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가 사회에서 배제되었다고 느낄 수 있는 소소한방식들은 수도 없이 많다. 나의 경우엔 이런 기억들이 있다. 학교에서 연필이 없어 항상 연필을 빌려야 했고, 하나있다고 하더라도 잘근잘근 씹은 자국이 난 5센티미터도 안되는 몽당연필이라 놀림을 받고 조롱거리가 되었던 경험. 책을 거의 가지고 다니지 않아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다른아이의 책을 같이 보거나 잠시 다른 아이의 책을 들여다봐야 해서 나라는 존재는 방해가 되며, 다른 친구들을 성가시게 한다는 죄의식과 모욕감이 같이 부대꼈던 감정들. 늘상입을 속옷이 없어 특히 학교 운동장에서 아무도 알아채지못했으면 하고 바랐던 순간들, 양말이 없어서 아버지의 양말을 신고 발목 한참 위로 올라온 큰 양말 때문에 체육 시간에 신발을 벗어야 할 때면 수치심으로 시들고, 선생님이전 학급 앞에서 가지고 있지도 않은 학교 스웨터를 1월 중순인데 왜 입고 있지 않냐고 물었던 경험, 지각할 때 모든눈이 나에게 쏠릴 창피함에 대비해 마음을 단단히 먹으려고 교실 문밖에서 10부터 거꾸로 세었던 순간들. - P47
경험들을 통해 내가 반 친구들과는 다르고 다른 학생들과나 사이에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됐다. 물론 그 당시에는 내 경험을 정확하게 명명할 수 없었다. 단지 명백하게 합당한 이유들로 동네 이웃과 학교에서내가 다르게 여겨진다는 사실을 알 뿐이었다. 나의 환경에문제가 있는 상황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 생각은 옳았지만, 내가 그 그릇됨의 한 부분이었다고 믿은 것은 실수였다. 성인이 되어 범죄학과 사회학을 공부했지만 그 내용들은 책을 통해 알기 오래전부터 이미 삶에서 접했던 것들이었다. 이후에 그런 상황들과 분리된 환경에서 이런 주제들을 공부하니 이상하고 초현실적이었다. - P48
나의 성배배 유입은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 소외로 조장되었다. 경제ㆍ사회적 결핍은 보통 남성과 여성에게 약간다르게 영향을 미친다. 두 젠더 모두 범죄에 끌리지만 젠더이 따라 구체적인 범죄 형태는 달라진다. 경험상 마약의 경우 남성들은 거래를, 여성들은 운반을 하는 경향이 있다. 철도의 경우 남성은 무장 강도가 되는 경향이 좀 더 높고내가 알던 소매치기의 대부분은 여성이었다. 성매매에도젠더 차가 있는데, 남성들은 자신의 몸을 팔기보다는 포주의 역할로 이윤을 챙기고 통제를 시도하는 경향을 보인다. 사건이지만 내면에 스며드는 범죄성을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 극빈한 상태와 경제적 궁핍 정도가 심한 사람들을 많이도 목격했다. 탈성매매한 지 몇 년 뒤 학업을 시작하고 1년쯤 되었을 때의 예를 하나 들 수 있겠다. 파넬 거리를 걸어가고 있을 때였는데, 한 노숙인이 내게 다가왔다. 꾀죄죄하고, 누더기를 입은 채 엉겨 붙은 수염이 더럽고 길었다. 그는 적어도 40세, 아니 45세 정도로 보였다. 그 사 - P48
람이 내게 말을 걸었는데 그 말이 충격적이어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가 말했다. "레이첼, 너 나 기억 못 하니? 나야, 존!" 그는 얼굴에 함박웃음을 띠면서 말을 했다. 나를만나 무척 기뻐했다. 수염과 지저분함, 거친 피부를 넘어그의 눈을 보았다. 똑같이 날카로운 푸른색이었고, 눈 뒤에숨은 활기 그대로 즐겁고 장난기 어린 빛을 뿜어냈다. 정말존이었다. 존과 나는 1990년 여름 동안 청소년을 위한 정신 질환심사 센터에 있었다. 당시 우리는 둘 다 열네 살이었다. 나는 그때 쉼터에서 유예 처분을 받고, 위탁 가정에서 쫓겨난채로 학교에서는 퇴학을 당했는데 이 모든 일이 몇 주 만에한꺼번에 일어나서 그곳에 배치되었다. 열두 명 정도 되는아이들이 수용 시설에 있었지만 존과 나는 잘 통했다. 우리는 항상 웃었다. 시설 안에 방 하나로 만든 학교가 있었는데 우리 둘은 눈만 맞았다 하면 웃어서 선생님께 혼나 수업시간에 억지로 존을 보지 않으려고 했던 적도 있었다. - P49
결국엔 정신 질환 심사에 질려 그곳을 나와버렸다. 그날 이후로존을 보지 못했고, 파넬 거리에서 다시 만나기까지 10년이흘렀다. 10년. 존은 서른이 되었다. 열여덟 살 이후로 쭉 노숙을 했다고 말했다. 정부 보호를 받는 아동이 열여덟 살이되면 자립하리라 기대한다. 존은 가라앉거나 헤엄칠 수 있었다. 존이 그랬듯 많은 이들이 가라앉았다. 족히 몇 분간 얘기를 나눈 뒤 존이 포옹 인사를 하려고팔을 내밀었다. 존을 안자 냄새 때문에 현기증이 일었는데바로 죄책감이 들었다. 걸어오면서 나는 울었다. 우리가 만나고 헤어진 그날, 존은 그게 뭐가 됐든 이제까지 그가 살아오던 방식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비슷하게 - P49
절망적인 처지에서 내가 그랬듯이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훔치고 사기 쳤으리라. 범죄 발생은 경제적 결핍이나 사회 배제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으며, 단순히 악의 존재로 설명될 수 있다는 말을들은 적이 있다. 1990년대 초반 나는 존과 같은 젊은이들을 많이 만났고, 나 또한 그러한 청소년이었다. 우리를 그자리로 데려다 놓았던 일들은 악과는 거리가 멀었다. - P50
그녀는 자연적이고 치유가 되는 수많은 영향력을 피해 은둔했기에, 창조주가 지정한 순리를 모든 마음들이 거스르듯, 거슬러야만 하듯, 거스를 것처럼 음울하고 고독한 그녀의 마음은 질병으로 번졌다. -찰스 디킨스, 『위대한 유산』
가장 눈에 띄는 어머니의 병세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었는데, 당신 자신과 아이들 모두를 염려했다. 아이 다섯의활동 영역을 집으로 제한하고, 학교와 동네 가게 외 다른곳에는 거의 가지 못하게 하는 그런 종류의 두려움이었다. 이웃집 아이들과 놀거나 사귀는 건 허락되지 않았다. 이웃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면 어머니 말씀을 무시하는 행동이어서 물론 당신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살던 더블린 북쪽 시내에 위치한 주거 단지를 드나들 때 조용히 해야 하는 걸로 알고 자랐다. 이런 행동들은 우리가 입고 있던 더럽고 낡은 옷들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동네 주민들의 눈에 띄어 더 구별되었다. 이웃집 아이들도 우리를 그렇게 대했는데(그 아이들이 정말로 알고 그런 행동을 했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매일 같은 놀림은 잔인했고, 소외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결과적으로 이런 상황은 우리를 고립시키려는 어머니의 성향을 부채질했다. 질환의 한 현상이었을 뿐이었는데, 갈수록 더 충격적인 방식으로 드러났다. - P53
돌아보면 내 어린 시절은 마치 살아 있는 척도와도 같았다. 불안정한 마음의 진행을 재는 불가사이하게 정확한측정 방법 말이다. 여덟아홉 살 무렵 짧은 시간 안에 꽤 심각해졌던 말더듬증을 예로 들어 볼 수 있겠다. 운 좋게도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언어 교정 방법으로 내가 말을 더듬을 때마다 얼굴을 힘껏 때렸고 나는 아픔과 함께 전기 불빛이 크게 파열하듯 눈이 부시게 번쩍이는 빛을보며 충격과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래도 효과적이었다고인정해야겠다. 어머니는 그야말로 말더듬증을 놀래서 쫓아냈고 그 이후로 재발하지 않았다. 가장 잔혹한 유년 시절기억 중 하나는 부엌문을 열었을 때 엄청나게 커다란 피 웅 - P53
덩이 속에서 의식 없이 쓰러져 있는 어머니를 발견한 일이다. 당시 나는 아홉 살쯤이었다. 아주 어린 나이가 아니었는데도 피가 어머니 몸 사방으로 1미터 넘게 퍼져 있어 작은 호수같이 보였다. 그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머니는 며칠 후 그때 입고 있던 코트를 그대로입고 집에 오셨는데 코트는 밤색이 된 마른 피로 범벅이었고 만성 빈혈로 피 2리터를 수혈받아야 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중얼거리셨다. 가족 중 어느 누구도 어머니가 자살 시도를 했고 거의 돌아가실 뻔했다는 진실을 언급하지않았다. - P54
문제 가정의 균열은 어디서부터 시작될까? 가족이 형성되기 전부터 시작된다. 상처는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의 만남 속에 이미 도사리고 있다가 이 파괴력이 잠재된 사랑으로 창조된 아이들을 통해 존재한다. 인간이라면 그렇듯 부모님 두 분 모두 사랑이 주는 위로를 향해 손을 뻗었는데안타깝게도 그 손이 서로를 향했다. 결함이 있고 균열됐을지라도 사랑이 존재했기에 내가 이 자리에서 그 결과를 기록할 수 있고 물론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때때로 인생이그렇듯 고단했고 유년 시절 감정적으로 고되었지만 내 인생이었고, 나는 언제나 인생을 사랑했다. 삶을 살아가는 일보다 그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더 사랑했던 때가 있었을지라도 삶을 떠나보내야겠다고 생각한 날은 드물었다. 문제 가정을 설명하는 말들이 우리 가족에게 꼭 들어맞지 않기도 한다. 와해, 퇴보, 악화와 같은 단어들은 한때 건강했거나 온전했음을 전제한다. 우리 가족은 와해되지 않았고, 태생부터 깨져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만나기 14년 전인 열여덟 살에 처 - P54
신경쇠약을 경험했고, 어머니도 10대부터 이상하하기 시작해 아버지를 만나기 전 10년 정도의 기간계속 정신 질환을 앓던 중이었다. 심각한 정신 질환에을 받은 이 두 사람이 서로의 짝이 됐을 때 어머니는스플릿, 아버지는 서른들이었다. 아버지는 신경쇠약을 처음 겪었을 때 성 브렌든 정신병에 갔는데 그때 조울증을 진단받았다. 아버지 가족은 아버지가 인생을 함께할 여자는 안정감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조현증을 앓던 딱한 어머니는 더블린을 통틀이 가장 적합하지 않은 상대였다. 그러나 아버지와 어머니는 만나서 결혼했고 어머니 질환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고 지속적으로 발현되어 결혼 생활과 우리 형제들의 유년기 내내 우리 귀에 바다처럼 포효했다. - P55
어머니 질환은 또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었는데, 아버지가 자살한 지 하루 이틀 후 저녁에 나와 오빠를 아버지의단칸 셋방으로 보내 소지품 중 쓸 만한 것이면 무엇이든 모아 오게 했다. 우리 나이는 그때 열셋열넷이었다. 아버지가 세 들어 살던 집은 도시 남쪽에 위치한 라스마인이라는곳이었다. 동네 중심가는 번쩍이는 스완 쇼핑센터 간판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날 그 쇼핑센터 간판을 처음 봤는데, 그 이후로 그 간판만 보면 깜깜했던 11월 밤의 기억이 되돌아온다. 저녁 8시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나 하늘은 어두웠고, 이에 비해 간판 불빛이 너무 밝아 실내 상점이 밀집한 통로에 놓인 비디오 게임과 핀볼 기계가 떠올랐다. 아버지 단칸 셋방에 가보니 한쪽 구석엔 작은 싱크대를, 다른 쪽 구석엔 침대를 놓아 공간을 구분해보려고 볼품없는 시도를 했건만 예전에 봤던 원룸들과 다를 바 없이 가 - P55
축우리 같았다. 부모님이 별거할 때마다 아버지가 새로운방을 구하는 일이 자주 있어서 수년간 비슷한 원룸을 많이봐왔다. 그때가 마지막으로 부모님이 물리적으로 갈라섰던때였는데 가족 문제가 생길 때마다 아버지는 없어도 되는구성원이라고 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방식이 가족 갈등에서 내가 기억하는 잔인함이다. 그렇기에 나는 별거하는 아버지들에 대한 깊은 연민을 무거운 짐처럼 늘 짊어지고다닌다.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 지 알기 쉽다. 오빠와 나는 그 단칸방에 서서 둘러보았다. 여기에는와본 적이 없었다. 그곳은 유별나게 작았고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곳이라 그런지 우울함 같은 특별한 기운이 있었다. 죽음만이 가져올 수 있는 끔찍한 최후의 느낌과밀접하게 연관된 수모와 수치스러운 가난의 냄새가 밴 애처로운 슬픔의 감정. 그곳엔 유독 아버지의 죽음과 연관된요소들 외에도 전에 경험해본 적이 없는 무겁고 암울한 최후를 품어내는 향기가 있었다. 어머니는 조금이라도 쓸모가 있거나 가치가 있는 것이면 모두 가져오라고 했지만 실제로 가져갈 것이 별로 없었다. 오빠와 나는 거기 있는 동안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마치 우리 행동이 아버지께 모욕이 되는 양 매우 조용하게 말했는데, 어른이 된 나의 눈으로는 우리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 아버지께서 더 모욕감을 느끼셨을 거라고 생각한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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