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맑은 정신이라는 말을 가지고 말꼬리를 잡고 있다. 이제는다시 말을 해도 괜찮다. 사령관이 주요 의례를 마치고 반지를 교환하고 베일을 거둘 차례가 왔기 때문이다. 우우. 나는 머릿속으로 야유를 퍼붓는다. 잘 봐둬, 이젠 너무 늦어버렸으니까. 천사들은 나중이 되면 시녀를 얻을 자격이 생길 거야. 특히 새로 얻은 아내가 자식을 낳지 못할 경우라면 더더욱. 하지만 너희 계집애들은 이제 볼 장다 본 거야. 이제 눈앞에 보이는 남자 외엔 그 누구도 없어. 하지만그들은 너희에게 사랑받기를 기대하지도 않아. 그냥 말없이 의무를수행해 주면 되는 거야. 의혹이 생기면, 똑바로 누워 천장을 바라볼수는 있지. 그 위에서 뭐를 보게 될지 누가 알겠어? 장례식용 화환들과 천사들, 먼지처럼 흩어진 별자리, 별과 다른 것들, 거미들이 남자고 간 퍼즐들. - P384

넌 언제나 그렇게 내숭이었어. 모이라가 말한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애정이 묻어 있다. 참 그래서 덕을 많이도 봤겠다. 많이도봤어모이라가 옳았다. 지금 이 정말로 딱딱한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지루한 의례가 이어지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모이라가 옳았다는 확신이 든다. 권력을 지닌 자들에 대해 음담패설을 속삭이는 데에는,
확실히 강력한 무언가가 있다. 짜릿한 쾌감이 있고, 뭔가 발칙하고,
은밀하고, 금지된 전율이 있다. 그것은 마치 일종의 주문 같다. 그런음담패설은 권력자들의 바람을 빼고 쭈그러뜨려, 우리가 조롱할 수있는 평범한 수준으로 떨어뜨린다. 화장실의 페인트칠한 칸막이에이름 모를 누군가가 이런 낙서를 긁어놓았다. ‘리디아 아주머니는빠는 걸 즐긴다‘, 그건 마치 저항의 고지에서 흔들리는 깃발 같았다. - P385

이제 여기 내 방의 이 지나치게 더운 공기 속에는 채워야 할 공간이 있다. 채워야 할 시간도, 저녁 식사로 끊어진, 여기와 지금, 거기와 그때 사이의 시공. 환자식처럼 쟁반에 받쳐서 방까지 가져다주는식사의 도착, 필요 없는 사람, 환자. 유효한 여권은 없다. 탈출구는 없다 - P388

에서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꾸면 되지. 우리는 서로에게 또 스스로에게말하곤 했다. 그래서 우리는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남자로 바꿨다. 변화는 언제나 좋은 거라고 우리는 굳게 믿고 있었다. 우리는 수정주의자였다. 우리가 수정한 건 물론, 우리 자신이었다.
옛날 우리의 사고방식을 돌이켜 보면 낯설기만 하다. 손만 뻗으면뭐든 가능할 것처럼 생각했다. 우연이라든가 한계 따위는 존재하지않는 것처럼, 한없이 뻗어가는 우리 삶의 경계를 마음대로 빚고 수정하는 일을 영원히 계속할 수 있을 것처럼, 우리는 믿고 생각했지.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나 역시 그렇게 행동했다. 루크는 내게 첫남자가 아니었고, 어쩌면 마지막 남자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런 식으로 얼어붙어 버리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시간 속에, 허공 한가운데, 그때 그 나무들 사이에 떨어지던 모습으로, 그렇게 정지해 죽어 버리지 않았더라면. - P393

이게 그 애란 말인가, 그 애가 이렇게 변했을까? 나의 보물어쩌면 이렇게 키가 크고, 달라졌는지. 살짝 미소를 짓고 있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은 꼭 옛날 첫 영성체를 하던 때 같다.
시간은 가만히 멈춰서 있지 않았다. 그것은 나를 휩쓸고 지나가나를 깨끗이 지워 버리고 말았다. 나라는 존재는 경솔한 아이가 너두 발은 물가에 남기고 가버린, 모래로 만든 여자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 애에게 있어 이제는 하얗게 지워져 버린 존재다. 이 사진의반짝이는 표면 너머 까마득한 저 뒤에 존재하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죽은 엄마들이 다 그렇듯 그림자의 그림자가 되어버렸다. 그애의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속에 나는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그 애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살아 있다. 그 애는 살아서 성장하고 있다. 그건 좋은 일 아닐까? 축복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견딜 수가 없다. 내가 그렇게 지워져버렸다는 사실을. 그녀가 차라리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았다면 좋으련만. - P396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사실 좀 다르다. 나는 모이라가 어떻게 탈출했는지, 그 이야기를 하고 싶다. 탈출해서 이번에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고, 아니, 그런 얘기를 할 수 없다면, 차라리 모이라가 ‘이세벨의 집‘을 폭파시켜서, 그속에 있던 사령관 50명을 한꺼번에 날려 버렸다고 말하고 싶다. 뭔가 대담무쌍하고 어마어마한 일을 저지르고 끝내 버렸다고 말하고 싶다. 뭔가 엄청난 일을, 그녀에게 어울리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고. 하지만 내가 아는 한 그런 일은 결코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모이라가 결국 어떻게 끝을 맺었는지, 끝을맺기나 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후로 다시는 볼 수없었기 때문이다. - P436

이 이야기가 달라졌다면 얼마나 좋을까. 좀 더 품위 있는 이야기였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야기 속의 내가 더 행복해 보이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더 적극적이고, 덜 우유부단하고 사소한 일들에 이렇게 넋을 놓는 사람이 아니고 똑똑한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 이야기가 좀 더 구체적이라면 좋겠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거나 갑자기 삶에서 정말 중요한 깨달음을 얻는 이야기라거나, 아니면 최소한 일몰이나 새나 폭풍우나, 눈(雪)에 대한 이야기라면 좋겠다.
어떻게 보면 이 이야기도 그런 것들에 대한 이야기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사이에 중간에 너무 많은 다른 것들이, 너무 많은 속삭임들이, 타인에 대한 수많은 추측들이,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숱한 뜬소문들이, 너무나 많은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너무 많은 탐색과 - P459

비밀들이 끼어들고 만다. 그리고 너무도 오랜 시간을, 기름에 튀긴음식이나 짙은 안개처럼 지루한 시간들을 버텨내야만 한다. 고요하고 한가하고 몽롱한 거리에서 터진 폭발 사고처럼 시뻘건 사건들이한꺼번에 터져 버린단 말이다.
이 이야기가 이토록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어서 당신에게 미안하다. 교차 사격 한가운데 꼼짝없이 갇혀서 사살당하거나, 사지가 찢겨 능지처참을 당한 시체마냥, 내놓은 이야기란 것이 산산이 흩어진파편들이라서 미안하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바꿀 수 있는건 없다.
그래도 좋은 일들도 집어넣으려고 애를 써왔다. 예를 들어, 꽃 같은 것. 그마저 없다면 도대체 지금 어떤 기막힌 지경에 이르렀을까? - P460

그렇지만 이 이야기를 하고, 또 하고, 되풀이할 때마다 나는 고통스럽다. 단 한 번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그때도 단 한 번으로 충분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나는 이 서글프고 굶주리고 황폐하고 절뚝거리고 사지가 절단된 이야기를 계속하려 한다. 왜냐하면 그래도 나는 이야기를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기회가닿는다면, 미래에든 천국에서든 감옥에서든 지하에서든 다른 어떤곳에서라도 당신을 만나거나, 당신이 탈출했을 때 내가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테니까 미래, 천국, 감옥, 지하, 거기가 어디든 여기가아닐 것은 분명하다. 무슨 이야기라도 털어놓다 보면, 적어도 당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거기 있어서 내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을, 구체적인 사실로 믿을 수 있다. 이 이야기를 당신한테 털어놓음으로써, 당신이 존재할 것을 의지로 명하는 바이다. 나는 이야기한다. 고로 당 - P460

신은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이야기를 계속할 생각이다. 그래서 스스로 견뎌낼 작정이다. 이제부터 이야기할 부분은 결코 당신의 마음에 들 리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착하게 굴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무엇 하나빼먹거나 생략하지는 않으려 한다. 아무튼 당신은 이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읽어왔고, 내가 빠뜨린 이야기들, 별건 아니라도 진실을 내포하고 있는 이야기들을 들을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 P461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그 이야기다.
나는 닉을 다시 찾아갔다. 몇 번씩, 나 혼자서, 세레나 몰래, 누가시킨 것도 아니었고, 댈 핑계도 없었다. 그를 위해 한 일도 아니고,
전적으로 나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 내 몸을 그에게 준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내가 가진 것이 있어야 주지 않겠는가? 그가 나를 들여보내 줄 때마다 나는 베푼다는 생색이 들기는커녕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그는 그럴 필요가 없었으므로,
그렇게 하기 위해 나는 무모해졌고, 어리석게 모험을 했다. 사령관과 헤어지고 난 후, 나는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위로 올라갔지만,
그러고 나서 나중에 복도를 따라 뒤쪽에 달린 하녀들의 계단으로 걸어 내려와 부엌을 통과했다. 부엌문이 등 뒤에서 짤각 하고 닫힐 때면 나는 거의 매번 정말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치솟는다. 그 소리는 쥐덫이나 무기 같은 쇳소리가 났다. 하지만 나는 되돌아가지 않았다.  - P461

서, 휘파하느님, 당신이 원하신다면 난 못할 일이 없어요. 나는 기도한다.
이제 주님이 내 주인이 되셨으니, 정말로 원하시기만 한다면 나 자신을 하얗게 지워 버리겠어요. 진정 내 모든 것을 비우고, 참된 성배가 되겠어요. 닉을 포기하겠어요. 다른 사람들도 까맣게 잊겠어요.
불평도 그만두겠어요. 내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겠어요. 희생하겠어요. 참회하겠어요. 모든 권리를 포기하겠어요. 모든 인연을 끊겠어요.
옳지 못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어쨌든 그런 생각을 한다. 그들이레드센터에서 가르친 모든 것들, 내가 이제까지 저항했던 모든것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 한꺼번에 나를 덮친다. 고통은 싫다. 머리는 얼굴 없는 계란형의 천주머니가 되고, 두 발은 허공에 매달린댄서가 되고 싶지는 않다. ‘장벽‘에 걸린 인형이 되고 싶지는 않다.
날개 없는 천사가 되고 싶지는 않다. 어떤 식으로든, 계속 살아가고싶다. 내 몸은 다른 사람들 마음대로 쓰라고 맡기겠다. 그들이 내 몸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해도 좋다. 나는 비굴하다.
처음으로, 나는 그들의 진정한 힘을 실감한다. - P495

나는 내 방 창가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 무릎 위에는 구겨진 별들이 한 뭉치 흩어져 있다.
이번이 내가 뭔가를 기다리는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뭘 기다리고 앉아있는 거야? 옛날에는 그런 말들을 썼지. 그건 ‘서둘러라‘라는 뜻이었다. 대답을 기대하는 질문은 아니었지. 뭘 기다리고 있는 거니?라는말은 다른 질문이지만, 난 그 질문에도 대답할 수 없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꼭 기다림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보다는 일종의 미결 상태라 하는 편이 좋을까. 긴장감도 없는 마침내 시간도사라지고 없다.
나는 정숙과 기품의 화신이 아니라 치욕과 굴욕의 상징이다. 이보다 더 참혹한 기분이 되어야 하는데. - P501

하지만 나는 고요하고, 차분하고, 이렇게 무심할 수가 없다. 그 치들이 너를 짓밟게 내버려두지 마라. 이 말을 혼자 되풀이하지만, 아무런 감흥이 없다. 거기 공기가 들어가게 하지 말라든가 아예 존재하지 말라고 말해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그런 말을 해도 좋을 것 같다.


정원에는 아무도 없다.
비가 올지 궁금하다.


바깥에서 햇빛이 희미해지고 있다. 벌써 붉은 빛이 돈다. 곧 어둠이 찾아오리라. 지금은 조금 전보다 훨씬 어둡다. 이렇게 어두워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 P502

문 뒤에 숨어 복도를 절름거리며 걸어오는 세레나를 기다릴 수도있다. 참회는 형벌이든 처분을 무조건 받아들이며 고분고분하게 굴다가 불시에 덮쳐 머리에 날쌔고 정확하게 발길질을 할 수도 있다. 그녀를 고통에서 구해 주기 위해, 그리고 나 자신도 고통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우리들의 고통에서 그녀를 구해주기 위해.
그러면 시간도 절약될 텐데.
차분하게 계단을 내려가서 분명한 목적지라도 있는 듯이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할 수도 있다. 도대체 어디까지 갈 수 있나 시험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빨간색은 너무 눈에 잘 띄니까.
ㅡ예전처럼 차고 너머닉의 방에 갈 수도 있다. 나를 방에 들여보내줄지, 은신처를 제공해 줄지 시험해 볼 수도 있다. 이제는 정말로 은신처가 절박하게 필요해지고 말았으니,


이런 허망한 대안들을 상상해 본다. 각각의 선택은 나머지와 꼭같은 비중이다. 무엇 하나 다른 것보다 나아보이지 않는다. 피로가내 몸 속에, 다리와 눈에 자리 잡고 있다. 결국은 거기 굴복하고 만다. 믿음은 그저 장식된 글자일 뿐이다. - P503

황혼을 내다보고 겨울이라는 생각을 한다. 부드럽고 가볍게 내리는 눈은 보드라운 결정으로 만물을 덮어 버리고, 비가 내리기 전의달무리처럼 사물의 윤곽선을 흐리고 색채를 말소해 버린다. 얼어 죽는 건, 첫 번째 오한만 지나고 나면 고통이 없다고들 한다. 어린애들이 만든 천사처럼 눈 속에 드러누워 잠이 들어버릴 수도 있다.
등 뒤에 그녀의 존재가 느껴진다. 나의 선임자, 내가 대역을 맡은그녀는 별들과 깃털로 만든 옷을 입고 샹들리에 밑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다. 공중에 멈춘 새, 천사가 되어 버린 여자가 사람들한테발견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번에는 내가 발견했다. 어째서 나는 이곳에 나 혼자밖에 없다고 믿어왔던 걸까? 언제나 우리 둘이 함께였는데, 그녀는 극복해야지 하고 말한다. 나는 이 신파극이 지겨워지려고 해. 침묵을 지키는 게 지겨워. 네가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은없고 네 삶은 아무짝에도, 누구에게도 쓸모가 없어라고 대꾸한다.
삶을 끝내 버리고 싶다. - P504

나의 의혹은 그의 머리 위 허공을 떠돈다‘ 나를 경고해 의혹을 몰아내려는 어둠의 천사, 그래, 알 것만 같다. 그라고 해서 ‘메이데이‘
를 모르라는 법이 어디 있나? ‘눈‘이라면 누구든 그 말을 알고 있을터이다. 그들은 지금쯤 숱한 육신으로부터, 숱한 입들에서 그 말을짜내고, 짓뭉개고, 비틀었을 터이다.
"나를 믿어요"
그 자체로는, 그 어떤 효력도 없고, 어떤 보장도 해 줄 수 없는 한마디.
하지만 나는 그 말에, 그 제안에 허겁지겁 매달린다. 내게 남은 건 그게 전부니까. - P506

코라와 리타가 주방에서 황급히 나온다. 코라는 울기 시작한다.
내가 그녀의 희망이었는데, 꿈을 실현시켜 주지 못했다. 이제 그녀는 영영 아기 없는 여자로 남으리라.
밴이 이중문을 활짝 열어놓고 진입로에서 기다리고 있다. 이제는내 양편에 자리 잡고 선 두 남자가 내 팔을 부축해 태운다. 이것이내 끝이 될지 새로운 시작이 될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다른 도리가 없었기에 이방인들의 손에 내 몸을 맡겼을 뿐.
"그래서 나는 차에 오른다. 그 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암흑으로 아니 어쩌면 빛으로. - P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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