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트레버William Trevor
1928년 아일랜드 코크주 미첼스타운에서 태어났다. 더블린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역사학을 수학하고 1954년 영국으로이주, 1964년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데뷔 이후 횟브레드상(현 코스타상) 3회, 오헨리상 4회, 래넌상, 왕립문학협회상등 다수의 문학상을 받았고, 다섯 번의 부커상 후보 외에도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수차례 거론되었다. 문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7년 대영제국 훈장 사령관 수훈을, 1994년 문학 훈위 칭호를 받았으며, 1999년에는 영국 작가가 받을 수 있는 가장 영예로운 문학상이라 불리는 데이비드 코언상을 수상했다. 2002년 평생의 업적과 공헌에 대하여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기사 작위를 받았다. 줌파 라히리,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등이 많은 영향을 받은 작가로 손꼽았으며, 아일랜드의 대통령 마이클 히긴스는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뛰어난 업적을 이뤄낸 우아함을 지닌 작가‘로 표현한바 있다. 2016년 11월 20일 88세로 세상을 떠났다. 생전 수백 편의 단편과 18권의 장편소설을 발표했고 대표작으로 《비온 뒤》《여름의 끝》《루시 골트 이야기》 《그의 옛 연인》 《밀회》 등이 있다.
우리가 그때 풋사랑이든 뭐든 서로 사랑했던 걸까? 당신은 라스코맥이나 캐슬타운로쉐에서 살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 어디도 아닌 여기 로크였을지도. 지난 수많은 세월 난 종종 당신이 가까이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눈을 감으면 일요일 교회에 있는 당신 모습이 보였다. 당신의 파란 드레스, 모자 끈에 달린 조화 장미. 의자 너머로 당신을 흘긋 보았다. 나 자신을어찌할 수 없어서, 데렌지 씨가 팬지 고모에게 눈길이 머무르는 걸 어찌할 수 없는 것처럼. - P35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건 이런 불안한 사랑이었다. 심지어팬지 고모를 향한 정중한 구애에도 불구하고 데렌지 씨는 때때로 쓸쓸해 보였다. 아버지가 말하는 걸 들었는데, 데렌지 씨는 사랑꾼은 아니라고 했다. 사랑꾼은 바로 조니 레이시라고. 데렌지 씨는 회계장부와 청구서들, 스위니네하숙집 2층의 고독한 프로테스탄트 세계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는30여 년 동안 팬지 고모를 사랑했다고 한다. 난 킬개리프 신부나 데렌지 씨와 팬지 고모가 불행하길 원치 않는 것 이상으로 팀 패디가 불행하길 바라지 않았다. 모든것이 어떤 식으로든 결국엔 다 괜찮길 바랐다. 오닐의 아픈 관절이나 플린 부인의 과부 형편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 P49
난 무엇보다도 동정을 원하지 않았다. 주홍 응접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팀 패디는 두 번 다시 솔 자루에 기대지않을 테고, 플린 부인도 근사한 정장을 차려입고 일요 미사에가지 못할 것이다. 난 아버지와 함께 다시는 경사진 목초지를올라 자작나무 숲길을 지나서 제분소로 걸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밤에 잠자리에서 난 더 이상 흐느끼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손톱을 써서 다른 손 손바닥을 쥐어뜯지 않고도아버지와 여동생들을 생각할 수 있었다. 심지어 내가 그토록많이 들었던 천국, 이제 궁금해할 더 큰 이유가 생겼음에도 여전히 어렴풋한 땅으로 남은 천국에 있는 제럴딘과 데르드러를상상할 수 있었다. 플린 부인과 팀 패디와 오닐도 그곳에 있다. 고 여겼다. 물론 나의 아버지도. - P78
그 시절 아일랜드에 평화가 머뭇머뭇 찾아왔다. 독립전쟁에이어진 내전은 결국 끝이 났다. 마이클 콜린스는 내전 중 조약을 반대하는 반란군 매복조에 의해 죽었다. 영국과의 조약으로 스물여섯 개 아일랜드 카운티가 자치지역으로 인정받을 거라는 <코크 이그재미너>의 기사를 조세핀이 읽어주었다. 빨간우편함이 녹색으로 칠해졌고, 제국주의 인물의 동상들이 철거되었고, 아일랜드어가 되살아났다. 이런 종류의 문제에 흥미를 잃어버린 어머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성장할 수 있는 위대한 시대야." 내가 어느 날 오후 머천트방파제를 서성이고 있을 때 한 노인이 장담했다. "내가 네 시대를 살았음 좋았을 텐데." 그러나 낯선 거리와 상점이야말로국가의 자유나 성장이 보장된 미래보다 내게 더 큰 영향을 미쳤다. 도시의 날씨 또한 중요했다. 날씨는 전과 같지 않았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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