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지속적으로 해상권을 장악하면서 전 세계에 걸쳐 자국의 의지를 관찰할 수 있었다. 백여 년 전에 영국은 지브롤터를 장악해서 지중해와 대서양 사이의 지역을 호령했다. 19세기에 들어서 지브롤터는 희망봉에 닻을 내리기 전에 거치는, 아프리카 서부 항만들로 가는일종의 발판 구실을 했다. 희망봉에서 위로 올라가 아프리카 동부 해안을 따라가다 보면 왕관에 박힌 보석, 즉 인도에 다다른다. 그 다음으로 말레이시아는 영국에게 중국의 해상 관문인 말라카 해협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처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리적 힘은1869년에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면서 한층 탄력을 받았다. 이제 영국선박들은 그 운하를 통과해서 보다 빠르게 인도로 갈 수 있게 되었고대영제국의 힘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 P184

적어도 그것은 영국에게는 늘어난 부가 군사력과 정치 권력의 향상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선순환이었다. 영국은 유럽의 대다수 전쟁과혁명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었지만 이 나라의 군대도 나름 바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미얀마, 크림 반도, 인도 등은 대중이 잘 알지도 못하는 머나먼 곳들이었지만 그곳에서 이 나라는 상당한 이윤을거둬들이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원자재들이 영국의 공장들로 들어와서 그 소유주들에게는 재산을, 노동자들에게는 일자리를 만들어주었다.
해군력, 즉 해상 권력은 모든 나라에게 공히 권력 구축에 기반을 둔제국을 떠받쳐주는 역할을 했지만 한편으로는 식민주의와 인종차별이라는 꼬리표도 따라다닌다. 하지만 해군의 역할에서 도덕적으로긍정적인 부분도 있었다. 1807년 노예 무역을 앞장서서 행해오던 영국은 돌연 이를 불법화했다.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영국 해군은 노예 - P184

상인들을 적극적으로 추적해서 15만 명의 노예를 해방시켰다. 정부또한 아프리카의 부족장들에게 보조금을 주어가며 그 행위를 중단해줄 것을 설득했다. 하지만 노예제 자체는, 비록 영국에서는 없었지만,
엄연히 합법적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1833년 영국이 통치하는전 세계 모든 곳에서 불법화된다.
대영제국은 해가 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현재까지 전 세계에14개의 영국령 섬들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그 가운데 적어도 한 군데 정도는 해가 뜨고 있을 테니 말이다. 한밤중에 케이맨 제도(카리브해에 있는 영국령 제도)는 어두컴컴하겠지만 남태평양의 핏케언 제도는 아직 한낮일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좋은일이든 나쁜 일이든 끝은 있게 마련이다. 대영제국의 종말의 서막은나중에 만나게 될 두 세력이 부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두 세력은 바로 독일과 미국이다. - P185

1871년 서로 오랫동안 싸우는 것에 지친 게르만 공국들은 하나로 합쳐지면서 서유럽에서 가장 크고 인구가 많은 나라가 된다. 그 나라는머지않아 경제적으로 가장 활력 있는 나라에 걸맞게 조선업을 포함한 군수 산업이 발전해 갔다. 영국은 나폴레옹 이후 처음으로 유럽 대륙을 지배할지도 모를 힘이 등장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동시에 미국의 산업혁명 역시 속도를 높여갔다. 이 현상은 주요 강대국들의 시장과 경쟁할 만한 상품 생산을 부채질했으며 전 세계에 진출할 - P185

수 있는 대양해군의 부상을 촉진했다.
돌이켜보면 영국과 독일의 군비 경쟁이 뒤따르는 가운데 무수한 요인들이 더해지면서 제1차 세계대전은 불가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관련국 모두에게 재앙이었다. 역사책으로만 보면 영국은 승자 편에 서 있지만 실제로는 모두가 패자였다. 제2차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도 그것은 패배였다. 영국은 전쟁으로 인해 쇠약해졌다.
복수심에 불타는 프랑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독일은 여전히 가장 큰 나라였지만 많은 국민들은 전시 지도자들과 1918년의 항복 조건, 이 두 가지 모두에서 배신감을 느꼈다.
21년 뒤 아찔한 낭떠러지 앞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던 유럽은 또다시 발을 헛딛고 만다. 이번 전쟁은 야만성 면에서도 이전 전쟁을 훨씬 뛰어넘었다. 그리고 아예 대영제국의 허리를 부러뜨려 버렸다. - P186

1940년의 영국은 1803년과 거의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독일은 영국 부대가 프랑스 북부 도시 덩케르크에서 굴욕적인 철수를 하게 했다. 이후 이 나라는 영국을 침공하겠다는 의도로 영국군이 보이는 곳에 부대를 배치했다. 비록 현실화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그것을 통해 공격과 방어 계획 모두에서 영국의 지리와 경제가 어떻게 군사 전략과 얽히는지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오늘날에는그와 같은 위협적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 사고방식은 비슷한 노정을 따를 것이다.
독일의 바다사자 작전(1940년 히틀러의 영국 점령 작전) 초기 계획은 네덜란드의 로테르담과 프랑스의 항구 도시 칼레에서 시작해서 수륙양용 작전을 펼치면서 영국의 켄트와 서식스 해안에 상륙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낙하산 부대는 브라이튼과 도버항의 고지대로 침투한다. - P186

2차 공격은 프랑스의 셰르부르에서 시작해서 도시/도버 해안으로 상륙하는 것이었다. 또 교두보를 설치해서 두 부대가 서남쪽과 서쪽에서 런던으로 접근해 간다. 이때 스코틀랜드까지 침공하는 것처럼 교란작전을 펼치기 위해 남쪽에서 부대들을 끌어온다.
영국은 그 계획을 알지 못했지만 학습에 의한 지리적 짐작은 가능했다. 최전선은 남쪽 해안들이었다. 따라서 적의 상륙 예상 지점 상당수에 참호를 파서 그 위로 사격진지를 배치하고 그것들 사이에 가시철조망을 쳤다. 또 교각도 해체하고 롬니 마시의 일부 지역도 침수시켰다. 이곳은 일종의 해안지층이었는데, 만일 독일군이 그들의 교두보를 어떻게든 뚫는다고 해도 그 뒤에는 수도와 미드랜드의 공업지대 및 북부를 방어할 저지선들이 펼쳐져 있었다. 이 저지선들은 적의전진을 더디게 만들고 공업 중심지를 피해 가게 하려는 의도로 만든것이다. 관건은 벨기에와 프랑스를 전격적으로 밀고 다니면서 큰 피해를 입힌 독일군 탱크들을 어떻게 저지하느냐였다. - P187

영국은 유럽의 해안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지켜보면서 선택지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영국의 관심사는 EU가 분해되는 것을 보는 게 아니다. 강력한 EU는 영국산 상품을 수출할 수 있는 거대한 시장이 될 수있고 대륙의 안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독재 정부들은자유주의적이며 합법적인 원리들을 해체하면서 우리 기억에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나쁜 시절로 회귀하도록 부추기고 있다. 최근에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폴란드, 헝가리, 크로아티아와 그 외 몇몇 나라들에서도 독재자들이 정권을 잡았다. 만약 EU가 실패로 돌아간다면영국이 구축한 <새로운 세력 균형 모델>이 떠오를 것이다. 반면 EU가성공한다면 영국은 어느 정도 거리는 두더라도 EU와 보조를 맞춰 움직일 것이다. 2018년에 EU는 미국의 GPS에 필적할 만한 갈릴레오위성 항법 시스템(EU와 유럽우주기구가 공동으로 추진)의 보안 파트에 영국이 접근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 일을 계기로 영국 정부는 위성 분야에서 전략적 자주성을 확보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해야 했다. 물론 아직까지는 미완성이지만. - P199

이러한 소프트파워의 수준은 강한 경제에 힘입은 바도 있다. 이 수준을 지킨다면 영국은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차상위 강국이라는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어떤 수준이냐는 이 나라가 하는 선택에 달려있다.
영국은 많은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정치적 분열을 겪고 있다 보니 한층 명확하게 정의된 외교 및 군사적 역할을 찾고 있다. 그 가운데서 우리가 보듯이 방위야말로 가장 평가하기쉬운 부분일 것이다. 비록 스코틀랜드의 독립이 상황을 바꿀 수 있다해도 말이다. 1720 년대에 이 나라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합병한 연합법의 이점을 누리기 시작했다. 2020년대는 영국에게 새로운시대가 되겠지만 지리적 조건은 그때와 바뀐 것이 없다.
영국은 당장 급박한 군사적 위협에 노출돼 있지는 않다. 물론 러시아가 썩 우호적이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굳이 북유럽평원을 지나유럽의 서부 해안 끝까지 밀고 들어올 것 같지는 않다. 독일과 프랑스는 영국의 동맹국이며 가까운 미래에도 그렇게 있을 가능성이 높다. - P201

이러한 현대적 독립 시나리오는 브렉시트와 직접적으로 연결돼있다. 2014년에 스코틀랜드는 독립을 묻는 국민투표를 시행했는데55퍼센트가 영국에 남는 것을 지지했다. 단 영국이 EU에 남아 있다.
는 전제에서였다. 브렉시트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도 EU를 지지하는 표가 잉글랜드보다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에서 압도적으로많이 나왔다.
지금 우리의 관심사는 스코틀랜드 독립에 대한 찬반이나 경제적 찬반 논쟁이 아니다. 스코틀랜드가 떠난다면 영국의 국제적 위상에 미치는 악영향은 영국이 EU를 떠나는 것에 비견되지 않을 정도로 커질수 있다. 이 절교에 두 손 벌려 크게 환영할 나라는 아마 러시아일 것이다. 유럽의 2대 강국 중 하나인 영국의 군사력이 축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대놓고 반길 나라들은 거의 없을 것 같지만, 파리와 베를린 정부는 유럽연합군을 창설하려는 계획에 늘 훼방을 놓았던 영국의 경제력이 축소된다는 점에는 주목할 것 같다. - P206

매킨더의 글을 못마땅해 하는 이들은 그가 제국주의자이며 지리의중요성을 전략적인 부분에만 맞추고 있다는 이유를 댄다. 하지만 그는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한편 열강들 사이의 긴장감을 완화할 수 있는 국제연맹도 지지했다. 또한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생각이 나치 지도층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그의 생각을 오용했다고 해서 그가 한 말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한 대륙의 해안을 마주보는 섬나라라는 현실은 변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들쭉날쭉한 양측 해안선과 수심 깊은 항구들은 바다를 통한 교역을 가능하게 해준다. 매킨더의 글을 제대로 이해하는 길은 그 안에서 침략을 정당화할구실을 찾는 대신 지정학적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미국 독립전쟁이 발발한지 두 세기 반이 지난 지금 영국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할 수 있는 한 많은 곳에서 말이다. 대영제국 이후, 그리고 브렉시트 이후 그들은 친구이면서 대등한 입장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물론 늘 그렇지만은 않겠지만. - P207

그리스,
그 위치 때문에고대부터 현재까지열강들의 게임의 대상이 되다

지중해 동부에서 보내는 여름? 아니면 에게해에서의 휴가? 모두다 환상적으로 들리지만 이런 안락함을 누리기엔 이 지역은 최근 들어 많이 뜨거워졌다. 상대적으로 조용했던 몇십 년을 보내고 나서 이지역이 다시 한번 불안한 지정학의 최전선에 등장하고 있다. 이곳에서 해저 가스전이 발견되면서 그리스와 터키 사이에 깊숙이 내재해있던 해묵은 반목에 새로운 갈등의 불씨가 또 하나 던져졌다. 여기에전 세계 다른 나라들까지 가세하고 있다. 두 나라 사이에 있는 이 수역은 가스가 발견되기 전에도 잠재적인 분쟁의 소지를 안고 있었는데 이제는 새로운 독성까지 추가되고 말았다.
지정학을 공부하는 많은 학생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만큼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가 또 있을까. 바로 이 분야의 학문이 태어난곳이 아니던가. 투키디데스(기원전 460-400년)는 서구 정치철학의 규범을 세운 인물이다. 그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오랜 세월에 걸 - P212

첫 국제 관계학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영감의 원천이나 다름없었다.
이 책은 오늘날에도 시사적인 현안을 논의할 때 자주 인용되곤 한다.
일례로 <투키디데스의 함정Thucydides Trap>(새로운 강대국이 부상하면 기존의 강대국이 이를 견제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전쟁이 발발한다는 뜻)이라는 용어는 어떤가. 신흥 강국 아테네의 부상이 패권국 스파르타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켜 전쟁이 발발한 상황에서 유래한 이 개념은 현재 중국의 부상으로 인해 미국 내에서 터져나오는 감정에도 적용된다.
투키디데스는 오늘날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을 당시에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 북쪽에 있는 산들은 그 방향으로 교역을 하는 데는 방해가 되지만 육로를 통해 지상으로 공격해 오는 적의 위협을 막아주는 데는 좋은 방벽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 말이다. 하지만 그리스가 안정과 번영을 구가하려면 에게해의 제해권을 장악해야 한다. 즉 해양 강국이 돼야 한다. 따라서 <바다와 산>이라는 두 요소야말로 그리스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다. - P213

그리스는 그 정도의 사치까지는 누리지 못하지만 이 나라의 해법은방어 부대가 높은 고지대로 물러나서 계속 싸우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침공 부대가 먼저 그리스의 중심부에 도달했을 때의 얘기다. 아예애초부터 그 가능성을 차단하려면 그리스는 북쪽의 산악지대라는 천연 요새뿐 아니라 바다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반도의 황폐한 지형은 그리스 사람들을 유능한 뱃사람으로 만들었다. 본토 안에서도 육상 무역은 쉽지 않았던 터라 (지금도 그렇지만) 상인들은 해안선을 따라다니면서 물건을 팔았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이 의미하는 바는 해상 무역을 기반으로 지역 강대국으로 부상한 그리스는 바다 위 교역로를 반드시 지켜야 했으며 그 결과로 강력한 해군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정은 오늘날에도 변함없다. - P217

아테네인들은 다른 곳으로 모험을 떠나기 좋아했고 다른 문화로부터 기꺼이 배우기를 즐겼다. 철학자 플라톤은 일견 오만하다고 할 수도 있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그리스 사람들은 외국인들에게서 빌려온 것을 완벽하게 만들어 버린다."완벽하게 만들어서 우리에게 남겨준 그리스인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 예를 들어보면 도시 계획의 아버지라 할 히포다무스, 위대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의학자 히포크라테스, 수학자 피타고라스, 그리고 세계 최초의 여성 수학자로 널리 알려진 히파티아 등이 있다. 또 민주주의 democracy, 곡예사acrobat, 풍자 sarcasm 등 그리스어에서 파생된 영어 단어들만 해도대략 15만 개에 이른다고 한다. 그것 말고도 우리가 고대 그리스에 감사해야 할 게 또 있다. Hippopotomonstrosesquipedalian이라는<길이가 긴 단어의>라는 단어를 만들어준 것이다.
- P220

1920-1930년대는 지속되는 분열과 불안정 그리고 파시즘과 손발을 맞추는 군사 통치의 시대였다. 그리스는 독재자 이오안니스 메탁사스 장군의 지휘 아래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애당초 그는 그리스가 중립을 지키는 걸 원했다. 하지만 두 차례에 걸친 이탈리아 침공에서 고배를 마신 뒤 그리스는 독일에 항복했고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 불가리아 군대에 의한 가혹한 점령기를 보내게 된다. 그나마 이나라의 지리 덕분에 점령군은 내륙 전체를 지배하진 못했고 그리스는 결사적으로 항전할 수 있었다. 그들은 산악지형을 십분 활용해서지속적으로 게릴라전을 펼쳤다. 그러나 이 기간에 행해진 적군의 식량 징발로 수만 명의 그리스인들이 굶어 죽었고, 7만 명이 처형당했으며, 레지스탕스 공격에 협조한 죄로 수백 곳의 마을이 파괴됐다. 또6만여 명의 그리스계 유대인들이 죽임을 당했으며 많은 이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다. 이 전쟁에서 살아남은 테살로니키의 유대인들은 겨우 9퍼센트에 불과했다. - P229

1947년 영국은 더 이상 그리스를 방어하는 책무를 수행하기 어렵다면서 미국에게 이 역할을 넘겨주기로 했다. 그러자 미국은 그리스군대를 지원하기 시작했고 힘이 세진 그리스군은 공산주의자들의 본거지인 산악지대를 소탕했다. 지난 세기들처럼 외부 세력이 상황을주도했고, 이전 세기처럼 지중해 유역에서 현재는 러시아가 된 소련을 저지한다는 것이 주요 명분이었다.
소비에트 연방과 단절한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그리스 반군에 대한지원을 끊었고 1949년에는 유고슬라비아 쪽 국경마저 닫아버리는 등공산주의자 반군에게 연달아 타격을 입혔다. 그러자 그해 10월 결국그리스 반군 대다수가 알바니아로 퇴각하면서 내전은 종식됐다.  - P230

이 전쟁으로 5만여 명의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고 약 50만 명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것이 총인구가 8백만 명도 되지않은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렇게 만신창이가 된 그리스의 1950년대와 1960년대는 스스로 국가의 수호자일 뿐 아니라 정치의 수호자로 자처하는 군부와, 분열된국민으로 각인된다. 내전의 후유증으로 경제 발전을 이루지 못한 그리스는 나머지 유럽 국가들보다 훨씬 뒤처지게 되었다. 하지만 군부의 주된 관심사는 민주적인 제도를 뒤엎는 데만 있었다. 정작 국민들은 민주적인 서유럽 문화에 그 어느 때보다 많이 노출돼 있었는데도말이다. 그리하여 1967년 5월의 선거는 군부의 영향력을 대폭 축소시키겠다는 공약을 내건 중도좌파의 승리가 점쳐졌다. 선거일이 점점다가오자 군부의 일부가 우려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 4월 21일 이른 아침, 거리를 내달리는 탱크의 굉음과 함께 간헐적인 총성이 아테네 시민들의 아침잠을 깨웠다. - P231

시민 대다수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군가가 울려 퍼졌다. 마침내 다음과 같은 선언문이 발표된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리스 군대가 이 나라를 통치하기로 한다."
유일하게 놀라운 사실은 이 쿠데타의 주축 세력이 고위 장성들이아니라는 점이다. 하급 장교들이 그 배후에 있었다.
그들은 주요 정치인들과 군의 최고사령관을 체포한 것을 필두로 쿠데타에 앞서 작성한 리스트를 바탕으로 거의 1만여 명을 색출해서 체포했다. 그 중 많은 이들이 심한 고문을 받았다. 이렇게 군부 독재 국가가 됐음에도 그리스는 1952년에 가입한 나토 회원국의 지위를 여전히 유지했다. 이는 외부 세력에게는 이 나라의 지리적 위치가 여전 - P231

히 전략적 중요성을 갖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그리스에 민주주의가 다시 찾아오는 것을 보려면 1974년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1981년 그리스는 나중에 EU가 되는 EEC에 가입했다. EEC 가입은 그리스 경제에 큰 보탬이 되었다. 비록 쓸 만한 육상 교역로가 여전히 부족하다는 문제점을 안고는 있었지만 마침내그리스에게도 운이 트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스의 지리와 정세가이 나라를 EU의 골칫거리인 두 가지 주요 위기의 최선봉에 세운 덕분이었다.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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