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에서나 텔레비전에서나 사람들은 홍콩의 밤을 찬양했으니까. 그 말대로였다. 이토록 화려한 야경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높은 건물들과 조명들, 레이저 쇼...... 어떤 고층건물에는 시시각각 빛으로 다른 그림이 수놓이기도 했다. 살면서 이런 풍경을 보게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었다. 기남의 인생에서 벌어졌던 다른 모든 일이 그랬던 것처럼.

우경의 집은 추웠다. 솜이 채워진 차렵이불을 덮었지만 으슬으슬한 추위가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기남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걸이에 걸어둔 패딩 코트를 걸쳐 입었다. 그러고 가만히 서서 마이클의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이답게 깊게 잠이 든 듯했다. 한밤중에 모닥불을 보는 사람처럼 기남은 오래도록그애를 바라보다 다시 자리에 누웠다.
평소처럼 수면제 반 알을 먹었는데도 잠이 쉬이 오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그랬지만 나이가 들면서 잠귀가 더 밝아졌다. 기남은 작은 소리에 여러 번 깨면서 얕은잠을 이어서 잤다. 다섯시가 되니 눈이 떠졌고 더는 잠이 오지 않았다. 기남은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거울을 쳐다봤다.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손가락으로 머리를 빗자 그 사이로 머리칼 몇 가닥이 쉽게 빠져나왔다. - P276

기남은 마음을 가다듬고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우경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산 아이보리색 니트 원피스를 입고 스타킹을 신었다.
그 위에 검은색 패딩 코트를 걸치고 밤색 털실로 뜨개질해서 만든크로스백을 둘렀다. 분홍색 립스틱을 입술에 바르고 마스크를 쓴뒤 밖으로 나가니 우경이 제인의 방문을 열고 서랍 위의 잡동사니들을 뒤지는 모습이 보였다. 우경은 잡동사니들 가운데서 검은 장우산을 꺼내고는 기남에게 건넸다.
"언제 한번 이 방 정리하긴 해야 하는데, 이삿짐에서 박스만 푼수준이야."
바닥에는 제인의 요와 이불이 반듯이 개켜져 있었다. - P279

어린 시절 기남의 방은 부엌 옆에 있었다. 그 방에는 문이 두 개있었는데, 뒷마당으로 연결된 문은 잠가도 되었지만 부엌과 연결미닫이문은 그럴 수 없어 누구나 언제든 열어볼 수 있었다. 기남은 아직도 겨울이 되면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 방에서 사는 동안 겨울마다 얼마나 추웠는지, 그게 얼마나 사람을 못 견디게 하는 괴로움이었는지 몸이 기억했기 때문이었다. 기남은 꿈을 꿀 때면 자주 그 방으로 갔다. 벌써 오십 년이 더 지난 일인데도, 기남은 꿈속에서 현재의 나이로 그곳에 살고 있었다.
기남은 아홉 살 때부터 식모 일을 했다. 기남을 제외한 일곱 식구의 밥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비질과 걸레질을 했으며, 얼마 - P279

지나지 않아서는 손빨래를 맡아 하고 밥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기남은 자신이 보통의 식모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어느 누가 식모를 학교에 보내주나. 동네 사람들은 기남이 지나가면 권사장네식모라고 불렀다. 그 집에는 아이가 넷 있었는데, 기남보다 세살어린 막내 아이는 너무도 해맑게 기남을 식모 언니라고 불렀다.
그래도 다른 아이들은 기남의 이름을 불러줬다.
어려서 기남은 권사장네 가족에게 소속되고 싶었다. 자신이 최선을 다한다면 식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어떤 말을 듣든, 어떤 일을 당하는 좋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자신을 속이는 일이 자신이 완전히 혼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보다는 쉬워서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자신을 속일 만큼속이고 나서야 기남은 자신이 그들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 P280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남은 권사장이 운영하는 공장의 주방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김여사라는 여자와 함께 둘이서 일꾼 서른 명의 밥을 하는 일이었다. 김여사는 허리를 꼿꼿이 펴지 못했지만 손이 빠르고 기운이 센 사람이었다. 자식 여덟을 모두 출가시켰다며 이제는 오히려 일하지 않으면 몸이 아프다고 했다. 그녀는 기남이 일하다 실수를 하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말수가 적은데다 잘 웃지도 않아서 처음에 기남은 그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기남이 사장님 내외의 덕으로 어려서부터 보살핌을 받고 국민 - P280

학교도 다닐 수 있었다고 말했을 때도 그녀는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대꾸했다.
"네가 무슨 덕을 봤는데? 여기서 일하는 거 월급도 안 주잖아? 사장네가 조그만 어린애를 요리조리 써먹고 생색만 내는 거지."
그런 이야기를 들은 건 처음이어서 기남은 그녀의 말이 듣기 싫기만 했다.
"권사장, 손해보는 장사 하는 사람 아니다. 뭐, 마음이 좋아 널키웠나. 너네 집에서 널 맡기는 비용까지 줬다. 내가 직접 봤다."
그녀는 기남의 부모가 권사장네만큼 부유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저 키우기 귀찮았을 뿐이라고, 아들 없는 집의 여섯번째 딸을 참을 수 없었던 거라고, 헐값에 치워버린 거라고
"사람 가죽 쓰고서 무슨 죄를 받으려고……" - P281

그녀는 쯧쯧 혀를 차면서 마늘 껍질을 벗겼다. 기남은 그런 그녀가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김여사를 만나고서야 권사장네 식구들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들은 가득 가지고서도 인색한 사람들이었다. 가장 추운 날에도 냉골 같은 기남의 방을 그대로 두었으며, 아무때나 방문을 열어 작은 것 하나라도 기남의손을 이용해 얻으려 했다. 혹여나 기남이 고기반찬을 조금이라도먹을까 전전긍긍했고 과일이 남아서 썩더라도 기남의 손에는 쥐여주지 않았다. 모두 기남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기남은 애써 자신이 모르는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편이 자신이 - P281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보다는 덜 아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여사와 시간을 보내면서 기념은 자신이 여태킹 의존해왔던 기만의 뿌리를 뽑아낼 수 있었다. 용기를 내며 큰사랑에게 월급을 요구하기도 했다. 시간이 갈수록 남은 길게은 분노를 느꼈고, 그 분노는 기남에게 약이 되었다 - P282

남은 건물을 나와 다시 해변을 따라 걸었다. 생각보다 멀리까지 왔는지 대관람차가 아주 작게 보였다. 기남은 바다를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갔다. 기남은 바다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았다.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는 달이 눈앞의 바다를 파도치게 한다는 사실도 바닷속에서 길을 잃어 익사하는 거북이 있다는 사실도 기남은알지 못했었다. 기남은 여전히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들을 떠올렸다. 그러자 익숙한 통증이 가슴에 퍼져나갔다. 멀리서 합창하는소리가 들렸다.
기남은 노랫소리를 따라 걸어갔다. 대관람차 가까이서 젊은이들 여럿이 마이크를 들고 캐럴을 부르는 모습이 보였다. 사람들이삼삼오오 모여서 그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기남은 주머니 속의 탁구공을 손으로 이리저리 만지면서 그 노래를 들었다.
캐럴을 듣는 동안, 기남은 명동의 한복판에서 서성일 수밖에 없었던 그날로 돌아갔다.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지금으로부터 벌써 사십 년 전이었다. - P303

기남의 마음에는 사라지지 않는 방들이 있었다. 언제든 그 문을 열면 기남은 그 순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날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이 생생했다. 그 중식당의 냄새, 식기의 모양, 음식의 종류, 노인 옆에 있던 젊은 남자, 그러니까 노인의 아들이 입었던 옷과 큰언니라는 사람의 표정까지도 기남은 살면서 수시로 그 문을 열었다. 문을 열 때마다 기억의 세부는 조금씩 사라져갔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마음의 통증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 문을 열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차갑고 단단하고 무거운 무언가가 여전히. - P306

기남은 인파에 치이며 명동거리를 이리저리 걸었다. 흥겨운 음악과 반짝이는 불빛들이 쏟아지는 거리를 지나는 동안 기남은 자신이 지금 살아서 숨쉬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일인지 느낄 수 있었다. 그때 큰길에 있는 극장 앞에 젊은 사람들 여서서 캐럴을 부르는 모습이 보였다. 기남은 구경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노래를 들었다. 노래는 아름답게 기남을 이 세계로부터 추방했다. 버스가 나를 그냥 치고 지나가줬으면……어린 시절부터 반복된 상상이 구체적인 실감을 가지고 기남에게 다가왔다.
생모는 기남이 결혼하기 전해에 죽었다. 여자는 가끔 기남에게전화를 걸어 그런 소식을 전하곤 했는데 어느 시점엔가 완전히 소식이 끊겼다. 여자는 살아 있다면 여든이 넘었을 나이였다. 하지만 죽었을 것이다. 살아 있는 한은 어떻게든 기남의 연락처를 알아내어 연락했을 테니까. 그 어설픈 관심이 기남의 오래된 상처를헤집고 일상의 평화를 침해했다는 것을 그녀는 끝끝내 몰랐을까.
기남을 통해 자신의 삶은 그래도 기남보다 나음을 확인하고자 했던 걸까. 기남은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 P307

"마이클은 다정하구나."
"맞아요. 엄마가 그랬어요. 마이클은 너무 다정해. 한국 할머니처럼."
"정말?"
"근데 너무 다정하면 안 된대요."
마이클이 잠시 기남을 보다 말을 이었다.
"너무 다정한 건 나쁜 거래요."
따뜻한 통증이 기남의 등과 배에 퍼져나갔다. 기남은 마이클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면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클은 자신을 몰랐고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몰랐다. 하지만 그 순간,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그애가 오히려 자신보다 자신을 더 많이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 건 무슨 이유였을까. 부끄러워도 돼요. 기남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한 번도 기대하지 않았던 말.
기남은 그 말을 잊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이야기가 - P319

기남의 마음에 어떤 파문을 일으켰는지 모르는 마이클은 자리에 앉아서 계속 이야기했다. 여자친구 에밀리에 대해서, 바다거북의 산란지인 카보베르데에 대해서, 그곳에서 태어난 새끼 거북들이 어떻게 바다를 향해 가는지에 대해서…… 마이클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기남은 그애가 한 계절만 지나도오늘의 일을 잊을 거란 걸 알았다. 그리고 더 많은 시간이 지나면자신이 그애에게 그저 멀고 낯선 혈육이 되리라는 것도. 하지만그 사실이 자신을 더는 슬프게 하지 않는다고 기남은 생각했다.
"할머니."
자신을 부르는 마이클을 보며 기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고 연약한 순간이 아직은 자신을 떠나지 않았음을 바라보면서. - P3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