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내가 정신노동자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글을 쓰느라 긴 시간을 보내기는 하지만, 그리고 글쓰기 ‘노동‘이라는 말을 자주 쓰기는 하지만, 그래도 난 여전히 글쓰기가 사치라고 생각해요. 내가 주변에서 지켜보았고 지금도 여전히 보이는 노동에 비해 글쓰기는 사치라는 생각을 사실 난 오래전부터 해왔어요. 장을 보러 마트에 가서 계산대에서 일하는 여자들의 반복적인 동작을, 그 여자들이 들어 올리는 생수를 묶음을 보면서, 난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요. 만일 내가 저 일을 해야 한다면? 그러면 난 스무 살에도 저 일을 해내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죠. 심지어 쉰살까지 그 일을 하는 여자들도 있는데 말이에요. 1960년대에 장피에르 샤브롤Jean-PierreChabeol이라는 작가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스스로 육체노동자와 똑같다고 확신하는 걸 보면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나요. 고단하고 때로는 위험한 일부 육체노동을 어떻게 따뜻한 곳에서 책상에 앉아 하는 글쓰기와 비교할 수 있겠어요? 나는내 사촌 자매들처럼 공장이나 재봉 작업실에서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 너무나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때, 그러니까 스무 살경에, 난 노동에 따라 보상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주어진 문제들도 다르고요. 물론 그렇다고 몸이 아무 상관 없는 건 아니죠. 보다시피 나는 곧 여든두 살이 되고, 이미 정형외과 수술을 몇 차례 받았고 걷는 데도 어려움이 있어요. 하지만 내 가족의 다른 여자들과 달리, 내 어머니와 달리, 육체적 마멸과 영양 부족의 징표가 몸에 남아 있지는 않죠. 나에겐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할 때부터 몸이 아주 중요한 문제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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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여자』의 출발에는 일상 속에서 불쑥불쑥 솟아오르면서 점점 더 강박적이 되어간 한 가지 생각, 나에게 글을 쓰 - P55

라고 부추기던 그 생각이 배어 있어요. ‘나도 직업을 갖고 일을 하는데, 장을 보고 음식을 만들고 빨래를 하고 아이들을여기저기 데려다주고 병원에 데려가는 건 언제나 내일이다.
난 단 한 번도 혼자 극장에 가지 못하고, 남편이나 아이들 없이는 휴가를 떠나지 못한다‘ 이런 생각이죠. 내가 상상하던,
스무 살의 내가 바라던 삶은 그런 게 아니었는데, 무슨 일이일어났기에 바뀌고 말았을까요? 난 그 답을 알아요. 간단해요. 내가 대대로 상속된 가부장제를 대표할 만한 남자와 부르주아적인 결혼을 했기 때문이죠. 나는 당신의 아름다운 책의제목처럼 나 스스로를 ‘가누기‘ 위해서 글을 썼지만, 또한 나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해서, 희미하게나마 변화를 촉발하기위해서 한 일이기도 해요. 책이 출간되고 1년 뒤에 남편과 헤어졌고요. - P56

라그라브

「얼어붙은 여자가 출간되었을 때 그 책을 읽으면서 난 당시의 내 삶이 적나라하게 펼쳐진 모습을 보는 느낌이었어요. 물론 똑같지는 않아도 아주 많은 게 일치했죠. 난 놀라며 마음속으로 외쳤어요. ‘그래, 바로 이거야!‘ 당신의 책은 우리의차이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내 마음을 들쑤셔서 성찰과 질문을 불러냈답니다. 난 딸이 아홉, 아들이 둘 있는 가정에서 자라났고, 교사들까지 모두 여자인 여자 중등학교에서 기숙 생활을 했어요. 여성적 세계를 증오했고, 그 안에서 질식할 것같았죠. 남자들의 세계에 대해 그야말로 아무것도 몰랐지만, 영웅들이 등장하고 온갖 음모가 펼쳐지는, 뛰어난 업적 - P56

들이 이루어지는 책 속의 세계들은 나에게 자유의 약속이 되었어요. 그때 난 ‘남자들의 세계가 바람직하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대로라면 철저한 안티페미니스트가 되었어야 하죠. 그래서 스스로를 가누다』를 쓰면서 그런 내가 어떻게 페미니스트가 되었는지 보여주려고 애썼어요. 무엇보다 사적인 영역에서 지배 경험들이 자꾸 쌓였고, MLF의 그룹 상담 모임에서 그 경험들이 갖는 의미를 알게 되었죠. 같이 모여서 서로의 상황을 다 같이 분석함으로써 남성 지배가 얼마나 견고한체계를 이루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었거든요. 그때 내가 속했던 ‘기혼 여성 그룹‘에서(머지않아 다 이혼했죠) 내가 여자가
‘되었다‘기보다는 나 자신을 여자로 받아들인 셈이에요.  - P58

말하자면 여자인 것이 그때부터 진짜 내 일이 된 거죠. 그런 큰 변화를 겪고, 그 변화로 여럿이 함께하는 이론적 성찰에 참여하게 되고, 그렇게 나의 사회학적 접근법이 자리잡게 되었어요. 그 뒤로 난 계급과 젠더라는 이중 초점의 안경을 썼죠. 사회계급에 우위를 둔 건, 나 스스로 청소년기부터 강하게 느꼈던 계급적 경멸mépris de classe에서 비롯되었을 거예요. 지금은 더는 쓰지 않는 말이지만, 나에겐 늘 계급 본능이 있었거든요. 나아갈 길을 개척하기 위한 일종의 나침반이었죠. 그리고 페미니스트로 사회활동에 참여하고 젠더 연구를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하면서 계급과 젠더의 교차로 인한 결과들에대해 자문하게 되었어요. 분명한 사회적 혹은 역사적 문맥 속에서 계급과 젠더가 각기 어느 만큼의 무게를 갖는가 하는 질문이었죠.  - P58

에르노


난 당신 같은 상황은 체험하지 않았지만, 아프리카 여성 작가들과 교류한 적이 있어요. 우리는 글을 쓴다는 글을 쓰는 여자라는 사실로 가까워졌고, 각자 자신이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는지, 무엇을 하려 하는지 이야기했죠. 물론 그런 식으로글쓰기의 문제에 집중한다는 한계가 설정된 방식이 서구의지배를 가려주거나 부정할 위험이 있다는 건 나도 인정해요.
당신의 경우는 하물며 지식을 주는 자리에 있었으니까 어느정도는 지배 상황에 있었던 셈이네요.



라그라브


물론이에요. ‘당신은 주변부에서 고치려고 시도해보지만, 경국 그 어떤 것도 고치지 못한다. - P60

에르노


보편적인 페미니즘은 불가능해요. 페미니스트 투쟁을 사회투쟁과 분리할 수 없죠. 나에게 교차성은 명백한 일이에요.
여자들은 어떤 사회계급에 속하느냐에 따라서, 그리고 인종화되었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남성 지배라는 조건을 같은 방식으로 겪지 않으니까요. 내가 겪고 분석한체험들에 근거하는 확신이죠. 노동자인 나의 친척 여성들과내가 책 속에서 모델을 삼은 부르주아 여성들 사이에, 내 어머니와 시어머니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요?  - P61

어머니가 내 시어머니를 두고 했던 말이 기억나요. "우리처럼 자란 사람이 아니구나." 이때의 ‘우리‘는 그냥 ‘너와 나‘를 가리키는게 아니라, 다른 환경에 속해 있다는 뜻이잖아요. 지금 생각하기로, 내가 결혼 생활 중에 성차별적 지배를 받았고 또 받아들인 건 내가 속한 출신 계급이 사회적으로 지배받는 계급이었기 때문이에요. 당신과 마찬가지로 나에게 페미니즘은,
당신이 사용하는 표현을 그대로 가져오자면, "경험의 페미니즘"이에요. 난 당신이 책에서 한 말에 전적으로 동의해요.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은 빈민가에, 신정 국가에, 혹은 옆 건 - P61

물에 사는 여성들의 착취가 모두 끝날 때까지 자신이 투쟁할것임을 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영원히 투쟁할 준비가되었다는 것이다. "
요즈음 난 카미유 프루아드 메트리 Camille Froidevaux-Metterie로 대표되는 현상학적 페미니즘을 흥미 있게 보고 있어요. 시몬드 보부아르처럼 "체험된 젠더"로부터, 그리고 남성 지배의자리인 동시에 해방의 자리인 몸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이관심을 끌더군요. 하지만 한 가지 걱정은, 여성적 본성에 기반을 두었던 1970년대의 어느 페미니즘에서처럼, 예를 들어
‘돌봄‘ 직종 같은 분야에서 사회적 제약이 여자들에게 가하는특수한 무게가 가려지지는 않을까 하는 거예요. - P62

라그라브


나에겐 교차성이 늘 곤란한 문제였어요. 특히 논문을 지도할때 그래요. 분명한 상황에서 주어진 주제에 관련될 때, 젠더,
계급, 나이, 섹슈얼리티, 인종으로 인한 결과를 통계적으로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아주 어려운 문제죠. 난 젠더와 교차성에 관한 불완전한 이론들을 비판하기보다는 방법들에 관한 집단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렇게 여러 장치를 개선하려고 노력할 때, 주변에서 그중엔 훌륭한 연구로 나를 감탄하게 만드는 일부 동료들도 포함되죠 왜 제대를 계급보다 우위에 두느냐고 이의를 제기하기도 해요. 우리 - P62

는 젠더 연구가 학문적 정당성을 획득하고 학술제도 안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싸워왔는데, 정작 사회계급에 인식론적 우위를 두지 않는다는 이유로 젠더 연구를 끌어내리려 하는 거죠. 나는 계급 탈주자이지만, 젠더 연구를 깎아내리는 사람들에게 맞설 수밖에 없어요. 사실 그들의 말을 뒤집어서 응수할수도 있거든요. 남자 계급 탈주자들은 자신들의 젠더가 어떤힘을 발휘했는지 잊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거죠. 젠더 여정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계급의 여정에 대해서만 말하잖아요. - P63

나는 ‘나‘라고말하는 데 성공했고, ‘나‘를 개인화하지는 않았어요. 이미 당신이 쓴 글들을 통해서 그 문제에 대해 알고 있기도 했고요.
당신의 글에 대해 비평가들은 ‘나‘라는 인칭을 벗어나서 그녀‘라고 말하면, 삼인칭으로 쓰는 그 순간부터 보편성에 이른다고 했죠. 사실 난 당신 스스로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생각해요. 그때 나는 ‘나‘를 사용하면 보편적 가치를 갖지 못하는 특수한 경우를 소개하는데 그치게 될까봐 두려웠어요. 그런데 내 책이 나온 뒤의 반응을 보면서 깨달았죠. 독자들은 내가 지나온 길을 그 특수한 개별성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독자들 자신의 길을 비춰보라고 내민 일종의 거울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처음엔 ‘나‘가 두려웠는데, 결국은 나쁘지 않았어요. 심지어 글쓰기의 상대적인 자유에 이를 수 있었죠. - P71

에르노


『세월』하고 『여자아이 기억』일부에서 그랬죠. 나머지는 처음 글을 쏠 때부터 전부 ‘나‘였고요. 당신은 학술적 글쓰기의 비개인성에 매여 있었으니까, 나와 반대인 거죠. 『사건』이나「수치」와 달리, 세월을 쓸 때는 내가 개인적으로 지나온 길을 되짚어가겠다거나, 내 인생의 어느 한순간 속으로 빠져들겠다는 생각이 없었어요. 그보다는 한 세대를, 우리 안에서 그리고 밖에서 변화한 것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죠(처음엔 세대라는 말을 그 책의 제목으로 생각하기도 했답니다). 물론 여자로서, 그리고 암암리에 계급 탈주자로서 그 일을 하고 싶었던 거예요.  - P72

『세월』을 쓰겠다는 계획은 마흔다섯 살쯤에, 지나간 시간에 대한 강렬한 자각에서, 그리고 내가 살고 생각하는 방식을 내 어머니나 1950년대의 일반적 세계의 방식과 비교해볼 때의 당혹감에서 시작되었어요. 많이, 특히 여자들에겐 엄청나게 많이 바뀌었잖아요! ‘나‘를 ‘사람들‘과 ‘우리‘ 안에 위치시키면서, 그렇게 내 뒤에 놓인 시간을 되짚어보고싶었어요. 하지만 ‘나‘를 다 비워내기까지 오래 걸렸죠. 정말로 비워내면 구체성이 떨어질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내 책은 역사서, 사회학 저술과 어떻게 다른가 자문해보았고, 개인 - P72

적인 사진들을 넣어 설명하고 그 사진과 관련된 기억과 미래로의 투사를 더하는 방식으로 답을 얻었어요. 『여자아이 기에선 주체가 누구인가에 따라서 ‘나‘ 혹은 ‘그녀‘를 내세웠죠. 1958년에 열여덟 살이던 여자아이를, 그 아이가 폭력적으로 처음 겪은 성적 경험을 내가 다른 ‘나‘를 보듯이 멀리서 본 거예요. 그 아이는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규칙이 지금과 전혀 다르던 시절에 자신의 믿음과 아비투스에 따라 변화해나갔고요. 나는 망원경으로 보듯 그 아이를 바라봐요. 그런 식의 거리두기가 점점 더 편하게 느껴지죠.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땐 ‘나‘를 피할 수 없었지만요. 그 자유는 계급 탈주자로서의 나의 역사와 그 특성들에 관계될테죠. 탈주자는 서로 다른 여러 상황과 경로를 포괄할 수 있는 단어잖아요. 『빈옷장』의 경우는 아무도 모르게, 아무한테도 말 안 하고 썼어요. 책 내용이 나와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폭력적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죠. 그래도 흔들림 없이 썼어요.  - P73

어쨌든 독자들에게 여러 번 받은 질문이기도 한데, 난 단 한번도 가까운 사람들이나 누군가의 반응에 대해서 생각해본적이 없어요. 단숨에든 서서히든 나를 사로잡은 것, 어서 써달라고 요구하는 것을 쓰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단순한 열정』과 『탐닉은 내 아들들에게 아마도 읽기 힘든 글이었을테죠. "단순한 열정 앞부분에서 글쓰기는 "도덕적 판단의 정지"를 지향해야 한다고 쓴 건, 그 글이 펼쳐놓게 될 위반적성격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방법이었을 거예요. 사실상 난, 텍스트와 단둘이 대면한다는 점에서, 엄청난 고독 속에서 글을써요. 하지만 당신이 가족을 생각하면서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들도 다 이해할 수 있어요. - P74

라그라브


조금 전 당신은 당신 안에 자리 잡은 글쓰기가 있다고 했어요. - P74

그게 나와야 하고, 글로 쓰여야 하는 거죠. 글쓰기의 욕망, 그리고 글쓰기의 힘이 있으니까요. 거기가 바로 문학과 사회학사이에 놓인 경계일 테고요. 사실 그 경계에는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죠. 어떤 것이 사회학에서 가능한지 아닌지를 내가판단할 수는 없지만, 늘 그 문제에 관심을 쏟고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 책에서 사용한 소재들 중에 내 책에서는 전적으로배제된 것들도 있죠. 성생활,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 단순한열정과 그렇지 않은 열정, 임신중지가 범죄였던 시절에 겪은끔찍한 중절의 고통, 방학 캠프에서 겪은 강간의 경험 같은 것들이죠. 당신의 작품과 내 책의 큰 차이를 말하자면, 당신에게는 내밀한 것의 한계를 밀어낼 수 있는, 아니 없애버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거예요. 당신은 그렇게 해서 "사적인 것이정치적인 것이다"라는 페미니스트 슬로건을 되살리죠.  - P75

『단순한 열정』과 『사건』에서 당신은 아무도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어요. 사회학자로서 나는 까다로운질문과 맞닥뜨렸고요. 바로 내밀성의 경계가 어디까지인가 하는 거죠. 예를 들어 내 형제자매들과 인터뷰할 때의 태도가 그랬고, 나의 사적인 삶을 되살릴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난 가까운 사람들의 사적인 것을 내가 마음대로 끌어내지 않으려고조심했어요. 내가 겪은 상처들 중에도 인터뷰에서 언급하지않은 것들이 있고요. 이른바 ‘사적인 삶에 대해 나 스스로 자기검열을 한 거예요. 두 경우만 예외죠. 그러니까 첫 고해성사이야기, 오빠와 함께 루르드로 순례를 갔던 이야기는 내밀한 요소들로 분류될 수 있어요.  - P75

읽으면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죠. 예를 들어 당신이 파리를, 혹은 노동의 세계를 처음 접할때 이야기를 읽다 보면 흡사 당신 곁에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 들거든요. 왜 여자들이, 나부터도 그랬지만, 당신 책 속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까요? 그건 바로 그 책을통해 우리가 가족의 삶, 중등학교, 대학교 같은 구체적인 상황들과 이어진 감정과 감각 속에 젖어들 수 있기 때문이에요.
난 내밀한 것을 글로 쓰면서 두려움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글을 쓰는 동안 나 자신을 나와 분리된 존재, 다른 사람으로 느끼거든요. 그 또한 세계 안에 존재하는 한 가지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사랑의 열정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가장 내밀한 것이지만, 난 그 이야기를 글로 쓰면서 절대적으로 매 순간을 나눌 수 있었고, 심지어 내 생각들을 사물로 간주할 수도 있었어요. 모든 것을 사물처럼 간주할 것. - P86

1974년에 「빈 옷장』을 쓰던 때만 해도 난 계급 탈주자라는 용어를 알지 못했어요. 10년 뒤 자리가 나왔을 때 국립농학연구소-오늘날의 국립 농학 · 식량 · 환경 연구소INRAE 의 전신이죠 의 한 연구원이 클로드 그리뇽의 강연 내용을 전해주었고, 그때 그 용어를 처음 듣고 의미도 알게 되었어요. 나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었죠. 그때부터 그 말을 자주 사용했어요. 하지만 거의 언제나, 전쟁 중의 탈주자는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 배신하지만, 내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썼죠. 사실 탈주자라는 말에는 스스로 내린 결정, 명철하게, 심지어 고집스럽게 추구한 의도라는 개념이 들어 있어요. 시대에 대해서도, 그 어떤 영향에 대해서도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위계를 고려하지 않는 단어죠. 하지만 사회나 학교가 우리에게이러저러한 방식의 말을 사용하라고, 이러저러한 책을 읽으라고 말한다면, 그로 인해서 서서히 자기 가족 환경의 취향과태도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면, 그것을 스스로 의도한 변절이 - P101

에르노


어느 순간에 자기 스스로를 탈주자라고 느끼게 되는지는 잘모르겠어요. 내 생각엔 단계적으로 오는 것 같아요. 하지만 나에겐 절대적으로 분명한 중요한 순간이 있었어요. 남편과 아이와 함께 안시에 살게 되면서 부모님을 못 만난 지 2년째 되었을 때였어요. 한 번도 못 만난 건 물론이고, 목소리조차들을 수 없었죠. 부모님 집에는 전화가 없었거든요. 그러다가 - P107

찾아갔는데, 어째서 그때 나 자신이 탈주자로 느껴졌을까요?
내 부모의 현실이 단번에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일 거예요. 이전에는 이미지로 떠올렸다면, 그때는 노르망디 억양, 말하는방식, 다른 사람 말을 자르기, 감정을 표현하는 강렬한 말들,
거친 동작, 모든 게 그대로 나타난 거죠. 부모님 가까이 살 때는 자각하지 못하던 것들이었어요. 사실 부모님은 내가 어렸을 때나 젊었을 때나 그대로였죠. 똑같이 정겹고 극성맞았어요. 내가 달라진 거죠. 내 부모를 나의 새로운 환경으로부터 바라보게 되었고, 내 부모가 민중 세계에 속했음을 드러내는 것들이 내 눈에 보이기 시작한 거예요. 부엌에 같이 서 있는데, 그래요, 여닫이문으로 카페와 이어진 부엌이 너무 좁고초라해서 마음이 아팠어요.  - P108

그 이전과 다를 바 없이 냉장고도 없고 욕실도 화장실도 따로 없었죠. 그땐, 그러니까 1960년대에까지도 그런 집들이 있기는 했지만, 점점 줄어들던 때였거든요. 말하자면 그때의 느낌은 물질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나는 저들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는 거였어요. 물론 애정이 있었고, 아버지는 좋아 어쩔 줄 몰라 하고 어머니는 내아들에게 달려들었죠. 하지만 아이가 자기가 왜 여기 와 있는걸까 어리둥절하면서 놀라는 모습을 보면서 난 내 세계가 바뀌었음을 깨달았어요.
일종의 사회적 현현이라 할 수 있을 그런 순간들은 쉽게 찾아오지 않죠. 아주 특별한 상황에서 가능하니까요. 영화<레벤느망>에서 임신한 상태로 부모를 보러 간 안이 같이 밥을 먹으면서 우스운 라디오 방송을 듣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 P108

때 안은 침묵을 지키잖아요. 그 장면을 보면서 내가 십대 때 옆에서 라디오 뤽상부르 에 나온 풍자만담가의 이야기를 듣곤 하던 부모님이 생각났어요. 난 그 장면이 계급 탈주자인 대학생 여자아이를 아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그 아이의 침묵은 ‘나는 더는 저들과 같지 않아. 난 저런 걸 들어도 웃기지 않아‘ 같은 거죠. 혹은 ‘내가 임신한 걸 알게 된다면.……
‘나는 내 어린 시절로부터 너무 많이 멀어졌구나… 이고요.
내 생각에는 돈보다는 지적이고 문화적인 획득이 계급 탈주자를 만드는 것 같아요. - P109

라그라브


내 경우는 스스로를 가누다 이전에는 아니었는데, 그 책을쓰면서 처음 나 자신을 ‘계급 탈주자‘로 지칭했어요. 내가 지나온 사회적 경로를 규정해야 했는데,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와 마주한 거죠. 우리는 계급 탈주자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계급 탈주자가 되고, 내가 계급 탈주자가 된 건 사회과학고등연구원의 연구교수로 선발되었을 때였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아주 늦어서죠. 계급 하락이 일어날 이유와 가능성이 없어진, 정말로 안도할 수 있게 된 때이죠. - P109

에르노


어떤 것이 눈에 보이게 만들려면 이름을 붙여야 해요. 물론그럴 경우에 성찰을 메마르게 할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요. 내 - P109

가 보기에 사람들이 계급 탈주자 개념에 온갖 소스를 더해서깃발처럼 휘두르고 있는 것 같아요. 능력 있는 학생이라는 개념이 성공하면서 결국 학교 시스템을 강화함으로써 상속자들에게 이권을 부여하는 과정이 되풀이되는 거죠.
처음에, 그러니까 자리』를 쓸 때만 해도 난 그런 상황을 표현해줄 이름을 알지 못했어요. 그래서 거리distance라는 말을 사용했죠. 내가 말하는 거리는 가정부와 고용인 사이에 놓인거리와는 다르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에요. "헤어진 사랑"
에 비유하기도 했어요. 내 경우엔 정말 그랬거든요. 그보다10년 전 『빈 옷장』을 쓰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지금은 계급 탈주의 여정이라고 정의되는 그것을 이야기하려 할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찢김, "둘로 잘림"의 이미지였어요. - P110

사실 처음에는 ‘빈 옷장‘ 대신에 ‘찢김‘을 그 소설의 제목으로삼으려 했답니다. ‘빈 옷장‘은 엘뤼아르Éluard의 시에서 가져온 제목이죠. "나는 빈 옷장들에 가짜 보물들을 간직했다." 내가 빈 옷장에 쌓아둔 보물들은 지식과 독서였어요. 그것들이 나로 하여금 검증하게 했고, 나를 내 출신 환경에서 잘라냈죠.
앞에서 이미 얘기한 대로, 그보다 5년 전에 난 내가 사는 세상이 바뀌었음을 마치 계시처럼 깨달았어요. 그리고 그 계시같은 깨달음이 있고 사흘 뒤에, 끔찍한 우연이죠, 심근경색후유증을 앓던 아버지가 내가 부모님 집에 가 있는 동안에 돌아가셨죠. 그런 뒤에, 같은 해에 새 학년이 시작될 때 나는 본 - P110

빌의 한 고등학교에서 처음 교사 생활을 시작했어요. 비서ㆍ회계 계열의 반이 제일 신입 교사인 나에게 주어졌는데, 그곳의 학생들은 내가 이전에 중등교원 자격시험의 실기 과정을 치른 리옹의 중등학교들의 학생들과 많이 달랐죠. 그땐 아직 내가 부르디외를 읽기 전이었지만 학교 교육에 대해 자문하게 되었고, "열악한 환경‘ 출신의 탁월한 학생들도 만나게되었어요 중학 1년 과정도 맡았는데 반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이 노동자의 딸이었죠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있는 자리에서자술 감독 교사가 그 아이 어깨를 잡으며 이렇게 말하더군요
"파트리샤, 넌 네가 나중에 잘살게 될 거라는 거 알지? 네 부모님보다 더 잘살게 될 거야" 물론 의도적인 말이었겠죠. - P111

하지만 난 소리 없는 분노와 고통으로 너무 괴로웠어요. 그리고곧 1968년 5월의 사건들이 일어났어요. 사회 전반에 관한 문제 제기가 이어졌고, 그중에 학교에 관한 것도 있었죠. 바로그즈음에 상속자들』을 읽었어요. 보들로와 로제 에스타블레Roger Establet 의 프랑스의 자본주의적 학교L‘école capitaliste enFrance 도 읽었고요. 그때부터, 정확히는 1972년 봄에, 나의 출신 환경과의 찢김에 관해 글을 쓰겠다는 욕망이 강박관념이되었고, 남편과의 불화로 인해서 더욱 강해졌어요. 남편은 중산층 부르주아 가정의 남자였고, 그의 환경에 통합되어가는 - P111

중에도 내 안에서는 출신 환경과의 차이가 끊임없이 느꼈거든요. 그즈음에 난 MLAC에서 임신중지 자유화를 위한 싸움을 시작했고, 스물세 살 때 받은 불법 중절 시술이 출신 환경으로부터 찢겨나간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나에게 문을 열어주었어요.
탈주자 얘기가 많이 빗나갔네요. 개인적으로 겪은 상황들과사회에서 벌어지는 운동들이 우리의 의식이 깨어나고 글 쓰는 행위로 넘어가는 과정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보여주고 싶어서였어요. 나에게는 근본적인 문제로 보이는 한가지만 더 얘기해볼게요. 바로 계급 탈주자가 어떤 글쓰기를선택하는가 하는 문제에요. 『빈 옷장』에서는 그런 질문을 제기하지 않았죠. 그냥 달려들었어요. 화자가 느끼는 것을, 마치 투사지를 위에 대고 베끼듯이 그대로 베꼈달까요.  - P112

상당히 격렬한 글쓰기죠. 그 뒤에, 아버지에 관해 글을 쓰려고 할 때 처음으로 ‘형식의 도덕‘이라는 문제와 직면했어요. 책을 쓰기 시작하긴 했는데 전혀 나아가지 않고, 자꾸만 거짓처럼 보였거든요. 결국 그리뇽이 파스롱과의 대화를 통해 민중주의와 동정주의에 관해 분석한 것을 조금씩 더듬어나가면서 나 혼자서 실험한 셈이에요. 사실상 지배당하고 있는 삶의 양태를 칭송하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이전에 나 역시 함께했던 행동과 태도에 대해서 관대한 시선이나 빈정거림에 빠지지 않는 것 또한 무척 힘들었죠. 그 좁은 길, 내가 양쪽 어디로든 떨어질 수 있다는 위험을 안고 올라서 있던 그 선을 나는 불행히도 ‘밋밋한 글쓰기‘라고 불렀어요.  - P112

에르노


난 내가 정신노동자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글을 쓰느라 긴 시간을 보내기는 하지만, 그리고 글쓰기 ‘노동‘이라는 말을 자주 쓰기는 하지만, 그래도 난 여전히 글쓰기가 사치라고 생각해요. 내가 주변에서 지켜보았고 지금도 여전히 보이는 노동에 비해 글쓰기는 사치라는 생각을 사실 난 오래전부터 해왔어요. 장을 보러 마트에 가서 계산대에서 일하는 여자들의 반복적인 동작을, 그 여자들이 들어 올리는 생수를 묶음을 보면서, 난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요. - P128

만일 내가 저 일을 해야 한다면? 그러면 난 스무 살에도 저 일을 해내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죠. 심지어 쉰살까지 그 일을 하는 여자들도 있는데 말이에요. 1960년대에 장피에르 샤브롤Jean-PierreChabeol이라는 작가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스스로 육체노동자와 똑같다고 확신하는 걸 보면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나요.
고단하고 때로는 위험한 일부 육체노동을 어떻게 따뜻한 곳에서 책상에 앉아 하는 글쓰기와 비교할 수 있겠어요? 나는내 사촌 자매들처럼 공장이나 재봉 작업실에서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 너무나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해요. - P128

그때, 그러니까 스무 살경에, 난 노동에 따라 보상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주어진 문제들도 다르고요. 물론 그렇다고 몸이 아무 상관 없는 건 아니죠. 보다시피 나는 곧 여든두 살이 되고, 이미 정형외과 수술을 몇 차례 받았고 걷는 데도 어려움이 있어요. 하지만 내 가족의 다른 여자들과 달리,
내 어머니와 달리, 육체적 마멸과 영양 부족의 징표가 몸에 남아 있지는 않죠. 나에겐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할 때부터 몸이 아주 중요한 문제였어요. - P129

라그라브


얘기를 듣다 보니 당신의 다음번 책은 노년을 과감하게 다루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사실 나도 요즘 노년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돼요. 우리가 직접 겪은 경험들에 관심을 쏟는다는 징표이기도 하죠. 그래도 우리의 다른 점도 알겠어요. 당신은 늘 당신의 몸에서 출발해서 글을 썼죠. 몸의 글쓰기. 반면에 난 늘 몸을 멀리 두려 했어요. 곰곰 생각해보면, 난 몸을 내가 일하는 데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통제해온 것 같아요. 몸을 노동력으로서 관리한 거죠. 일흔여덟 살이 되기까지 문제가 생겨서 일을 못 한 적은 없었으니까. 몸이 잘 버텨준 셈이에요. 물론 나이 들면서 절대 착각할 수 없는 신호를 보내기도 하죠. 얼굴이 서서히 변하고, 배가 점점 나오고, 눈의 관제가 떨어지고… 프레베르 Prévert 식으로 계속 나열할 수 있겠네요. 그런 것에 순응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당신이 - P129

강조한 것처럼, 내 몸은 힘겨운 육체노동으로 고생한 적 없고 제법 많은 은퇴 연금을 받고 또 예방 치료의 기회를 누릴 수도 있죠. 사실 힘겨운 투쟁으로 얻은 사회적 권리인데 요즘들어 예방적 치료의 기회가 줄어들고 있잖아요. 아무튼 그렇게 나이 들어온 여자의 몸이에요. 어떻게 보면 우리는 나이가들어야 자기 몸과 다시 친해질 수 있는 것 같아요. 나만 해도 이전에는 피로가 길동무처럼 늘 따라다녀도 그걸 경고로 받아들이지 않았거든요. 몸이 한 군데씩 탈이 날 때 내 안에 일종의 분노 같은 것이 솟아나지만, 그 분노를 곧 모두가 겪는운명에 대한 순응으로 바꿔버리곤 하죠. 그 운명이 어떤 건지 이해하려고 애쓰게 되고요.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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