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도 지난 일인데 아직도 그때의 감정이 느껴진다. 나는 수학 문제를 두고 고민하는 아이처럼 혼란과 흥미를 동시에 느끼고있었다. 그러다 나는 어떤 사실 한가지를 간파했다. 그건 나를 변화시키고, 온 우주를 조금 바꿔놓을 깨달음이었다. 남자들이 모든 부분에 있어 너무 자주 결정권자 노릇을 한다는것 우리는 대답을 해야만 하고, 온종일 갖고 놀던 장난감 칼을 밤마다 권위자에게 반납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단순히 성적이거나 연애와 관련한 통찰은 아니었다. 나의 통찰은 그보다 광범위했다. - P122
여름날 저녁 방에서 흘러나오던 빛, 노란색 전화기 그리고 그남자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은 삶이 거쳐 온 과정에서그 통찰이 갖는 가치의 증거였다. 그 순간 나는 스스로 자유를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생각을 미세 조정하고 저항만 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독립과 자존감에 관한 것으로 만들어 가며 수년이 흘렀다. 그날 밤의 웃음소리라든지 집안을 가득 채운 여성들의 자율성과 애정 같은 건, 기억의 빛으로 남아 안식처와 모험의 이상적 관 - P122
념이 되고 삶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되었다.
이후 수년간 그런 순간들이 몇 번 더 있었다. 빼앗긴 길이나 닫힌 문 앞에 설 때면 내면의 목소리가 말했다. ‘안 돼, 난 안 할 거야 안 돼, 나랑 맞지 않아 아닐 거야.‘ 이제 와 그걸 깨닫는다는사실에 마음이 아프다. 나이가 들면 후회도 하고 과거를 자주 회상한다. 하지만 나자신을 위해 길을 찾으려 애썼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물론 당시에는 제대로 깨닫지도 못했고, 그 길에서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말이다. - P123
나랑 맞지 않아‘라는 깨달음은 많은 부분에 해당했다. 여러 남자와 여자를 떠났고, 대학원 과정을 다 마치지 않았으며, 하던 일을 관두고 도시를 벗어났다. 모두 다 잘한 일이었을까? 전혀 아니다. 돌아보면, 잘한 일이라느껴진 적도 있었지만 젊음의 많은 부분이 자유와 두려움으로 뒤엉켜 있다. 나는 희뿌연 미지의 길일지라도 앞을 향해 나아갔다. 호기심이 두려움을 1밀리리터 가량 눌렀고, 때론 그 정도로 충분했다. 나는 그날 밤 로빈슨 가에서 내 행복한 자율성을 흩어 버린 남 - P123
자를 떠났고 이후 사랑했던 여자도 떠났다. 대학원에 진학했다. 가 페미니즘이 내 심장을 갈고 닦은 것만큼이나 내 정신을 날카롭게 다듬어 준 대학원 프로그램도 버렸다. 이 모든 과정에서 내게 용기를 주는 위스키에 매달렸다. 아예효과가 없어지기 전까지, 위스키의 효과는 엄청났다. 그로 인한 실패의 크기는 빙하 속 깊게 갈라진 틈만큼이나 깊고 무시무시했으며, 그 어떤 위험보다도 크나큰 위험이었다. - P124
지금 생각해 보면, M은 내게 폭풍우를 피할 안식처를 마련해쥐고 충분히 머물며 안정감을 되찾게 해 줬다. 나는 편안하게 머불 장소를 찾았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진 않았다. 나는 20대의 대부분을 성장하기도 사라지기도 하며 보냈다. 전형적인 20대의 모습일 수 있지만, 관계의 궁핍 속에 머무는 내겐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믿어 줬고, 그 믿음은 당시내게 과분한 선물이었다. 어느 날 밤, 스카치위스키와 와인을 어마어마하게 마신 뒤 그녀가 내 말을 끊더니 말했다. "너는 왜 지적으로 퇴행하려고만 하는거야?" 왜 그리 자신을 무너뜨리고 태워 버리냐는 의미였다. 그 질문은 나를 흔들어 깨웠다. 마치 내가 깨닫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했던 걸 그녀는 알고 있는 듯했다. 나는 지루한 상태로부랑하며 꿈도 없이 밑바닥을 전전하는 가짜 혁명가였고, 그녀는 그 모든 걸 꿰뚫고는 내게 꼭 필요한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 P131
우리는 서로에게 지독히도 심한 말을 내뱉고, 서로를 배신하고 너무 많은 술을 마시다 나쁘게 끝나 버렸지만, 그날 밤 그녀가나의 조용한 적을 언급해 준 데 대해 항상 고마움을 느낀다. 그건 아마도 내 안의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내 삶을 단단히 붙들어야겠다고 느낄 만큼 충분한 힘이 생겼다. 하지만 그녀와 헤어지고 한동안은 죽을 것만 같았다. 참나무한 그루가 도끼에 찍혀 버린 느낌이었다. 물리적인 고통이 느껴졌고, 때론 숨쉬기조차 힘들었으며, 그럴 때마다 위스키를 들이마시고 담배를 피워 댔다. 수영장을 몇 바퀴씩 돌거나 끝없는 무용담으로 많은 친구를 지루하게 만들었다. - P132
매우 이상적인 동시에 실망스럽게도, 내가 알아낸 사실은 세상모든 페미니즘은 정신적 사랑으로부터 당신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 나는 오스틴의 한 작은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었고, 어느봄날 저녁 베란다에 앉아 (당연히) 백포도주를 한 잔 곁들인 완두콩 페투치니를 먹고 있었다. 나는 그날 먹은 콩과 값싼 와인 그리고 나무 너머로 펼쳐진 풍경을 강렬하게 기억한다. 외롭고 슬펐지만 마침내 괜찮아졌고, 앞으로도 괜찮을 거란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그 조용한 저녁, 나 - P132
자신과 눈앞에 살아 있는 참나무만으로 의미가 가득했다. 앞으로내 삶의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야하는지 말해 주는 듯했다. 나는 멀리 떠나갔다. 이 시기의 내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주오랜 시간 먼 길을 갔고, 오랜 기간 위험에 빠지고 갇혀 있는 악몽에 시달렸다. 나는 절망 속에서 이성애자가 되었던, 혹은 단지 나쁜 선택을 했을 뿐인 나를 탓했다. 나는 나의 자유 낙하가 여성들과의 관계와 연관이 있다고 믿기도 했다. 급격히 친밀해지고 감정적으로 연결이 되지만 갑자기물속으로 뛰어들고 마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내 생에 두 번 정도는 한 여자를 만났을 때와 몇 년 뒤한 남자를 만났을 때, 한 번은 진탕 마셨다가 다음에는 정신이 멀쩡했을 때, 그러다 결국 영혼을 파괴하는 사랑에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마주했다. - P133
하지만 나의 고전적인 관점으로 볼 때, 여성과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여성들에겐 상호 배려와 다정한 태도가있는데, 남성과의 관계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다. 우리는 서로를 인정하며 걸어온 길을 잘 알고 있다. 감정을 개방할 때도 위협이나 자아 투쟁이 필요 없다. 우리는 오랫동안 인간의 심장에 물을 나르는 일을 해 왔으니까 말이다. 나는 수년간 이 사실을 믿어 왔고 믿고자 했다. 데이터가 항상이런 희망이 옳다고 말하진 않더라도, 때로 외로운 미치광이들이 다시는 내가 사랑을 하거나 위험을 감수하지 못하게 할지라도 말이다. - P134
이 이야기를 슬프다고만은 할 수 없다. 종잡을 수 없는 사랑과고요 그리고 사랑과 열병의 기간이, 마침내 다른 플라토닉 사랑이되고 다른 사랑과 고독을 만들어 낸다. 때로는 끔찍했고 내향적인 사람에겐 종신형과도 같았지만, 또 어떤 밤에는 기이하고 과감했으며 혹은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여성운동이라는 덮개 아래서 나처럼 나이를 먹어 온 여성이라면 이것이 평범하게 느껴질 것이다. 우리는 전통적인 남녀관계를 더 이상 참지 못해 밖으로 걸어 나왔고, 결혼과 모성 그리고 현상이 시키는 대로 하는 대신 다른 선택지에 따라 행동했다. 우리는 온전히 사랑과 힘 그리고 원하는 걸 바탕으로 선택했으며, 그런 자유가 초능력처럼 느껴졌다. 우리 중 누군가가 결국 혼자된다는 사실은, 좋든 나쁘든 우리가 쟁취한 승리의 부산물 같은것이었다. 의도치 않았더라도, 때로는 가슴 저미는 결과의 법칙이었다. - P135
나는 모두가 조금씩은 깨졌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게 어떤종류건, 사랑의 임무는 힘들게 어딘가에 닿아 깨진 부분을 메우는거라는 사실도 안다. 상처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배우면 되고, 강력 접착제와 기도문을 품고 계속해서 사랑하면 된다. - P136
캠퍼스를 두 번이나 가로질러 이 사무실과 저 사무실을 오가며 다양한 의견에 흥분되기도 긴장하기도 했던 그날, 술이 마시고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순간, 드넓기로 유명한 5만 평에 이르는캠퍼스의 본관 앞에 갑자기 멈춰 섰다. 십여 년 전 찰스 휘트먼이 올랐던 시계탑이 보이는 그곳에서, <요한복음> 구절이 새겨진 입구를 바라봤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열살쯤 처음 여기에 섰던 나는 이 구절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단순히 진리를 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진리(veritas)에 동조하기 위해 인정받길 희망하며, 그것을 좇고 있었다. 수개월 동안이나 여류 작가들의 잊힌 목소리에 관해 논문을 써 놓고, 이제와 힘을 쥔 네 명의 남성에게 도장을 받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한두 해 전, 그중 한 명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가 자네를 망쳐놓기 전에 여기서 벗어나게." 나는 벗어나기로 했다. - P140
나는 승리보다는 고된 노력을 기억하려는 편이다. 힘겹게 언덕에 올라 꼭대기에서 뒤돌아보면, 승리는 수월하게 성취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리라. 등반은 오래 걸릴 뿐 아니라 그 실상을 더욱 잘 보여 준다. 춥고 외롭고 포기하고 싶을 때, 당신은 몸을 일으켜 휘청거리면서도 계속해서 나아간다. 나머지는 뜻밖에 얻어지는 것이다. 타일러는 승리를 빼고서는 얘기하지 않을 거라고 한 친구가 일러 줬다. 그녀의 말이 옳다. 하늘을 나는 말에 올라탄 기사와 달리기 시합에 나가기 전날 밤 부러졌던 다리가 회복되는 일화 등, - P150
이곳의 모든 게 신성하게 느껴지곤 한다. 묘지와 인접한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외치는 소리, 근처 찰스 강에서 승무원 코치가메가폰에 대고 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여기는 혼잡하게 이어지는 삶과 그 끝의 고요함이 교차하는 곳이다. 계속되는 논쟁도, 권력이나 살인 충동도, 더 이상 존재하지않는다. 늑대와 어린양이 마침내 함께 누워 있다. 지난 2년여의 시간은 너무 끔찍했다. 너무 많은 변화가 있었고, 사회와 개인의 상처들이 드러났다. 이 세계의 비열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겐 이 조용한 땅, 바로 이곳이 필요하다. 비록 기억과 근거없는 믿음에 국한된 것일지라도, 매일 한두시간씩 나를 위로하는 곳이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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