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경 하얼빈 역에 도착한 안중근은 일부러 늑장을 부렸다. 거사장소가 하얼빈 역으로 바뀌면서 안중근의 눈빛도 한층 예리해졌다. 내일 열리는 회담 때문인지 주변 경비가 물샐틈없었다. 승강장에서 걸어 나오던 안중근은 대합실로 연결된 비상구를 발견했다. 귀빈용 통로였다. 개찰구를 빠져나온 안중근은 대합실 안으로 들어갔다. 대합실 찻집 유리창 너머로 조금 전 기차에서 내린 승강장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저기다! ‘ 이토 히로부미의 저격 장소를 물색한 안중근은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대합실 찻집에서 귀빈용 비상구를 통해 나가면 바로 승강장이었다. 김성백의 집으로 돌아온 안중근은 전보 내용부터 확인했다. 두 동지를 차이자거우에 두고 오면서 머리가 무거웠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그렇게 보냈습니다. 이토가 오늘 온다고 해서..…..." 유동하를 나무랄까 하다. 그만두었다. 내일 아침 9시면 모든 것이 밝혀질 일이었다. - P167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나라를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국민의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큰 뜻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그곳에서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하얼빈 도착 다음 날이었다. 안중근은 김성백의 초청으로 하얼빈공원 옆에 조성된 한인 공동묘지 개장식에 참석했다. 조성을 마친 공동묘지가 고려가에 모여 사는 한인 마을처럼 훈훈하게 느껴졌다. 뤼순감옥에 수감 중인 안중근은 사형 집행 날짜가 정해지자 하얼빈공원을떠올렸다. 안중근에게 하얼빈은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 하얼빈공원 옆한인 공동묘지에 잠시 묻혔다가, 고국의 품으로 돌아가길 바랐다. 자오린공원으로 바뀐 하얼빈공원에는 현재 안중근 유묵비가 세워졌다. 청초당靑草塘은 ‘풀이 푸르게 돋는 언덕‘을 뜻하며, 중국 당나라시편에서 따온 연지는 ‘벼루 앞쪽에 먹물이 담기는 오목한 부분‘을말한다. 유묵비를 감싸고 있는 한 그루 소나무가 죽어서도 죽지 않는안중근의 이정표처럼 다가왔다. - P169
주변 동태를 살피며 차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지홍차오 쪽에서 땡땡땡 요란한 신호음이 울렸다. 이토 히로부미의 도착을 알리는 소리였다. 안중근은 주먹을 질끈 움켜쥐었다. ‘내 심장이 뛰는 한 마지막 기회다. 절대 놓쳐선 안된다!‘ 이토 히로부미가 탄 특별열차가 도착하고 있었다. 승강장에 나와기다리던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가 그곳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의 회담은 이토가 타고 온 특별열차귀빈칸에서 삼십여 분간 진행되었다. 이틀 전에 도착한 코코프체프는 동청철도 시찰을 명목으로 이토히로부미는 만주 시찰을 핑계로 성사된 회담이었다. 물론 두 사람 사이에 만주 관할 문제가 놓여 있었다. - P171
회담을 마친 코코프체프가 먼저 기차에서 내렸다. 그 뒤를 작달막한 키의 노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저자인가?‘ 순간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어찌하여 세상은 이처럼 불공평하단말인가! 이웃 나라를 강제로 빼앗고, 숱한 목숨들을 짓밟고 일어선 잔악한 살인자가 기뻐 날뛰고 있었다. 힘없는 나라의 백성으로 태어난안중근은 그것이 한스러웠다. 이토 히로부미를 환영하는 군악대 연주와 함께 러시아 군대, 중국군대, 외교사절단 순으로 사열이 이어졌다. 대합실 찻집에서 나온 안중근은 욱일기를 흔드는 환영 인파 속으로 파고들었다. 흑백사진에서 본 늙은 도적이 분명했다. - P172
고개를 약간 앞으로 숙인 안중근은 사열대 쪽을 훑었다. 러시아인세 명과 일본인 칠팔 명이 코코프체프와 이토 히로부미를 뒤따르고있었다. 러시아 군대 뒤에 서서 사정거리를 재고 있던 안중근은 권총을 뽑아들었다. ‘탕!탕!탕‥‥…!‘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안중근의 사격술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처음 세 발은 이토 히로부미의 가슴과 배에, 나머지 세발은 남만주철도 총재 나카무라 제코와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이토의 수행비서관 모리 야스지로를 쓰러뜨렸다. 모두 일본인들이었다. 임무를 마친 안중근은 손에 쥔 권총을 승강장 바닥에 내던졌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코레야 우라Kopen ypa‘를 외쳤다. - P172
여섯 발의 총성과 세 번의 함성이 울려 퍼진 거사 현장을 찾았다. 하얼빈 역 1번 플랫폼에 두 개의 보도블럭이 설치되어 있었다. 삼각형은안중근이 총을 겨눈 자리, 사각형은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진 자리다. 하얼빈 조선민족예술관에 마련된 안중근 기념관을 하얼빈 역에 개관한 건 2014년 1월이었다. 거사 현장에 기념관이 들어서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안중근 기념관에서 일하는 조선족 최태옥씨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장소가 참 무서운 것 같아요. 개관한 지 1년 만에 10만 명이 넘는관람객이 다녀간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더 큰 성과는 중국인들의 자세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는 겁니다. 기념관이 민족예술관에 있을 때만해도 이렇게까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거든요. 학교에서 단체로 관람을올 때면 가슴이 얼마나 뿌듯한지 모릅니다" - P174
하얼빈 역사에 개관한 안중근 기념관으로 중국과 일본 간의 미묘한 자존심 대결도 펼쳐졌다. 선제공격은 일본이 먼저였다. "안중근은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테러리스트"라고 논평을 내자, 이에 중국 정부도 "안중근이 테러리스트라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14명의 A급전범들은 뭐냐"며 맞받아쳤다. 기념관에 설치된 통유리 너머로 거사 현장이 나타났다. 대합실 찻집에서 이토의 도착을 기다린 1909년 10월 26일 아침을 다시 보는 것같았다. 거사 현장에 ‘안중근 격살 이등박문사건 발생지‘를 알리는 큼직한 표지판도 걸려 있었다. 여기서 격살은 ‘무기 따위로 쳐서 죽인다‘ 는 분노와 증오를 담고 있는데, 중국 정부의 의도로 읽혔다. 러시아, 중국 모두 섬나라 일본에 패배한 쓰라린 기억을 갖고 있지 않던가. - P174
기념관을 관람하던 중 세 사람이 찍은 마지막 사진에 눈길이 머물렀다. 안중근, 우덕순, 유동하 모두 무언가를 주장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의 의거는 결코 사사로운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한반도의 독립과 아시아의 평화를 위함이었음을.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관람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중국 정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하얼빈 조선민족예술관에 안중근 기념관을 최초로 설립한서학동(조선족) 씨의 음성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대학 시절부터 나는 역사와 문화를 같은 수레바퀴로 보았어요 안 - P175
중근의사기념관 설립도 그래서 가능하지 않았나 싶어요. 하얼빈에서머문 시간이 극히 짧았던 것에 비해 역사적 행적은 그 이상이었으니까요 바로 그런 분을 너무 오래 묻어두었다는 게 자책감으로 다가왔고또 안중근 의사라면 뒷감당할 자신도 있었지요. 기념관이 사라졌으면사라졌지 안중근 의사께서 사라지기야 하겠어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은 하얼빈 역 철도경찰서어 첫 신문을 받았다. 러시아 검사 밀레르는 안중근의 신원부터 확인했다. 그렇지만 안중근은 한국어 통역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슨말을 하는지 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배경과 배후를 묻자 안중근도 대충 넘겨버렸다. 1차 신문을 마칠 즈음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서 파견한 소노키 스에키가 배석했다. 안중근은 소노키의 배석이 달갑지 않았다. 하얼빈은 러시아 조차지로, 사법권 또한 러시아 관할이었다. 러시아 당국이 안중근을 체포해 수사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 P176
그러나 한국 언론은 의외로 조용했다. 《대한매일신보》만 안중근의 검찰 신문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정도였다. 물론 모두가 숨을죽인 것은 아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을 애도하는 친일파들의 추모행사가 한창일 때, 기꺼이 붓을 든 선비 학자가 있었다. 《매천야록》을 쓴 황현이다.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하얼빈 소식이 동서양에 전해지니, 세계가모두 놀라서 한국에 아직 사람이 있다고 여겼다. 안중근과 거사를 도모한 십여 명이 모두 붙잡혔는데 안중근은 웃으면서 "나는 이미 일을성공하였으니 죽음이야 누가 알겠는가"라고 말했다 한다. 그의 소식이서울에 이르자 사람들이 감히 통쾌하다고 칭송하지는 못하였지만 모두 어깨를 추켜세웠다. 그리고 저마다 깊숙한 방에서 술을 따르며 경하하였다.‘ 1910년 황현은 한일합병 조약으로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자 절명시 네 수를 남기고 음독 자결했다. - P180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된 ‘청록파 시인 조지훈도 <안중근의사 찬〉이라는 시로 안중근을 추모했다.
쏜 것은 권총이었지만 그 권총의 방아쇠를 잡아 당긴 것은 당신의 손가락이었지만
원수의 가슴을 꿰뚫는 것은 성낸 민족의 불길이었네 온 세계를 뒤흔든 그 총소리는 노한 하늘의 벼락이었네
의를 위해서는 목숨도 차라리 홍모와 같이 가슴에 불을 품고 원수를 찾아 광야를 헤매기 얼마이던고
그날 하르빈 역두의 추상같은 소식 나뭇잎도 우수수 한 때에 다 떨렸어라
당신이 아니면 민족의 의기를 - P181
누가 천하에 드러냈을까 당신이 아니더면 하늘의 뜻을 누가 대신하여 갚아줬을까
하얼빈 사건에 연루되어 끌려온 사람은 모두 열세 명이었다. 그들도안중근처럼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 지하 감옥에 임시 수감되었다. - P182
1909년 10월 30일. 자신의 주장을 일관되게 펼쳐온 안중근은 일본 검찰관 미조치 앞에서 마침내 포문을 열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저지른 15개항의 죄목이었다.
1. 한국의 왕비를 살해한 죄 2. 1905년 11월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죄 3. 1907년 정미7조약을 강제로 맺게 한 죄4. 한국의 황제를 폐위시킨 죄 5. 한국 군대를 해산시킨 죄 6.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죄 7. 한국인의 권리를 박탈한 죄 8. 한국의 교과서를 불태운 죄 9. 한국인에게 신문 구독을 금지한 죄 10. 제일은행권을 강제로 발행한 죄 11. 국채 2300만 원의 빚을 지게 한 죄 - P182
12.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 13.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정책을 호도한 죄 14. 일본 천황의 아버지인 고메이 천황을 죽인 죄 15. 일본과 세계를 속인 죄
이토 히로부미의 죄목을 일목요연하게 진술한 안중근은 가두선교때의 일이 생각났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사람을 죽였다고 합시다. 여기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릴 때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그에게 죄가 없다면 그만이고, 설령 죄가 있다면 그 사람만 다스리면 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수천만 명을 죽였다면 어찌 한 사람 몫으로 그 죄를 다 갚았다고할 수 있겠습니까? 반대로 어떤 사람이 수천만 명을 살렸다고 한다면어찌 그 사람에게 상을 다 주었다고 하겠습니까?" 안중근 자신과 이토 히로부미를 두고 한 연설이었다. 이토 히로부미야말로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다른 사람을 부추겨 죄를 범하도록 지시한(교사죄) 씻을 수 없는 범죄자였다. - P184
김아려를 영사관으로 부른 미조치 검사는 두 개의 문서를 책상위에 펼쳐놓았다. 분도의 청취서와 영사관에서 찍은 안중근 사진이었다. 김아려는 고개를 내저었다. 김성백의 집에서 들은 말이 있었다. 안중근과 부부라는 사실을 절대 밝혀서는 안 된다는 미조치 검사도더는 캐묻지 않았다. 이토 히로부미의 죄목을 열거할 때 안중근의 주번 조사는 큰 의미가 없었다. 참고인 조사를 마칠 즈음 김아려는 자못 의연한 자세로 입을 열었다. 일본 검사에게 들려줄 말이 있었다. "모르셨습니까? 집안 살림을 하는 아녀자는 지아비의 바깥일에 관여하지 않는 게 우리나라의 오랜 풍습입니다."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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