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것, 고귀한 것, 장엄한 것의 세계, 뜨거운 환희와 감미로운 슬픔, 무엇보다 사랑의 세계가 거기에 있다. 그것을 문학이라고 했는데, 그런 책은 정말귀해서 구해 읽을 수 있는 것은 두길 선생의 책꽂이에꽂혀 있는 것들뿐이다. 그 책들을 다 읽어버리면 더이상읽을거리가 없어 안달이 날 터이므로 천천히 아껴서 읽기로 했다. 책 한권을 빌려오면 더럽히지 않도록 표지를다른 종이로 싸서 다섯번 이상 읽고 또 읽는다. 정지용과윤동주의 시가 좋아서 더러 공책에 베껴 써서 외우기도한다. 그런데 시도 좋지만 소설은 더 좋다. 한번은 같은반 아이한테서 『부활』을 빌려다 봤는데, 그 책이 어찌나애착이 가던지 차마 주인에게 돌려주기 싫어 쩔쩔맨 적도 있다. 그래, 소설 속에는 문명과 세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아기자기한 사랑 이야기도 있다. 그런 책을 읽으면언제나 가슴이 뛰고 황홀한 기분이 된다. - P245
‘친일파를 척결하자!" 스무명가량의 조천중학원 학생들은 세시간 걸리는 먼거리를 걸어가 참가했고창세와행필도 함께 갔다. 거기에서 그들은 읍내 학생들이 벌이는 격렬한 시위를 보고눈이 휘둥그레졌다. 차량 시위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백여명의 학생들이 앞에 현수막을 건 트럭 몇대에 분승하여 요란하게 경적을 울리며 달리고, 나머지 학생들은 트럭 행렬 뒤를 따라 구보하면서 구호를 외쳤다. 창세들도그 대열에 끼어 신나게 달렸다. 하지만 시위는 곧 진압되었다. 기관총을 설치한 미군 지프차가 시위대를 향해 무섭게 내달리면서 드르륵 공포까지 쏘았던 것이다. 그러나 관덕정 광장에서 쫓겨난 시위대 중 일부는 정뜨르 비행장으로 몰려가 미군 막사를 겨냥하여 활주로의 마른잔디에 불을 질렀다. 불은 해풍을 타고 빠르게 번져 위험스러웠지만 용케 미군 막사에 피해가 가기 전에 진화되었다. - P251
장내에 가득한 수만 군중이 거대한 물결이 되어 출렁거렸다. 그 엄청난 열광의 기운이 찌들어 있던 절망감을 몰아내주었다. 사람들은 같은 생각, 같은 소망을 품고 함성을 질렀다. 모두가 빈틈없이 빽빽하게 붙어 하나가 되었다. 하나의 생각, 하나의 길, 하나의 노선이 되었다. 저마다 거대한 집단의 공감, 집단의 힘을 실감했다. 그 거대한 실체를 자신이 이루었다는 것, 지금까지 몰랐던 자신의 힘에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뭉쳐진 힘이 무언가 큰일을 이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하늘을 뒤덮은 검은 구름을 찢고 쏟아지는 햇빛처럼 진리의 빛이 쏟아져 내리는 듯이 느껴졌다. 청년들의 눈에서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정두길은 보았다. 그의 눈에도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 연설이 끝나고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쿵쿵쿵! 북소리가 크게 진동을 일으키며 북채가가슴을 두드리는 듯했다. 두길은 임술년과 신축년에 관덕정 광장을 중심으로 성안을 가득 메웠던 수만 군중의함성을 상상해보았다. 그때의 그 수만 군중이 바로 지금의 이 군중이 아닌가! - P266
그 무차별 발포 사건의 희생자는 사망자 여섯명에 중상자 여덟명이었다. 사망자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마을별로 마을장이 치러졌고, 유가족을 위한 조위금 모금운동이 전도적으로 벌어졌다. 평화로운 시위에 총을 쏘아 사람들을 죽이다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있을수 없는 일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P278
도민의 강력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은 발포 명령자 처벌 문제에 대한 언급은커녕 사과의 발언도 한마디 없었다. 열흘 가까이 참고 기다렸으나 아무런 대꾸가없자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어 3월 10일, 마침내 전도적총파업이 벌어졌다. 좌파 우파를 망라한 민관 총파업이었다. 제주도청, 군청, 읍사무소, 면사무소 등 경찰 및 사법기관을 제외한 대부분의 행정기관과 각급학교, 우편국, 무선국, 측후소, 전매서 등의 공무원들, 신한공사, 운수회사, 은행, 금융조합, 어업조합, 전기회사 등 제주 직장인 95퍼센트에 달하는 사만여명이 파업을 단행하였고, 심지어 경찰의 20퍼센트도 가담하였다. 물론 파업에가담한 경찰은 육지부에서 파견된 응원경찰이 아닌 토박이 경찰이었다. 조천지서 한쌍백 순경도 파업에 참가했다. - P285
조병옥은 3·1절 발포사건에 대해 사과하기는커녕 정당방위였다고 도리어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심지어 "사살은 내가 시킨 바다. 발포명령자를 처벌하라고? 발포는 내가 명령했으니 처벌할 테면 나를 처벌하라" 라고 싸늘하게 비웃었다. 읍내 공무원들이 모인 시국강연 자리에서는, 제주도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불온하다면서 건국에 저해가 된다면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고 협박하듯엄포를 놓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방약무인이었다. 너무도 놀라운 발언이어서 사람들은 아연실색했다. "제주도사람들은 사상적으로 불온하다. 건국에 저해가 된다면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 이 말이 도민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 P296
혼인 잔치를 위해 행필은 지붕 이엉을 새로 갈고 대문앞에 붉은 동백꽃과 푸른 솔가지로 장식한 솔문을 세웠다. 잔치 음식으로는 혼인날에 맞춰 새끼 때부터 키운 돼지 한마리를 잡았고, 닭 다섯마리, 계란 백개, 소주 한말반을 내놓았다. 솥뚜껑에 빙떡을 지지고 바닷물로 두부도 넉넉하게 빚었다. 친척들은 깜냥껏 소주를 빚어 부조했다. 행필은 향사에 보관 중인 사모관대와 꽃가마를 빌려왔다. 이양일이 금년 초에 마을 청년들의 혼사를 위해기증한 물건들이었는데, 그것들을 누구보다 먼저 사용할 수 있어서 행필은 기분이 좋았다. 열여덟살 강행필이 장가가는 날은 행사 치르기 좋게날씨가 청명했다. 정미소 옆 보리밭의 돌담 위에서 장끼한마리가 암꿩을 불러 꿩꿩 노래하고, 동네 앞바다도 부드러운 명주를 깔아놓은 듯 잔잔했다. - P310
흐린 하늘 밑으로 바람에 밀린 검은 구름떼가 아주 낮게 떠서 질펀한 바다 벌판을 쓸며밀려온다.흰물결이무수히 일어나고 그 위로 흰 갈매기들이 바람을 거슬러날아오른다. 납빛으로 무거워보이던 주위 풍경이 부산하게 흔들린다. 길가의 무성한 풀숲이 바람에 몸살나게들볶이고, 나직한 키의 구럼비나무들이 서로 어깨를 비비면서 우쭐우쭐 춤춘다. 이삭이 패기 시작한 보리밭 밭담 위 찔레 덤불에 무더기로 핀 하얀 꽃들이 바람에 흔들려 짙은 향내를 사방에 퍼뜨린다. 창세가 달리면서 다시 한번 외친다. "조선 건아 서윤복 선수 만세!" - P325
무자비한 테러 행위로 전국적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던 서북청년단의 존재가 제주 사회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 무렵부터였다. 그간 육지부의 각도시, 각 읍면 지역에 조직을 만들어 대규모로 세력을 확장해온 서청은 좌파 인사와 집회에 무자비한 폭력을 가해 백색테러의 대명사로 떠올랐다. 신임 도지사 유해진이 자신의 경호원으로 일곱명을 데리고 들어온 이래 서청 단원의 입도가 두어차례 이어져 지금은 그 수가 수백명에 이르렀다. 충남 부대의 탄압에 시달리던 도민은 이제 그보다 훨씬 사나운 세력을 만나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승냥이가 나가더니 범이 들어온 격이었다. - P337
"월급도 없다는디, 그거 사실인가?" "미군정에서 월급은커녕 보급품도 안 준다는 거라." "아니, 거 뭔 말이라 월급도 안 주고 부려먹을 수 있나? 월급도 없고 보급품도 없이 어떵 먹고살라는 거라게?" "현지에서 조달해 먹으라는 거주, 허허." "현지 조달?" "게민 우리 먹을 것을 빼앗아 먹으라는 거 아니라?" "약탈해서 먹으라, 이거여!" "약탈? 허어, 이건 뭐, 양떼 속에다 굶주린 늑대를 풀어놓는 격 아닌가!" "굶주린 늑대떼!" "조천지서엔 어떤 놈들이 올 건가 참말로 걱정되네!" - P341
광복절 이틀 전인 8월 13일, 북촌리에서 총격 사건이벌어졌다. 장영발이 자전거를 타고 가서 그 사건을 취재했고, 창세도 그 마을에 조천중학원 동급생이 있어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 수 있었다. 그 무렵 미군정 경찰은 민전이 8·15를 기하여 전국적으로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는 음모설을 내세워 비상경계를 펴는 한편 예비검속까지 벌이고 있었다. - P341
낙인 찍기는 상뒷동산아래 평지에 홀로 서 있는 키큰 종가시나무 그늘에서 행해졌다. 소유권표시를 위한낙인은 주로 생후 오개월에서 일년 미만의 망아지들이대상이지만 오래되어 낙인이 흐릿해진 말들도 다시 불도장을 맞았다. 낙인을 달구려고 모닥불을 피우자 시원하던 나무 그늘이 금세 후끈해졌다. 양산도가 웃옷을 벗어던지고 손잡이가 달린 낙인을 모닥불에 묻었다. 낙인으로 말 엉덩이를 지지는 것은 여간 조심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달군 쇠가 털가죽만 지져야지 자칫 잘못하여 더깊이 들어가 살을 태웠다 하면 큰 화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낙인 찍기는 누구보다도 익숙한 양산도가 도맡아 했다. - P356
백중날은 연중 간만의 차가 가장 클 때여서 수배 중인 청년들을 제외하고 많은 사람이 바닷가에 나와 있었다. 평소에는 물속에 숨어 보이지 않던바위와 돌이 백중 썰물에 드러났고 거기에 소라, 보말, 참게, 성게, 오분자기(떡조개) 들이 오물거렸다. 썰물이 하루에 두번 있으니 작년까지만 해도 백중날에는 밤에도 횃불을 들고 해물을 잡았다. 낮보다 밤에 훨씬 더 많이 잡혔다. 횃불 불빛에 현혹된 해물이 우르르 바위로 기어올라서 비로 쓸어 담는다는 말이 생길 정도였는데, 올해는야간통행금지령이 내려 그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 P35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