견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바리데기는영원히 애도해주는 역할을 맡은 것이었습니다. 누구를 위해? 남은 사람들만이 아닌 죽은 사람들과 우리의 연결성, - P42
영혼을 위해서 말입니다. 비탄하는 사람들과 영원히 연대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 영원한 비탄의 연대가 영혼을위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마 영혼이라는 단어는 그런 행함을 지칭하는 말일 것입니다. 제가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를 쓰면서 비탄의 연대를 늘 마음속에 두고 있었던 것은, 어쩌면 영혼이라 이름 붙인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저는 시를 쓰면서는 늘 존재론적 개종이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 P43
그렇다고 제가 전체주의적이고 탈개인화된 어떤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식물의 영혼, 동물의 영혼, 인간의 영혼 이렇게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애니메이션 세계처럼 영혼계와 현실계를 나누어 생각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영혼과 육체를 나누어 이원성을 증명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영혼의 집으로서의 육체를 이야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영혼은 일개인을 넘어선, 자아 정체성을 넘어선 어떤 거대한 존재성을 가진 것이겠지만, 그것을 흡입하면 자아 정체성이 더 세어질 것이라는 역설적인 생각도 해봅니다. ‘내‘ 영혼이라고 하기에는너무나 큰 것이 ‘내‘ 영혼일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질문하곤 합니다. ‘내‘ 영혼이 ‘내‘ 육체를 알아볼까? ‘내‘ 영혼이 지금 쓴 ‘내‘ 시에 깃들였나? 하고요. - P43
당시에 저는 남해의 절에서 참선에 참여하고 있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좀 더 자세히, 다른 방향으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스님의 말씀이 가부좌한 우리에게 떨어질때마다 제 몸이 그렇게 비루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저 멀리 공중으로 떠올라서 제 몸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돼지를 먹는 돼지의 몸을, 돼지로 다루어지는 몸을, 저는 육욕에 사무친 우리의 몸을 비하하는 스님의 말씀이 떨어질 때마다 그에 반하는, 혹은 핑계를 대는 시를중얼거리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몸이 있다는 것은 ‘감각‘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고 고통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저 - P46
는 그때 침묵하는 돼지 행성의 돼지 한 마리로서 멀리서돼지의 목을 자르고 희롱하고 마침내 먹는, 구제역에 걸린 돼지를 산 채로 구덩이에 묻는 인간인, 나와 같은 감각을 가진 동물 돼지를 봤습니다. 심지어 돼지와 몸을 서로맞대고 있다는 공통감각을 홀연히 느꼈습니다. 서로를 인지하는 존재의 감각을 가졌습니다. 이것을 관념으로 환원할 수 없는, 동물성이라는 공통감각, 감각의 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느끼는 것과 느껴지는 것이 동일한 감각 말입니다. 저에게서 동물 존재라는 어떤 추상성이 떨어져나가고, 동물 존재의 총체성이라는 어떤 생의 감각이 내려앉았습니다. 저는 저의 존재가 살아 있는 살 속에 있음을 느꼈습니다. 저의 안에서 자연스럽게, 그러한 동물들과함께 도살된 동물의 비명 소리를 들었습니다. - P47
그동안 우리는 동물을 결핍의 존재, 언어 없는 미물, 응답없는 주체로 느끼고 판단해왔지 않습니까? 마치 남자들이여자들을 그렇게 느꼈듯 말입니다. 휴머니즘이 버린 두존재가 동물과 여자라는 항간의 말이 있지 않았습니까? 동물성은 저 자신이 시를 쓰며 그것과 내통함으로써 재현이나 비유가 아니라 어떤 내재성을 몸소 경험하는 일이었습니다. 동물성은 저의 내적 세계의 비유의 산물이 되거나 초월이 필요한 어떤 존재가 되는 게 아니라 동물 자체가 자연에 내재하듯 저라는 시인의 내재성이 되었습니다. - P47
제가 쓰는 용어 ‘시하다‘ ‘여성짐승하다‘는 ‘되기‘가 아닙니다. ‘되기‘는 은유를 전제로 하지요. ‘하다‘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다‘는 타자를 동사적 관계 속에서 발견합니다. 타자를 명사로 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다‘를 통해동물의 몸, 벌거벗은 몸, 자연의 몸이되지 않습니까? 그처럼 ‘하다‘ 속에서 저는 타자 앞에서 동요하는 자이고, 구멍 난 자이며, 타자에게 매달려 안달하는 자입니다. ‘사랑하다‘는 나를 타자로 만듭니다. 그래서 랭보처럼 "나는 타자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시하다‘는 ‘사랑하다‘입니다. 나를 타자에게 내주지 못해 안달하는 말이 시입니다. 모든 시는 몸으로 하는 연애시이며 풍자시라고 저는오래전에 저의 에세이‘에서 쓴 적이 있습니다. 시는 몸으로 ‘하는‘ 관계 맺기입니다. 이때 우리는 주체도 객체도 아닌 관계 그 자체가 되지요. 우리는 서로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 민족, 국가, 이데올로기의 한 부분도 아니 - P57
고 전체의 부속물도 아닙니다. 우리는 ‘자연‘이고 몸입니다. 익명적이고, 비분리적이고, 생물인 몸입니다. 이것으로 시하는 것이지요. 타자의 몸은 총체성으로 규정할 수 없는 어떤 ‘삐져나옴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삐져나온 것들과 일그러진 것들과 나의 삐져나옴과 일그러짐을 맞대는 것입니다. 동일성에의 강요가 우리를 얼마나 폭력 아래 있게 했고, 우리를 죽게 했는지 알지않습니까? 서정시마저 시인의 그런 시선 아래 타자를 둘수는 없습니다. 시에서는 타자의 나머지와 저의 나머지가만나는 것이지요. 우리는 서로의 몸으로 관계 맺고 있기에 서로 태어나고 병들고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그런 것으로 우리는 관계 안에서 서로 끝없이 발견하는 것이지요. - P58
사에서의 리듬은 시가 전개하는 시간이고, 에너지와 긴장, 현기증입니다. 한 편의 시의 리듬은 한 편의 시의 생애지요. 시에서의 리듬은 한 편의 시가 시라는 장에서 살아내는 모습, 과정 전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듬안에 시의미학과 윤리학이 작동할 겁니다. 물론 리듬은 신이 우리에게로 걸어오는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걸 시인이 받아안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에서 시의 리얼리즘을 말하는 사람들이 시에 등장하는 내용만을 가지고 시에서의 윤리학을 거론하는데, 그것은 시를 하나의 장르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그것은 소설을 다룰 때와 똑같이 시를 다루는 것입니다. 시의 시간은 강렬한 응축이기 때문에 운율이나 박자 혹은 호흡만으로도 정의내릴 수 없습니다. - P62
리듬은 시 속의 언어들과 그 언어들 때문에 언어 밖에 있게 된 입자들의 흐름이며, 그 흐름의 방식, 수학입니다. 리좋은 규칙이 아니라 생성입니다. 리듬이 시안에서 시인을 잉태하고, 시인을 분만합니다. 물론 한 편의 시 안에는반복이 있고 차이가 있겠지만 그것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일종의 변용입니다. 저는 『날개 환상통』에 「리듬의 얼굴」이란 제법 긴 시를 실은 적이 있는데, 제가 그 시에 그런 제목을 붙인 것은 제가 그 시를 쓰는 중에 이글이글 타고 있으나 싸늘한, 사라졌으나 따가운, 버리고 싶어도 버려지지 않는 제 몸의 살 - P62
아 있는 고통들, 그 고통의 리듬 끝에서 사라진 어머니의희미한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지요. 제 몸의 고통은 고뇌와 달리 리듬이었습니다. 그곳의 제일 깊은 곳엔 죽음도넘어서는 끝없이 ‘나‘를 소멸로 밀어 넣는 리듬의 실체, 사라진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내 고통의 주인은언젠가 제 몸을 수태한, 제 몸의 주인이었으나 지금은 사라진 이의 얼굴로 거기 있었습니다. 내밀성으로 깊이깊이침잠해가는 무한수열의 고통, 그 리듬의 끝에 제 몸의 기관을 하나하나 만들었으나 지금은 제 몸에 부재하는 어머니의 몸 같은 존재가 앉아 있는 걸 보았다고나 할까요. 아마도 제 몸을 만드신 이는 자신의 몸이 지닌 리듬을 나누어 ‘나‘를 만들었을 겁니다. - P63
리듬이 쓸개가 되고, 리듬이허파가 되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 시의 제목을 "리듬의 얼굴"이라 했습니다. 저는 시라는 것이 결국 그 텅 빈얼굴인 음악에 이르고자 하는, 끝끝내 하나의 벌어진 입술모양, 하나의 모음에 이르고자 하는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제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호스피스에 입원해 계셨는데, 저는 엄마가 입원한 방에 들어갈 때마다 유리 믹서에 들어간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엄마가 자신의 일생을 천천히 믹서로 갈아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블렌딩blending의 리듬이 느껴졌지요. 엄마가 경험한 산과 바다, 엄마의 시간, 엄마가 저장해둔 공간들. 그리고 우리 형 - P63
제들을 모두 소멸의 수학 속에 집어넣은 듯한 리듬 속에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엄마가 말을 못 하게 된 날부터는 모음 한 개가 방 안을 채웠다가 다른 모음 한 개가 다시 채우는 듯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 하나의 모음의 끝에다다르는 수열이 리듬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루트 기호를 붙인 것처럼 하나의 숫자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 마침내 모음 하나로 꺼지는 리듬 말입니다. 거기에 이르기위해 엄마의 리듬은 끝없이 헤엄쳐온 것이지요. - P64
황 시인이 제가 답변 중에 빠트린 ‘반복‘을 질문해주었습니다. 한 번 경험한 것은 영원히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파토스를 말입니다. 시작하기 전에 이미 반복이 있었습니다. 죽은 후에도 반복이 있을 겁니다. 시작도 끝도 반복의 결과물입니다. 지금 저의 현재는 반복을 반복하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반복을 반사하는 거울입니다. 단적으로 잠자고 일어나고 잠자고 일어나듯이 저의 과거는 저와 함께일어나고 잠듭니다. 그렇지만 리듬은 이 규칙적인 반복을시적인 이행으로 생성해주는 것이겠지요. 제가 시는 쓰는 것이라기보다 ‘하는‘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 P66
이것은 시의 리듬이 이 반복과 반복을 ‘수행하기‘ ‘이행하기‘로 변용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성들의 시에 대해 글을 쓰면서 느낀건 저와 동시대의 남성 시인들과 다르게 여성시의 화자들이 시에서 무엇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화자 스스로 행위를 한다는것이었습니다. 스스로 시안에서 몸을 움직이고, 행위를주고받고, 쓰러집니다. 그래서 저는 ‘시하다‘라는 용어를사용했습니다. 요즘 제가 쓰는 시들도 ‘죽음하다‘를 반복함으로써 오히려 지속을 영위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 P66
유한하게 닫힌 시간과 공간이 무한한 순환으로 자기유사성을 뚫고 우주선처럼 솟아오릅니다. 마치 시간의 흐름이 눈에 보이는 듯하고, 지금의 절망사건이 미래에도 끝나지 않을 절망 사건으로 확장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음악은 반복으로 구성됩니다. 열 번, 스무 번을 반복해도더 들려줄 것이 남았기 때문에, 아직 끝이 아니기 때문에음악은 반복합니다. 하지만 시는 이 음악을 배면에 갖추고 있기도 하지만, 이미지와 해석적 진술을 갖고 있기 때문에 반복 위에서 물처럼 튀어 오르고, 반대로 흐르고, 교 - P67
차합니다. 그래서 시의 리듬과 음악의 리듬은 다릅니다. 시는 박자가 아닙니다. 시는 반복 사이에 있는 것, 그 반복 사이에 있는 감각적이고 해석적인 것들의 리듬, 그것의 확장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시의 모습, 시의 반복은 모방해야 하고, 재현해야 할 원본을 전제로 하지 않기때문에 밖으로 튀어 오를 준비를 진행해나갑니다. 여자들의 시는 디뎌야 할 부동산이 없으니 방향 없이, 도달할 수없는 ‘사이‘의 공간에서 쓰이니까 더욱 그렇지요. 발 디딜곳 없는 미지에서 리듬의 발자국만 떠도는 것이지요. - P68
시의 원료는 감각이지요. 시는 어떤 장르보다 감각이 주재료이고, 시는 감각기관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장르입니다. 한 편의 시가 서사를 진행한다 해도 그 서사에서 시간적 요소를 제거하면 감각이 오롯이 남지요. 저는 학생들과 수업할 때 항상 학생들이 내놓은 감각적 소여를 가지고 어떻게 그것들이 한 편의 시가 되는지 토론했습니다. 물론 감각이니 지각이니 하는 용어를 써서 학생들을 괴롭히지 않았고, 학생들의 재료를 감각으로 옮겨 가게 하고, 그 감각들의 뭉텅이를 보이지 않는 어떤 에너지 흐름의단위, 생성의 블록, 묘사의 시점 안에 모이도록 만들어보게 했습니다. 그 감각들이 어떻게 문장에 놓여야 하는지, 그 감각들이 병렬적으로 교차하거나 수렴하고 발산해서대상에 종속되지 않고 어떻게 지각의 범주를 벗어나게 할수 있는지도 생각해보게 했습니다. 저는 감각이라 하지않고, 학생들에게 묘사의 숨은 형식들, 구조의 시점들이라고 말했습니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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