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기쁘지도 않아?"
‘어머니 말씀이 맞아 맞는 말이야. 그런데 나는 왜 기쁘지 않을까? 왜 마음이 들뜨지도 않고, 떨리지도 않을까?‘
여자는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올 대답에 귀 기울였다. 하늘이 내려준 놀라운 선물을 받으면 아주 작은 반응이라도 있을 법한데, 여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단지 혼란스러웠을 뿐. 이상하게도 두렵기만 했다.
‘이상하다. 나는 왜 기쁘지 않을까? 우편물을 분류하다가 노르웨이의 잿빛 피오르 해안이나 프랑스 파리의가로수길, 이탈리아 소렌토 해변, 미국 뉴욕의 빌딩 사진이 인쇄된 그림엽서를 보면 저절로 한숨이 나올 때가수백 번도 넘지 않았던가? 나는 언제쯤 이런 곳에 가볼수 있을지, 내게도 차례가 올지, 안타까워하지 않았던가? 지금처럼 우체국 안이 텅 비어 있는 오전 시간 내내나는 무엇을 꿈꾸었지? 언젠가는 이 의미 없고 단순한일에서, 이 지겨운 시간과의 경주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지 않았던가? 단 한 번만이라도 마음 편하게, 산산이 조각나고 갈기갈기 찢긴 시간이 아니라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던가? 단 하루만이라도 똑같이 반복되는 이런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던가? - P34

인정사정없이 잠을 깨우는 자명종 소리에 놀라 일어나서 옷을 입고, 방을 덥히고, 우유와 빵을 집어삼키고, 서둘러 우체국에 도착하면 우편물에 소인을 찍고, 서류를작성하고, 전화를 받고, 업무가 끝나 집으로 돌아가면다림질하고, 빨래하고, 음식 만들고, 해진 옷을 수선하고, 어머니를 돌보고, 그리고 마침내 피로에 지쳐 죽은듯이 잠에 곯아떨어지는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지 않았던가? 나는 그것을 바로 이 책상에서, 둥지처럼 비좁은이 의자에서 수천 번, 아니 수만 번 꿈꾸었어. 그리고 이제 마침내 그 꿈이 이루어지려 하고 있어. 난 이곳에서벗어나 자유롭게 떠날 거야. 그런데 어머니 말대로 나는왜 기쁘지 않을까? 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걸까?‘ - P35

여자는 경직된 눈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자리에 앉아, 낯설고 차가워 보이는 벽을 응시하며 마음에서어떤 기별이 오지 않을지, 늦게나마 설레는 느낌이 들지 않을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무심결에 호흡을 멈추고 마치 임신한 여자처럼 머리를 깊이 숙인 채 몸안에서 나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여자의 몸은 새들이 떠나간 숲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스물여덟 살의 여자는 행복이란 게 어떤 상태를 뜻하는지를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신은 행복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깨달았다. 그것은 어린 시절에 배운 적이 있지만 지금은다 잊어버린 한때 알았다는 사실만 기억나는 외국어와 - P35

내가 최근에 행복을 느꼈던 게 언제였지?‘
여자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숙인 이마에 가느다란두 줄의 주름살이 생겼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오래된장면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뿌연 거울을 통해보이듯이 어떤 모습 하나가 떠올랐다. 짧은 면 치마를입고 어깨에 멘 책가방을 흔들며 날씬한 다리를 움직여걷는 어느 금발 소녀의 모습, 친구 열두 명이 소녀를 둘러싸고 있다. 빈 교외의 공원에서 열렸던 크리켓 경기에서 공이 하늘 높이 올라갈 때마다 웃음소리도 함께 솟구쳐 올랐다. 신나게 재잘대던 맑은 목소리들, 그 웃음소리가 얼마나 밝고 자유로웠는지 새삼 기억났다. 즐거운 웃음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소녀의 몸속에서 피부를 간질이고 핏속에서 소용돌이치고 들끓었다. - P36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웃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진정 자유롭던 시절이었다. 프랑스어 수업 시간, 우스황스럽게 들리는 프랑스어 단어가 나오거나 누가 발음을 엉터리로 하면 소녀들은 두 손으로 의자를 움켜쥐고입술을 깨물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아주 사소한 일에도 소녀들에게는 웃음의 물결이 퍼졌다. 선생님의 말더듬이 버릇, 거울을 보며 찡그린 얼굴, 제 꼬리를물고 빙빙 도는 고양이, 거리에 서서 사람들을 지켜보는경찰관……. 아무리 사소하고 의미 없고 작은 일에도 소녀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건자연스럽고 장난기 넘치는 웃음이었다. 소녀는 자는 동안에도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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