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일어나 난방이 안 되어얼음처럼 차가운 객차를 타고 가 늦은 저녁에야 돌아왔다. 집에 와서는 빨래하고, 옷을 꿰매고 깁고, 다렸다. 그렇게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는 상태가 될 때까지 일한 후에야, 옆으로 넘어진 가방처럼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영원히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1918년, 그녀는 스무 살이 되었지만 전쟁은 여전히계속되었고, 걱정 없고 자유로운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거울을 보거나 골목길에 고개를 내밀 시간도 없을만큼 바쁜 나날이 계속되었다. 크리스티네의 어머니는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눅눅하고 쉴만한 공간이 없는 병원에서 일하고 나면 다리가 퉁퉁 붓는다고 하소연했다. 하지만 크리스티네에게는 어머니를 불쌍히 여길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여자도 병원에서 너무 오랫동안 일하느라 몸이 몹시 허약해졌다. 매일 끔찍하게 사지가 절단된 70~80명 환자의 입원 서류를 타이핑하느라몸 한구석에 마비 증세가 나타났다. - P43
1919년, 여자가 스물한 살 때 전쟁이 끝났다. 하지만 가난은 끝나지 않았다. 당국이 끝없이 쏟아내는 법령 아래 숨었을 뿐이었다. 아직 잉크도 마르지 않은 전쟁 공채와 지폐의 방공호 아래로 교활하게 기어 들어가 숨어있던 가난은 뻔뻔스럽게 기어 나와 우묵한 눈으로 주위를 살펴보며 주둥이를 크게 벌리고 전쟁의 시궁창에 남겨진 것들을 집어삼켰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이 계속되던 겨우내 하늘에서는 수십만, 수백만 개의 돈다발이눈송이처럼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눈은 온기 있는 손에닿자마자 녹아버렸다. 돈은 잠을 자는 사이에도 녹아버렸다. 다시 시장으로 뛰어가기 위해 나무 굽을 댄 구두로 바꿔 신는 동안에도 돈이 날아가 버렸다. 멈추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항상 너무 늦었다. 생활이 수학이 되고, 덧셈이 되고, 곱셈이 되고, 머리가 어질어질한 숫자들의 소용돌이가 되고, 마지막 남은 물건들을 시커멓고 탐욕스런 진공 속으로 빨아들이는 회오리바람이되었다. - P44
스물여섯 살의 크리스티네는 두려움을 느끼면서 그런처녀들의 형태를 지켜보았다. 그들의 자존심과 욕심, 빈틈없고 대담한 시선, 도발적인 엉덩이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남자아이들이 아무리 노골적으로 몸을 더듬어도 웃기만 하는 처녀수치심도 없이 남자아이들을 숲속으로 이끌고 가는처녀들과 마주치곤 했다. 여자는 그들을 볼 때마다 심한거부감이 들었다. 그러나 거리낌 없이 욕망을 충족하고, 성에 대해 개방적인 전후 세대 젊은이들과 비교할 때자신은 너무 늙었고, 너무 지쳤으며, 아무 쓸모 없는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 압도당한여자는 경쟁하고 싶은 마음도, 경쟁할 능력도 없음을 깨달았다. 여자는 경쟁하거나 애쓰지 않기로 작정했다. 조용히 몽상하고, 묵묵히 일하고, 창가의 꽃에 물이나 주면서 차분히 살아가리라고 다짐했다. 바라는 것도 갖고싶은 것도 없이, 여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새롭고 신나는 일도 찾지 않았다. - P47
바위투성이 우뚝한 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사람을 압도하는 낯설고 거대한 풍경이었다. 크리스네가 그동안 꿈에서도 보지 못했던 알프스산맥의 웅장한 모습이었다. 여자는 놀라움으로 몸을 떨었다. 동쪽에서는 아침 햇살이 산봉우리를 뒤덮은 만년설을 비추어 찬란한 빛이 사방으로 반사되고 있었다. 희고 깨끗하고 생경한 햇빛이 너무 눈부시고 날카로워서 여자는 순간 눈을 감았다가 떴다. 놀라운 광경을 좀더 가까이 보려고 손으로 유리창을 누르자, 창문이 왈칵 열렸다. 찬바람에 날려 객차 안으로 들어오는 눈과 함께 얼음처럼 - P58
차고 유리처럼 예리한 공기가 화들짝 놀라 벌어진 여자의 입을 통해 폐까지 들어왔다. 생애 가장 깊고도 깨끗한 호흡이었다. 거세게 들어오는 신선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려고 여자는 두 팔을 벌렸다. 가슴을 부풀리며 들이마신 시원한 기운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아, 정말 대단해!‘ 시원한 바람을 맞아 기분이 상쾌해진 여자는 고개를좌우로 돌리며 차창밖풍경을 감상했다. 점점 더 흥미를 느끼며 화강암 산비탈을 따라 눈 덮인 산 정상에서산허리까지 바라봤다. 곳곳에 절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폭포에서는 흰 물줄기가 계곡으로 쏟아져내리고 산허리에는 아담한 돌집 몇 채가 암벽 사이 깊고 좁은 틈새에 새집처럼 들어앉아 있었다. 산 정상 위에서는 독수리 한 마리가 서서히 선회하고, 그 위로 맑고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여자는 이처럼 강렬하며 행복감에 취하게 하는 대자연의 위력을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 P59
어린 시절, 여자는 며칠 동안 고열에 시달리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 열이 내리자 어머니는 희고 달콤한 아몬드 밀크를 가져왔다. 아버지와 오빠가 침대 옆에 앉아 있었고 온 가족이 그녀를 돌보며 분주했다. 가족 모두 그녀에게 다정했다. 옆방에서는 카나리아가 지저귀고, 침대는 부드럽고 따뜻했다. 학교에 갈 필요도 없었다. 모든 것이 그녀를 위해 존재했다. 비록 힘이 없어서놀 수는 없지만 침대 위에는 장난감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아니야 눈을 감고,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미용사들의 서비스를 마음껏 즐겨보자..……‘ 여자는 지난 20여 년 동안 어린 시절의 그런 아늑함을 떠올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그 모든 것들이 생각난 것이다. 피부가, 따뜻해진 관자놀이가 기억 - P86
불러내고 있었다. 손을 민첩하게 놀리던 미용사가 이마음 "좀더 짧게 자를까요?" 같은 질문을 했다. 생전 처음으로 명령을 내리듯 약간 거만하게 이런저런 요구를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자는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의도적으로 앞에 있는 거울을 보지 않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용사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두는 게 좋겠어.‘ 빛나는 유리병에서 나오는 향기가 그녀의 머리카락위로 흘렀다. 면도날이 그녀의 피부를 간질였다. 머리가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가벼워진 느낌, 목이 시원하게드러난 느낌이 들었다. 여자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마비된 듯, 꿈같은 느낌이 기분 좋게 이어졌다. - P87
그것은 여자가 꿈도 꾸어보지 못한, 노동도 가난도 없는 세상이었다. 이모는 여자에게 산봉우리와 호텔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지나치면서 만나는유명인 호텔 손님들의 이름도 말해주었다. 여자는 이모의 이야기를 들으며 경외심 가득한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이런 공간을 오갈 수 있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런 모든 경험이 자신에게 허락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마침내 이모가 시계를 보았다. - P89
축복받은 어느 먼 나라에서 온 와인이리라. 얇은 크리스털 잔에 담긴 와인이 투명한 호박만큼 눈부시게 빛났다. 와인은 달콤하고 시원한 크림처럼 목구멍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처음에 크리스티네는 경건한 마음으로 한 모금만 마셨다. 그러나 그녀가 좋아하는 모습에 한껏 기분이 고조된 이모부가 줄곧 잔을 채워주었다. 크리스티네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 많아졌다. 코르크 마개를 뽑은 샴페인처럼 그녀의 입에서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소용돌이치듯 쾌활하게 터져 나오는말에 자신도 놀랐고, 그동안 마음을 가두고 있던 ‘불안‘ 이라는 견고한 벽이 단숨에 무너진 듯했다. ‘이런 곳에서 불안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이모, 이모부 모두 좋은 사람들이야. 주위에 말끔하고 화려하게차려입은 사람들도 한결같이 세련되고 품위 있어. 아아, 세상은 아름다워, 인생은 아름다운 거야.‘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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