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으로 나오니 마치 욕조에서 바로 나온 듯 상쾌했다. 행복한 기분에 온몸의 신경이 파르르 떨렸다. 이모부의 손을 잡고 몸을 굽혀 감사의 입맞춤을 했다. 방으로 돌아오자, 여자는 객실 안에서 혼자가 되었다. 사방이 돌연 조용해지고 혼자 있자니 무섭고 불안했다. 드레스 아래 맨살이 화끈거렸다. 여전히 흥분에 들떠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넓은 방이 이제는 비좁아 보였다. 여자는 발코니 문을 열었다. 드러난 어깨 위로 눈이 내렸다. 발코니로 나갔다. 추위로 몸이 떨리긴 했지만 기분이 상쾌했고 숨쉬기가 훨씬 편해졌다. 광활한 풍경을바라보았다. 그녀의 작은 심장이 거대한 밤하늘 아래서고동쳤다. 방 안의 고요함보다 더 적막한 자연 그대로의고요함이 느껴졌다. 아무런 부담도 무게도 없는, 부드러운 고요함이었다. 한낮에 빛나던 산들이 이제 그림자 속에 묻혀 있었다. 산들은 반짝이는 흰 눈에 덩치가 큰 까만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이아몬드를 뿌려 놓은 듯 반짝이는 별들 사이로 표면이 고르 - P110
지 못한 노란 진주 같은 보름달이 높이 떠 있었다. 음산하고 차가운 달빛을 받아 안개 자욱한 계곡의 윤곽이희미하게 드러났다. 인간의 때가 묻지 않은 자연, 그녀가 아는 어떤 것과도 다른 신성하고 고요하고 부드럽게사람을 압도하는 풍경이었다. 차츰 고요 속으로 빠져들자 흥분된 마음도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는 듯했다. 그때 갑자기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금속성 소리가 들려왔다. 계곡 아래에 있는 교회의 종소리였다. 소리는 계곡 암벽의 왼쪽 오른쪽으로 울려 퍼졌다. 순간, 여자는 마치 자신이 그 종이라도 된 듯 깜짝놀랐다. 그리고 안개 바다에서 울려 퍼지는 금속성 소리에 귀 기울이며 숨을 죽인 채 종소리의 수를 셌다. 아홉, 열, 열하나, 열둘, - P111
‘자정이다! 말도 안 돼. 이제 겨우 자정이라니? 수줍을 많고, 겁 많고, 내성적이고, 깡마르고, 보잘것없고, 소심한 영혼을 가진 여자가 도착한 지 이제 겨우 하루, 아니 열두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단 말이야?‘ 그 순간, 가슴이 터질 듯한 감동에 휩싸여 마음속 가장 깊은 곳까지 흔들린 여자는 난생처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의 영혼은 신비스러울 정도로 부드럽고 탄력 있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어서 단 한 번의 체험만으로 무한히 커질 수 있고, 그 비좁은 공간에 온 세상을 담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 P111
‘시간 맞춰 일하러 가야 해! 늦으면 안 돼!‘ 지난 십 년 동안 습관이 되어버린 생각들이 줄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곧 자명종이 울릴 거야……. 다시 잠들면 안 돼... 책임감! 책임감을 잊어선 안돼! 당장 일어나자. 여덟시에 업무가 시작되잖아. 그전에 일어나서 불 피우고, 커피 끓이고, 우유와 빵 사 오고, 방을 정돈하고, 어머니 붕대를 갈아주고, 점심 식사 준비도 해놓아야 하잖아? 오늘은 해야 할 일이 더 있었는데 ...... 아! 맞아. 식료품 가게 여주인이 어제 외상 갚으라고 했었지...... 안돼, 자면 안 돼, 정신 차리고 자명종이 울리면 일어나야해...... 그런데 오늘은 무슨 문제가 있나? 자명종이 울리질 않아....... 고장 났나? 태엽 감아 놓는 걸 깜빡했나? 자명종 어디 있지? 방 안에 빛이 벌써 환한데·· 세상에! 늦잠을 잤나보다. - P112
‘여기가 도대체 어디야?" 여자의 눈길이 천장을 더듬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연기에 그을리고 거미줄이 무성하며 경사진 다락방의 우중충한 잿빛 천장과 갈색 나무 대들보는 어디 가고 황금색 테두리에 푸른색과 흰색으로 깔끔하게 채색된 천장이 보였다. ‘이 빛은 전부 어디서 들어오는 거지? 간밤에 다락방에 새 창문이 생겼을 리도 없는데……. 여기가 도대체어디야?‘ 여자는 자기 손을 보았다. 낡은 갈색 담요가 아니라, 붉은색 꽃으로 수놓은 새파란 푸른색 담요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니야(첫 번째 충격)! 이건 내 침대가 아니야(두 번째 충격!) 여긴 내 방이 아니잖아.‘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참을 두리번거리고 나서야 기억을 되찾았다(세 번째 가장 큰 충격). - P113
휴가, 여행, 자유, 스위스, 이모, 이모부, 으리으리한 호텔! 걱정할 일도 없고, 책임질 일도 없다. 해야 할 일도 없고 시간을 맞출 필요도 없다. 자명종도 없다! 불을 지피야 할 난로도 없고, 걱정할 것도 없다.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몰려올 사람들도 없다. 십 년 동안 그녀의 생활을 짓밟아 온 끔찍한 굴레가 처음으로 벗겨졌다. 온몸에더운 피가 흐르는 것을 생생히 느끼며, 보드랍고 따뜻한침대에 그대로 누워 있어도 괜찮았다. 커튼을 젖히기만하면 방 안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온기가 피부에 부드럽게 와 닿았다. 눈이 다시 감겨도 걱정할 필요 없다. 이제 그녀에게는 게으름 피울 권리가 있다. 꿈을 꾸어도 되고, 기지개를 켜도 되었다. 머리맡에 있는버튼을 눌러 종업원을 부를 수도 있다(여자는 이모가 해준 말이 기억났다). - P114
이 매혹적인 세계에서는 수만 번이라도 서비스를 주문할 수 있다. 그들은 그런 일을 하라고 있는 사람들이다. 원한다면 방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된다. 버튼을 눌러도 되고, 안 눌러도 된다. 일어나도 되고, 안 일어나도 된다. 다시 잠을 자도 되고, 침대에 앉아 있어도 된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눈을 감고 있어도 되고, 뜨고 있어도 된다. 마음껏 공상에 잠겨도 괜찮다. 아무 생각 하지 않아도 된다. 게으름을 피워도 좋다. 시간은 나의 것이지 다른 사람을 위해 있는 게아니다. 미친 듯 돌아가는 시간의 바퀴를 따라갈 필요가없다. 노를 배 안에 들여놓은 배처럼 눈을 감고 시간에몸을 맡기며 둥둥 떠가면 된다...... 크리스티네는 꿈꾸듯 그 새로운 느낌을 즐기며 누워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일요일 아침 교회 종소리처럼몸에서 혈관이 뛰는 소리가 기분 좋게 귓속에서 윙윙거렸다. - P115
약한 시간 후에 산 경사면 한가운데 볼록하게 튀어오른 전망 좋은 자리에 다다르자, 여자는 풀밭 위로 몸을 던졌다. ‘이것으로 충분해! 오늘은 이만하면 됐어." 머리가 빙빙 돌았지만, 묘하게 행복했다. 눈꺼풀 아래로 피가 고동치는 느낌이었다. 바람에 드러난 피부가 쓰라렸다. 하지만 고통에 가까운 이런 느낌마저 새로운 재미로 여겨졌다. 여자는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온몸을 뒤틀게 하는 육체적 고통 속에서 젊음과 생기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피가 이토록 힘차게 혈관 속을 흐르고, 맥박이 이토록 빨리 뛸 수 있는지 몰랐다. 한계를 뛰어넘어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탈진한 상태에서도 이토록 민첩하고 힘이 넘칠 수 있음을 미처 알지 못했다. 꿈에서도 보지 못했던 새파란 하늘에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여자는 상쾌한 기분으로 얼음처럼 차고 향기로운 알프스의 이끼를 손으로 뜯으며, 파노라마처럼펼쳐지는 아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 P119
공상에 잠겼다. 깨어 있는 상태로 꿈을 꾸는 듯했다. 한두 시간 동안 여자는 그렇게 맹렬한 감정의 격동과 자연의 강하고 격정적인 움직임을 온몸으로 음미했다. 그때 입술을 태워버릴 듯 날카로운 햇빛이 여자의 얼굴에쏟아지기 시작했다. 여자는 벌떡 일어나 산길을 걸어 내려가면서 노간주나무, 용담, 세이지 등 꽃 몇 송이를 땄다. 날씨가 추워서 꽃잎 사이사이에 수정 같은 얼음이그대로 남아 있었다. 처음에는 관광객답게 차분하게 걸어가다가, 이내 중력에 몸을 맡기면서 빠르고 대담하게이 돌에서 저 돌로 겅중겅중 뛰어 내려갔다. 가슴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고, 전에 경험하지 못한 행복감을 느꼈다. 이리저리 굽은 길을 돌아 계곡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여자는 노래라도 부르고 싶었다. 골짜기를 타고 불어오는 바람에 치맛자락과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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