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나고 사귀었던 한사람 한사람을설명해 나가는 작업은 의외로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나는 그 삶들 속에 모든 삶의 비밀이 숨어 있음을알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의 실체가 정확하게알려져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한 인물에 대한 보고서는 곧 그 인물의 삶이박혀 있는 사회에 대한 보고서일 수도 있다.
앞으로도 나는 이 작업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내‘가 화자가 되어 ‘당신‘을 만난 ‘우리들‘의 이야기를계속하여 기록해 나가고 싶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맺기를모색하고, 가능하기만 하다면 애정과 신뢰를 쌓으면서사람 살 만한 세상을 만드는 데 동참하고 싶다.
-「머리말을 대신하여」에서

겨울해는 일찍 저문다. 어찌나 일찍 어둠이 찾아오는지 늦은점심 찾아먹고 돌아서면 벌써 밤이다. 요즘은 더욱 그렇다. 아침에 받아보는 네 개의 조간신문을 꼼꼼하게 다 읽고나면 어느새 석간이 오고 다시 혼미한 정치판 기사 속에 빠져 헤매다 보면창 밖으로 이미 저녁이 날아와 있곤 한다.
밤의 그물망에 포위되어 있는 우리 동네를, 멀고 아름다운 동네를, 원미동을 보노라면 문득 적막해진다. 추위가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겨울밤만 아니라면 원미동의 밤도 상당히 발랄한 편이니까. 적막함을 관망하기 위해서, 라는 명분을 앞세워나는 종종 창 앞에 바싹 붙어서서 관찰하는데 이때 필수적인 것은 조명이다. 바깥은 어두운데 안쪽에만 휘황하게 불을 밝혀 놓으면 구경거리의 자리가 달라지는 법이었다. 거리의 모든 시선에 노출당하여 실없이 구경거리가 되지 않으려면 일단은 불을꺼야 한다. 그래서 나는 종종 마루의, 혹은 방의 불을 꺼버린 채 바깥 찬공기를 마시며 거리를 내려다 본다.  - P11

갈등에 대하여, 그처럼 많은 시간 생각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었다. 외벽의 누수방지를 위해 공사를 하고나면 그것의 완벽성이 입증되기까지 그는 고민하고 갈등하였다.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옥상의 방수공사를 맡게 되었을 때, 그는 사흘간 식음을전폐하고 일에 매달렸고 그뒤 장마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한 달동안 수없이 갈등하며 초조하게 공사 결과를 확인하였다.
보일러도 그런 까닭에 손대지 않았다. 방이 따뜻하지 않다거나 곁불이 새어 화덕만 망가지는 결과가 종종 있었으며 그럴 경우 그는 갈등을 뛰어넘는 자기 불안에 식욕을 잃을 지경이었다.
말하자면, 우리 동네의 그 페인트공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는 대단히 철학적인 인식구조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가손 댄 모든 공사의 내용에 분석과 해석을 거듭하다가 모순에 빠져 회의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종류의 하자 보수공사에서 오직 갈등만 익힌 그는 페인트공으로 스스로를 낙착짓고자 하였다.
페인트는, 초조롭게 결과를 기다릴 만큼 노골적인 하자는 없을 분야였다. - P27

며칠 전에 여대생 셋이 우리집을 찾아왔다. 8년 전쯤 내게서국어를 배우던, 말하자면 제자들의 방문이었다. 학교를 떠난 후로는 서로간에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지만 우리들은 금세 서로서로를 확인하곤 옛기억들을 펼쳐나갔다. 두 사람은 대학 졸업반이고 하나는 이제 졸업반이 된다고 하였다. 착하고 귀여운 내제자들은 기특하게도 내 책들을 모두 사 읽은, 독자들이기도 하였는데 그녀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독후감이 이랬다.
"선생님께서 왜 원미동처럼 가난한 동네에 살게 되었는지 정말 궁금했어요. 형편이 안 좋으신 것이나 아닌지 은근히 걱정도했구요. 그런데 막상 와보니까 그다지 가난한 동네가 아니네요.
아니, 되려 중산층 이상의 동네로 보여요."
나는 우선 제자들의 마음 씀씀이에 감격했다. 옛 스승의 처지가 곤란한 것은 아닐까 염려했다니 감격할밖에.
『원미동 사람들』이란 제목의 연작소설집이 나온 뒤부터 나는종종 이와 비슷한 소리를 듣는다.  - P31

한 동네에서 오래 살다보면 이웃들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아는것이 많아진다. 때로는 예기치 않은 사건을 통해서 어떤 인물을더욱 자세히 알게 되기도 하며, 때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발견하고는 한 인물에 대한 인식에 수정을 가하게 된다.
나는 오랫동안 이웃 하나하나를 묘사하는 일에 꽤 애정을 바치고 있었는데 그 일은 내가 바로 그들에게 애정을 바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해 주는 작업이기도 하였다. 그런 마음 없이는 도저히 어떤 누구도 설명할 수 없었다.
나는 이웃들 삶의 어느 한 부분을 묘사하면서 가끔 즐거웠고많이 쓸쓸하였다. 그들의 삶이 성공적이든 실패한 것이든 관계없이 내 느낌이 그러했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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