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는 젠더 문제이기도 하면서, 지리적 문제이자 특권 문제이기도 했다. 아이비리그에서는 텍사스 규정에는 없던 모든 방식으로 여학생들을 훈련하려고 했다. 텍사스 여학생들은 승마 경주banneracing)에 나갈 수는 있었지만, 승마를 하려면 돈과 말이 필요했다. 우리가 갖지 못했던 건 스스로 삶의 힘이 자라나고 넓어져 가는 걸 느낄 기회와 방식이었다. 당신은 아직 무엇을 배우지 못했는지, 어떤 기회가 없었는지, 그리 많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부재가 내게 가져다준 모순적인 상황에 조금 경탄한다. 나의 걸음걸이를 느리게 했던 소아마비가 내게 물을 선물해 줬으니까 말이다. 캐롤라인에 대한 나의 사랑은 내 삶에 있어 본질적인 의미의관계였고, 공교롭게도 내가 특정 나이가 되어 힘과 자유를 느끼기시작할 무렵 그녀를 만났다. 40대 초반이 되었을 때다. 세상 물정 - P201
에 밝으면서도 마라톤에 나갈 수 있을 만큼 젊은 나이. 나는 문학 비평가라는 사랑하는 일이 있었고, 처음으로 반려견 사모예드를 기르게 되었다. 22킬로그램이 넘는 아름다운 사모예드는 만족스러운 내 삶의 나날들을 더욱 풍요롭게 해줬다. 내겐 매주 마감 일정이 있었고, 수영장과 숲 그리고 내 쌍둥이인 것같은 여자친구도 있었다. 사실 캐롤라인에겐 진짜 쌍둥이 자매가 있었지만 말이다. 그보다 몇 년 앞서 나는 사랑했던 혹은 사랑한다고 생각했던한 남자를 떠났다. 하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라 그의 칭찬과 사랑을 갈구하며 인질로 잡혀 있는 관계일 뿐이었다. 그는 수년간 형편없는 로맨스로 점철된 내 삶의 거친 나날들의 마지막 장을 장식한 남자였다. - P202
내겐 일이 있었고 술 취하지 않는 맨 정신이 있었기에 겨우 살아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여자친구와의 우정, 특히 캐롤라인과의관계가 나를 지켜 냈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각자의 모습을 발견하며 성장했고, 각자가 발견하지 못한 내면의 힘을 상대가 끌어내주며 함께 성장했다. 함께일 때면, 혼자일 적엔 몰랐던 내면의 강한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사랑했다. - P202
내가 칭찬을 갈구했던 그 남자는 내 글이 발행되기 전 종종 미리 읽고 수정해 주곤 했다. 그 남자가 파란색 펜을 들고 수정하던어느 날, 우리 관계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나는 존 르 카레(John le Carré)와 어렵게 인터뷰를 마친 뒤 기사를작성했는데, 기사 도입부가 썩 마음에 들었다(시간이 확실성의 지표라면 3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 도입부가 마음에 든다. 내가 쓴기사를 읽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데, 어느 순간 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내 첫문장에 줄을 긋고는 "문장이 지나치게 화려해"라고 말했다. - P203
머뭇거리던 그 모습에 나는 그를 보내 버렸다. 나는 이전에도그런 장면을 두어 번 본 적이 있다. 대학원과 직장에서, 내가 존경하던 남성들은 내 글을 읽으며 움찔하고는 분수에 맞는 문장을 쓰라고 했다. 나는 그 남자보다 열한 살이 어렸지만 더 나은 작가였고, 어떤 문장이 좋은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가 수정을 끝냈을 때, 나는 고맙다고 말하고는 사본을 들고내 서재로 갔다. 나는 원래 썼던 그대로 내 문장들을 복구했다. 이틀 뒤 신문이 발행되었고, 내 글은 맨 앞쪽에 실렸다. 그는 아침을먹으며 기사를 읽더니, 눈썹을 치켜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그냥 웃었다. - P203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여자가 그러듯) 친구에게 우리의 성적 역사와권력 앞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했다. 진실이 속삭이거나 소리치는데도 권력은 별 관심도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는 크든 작든 성폭력이 나를 쓰러뜨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느낀다고 말한다.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기지도,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는 나를 망쳐 놓지 않아서 다행이다. 뜻밖의 행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람들은 트라우마에시달리고, 트라우마를 안고 살고, 무수한 방식으로 트라우마를 표출하며 살아간다. - P204
마조리는 우리에게 일어난 흔한 일이나 우리의 아주 미미한 조언도 모두 메모하곤 했다. 정작 메모를 해 가며 그녀의 말을 듣고기억해야 했던 건 우리였는데 말이다. 마조리를 알고 지낸 시간이 20년도 되지 않지만, 그동안 내겐반려견이 있었고, 캐롤라인이 있었으며, 내가 사랑한 모든 게 있었고, 그것들을 모두 잃기도 했다. 마조리는 그 모든 걸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비통함앞에서 결코 움츠러드는 법이 없었고, 비탄이 다가올 때 폄하하지않았으며, 큰 의문 이상으로 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50대에는 자매를 잃었기에, 견딜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걸 잃는다는 상실에 관해 잘알 - P217
고 있었다. 이 전쟁터에서 그녀는 전사였다. 지금 와 돌아보면, 그녀는 캐롤라인이 죽은 다음 날 아침 나를만나러 처음으로 내 집에 찾아와 활짝 웃으며 두 팔을 펼치고 성큼성큼 다가온 사람이었다. 몇주 뒤 내가 아무런 경고도 없이 그녀의 집에 찾아가 현관에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자, "벼락처럼 덮쳐 오는 일들이 있지만, 때로는 그만큼 빨리 사라져 버리기도 해"라고 말해 줬다. 그녀는고통을 피해 달아나거나, 말실수한 친구들 그리고 날 돕지 못한친구들을 용서하라고도 일러 줬다. - P218
분개 말고도, 내가 돌봐야 할 더 큰 감정이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았다. 그녀는 내가 가장 친한 친구를 묻을 때도, 부모님 두 분을 땅에 묻을 때도 사랑하던 반려견을 묻을 때도, 내곁에 머물러 주고 어떻게든 계속 살아갈 방법을 알려 줬다. 죽음을 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야기의 자연스러운 결말로받아들이는 것, 그건 비나 밤처럼 어느새 찾아오는 무심하고도확실한 삶의 결과였다. 마조리가 살면서 가장 아쉬워한 점은 자녀가 없다는 것이었다. 자식을 낳지 않은 걸 두고 인생의 한 가지 선택지가 아닌 개인적 실패 혹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게 나는 속상했다. - P218
버지니아 울프는 《파도(The Wave)》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소설 집필을 시작하며, ‘매우 불완전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황홀한 책이 가지고 있는 힘은 하늘만이 아실 것이다‘라고 일기에 썼다. 이 장면은 울프의 순전한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일기 도입부에서는 위풍당당하면서도 외로운 모습을 드러내며 작가의 경험을 정확히 묘사한다. 나는 이 문장을 프린트해서 위층 서재 벽에 붙여 두었다. 그 옆에는 튤라가 잠든 모습을 그린 그림, 글쓰기 아이디어들을 적어둔포스트잇,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아빠가 엄마에게 보낸 전보도 붙여 두었다. - P227
나는 울프의 정신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오래전 잉크병을 집어던졌다. 가정의 상징적인 천사에 맞서기 위해 잉크를 무기로 사용했다. 남성에게 부여받은 성스러움으로 창의적인 여성의 영으로 배를 채우는 가정의 천사에 맞서야 했다. 울프가 기록하길, 그녀는 한 세기 동안 여성들에게 영감을 주고 여간해서는 죽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 내게 강요하는 천사는 없다. 아무도 내게 저녁을 준비하고, 자신을 희생하고, 예의를 갖추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오직 나뿐이다. 나와 반려견, 그리고 바늘이 없는 시계만 있다. 배고프면 먹고, 걷고 싶으면 걷는다. 때로는 몇몇 훌륭한 순간을 위해 검소하고 엄격한 흥정을 하고, 어쩔 땐 잔인한 고요함을누린다. 요즘은 계단을 오를 때면 익숙하게 느껴지는 숲의 빈터를 향해마음이 굽는다. 너무 무서워서 받아들이지는 못할 때도 있다. 어느 날은 그냥 앉아서 창밖을 내다본다. 가끔 겨울 오후에는 춤을춘다. - P230
‘일년생식물(annual)‘이란 단어도 한 해를 의미하는 라틴어에서왔으며, 반드시 죽는(mortal)‘이라는 단어도 죽음을 의미하는 라틴어에 어원을 둔다. 오직 한 단어만이 시간과 연관된 단어가 아닌끝 혹은 빛을 잃는 순간을 의미한다. 반려견은 죽을 것이고, 나는다년간 내가 죽을 때까지 반려견을 사랑할 것이다. 나는 양쪽 부모님 집안으로부터 원예 재능을 물려받았다. 물론 텍사스에서 뭔가를 기르는 일은, 특히 농장 집안 출신이라면의무적으로 주어진 업이었다. 1950년대쯤 찍은 한 사진을 보면, 뒷마당에 있는 아빠 무릎에아주 조그마한 내가 앉아 있다. 옥수수와 토마토의 키가 얼마나큰지, 나는 밥도 못 얻어먹은 아이처럼 보인다. - P238
몇 주 동안은 가을정원을 청소하고 꿩의다리꽃과 스위트피를 지나친 애정으로 돌보느라 날마다 흙에 파묻혀 시간을 보냈다. 해질녘까지 정원에머물다 손이 흙으로 엉망이 되었고, 한철 늦게 피는 야생화들의풍작을 보며 야생의 행복을 음미했다. 나는 항상 삶의 다년성을 상기해야 했고, 윌라 캐더(Willa Cather)의 소설 《나의 안토니아(My Antonia)》에서 호박밭에 누워 완벽한 고요 속으로 떠다니는 장면을 아름답고 정교하게 묘사한 문장 ‘우리가 죽어 전적으로 다른 무언가의 일부가 될 때‘를 상기해야 했다. 내 지친 마음에 연고를 발라 줬다. 내가 일하는 동안튤라는 수호초 근처에 엎드려 있었고, 나는 튤라옆에 누워잡초와 한련초가 고개를 숙이고 우리의 슬픔을 흔적도 없이 덮어 주길 바랐다. - P241
우리는 모두 괜찮고, 사랑은 죽지 않는다. 다만 물리적인 육체만 죽어 없어질 뿐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위안이 된다. 반복해서잊고 마는 천진함처럼,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언제나 잊고 사는진실이다. 샌프란시스코에 살 때 나는 20대 초반이었고, 하루는 희망에찼다가 다음 날 무너져 버리는, 방황하고 아슬아슬한 사람이었다. 혼란스러운 시대에 캘리포니아는 최고의 것과 최악의 것을모두 다 가지고 있었다. - P250
캘리포니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게 분명하다. 닫혔던 내 시스템을 무엇인가가 비집어 열고 들어왔다. 나는 어두운 밤 혼자의자에 앉아서도 혼자라 느끼지 않고 분열되지 않는다. 그냥 슬프고 슬픔에서 위안을 얻을 뿐이다. 그건 온전함이다. 때로는 기쁨 대신 경험 자체를 얻는다. 비탄은 어둠 속에서 펼치는 레슬링 경기다. 당신은 숨을 빼앗기고 탈진해 버린다. 당신은 쓰러지고 거대한 자신 그 자체가 될뿐이다. 당신은 매번 다시 배워야 한다. 고통을 겪어 봤다고 해서, 이해하거나 거르고 넘어가는 법은 없다. - P254
북동부의 끝없는 겨울엔 무엇보다도 빛이 가장 먼저 돌아온다. 맹렬한 눈보라 한가운데서도 견뎌 내야 하는 혹한의 바람이주나 더 남았어도 매일 새하얀 눈 위로 하얗게 반사되어 펼쳐지는 빛을 보며 삶은 살아봄 직하다는 사실이 축복처럼 다가온다. 상처받고 황량해도 밝게 펼쳐지는 빛이 있고, 길어질 날이 있으며, 약속이 있다. 살아오면서, 지나온 것들보다는 앞에 놓인 것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러지 못하면 삶의 여정에서 슬픔에 빠져정신을 놓아 버릴 것이다. 과거의 시계와 앞에 놓인 날들 사이에조심스럽게 머물러야 한다. 같은 길일지라도 말이다. 나는 겨울 중 아주 여러 날을 케임브리지 거리를 걸으며 보낸다. 어떤 날은 묘지에 들러 내가 돌멩이를 놓아 둔 묘비를 지나친다. - P256
가능한 한 매일, 영감의 원천이 되는 샘물을 마셔야 한다. 꼭 대단한 트레비 분수가 아니어도 된다. 개울에서 흘러온 물도 괜찮고 컵에 든 한 잔의 물이어도 된다. 아름다움이든 선함이든, 거기 있는 걸 취하면 된다. 들이마시는 공기도 피어스 무덤 위를 뱅뱅 도는 새빨간 꽁지깃을 단 매도, 영감을 준다. 돌멩이들을 남겨라. 걱정은 되도록 하지 말자. 나는 이 무덤이 좋고, 죽음과 희망에 관해 무덤이 가르쳐 주는 게 좋다. 타일러가 어릴 적 상상했던 40만 킬로미터도 넘는 밧줄처럼, 세대를 건너 무덤이 던지는 기다란 밧줄 같은 게 느껴진다. 나는 지금 나의 어둠보다 멀리 걸어 나가려 한다. 한 발짝 한발짝이 모두 믿음의 행동이고, 매번 내쉬는 숨은 누더기가 되어버린 기도문이다. - P258
공집합 기호 Ø가 새겨진 피어스의 무덤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무한대 기호 ∞와 헷갈렸다. 어릴 때 나름 수학 영재였던 내가처음부터 제대로 파악했어야 했지만, 어쨌든 몇 달간은 무한대로착각하고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무의식중에 아무것도 없는 공집합이 아닌 영원함을 보고 - P267
싶었던 것 같다. 텅 빈 공간이 아닌 한계가 없는 수평선을 말이다. 나는 수평선이 두 가지 모두를 상징한다고 배우며 자랐다. 끝이없으면서도 반드시 풍족한 개념은 아니기에, 내게도 그리고 세상에도 와 ∞는 같은 걸로 보일지 모르겠다. 당신은 이 두가지 모두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요정들은 자라서 사라지고, 반려견과 친구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도 모두 당신을 떠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삶 자체를 비롯한 삶의 모든 것이, 타인의 선의는 물론이고 타인의 덧없음에도 달려 있다는 사실 또한 기억해야 한다. 영원은 멀리 한 줄 기억 속에 흐릿해지도록 두고, 당신은 신기루를 향해 걸어가야만 한다.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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