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에서 다롄은 991 킬로미터. 뤼순을 가려면 다롄에서 차를 갈아타야 한다. 중국 해군기지가 들어선 뤼순은 외국인 접근이 상당히 까다로웠다. 경찰서를 방문해 ‘외국인 숙박 허가서를 받아야 했다.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숙소를 정한 뒤 뤼순 역으로 나갔다. 안중근에게 뤼순은 꿈의 도시였다. 뤼순항을 개방해 중국·러시아·일본 3국의 대표를 구성한 다음 동양평화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했다. 공동 출자에 의한 재정 확보와 3국 청년들로 구성된 합동 부대 등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해놓았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침략전쟁부터 막아야 했다. - P212
제정 러시아가 건설한 뤼순 역은 지금도 기차가 운행 중이었다. 하얼빈에서 압송된 안중근은 1909년 11월 3일 뤼순 역에 내렸다. 밖을내다볼 수 없도록 제작된 호송마차에 오른 안중근은 눈을 감았다. 온몸을 결박당한 채 끌려온 터라 몹시 지쳐 있었다. 뤼순감옥 특별 감방에 수감된 안중근은 저들의 행동을 오히려 의아스럽게 여겼다. 뤼순감옥에서 일하는 간수들이 너무 깍듯이 대해주었다.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같은 일본인이 분명한데 어찌 이처럼 다를 수 있단 말인가? 한국에 와 있는 일본인들은 교활하기 이를 데 없는 - P212
데, 뤼순에 있는 일본인들은 왜 이렇게 어질고 후한 것일까? 한국과 뤼순에 있는 일본인의 종자가 다른가? 아니면 풍토와 풍속이 달라서 그런가? 한국에 있는 일본인들은 극악한 이토를 닮아 그렇고, 뤼순에 있는 일본인들은 법원과 검찰청 관료들이 인자해 스스로 감화된 것인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군 포로 석방 문제로 적잖은 곤욕을 치렀고, 일본인을 직접 혼내준 적도 있었다. 서울에서 만난 친구들과 거리를 산책하고 있었다. 일본인이 갑자기 튀어나와 한국 사람이 타고 가는 말을 빼앗으려고 했다. 부아가 치민 안중근은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왜놈 주제에 감히 남의 땅에서 행패를 부려?" 그자의 멱살을 틀어진 안중근은 권총을 꺼내 복부를 겨누었다. "어찌하겠느냐? 빼앗은 말을 주인에게 다시 돌려주면 용서하겠지만, 그렇지 않을 땐 네놈을 당장 죽일 것이다." 주위에 일본인이 여럿 모여 있었지만 섣불리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안중근이 권총을 뽑아든 순간 모두 입을 다물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그런데 감옥은 왜 이러는 걸까? 여전히 친절하고 여전히 조용했다. - P214
재판장 : 피고는 해외에서 활동한 3년 동안 어떤 목적을 가지고 지냈는가?
안중근 : 한국 동포들을 위한 교육운동과 의병 활동을 했다. 그 필요성을절실히 깨달은 건 러일전쟁 때였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에 체결된 을사조약과 3년 전에 체결된 정미조약이 나를 해외에서 활동하도록 만들었다.
재판장: 피고는 한국의 앞날을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가?
안중근 : 원래 한국은 무력에 의존하지 않고 문필로 세운 나라다. 그런데 일본국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강제로 조약을 체결하면서 한국을 침략했다. 이를 다시 되돌릴 수 있다면 예전처럼 독립된 나라에서 살기를 원한다.
재판장 : 하얼빈 역에서 이토를 총기로 살해하고 수행원들에게 부상을입혔는데, 이 사실을 인정하는가?
안중근 : 그렇다. 이는 3년 전부터 갖고 있던 계획을 실행한 것이다. 또한 한국 참모중장으로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국 적장을 사살한 것이므로, 국제법에 따라 재판받는 것이 옳다고 본다. 나는 일반적인 살인범이 아니라 전쟁 포로이기 때문이다. - P229
"나의 범죄는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이토의 죄상 또한 세상 사람들이 익히 아는 바다. 나는 사사로운 감정에 이끌려 사람을 죽이지 않았으며, 하얼빈에도 한국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임무를 띠고 왔다. 나는 전쟁을 벌여 이토를 습격했고 포로로 잡힌 것이다. 하여 관동법원과 내 사건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나는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군인 신분으로 싸웠을 뿐이다." 통역관을 거쳐 진행되는 재판은 그러나 회를 거듭할수록 힘들고어려워졌다. 전쟁터에 버려진 외로운 병사 같았다. 자세를 곧추세운 안중근은 그럴수록 더욱 힘을 냈다. 관동법원 법정은 벼르고 벼른 제3의 전쟁터였다. - P230
항소를 포기한 안중근은 뤼순감옥에서 집필 중인 《안응칠 역사》터 마무리했다. 법원과 감옥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요청하면 틈틈이 서예 글씨도 써주었다.
합치면 성공하고 흩어지면 패망한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는이치이다. 지금 세계는 동서로 나뉘어 있고, 인종도 각각 달라 서로 경쟁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편리한 실용기계 연구가 농업이나 상업보다전쟁물자보급에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기관총, 전투기, 잠수함 등은 사람을 상하게 하고 사물을 해치는 것들이다. 수많은 청년을 훈련시켜 전쟁터로 몰아넣고 있으며, 피가 냇물을 이루는 날들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항소를 포기하고 쓴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서문이다. 처음 계획은 서문, 전감, 현상, 복선, 문답 등 5단계로 구상했으나 시간이 여의치 못했다. 여러 달이라도 줄 것처럼 말하던 관동법원 측은 사형 집행일이 임박했음을 알려왔다. 결국 <동양평화론》도 미완으로 남고 말았다. - P236
동포에게 고함
내가 한국의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해외에서 풍찬노숙으로 보내다,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는다. 우리 이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한다면죽은 자로서 여한이 없을 것이다.
사형 집행을 앞두고 쓴 안중근의 옥중서신은 어머니, 아내, 사촌 숙부, 뮈텔 주교, 빌렘 신부 등 모두 여섯 통이다. 안중근은 그 편지를 면회 온 두 동생에게 대신 전했다. - P242
1910년 3월 26일 새벽 뤼순감옥은 봄을 재촉하는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안중근은 어머니가 지어 보낸 수의로 갈아입었다. 한복 저고리는 흰색이고 바지는흑색이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한국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아마도 이 편지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 P243
사형장에 도착한 안중근은 미조치 다카오 검찰관, 구리하라 사타키치 소장, 소노키 스에키 통역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수대에 올랐다. 사형 집행관이 물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동양평화를 위한 만세삼창과 기도를 올리고 싶다." 사형 집행을 알리는 백포가 머리에 씌워지자 안중근은 묵도와 함께 기도를 올렸다. 감옥의가 안중근의 절명을 보고한 시간은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15분이었다. 짧은 시간, 먼 여정의 길을 함께 걸어온 우덕순도 그날을 기억하고있었다. ‘점심 무렵 간수가 불러내 갔더니 교회당에 조도선과 유동하가 먼저 와 있었다. 흰 천으로 덮인 운구가 보여 마지막으로 한 번만 얼굴을보여달라고 했지만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세 사람은기도를 마친 후 각자 방으로 돌아가야 했다. - P246
옅은 먹구름 사이로 번져가는 석양빛에 잠시, 뤼순감옥을 배회할때였다. 우덕순의 친일 문제는 마음을 무겁게 했다. 발단은 일제의 어용단체 ‘조선인민회 하얼빈 지부장에서 비롯되었다. 반론도 있었다. 우덕순의 변절이 위장 전술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 예로 김좌진이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이자 친일 밀정이었던 배정자를 제거하려는 계획에 적극 동참한 인물이 우덕순이었다. 김좌진과 우덕순은 십여 년 넘게 관계를 맺어온 돈독한 사이였다. 당시 일제는 우덕순을 배일사상이농후한 인물로 평가하기도 했다. 물론 우덕순이 ‘조선인민회‘ 하얼빈지부장으로 활동한 사실이 친일로 밝혀진다면 그 또한 피할 수 없는화살이다. 항일운동사에서 친일밀정은 반드시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하는 까닭이다. - P247
안중근의 시신을 인수해 가려고 감옥 입구에서 기다린 두 동생은할 말을 잃고 말았다. 뤼순감옥 측은 일본정부의 방침에 따라 안중근의 시신을 교부하지 않기로 결정이 났다며, 이미 매장이 끝났음을 알려왔다. "오냐, 극형도 모자라 시신마저 돌려주지 않는 너희 왜놈들의 극악무도함을 결코 잊지 않으며, 언젠가 반드시 오늘의 이 한을 되갚아줄날이 있을 것이다." 4개월 넘게 형을 옥바라지한 두 동생은 가슴에 피가 맺혔다. 통역을 맡은 소노키 스에키를 붙잡고 매달렸지만 돌아오는 건 메아리뿐이었다. - P247
뤼순감옥에는 안중근을 기리는 기념관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사형 집행을 당한 곳이다. ‘안중근 의사 취의지 安重根 義士 就地(순국 장소)‘ 안으로 들어가면 양쪽 벽면에 유묵이 걸려 있고, 헌화를 하는 사형장이 나타난다. 지상에서 사오 미터 높이에 매달려 있는 교수형 밧줄을 지나 집행을 앞둔 사형수가 대기하는 먹방으로 들어갔다. 사방이 꽉 막힌 먹방은 칠흑처럼어두웠다. 몸 하나 겨우 들어갈 공간에 갇혀 눈을 감고 서 있자, 기념관입구 벽에 걸린 색 바랜 유묵이 다가왔다. ‘國家安危勞心焦思(국가안위노심초사)‘ 안중근은 그렇게, 식민지 조국의 안위를 먼저 걱정하고 애태우다, 서른두 살의 나이로 우리 곁을 떠나갔다. - P248
사형장에서 나와 북문 쪽을 향해 걸었다. 중국인 관광객들이 떼지어 몰려왔다. 뤼순감옥에서는 별로 반갑지 않은 풍경이다. 오늘따라측백나무에 가린 담벼락 북문이 왠지 슬퍼 보였다. 마차에 실려 북문으로 빠져나간 안중근의 유해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수인 공동묘지였던 뒷산마저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자애로우신 나의 빌렘 신부여, 저에게 처음으로 세례를 주시고, 최후의 장소까지 내림하시어 친히 모든 성사를 베풀어주신 홍은에 감사합니다. 저를 잊지 마시기를, 저 또한 결코 잊지 않겠나이다. 빌렘 신부에게 쓴 안중근의 마지막 편지가 애잔하게 들려왔다. 뤼순감옥에는 광복회 후원으로 조성된 ‘국제 의사들 기념관‘도 있다. 뤼순감옥에서 순국한 안중근, 신채호, 이회영의 흉상이 돋보였다.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우당 이회영은 1932년에, ‘역사를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가르침을 남긴 단재 신채호는 1936년 - P248
에 숨을 거두었다. 한반도 면적의 세 배가 넘는 만주 땅에서 뤼순감옥만 한 곳이 또있을까. 그곳은 한국의 독립투사들을 기리는 거대한 기념관처럼 보였다. 안중근, 신채호, 이회영, 홍범도, 김구, 백정기, 이강훈, 최흥식, 이강, 민필호, 유상근, 박희광, 황덕환, 채세윤……. 이렇게 많은 독립투사들을 한자리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신채호가 지은 한 편의 시가 절로 맴돌았다.
나는 네 사랑 너는 내 사랑 두 사랑 사이 칼로 베면 고우나 고운 핏덩이가 줄줄줄 흘러내려 오리니 한 주먹 덥석 그 피를 쥐어 한 나라 땅에 고루 뿌리리 그 피 떨어지는 곳마다 꽃이 피어서 봄맞이 하리 - P250
다롄에서 상하이는 일반 기차로 스물다섯 시간이 소요되는 먼 길이다. 랴오닝, 허베이, 산둥, 장쑤 등 네 개의 성을 지나야 한다. 광활한 만주 벌판을 벗어난 상하이행 기차는 톈진에 이르러 가쁜숨을 몰아쉬었다. 안중근은 산둥을 거쳐 상하이를 다녀갔고, 윤봉길은칭다오를 경유해 상하이로 망명했다. 차창밖들녘 너머로 안중근의기 띤 얼굴이 그려졌다. 1905년 6월, 상하이에 도착한 안중근은 대한제국 전권대사로 미국을 다녀온 민영익을 방문했다. 러일전쟁 직후 상하이로 망명한 민영익은 대저택에 살고 있었다. "우리 대감님께서는 한국 사람은 만나지 않습니다." 문지기 하인의 말에 안중근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대감은 어느 나라 사람을 만나는 것이오?" "그건 나도 잘 모르는 일입니다." 날도 저물고 해서 첫날은 숙소로 돌아갔다. 그런데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민영익의 대문은 열리지 않았다. 세 번이나 문전박대를 당한안중근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 P253
기차역에서 내려 상하이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길이 즐겁지만은 않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27년 동안 상하이에서 머문 기간은 13년. 그후 임시정부는 계속해서 자리를 옮겨야 했다. 항저우, 난징, 창사, 류저우, 충칭……. 아홉 번에 걸친 피난길은 그 거리만 4000킬로미터가넘었다. 집세 30원을 주지 못해 집주인에게 소송을 당했던 3층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색바랜 태극기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대각선으로 연결된 - P256
두 장의 태극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걸어온 상징물처럼 보였다. 사진 촬영이 금지된 김구 집무실은 청사 2층에 자리했다. 해주경찰서로 연행된 김구는 다음 날 신문을 보고 알았다. 자신이왜 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는지를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피살되었다는 소식이 아침 신문에 실려 있었다.
백여 쪽 분량의 서류를 들고 나타난 일본 경찰의 취조가 시작되었다. 해주경찰서가 모은 김구 관련 문서였다. 내심 김구도 급한 마음을내려놓았다. 이토 히로부미 피살 사건에 안중근이 개입했다면 쉽게 풀려나긴 어려울 듯싶었다. - P257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가 있는 골목은 아주 사소한 일상들이 공존한다. 세탁한 옷을 대나무 막대에 걸어 말리는 풍경이 가을바람에 산들산들 그네를 타는 듯했다. 상하이만의 익살맞은 풍경은 훙커우공원으로 향하는 길에도 어김없이 펼쳐졌다. 대나무막대에 걸린 색색의옷들이 마치 오랜 정경처럼 거리를 수놓았다. 지하철 훙커우쭈추창 역에서 멀지 않은 훙커우공원도 루쉰공원으로 바뀐 지 오래였다. 그런데 두 사람의 인연이 지기처럼 느껴졌다. 루쉰이 잠든 묘지가 바로 윤봉길의 거사 장소였던 것이다. 펜을 무기로삼았던 루쉰 작가의 묘비문부터 찾아 읽었다. ‘나는 하나의 종착점을 확실히 알고 있다. 그것은 무덤이다. 이것은누구나 다 알고 있으며 길잡이가 필요하지 않다. 문제는 그곳까지 가는 길에 있다. 길은 한 가닥이 아니다. 원래 희망이란 있다고도 할 수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곧 길이 된다.‘ - P260
1932년 4월 29일 오전 11시 40분, 그 길을 걸어간 사람이 있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국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는 편지를 남긴 윤봉길이다. 1908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출생한 윤봉길은 청소년 시절에 벌써투사의 기질이 농후했다.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그는 일본의 식민지 교육이 싫다며 학교를 뛰쳐나왔다. 1930년 6월 친구들이 마련해준 50원을 들고 상하이로 망명한 윤봉길은 안공근 집에 자리를 틀었다. 밤에는 공장 노동자로, 낮에는 야채 장사를 하며 길을 모색하던 윤봉길은 임시정부를 찾았다. "제가 채소 바구니를 등에 메고 날마다 훙커우 방면으로 다니는 것은 다른 목적이 있습니다. 상하이로 온 지 두 해가 다 지나도록 죽을자리를 찾지 못해 이렇게 선생님을 찾아왔습니다. 저를 믿고 지도해주시면 선생님의 은혜는 죽어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 P262
윤봉길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던 김구는 한인애국단 소속 이봉창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난 1월 히로히토 일왕의 암살 계획이 실패하면서상하이 임시정부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때 맞춰 잘 오셨소 내가 요사이 계획하는 일이 하나 있는데,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해 고민하던 중이었소. 신문을 보셨는지 모르겠지만왜놈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오. 오는 4월 29일 훙커우공원에서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큰 행사를 연다지 않소. 그러니 윤군은 일생의 목적을 그날에 달성해보는 것이 어떻겠소?" "듣던 중 반가운 소식입니다. 제가 그 일을 맡을 테니 선생님께서는준비만 잘 해주십시오." - P262
"한 번 더 깊이 생각해보는 건 어떻소?" "아닙니다. 제가 죽을 자리는 이곳입니다." 거사 계획을 안공근에게 맡긴 김구는 시먼루에서 폭탄 제조업을하는 김홍일을 찾아갔다. 창춘에 괴뢰만주국을 세운 일제는 상하이 사변을 일으키며 점차점령지를 늘려갔다. 훙커우공원에서 열리는 천장절기념식도 섬나라의 위상을 주변국에 과시하려는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며칠 전부터 일제는 기념식에 참석하는 사람은 점심 대용으로 도시락과 물병, 일장기를 준비하라며 신문에 대대적인 홍보를 하고 있었다. 김홍일이 제조한 폭탄은 모두 두 개였다. 물병을 개조해 만든 것과 거사 후 자결용으로 사용할 도시락폭탄이었다. 4월 29일, 거사의 날이 밝아왔다. 일본식 정장 차림으로 집을 나선 윤봉길은 임시정부 청사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구와 뜨겁게 악수를나누었다. - P263
"제 시계를 선생님 시계와 바꾸었으면 합니다." "웬 시계를 ...…?" "제 시계는 어제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가 아닙니까. 그래서 바꾸려는 겁니다. 앞으로 한 시간만 더 지나면제 시계는 필요 없지 않겠습니까?" 윤봉길은 양복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김구에게 주었다. 그의 손에는 두 개의 폭탄이 들려 있었다. 새 시계를 헌 시계와 바꾼 후 청사를 나설 때였다. 택시를 타려던 윤봉길은 순간 멈칫거렸다. - P263
"선생님, 이것도 받으시죠." "그냥 넣어두시오. 약간의 돈은 필요하지 않겠소?" "택시비를 주고도 5~6월 남겠습니다." "알겠소 그럼 우리 지하에서 만납시다. 나도 곧 윤군을 뒤따라가겠소" 그리고 오후 1시경이었다. 3만 명이 모인 훙커우공원에서 결행 소식이 들려왔다.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리카와 요시노리와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다 사다쓰구는 현장에서 사망, 제3함대사령관 노무라 요시사부로, 제9단장 우에타 겐키치, 주중공사 시게미쓰 마모루, 상하이 총영사무라이 등은 중상을 입었다는 소식이었다. 훙커우공원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은 5월 25일 상하이 파견군 일본 사령부 군법회의 예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 P264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는가?" "이미 죽기를 각오한 몸, 사나이로서 할 일을 했으니 기쁠 따름이다." 1932년 12월 19일 윤봉길은 일본 가나자와 육군형무소에서 총살되었다. 윤봉길은 두 아들에게 짤막한 편지를 남겼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국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丈夫處世兮 其志大矣(장부처세혜 기지대의 대장부가 세상에 처함이 - P264
여, 그 뜻이 크도다). ‘ ‘丈夫出家 生不還(장부출가 생불환: 대장부가 뜻을 세워 집을 나서면, 그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하나는 하얼빈 거사 직전 안중근이 남긴 말이고, 다른 하나는 윤봉길이 망명길에 오르면서 남긴 말이다.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은가? 누가 죄인이고 누가 의인인가? 서로 닮았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루쉰공원 안에는 윤봉길 기념관을 알리는 이정표가 한글로 표기되어 있다. 루쉰 묘지에서 이정표를 따라 200여 미터 걸어가면 기념관입구가 나오는데, 나들이객으로 왁자하던 공원 숲속으로 들어가면 사위가 금세 고요해진다. - P265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한 이미륵(본명 이의경)은 3·1운동 가담 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그만두었다. 스물한 살의 나이로 압록강을 건넌 그는 상하이로 향했다. 일제 치하에서 유럽 등지로 유학을 가려면 중국여권을 취득해야 했는데, 김아려의 집이 바로 한국 청년들이 모여드는곳이었다. 독일로 떠나기 전 상하이 임시정부 청년외교단에서 활동한 이미륵은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에 김아려의 이야기를 남긴 유일한 작가다. 두 남매를 키우며 남편의 빈자리를 지켜온 김아려는 1946년 2월27일, 상하이에서 생을 마쳤다. 만국공묘에 묻힌 그녀의 유해도 도시개발로 유실되고 말았다.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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