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파리에 와서 1~2년간 나를 둘러싼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느꼈다. 시간이 멈췄기에 나는 노화를 멈췄다. 당시 나는 사회적으로 10대 수준도 안되는 언어능력과 생활능력을 가진, 몸만 어른인 존재였으니까. 언어를 지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지적 성숙이 지체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나, 육체의 노화가 멈추는 느낌은 예상 밖이었다.
어린아이와 같은 호기심과 깨달음, 발견으로 채워지던 시절이었다. 세상에 저항하던 정신의 세포가 하나하나 낯선 향기에무장해제되고, 깨어나며, 왕성하게 새로움에 반응했다. - P14

거리에서 종종 마주친다. 삶의 작은 반경에 다만 자기 삶을부려놓고, 오직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한 사람들의 얼굴, 사람의 얼굴은 얼마나 적나라하게 그 속에 삶을 함축하고있는지. 그것은 축복이기도 때론 형벌이기도 하다. 나이든 아시아 여성들, 그들의 현재는 고스란히 나의 미래다. 유독 그들에게서 방어적인 눈빛을 많이 본다. 그들은 인생에서 여러 번선택의 기로에 섰고, 나를 확장하는 대신 내가 선 땅을 단단히구축하는 선택을 했을 것이다. 어찌 보면 그 눈은 나와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쌓아 올린 둑 안에서 세상을 경계하며바라보는 눈이다. 그들에겐 최선의 선택이었겠지만, 항해를 멈추고 닫힌 세계에서 맴도는 슬픔이 배어나온다. - P17

항해의 목적은 안전하게 돌아오는 데 있지 않다. 항해의 목적은 더 멀리 항해하는 것에 있다. 육체의 생명이 다하는 날, 바로그날 나의 정신도 성장을 멈추기를 바란다. 내정신이 이미 오래전에 멈추었음에도 육체가 꾸역꾸역 삶을 영위하는 민망한사건이 가급적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한다. 나의 육체와 정신이함께 손잡고 오래오래 월담하고 월담하기를. - P18

사람들이 서로의 스펙을 묻고, 진열하고, 서열화하는 것은, 사람 볼 줄 아는 능력을 상실해가기 때문이다. 사람 눈빛과 낯및 보면 대충 알고, 몇 번 말 붙여보면 더 또렷이 느낀다. 글쓰는 것, 사람 대하는 것을 보면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물론이러한 직관을 가지려면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내 엄마가 자신이 키운 자식이 성장하여 데려온 남자를뜯어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받아들였던 것처럼, 자신의 삶에대한 믿음이 있으니, 그 결과물인 자식의 선택에 대해서도 조건없는 신뢰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을 점수화하고 서열속에 집어넣어 보아야만 비로소 파악할 수 있다는 건 직관을 상실해가는 우리의 모습을 투영한다. - P20

프랑스 책들을 사 보면, 책날개에 저자의 얼굴은커녕 이름말고는 소개 한 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껏 독자에게 친절을 베푸는 출판사가 있다면, 저자가 같은 출판사에서 낸 책들의 목록을 알려주는 정도. 이 프랑스식 불친절은 책에 대한존중이며, 결국 독자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다. 어떤 편견이나선입관도 없이 책과 직접 대면하라는 주문이다. 유명인사의 추천사 한 줄 없어도 망설임 없이 책장을 열고 저자의 목소리와단도직입으로 만나라 청하는 것이다.
그 누구든 어제까지의 삶이 축적한 알몸의 주인으로 만날 수있는 세상. 그런 사치, 맘껏 누리고 싶다. - P21

난 ‘계급‘을 지극히 기계적인 마르크스의 피조물이라고 비웃어왔지만, 그 피조물에 많은 사람이 갇혀 있다는 사실을 지금은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이 땅에는 역사를 맹렬하게 직시하며 진실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계급과 흐릿하고 매캐한 세상에서 안개가 걷히는 걸 절대 바라지 않는 눈 부릅뜨고 하늘을 우러러볼 수 없는 계급이 있다. 그와 나는 결코 만나질 수 없는 계급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고, 1980년대 대학이라는 용광로속에서 잠시 사고처럼 부딪히고 이끌렸을 뿐이다. 역사 앞에 떳떳한 계급과 역사를 계속 매장해야만 비로소 고개를 들 수 있는계급의 두 사람이 손을 맞잡는 건 불가능하다. 비루하게 왜곡된역사가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청산되지 못한 역사, 거짓이 계속 거짓을 부르게 만드는이 고단한 시대의 패배자는 속죄의 길을 찾지 못하여 계속 비굴할 수밖에 없는 그들이다. 나는 당신들의 계급을 동정한다. - P26

유일한 승천 길이었던 사법고시도 당장 안전하게 목구멍에 들어갈 양식을 벌어야 하는 사람들에겐 닿을 수 없는 사치였음을작가는 알고 있었다. 가난이 사악한 것은 꿈 자체를 지우기 때문이다. 자신의 꿈뿐 아니라 아무 죄 없는 자식들의 꿈까지 지워버렸고, 그로 인해 부부는 서로에게 악을 써대며 살았다. 그기쁜 날, 발목에 매달려 있던 쇠사슬이 일순간 사라진 날, 성동일은 덩실덩실 춤추기보다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그가명예퇴직을 당하고 온 날의 표정과도 비슷했다. 살얼음판 위를 걷던 사람이 비로소 땅 위를 걷기 시작했을 때, 그 평범한 삶에 도달한 감격은 호들갑으로 표현될 수 없었다. 감히 바랄 수도 없어 보였던 평범함을 기적처럼 얻었을 때 기쁘기보다 비장해진다는 걸, 배우는 잘 표현했다 - P36

질투하지 않는 인간관계, 그것이 얼마나 서로를 풍성하게해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드라마였다. 쌍문동 골목에서 피어나는 톡톡한 ‘정‘의 본류는 세 엄마 간의 돈독한 우정이었다. 그들의 우정은 아이들에게로, 그리고 가장 난이도 높은 지대인남편들에게까지 이어졌다. 질투는 결단코 인간의 본능이 아니다. 그것은 만인이 만인을 향한 경쟁을 통해 단 하나뿐인 줄에일렬종대로 서서 우열을 거둬야 한다고 믿는 이데올로기에서작동되는 자본주의에 의해 학습된 어리석은 태도일 뿐이다.
만인에게는 만인의 길이 있으며, 우린 그 길들을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허락해야 한다. 싸움은 그 다양한 길을 허락하지 않는 세상과 해야 하는 것이다. 아메리칸 인디언, 중국의 모쒀족 등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로 인간의 본성이 침해되는 참사를 겪지 않은 인류는 경쟁과 질투를 모르고 살았다. 그들에게인생은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경주가 아니라, 자연을누리고 이웃과 어울려 서로를 경배하고 축복하는 향연이었고 축제였다. - P39

프랑스사회에서 성대한 결혼식은 에너지 넘치는 몇몇 사람들이 벌이는 공동체를 위한 서비스로 여겨질 만큼 드문 일이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결혼식은 구청에 가 구청장과 증인 앞에서 선언하고 서명하는 것일 뿐이며, 이마저도 생략하고 사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그래서인지 이 결혼식은 내게 낯설고 그만큼아름다웠다. 아직도 이런 것을 정성 들여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다니. 더욱이 그들이 쏟은 정성은 오로지 서로를 향한 애틋한애정만을 동기로 삼은 듯했다. 하객 중엔 파트너를 향해 진한애정표현을 하는 커플들이 많았다. 신랑 신부가 방사한 에로스의 분가루가 모두의 머리 위에 소복이 내려앉았기 때문이리라.
결혼식이야말로 한 커플의 낭만적 사랑을 결박하는 가장 찬란한 슬픔의 세리모니라는 나의 오래된 확신은 결혼과 사랑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실증적으로 보여준 이들 앞에서 전복되고 말았다. - P45

갈비뼈를 내주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 그리하고 멀리 달아날것. 도움을 받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일어설 수 있도록, 마지막결정적인 지점에선 묵묵히 바라만 볼 것. 자식이 맞이해야 할고난과 역경을 부모가 대신 맞아주지 말 것. 남의 인생을 결코대신 살아주려고 애쓰지 말 것. 남의 고난을 대신 짊어지는 자결국 상대의 자존을 빼앗은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 P71

영혼을 가지고 태어난 우리, 영혼의 문이 닫히기 전에 세상과사물을 영혼으로 보는 훈련을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눈먼 자들의 세상에 갇히고 말 터이다. 영혼의 근육을 키우는 훈련의 첫 단계는 타인의 자리에 서서 그 사람의 심정을 헤아려보는 것이라고 인디언들은 말한다. 어쩜 그것만으로 충분할지모른다. 우리에게 가장 힘든 것이 바로 그것이므로,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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