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전 세계와 기싸움을 벌이며신의 과업을 수행 중이다

이란 사람들은 갖가지 훌륭한 빵들을 만들어 왔다. 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밀가루로 만든 바삭바삭한 난에 바르바리 (Nan-ebarbari, 바르바르인들의 빵이라는 뜻으로 바르바르라고도 부름)라는 것인데, 바닷소금으로 간을 하고 참깨와 양귀비씨를 뿌려서 주로 아침에 먹는빵이다. 모양은 대체로 기다란 타원형이고 안쪽에는 위에서 아래로평행선 몇 개가 그어져 있다. 공교롭게도 이란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주 만들어 먹는 이 빵의 외관이 자신들 나라의 모양과 닮았다는 얘길자주 듣는다.
이란은 두 가지 지리적 특징에 의해 정의된다. 하나는 국경지대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딱딱한 빵의 가장자리 같은 형태의 산맥이고, 다른 하나는 평행하듯 달리는 저지대 언덕을 따라 이어지는 내륙의 평평한 소금사막이다. 산맥은 이란을 일종의 요새로 만들어 준다. 어느각도로든 이 나라로 접근하려고 하면 느닷없이 떡하니 가로막는 고 - P66

지대와 맞닥뜨리게 된다. 이는 곧 이 나라의 많은 곳이 통과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산악지대가 카비르 사막과 루트 사막(루트Lut는 페르시아어로 물이 없고 식물이 자라지 않는 척박한 땅을 가리킨다)이라는 내륙의황무지를 에워싸고 있는 형국이다.
카비르 사막은 거대한 소금사막으로도 알려져 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합친 넓이에 버금가는 이 사막은 길이가 800킬로미터 너비가 320킬로미터에 달한다. 나는 차를 타고 이곳을 지난 적이 있는데그야말로 칙칙하고 평평한 관목들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곳에서 뭐라도 볼 만한 것을 찾고 싶다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낫다. 또어떤 곳에서는 지표면에 있는 소금층이 물에 잠길 만큼 깊은 진흙층을 숨기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곳을 만나면 발이 푹푹 빠질 정도다. 사막에서 익사하는 것보다 더 어이없게 죽는 방법이 있을까 싶다. 또 다른 주요 사막들의 이름은 훨씬 더 매혹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그것도 루트 사막이 <적막한 평원>이라고 알려진 이유를 알기 전까지 만이다. - P67

역사의 대부분 동안 이 땅은 페르시아로 알려져 있었다. 이란이라는이름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35년부터인데 인구의 40퍼센트가량을 차지하는 비非페르시아계 소수 민족을 고려해서였다. 이란의 국경은 수세기에 걸쳐 바뀌어 왔지만 기본적인 지리적 형태는 여전히 난 에바르바리 빵 모양으로 남아 있다.
이 나라의 국경을 따라가 보려면 먼저 호르무즈 해협을 따라 해안에서 시작되는 장장 1천5백 킬로미터 길이의 자그로스 산맥에서 시계방향으로 출발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이 산맥은 페르시아만을 가로질러 맞은편의 카타르와 사우디아라비아를 마주보고 있는 이란의 일부 지역을 따라 북쪽으로 길게 뻗어 있다. 더 북쪽으로 가서 샤트알아랍강을 따라 계속해서 올라가다 보면 이라크와 터키 국경과 마주치게 된다.  - P68

한마디로 이 나라의 지형은 미래의 침략자와 정복자에게는 엄청난장애물이라는 얘기다. 산맥이라는 장벽을 뚫기 위해 치러야 할 부담을깨달은 침략자는 차라리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페르시아, 곧 이란이 그 기나긴 역사에서 이 지리적 조건으로 모든적을 포기시켰던 것은 아니다. 이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진격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323년 그가 사망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페르시아는 다시 지배권을 가져왔다.
한참 지나 서기 1200년대와 1300년대에는 몽골족이 이어 티무르(칭기즈칸을 존경하고 평생 그의 길을 따르려 했던 티무르 제국의 건설자)가 광활한중앙아시아 스텝 지대를 건너와서 이 땅을 파괴하고 수십만 명의 사람들을 학살했지만 페르시아 문화에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길 만큼이곳에 오래 머무르지는 못했다. 또 1500년대부터 오스만 제국이 수차례에 걸쳐 자그로스 산맥을 넘어오는 모험을 감행했지만 그들도 이나라의 가장자리만 슬쩍 훑고 간 정도였다. 러시아인들이라고 비슷한모험을 감행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또 영국인들도 이 땅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은 소수 민족 집단 중 일부를 끌어들여 돈으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방법이라고 여겼다. - P70

나라 안을 들여다보면, 대다수 이란 사람들이 어째서 산악지대에몰려 살고 있는지 그 황량하고 혹독한 풍경을 보면 이해가 된다. 산을 가로질러 오가며 교류하는 것이 쉽지 않은 탓에 인구가 밀집된 산악지대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문화를 발전시켜온 경향이 있다. 그래서각 소수 민족은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고수하면서 흡수 통합에 반발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란은 현대 국가로서 국민의 단결이나 화합정신을 발전시키는 데 한층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또 산 때문에주요 인구 분포지가 넓은 땅덩어리에 드문드문 흩어져 있다 보니 최근까지도 밀접하게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현재에도 이 나라 도로는절반 정도만 포장된 상태다. 그래서 뭉뚱그려 이란 국민이라고는 해도 다양한 소수 민족 출신인 경우가 많다. - P71

"우리는 호르무즈 해협을 누구나 이용할 수 있거나, 아니면 아예아무도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을 적들이 깨닫도록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상황이 어디까지 튈지 알 수 없는 도박의 성격을 띤다고 봐야 한다. 그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 미국은 심각한 분쟁이 발발한지 몇 시간 안에 이란의 공격력을 최대한 무력화시킬 수 있는 계획을수립했다. 또 걸프 국가들(페르시아만 연안 8개국)은 원유와 가스 파이프라인을 홍해로 향하게끔 설치해서 그곳에서 유조선들이 인도양으로접근할 수 있게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렇게 해서라도 이란이 예멘에있는 후티(Houthis, 예멘의 이슬람 시아파 무장단체) 동맹에게 제공한 미사일 공격의 목표가 되는 것만큼은 피하자는 것이다. - P76

어떤 이들에게 쿠데타는 성공한 것처럼 보였을 수 있지만 그것은결국 이 나라에 기나긴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국왕은 점증하는탄압의 소용돌이 속으로 국가를 몰아넣었고 그 결과 갓 태어난 민주주의의 도정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국왕은 모든 부분에서 즉각적인 반발에 부딪혔다. 보수적인 종교 단체들은 그가 비이슬람교도에게 투표권을 주자 분개했다. 또 모스크바의 지원을 받는 공산주의자들은 국왕의 기반을 약화시키려고 했다. 한편 자유주의적인지식인들은 민주주의를 요구했고 민족주의자들은 굴욕감을 느꼈다.
그 쿠데타는 국민들로 하여금 외세의 입김을 받는 나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상기시켜 주었다. 석유 산업의 국유화는 결과적으로 국가에게는 더 많은 수익을 가져다주었지만 정작 일반 국민들에게는 그 수익이 찔끔찔끔 돌아갈 뿐이었다. 이번 쿠데타는 이란 역사에서 하나의 갈림길이었으며 이후 이 나라 정국은 1979년의 또 다른혁명을 향해 더욱 속도를 높였다. - P84

모두가 자유로운 이란을 갈망했고 그것이 주요한 요인이었던 것은맞지만 그렇다고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클린턴이 했던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말은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었는데 그 안에는 페르시아어도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2013년의 선거는 이란의 국제 고립을 심화시키고 경제를 더욱 위축되게 만든 아흐마디네자드 치하에서낭비한 시간들에 대한 질책이었다.
로하니는 2017년 재선에 성공하지만 보수 강경파는 2020년에 총선 몇 개월을 앞두고 선거에 대비해서 모종의 묘책을 실행했다. 헌법수호위원회가 자신들의 위력을 발휘해서 거의 7천 명에 달하는 국회의원 후보자들의 자격을 박탈해 버린 것이다. 그 가운데는 90명의 현역 국회의원들도 포함됐다. 이것을 본 수백만 명의 이란인들은 자문했다. "왜 저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지?" 그리고 선거일, 그들은 투표장으로 나오지 않고 집에 머물렀다. 1979년 이후 가장 낮은 투표율을보인 이 총선의 결과는 강경 보수파의 압승이었다. 이 메시지는 분명했다. 어찌 됐든 아야톨라파(시아파 성직자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자들)와 이란혁명수비대는 권력을 내놓을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 P94

미국은 이란을 침공했던 이라크 수니파 정권(사담 후세인 정권)을 갈아치웠다. 이제 다시 한번 메소포타미아 평원은 이란 전면에서 완충지가 되면서 잠재적 적대 세력을 저지하고 무력을 투사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부시 행정부는 소수파인 수니파 정권을 무너뜨렸으니 이라크의 다수를 차지하는 시아파 지도자들이 확실하게 나라를 통치하도록 시스템을 잘 관리하면 그 결과로 이라크내에서 민주주의가 꽃필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었다. 하지만 이라크내 시아파는 매 단계마다 이란의 도움을 받았다. 이란은 미군의 침공이후 발발한 이라크 내전에서 여러시아파 민병대를 지원함으로써이라크에서 외세를 몰아내는 데 힘을 보탰다. 꽤 많은 미군과 영국군에게 피해를 입힌 노상 폭탄 공격은 이란에서 자주 발생하던 일인데이라크 민병대는 그런 테헤란으로부터 자금과 무기, 훈련을 지원받았다. 이라크는 이란의 푸들 강아지가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의 이라크 지도력으로는 동쪽에 있는 이웃인 이란을 향해 호의적인 손짓을자주 할 수밖에 없다. - P95

전쟁 가능성이 낮은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이 손실을 입고 있는 것을 본 미국 국민들은 군사적 모험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이 또한 그 요인들 가운데 하나다. 이점을 잘 알고 있기에 이란은 미국의 부당한 침략에 대해 확실하지만, 그러나 애매한 수위까지 밀어붙이는 도박을 할 수 있다. 이란 정부는긴장이 고조되면 공습을 받을 수도 있지만 미국이 이라크를 통해 자그로스 산맥으로 접근하거나 페르시아만에 주둔하고 있는 함대의 병력을 상륙시키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란의 군사력은 빈약하지만 수백만 명의 남성들을 징집할 수 있으며 19만 명의 혁명수비대를 포함한 60만 명의 현역병들까지 동원할 수 있다. - P102

지금부터는 이란 정권이 직면하고 있는 내부의 도전과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란의 상황은 경제적으로 점점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 가는 형국이다. 하지만 정부는 유독제재 부분에만 문외한인 박사학위 소지자 공무원들을 채용하고 있는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 와중에 경제는 해가 갈수록 비틀거리고 있다.
이란은 중국과 경제적 우호관계를 다져왔다. 중국은 러시아가 그러하듯 제재 조항들을 무시하려고 하는 여타의 나라들보다도 무시하려는 그 의지가 훨씬 크다. 국내에서의 정부에 대한 시위는 더 잦아질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권은 반대 의견을 잠재울 수 있다면 국민 수천 명 정도의 목숨은 무시할 수 있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간다면 돌이키기 어려울 것이다. - P105

나는 자신들에게 고통을 주는 이들에게 정면으로 반발한, 믿기 어려우리만치 큰 용기를 발휘한 이란 젊은이들을 직접 만난 적이 있다.
또한 순교라는 개념이 그들 문화 속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 것도보았다. 그러나 스스로를 희생하러 나설 사람들의 수는 제한적일 것이다. 수많은 청년 군인들과 민병대원들이 더 이상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지 않는다면 이 역동성은 바뀔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특히혁명수비대와 바시즈민병대의 광신도들은 요지부동인 것처럼 보인다. 정권은 자국 군대를 밀착 감시하고, 법 집행 기관 안에 비밀경찰을 심어두며, 군대를 배치할 때 혁명수비대를 함께 보낸다.
마지막으로 내부에서 활동하는 개혁주의자들이 있다. 20여 년에 걸쳐 그들은 선출된 기관들을 이용해서 외형적으로나마 민주주의를 보여주도록 이슬람 성직자들과 혁명수비대라는 실제 권력과 균형을 잡는 노력을 해왔다. 이들은 강력한 이슬람 전통을 보존하는 동시에 민주주의를 확립해 보려고 한다. 그들의 노력은 여전히 진행 중이긴 하지만 아직까지 큰 진전을 이룬 것 같지는 않다. - P107

이란 정권이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양태 가운데 심각하게 받아들여져야 하는데도 그러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혁명적인 <신정 국가>(지배자를 신 또는신의 대리인으로 간주하는 국가일 거라는 점이다. 그만큼 신권 정치는 이나라의 기본 원리이며 스스로 기반이 약화되지 않는 이상 변하지 않는다. 프랑스 대통령이 프랑스의 국시인 자유, 평등, 박애를 더 이상 찬성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것을 상상해 보라. 이런 일은 일어날리 없다. 그렇다면 이란의 시아파 이슬람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신의계획의 선언>이라는 신념을 가진 아야톨라파가 큰 악마(미국)와 타협하고, 성적 자유를 허락하며, 다른 종교로 개종하고, 진정으로 다원론적 정치 체제를 선언한다고 상상해 보라. 이 땅에서 신의 뜻을 집행하는 이상 지금 말한 사항들은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 P110

현체제 아래에서 이란은 소위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해있다. 정권을 여전히 지지하고 있는 수백만 명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정통성의기반을 약화시키는 체제 완화를 시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그렇게 하지 않으면 젊은 세대는 날이 갈수록 21세기보다는 16세기에 더 어울려 보이는 체제에 점점 더 환멸을 느낄 것이다.
1979년의 이란 혁명, 즉 이슬람 시아파 지도자인 호메이니를 주축으로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란이슬람공화국이 세워지는 것을경험한 세대는 시간과 인구 통계학적 변화가 그들에게 불리하다는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여러 카드가 있다. 핵 이슈는아직도 살아 있고 호르무즈 해협은 여전히 비좁다. 또한 정치와 테러리즘 영역에서 써먹을 다양한 대역 배우들을 그들이 부를 수 있는 지역에서 보유하고 있다. 안팎에서 조직화된 내부 전복 시도에 대응하기 위해 이란 정권은 훨씬 무시무시하고 무자비한 보안 기관도 운영하고 있다. 그들은 이렇게 <신의 과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볼 때 선뜻 타협하는 것은 죄악이며, 저항이야말로 신성한 행동이다. 종교를 내세운 이들 혁명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혁명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 P112

사우디아라비아,
한 가문의 성이 나라 이름이 되다

이처럼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행위는 곤란한 상황을 낳는다. 역사적으로 사우드 가문이 자신들이 통치하던 네지드의 일부 지역을 자신들 가문의 이름으로 부르라고 주장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나머지 아라비아는 어떨까?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다. 오늘날이 나라 인구의 상당 부분이 사우드 가문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된것은 채 1세기도 안된다. 만약 120년 전에 누군가가 샴마르족에게샴마르 토후국이 곧 사우드 왕국의 일개 속주가 될 거라고 얘기해 줬다면 그들은 처음부터 검을 잘못 쥐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또 대다수가 페르시아만을 마주하는 지역에 거주하는 시아파 주민들도 자신들이 수세기 동안 부딪쳐 온 사우드 수니파와하비 원리주의자들의 통치를 받게 될 거라는 사실에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이 이야기는 현대의 왕국은 살아남기 어렵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그표면 아래 흐르는 긴장감을 보여주는 것이다. 통치하는 왕가가 권력을 유지하려면 중심이 외곽을 품어야 하는 법이다. - P117

이 나라가 주요 동맹국이자 보호국과 맺고 있는 관계의 근간이기도 하다. 그 나라는 바로 미국이다. 석유는 이 나라에 엄청난 부를 안겨주었고, 이 부는 <이슬람원리주의>라는 극단적인 브랜드의 폭력적인 해석을 수출하는 이 나라를 석유에 목말라하는 권력 구조 사이에서 살아남게 해주고 있다. 최근에도 사우디아라비아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국왕이나 석유 갑부가 아닌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세계가 조금씩 석유의존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모래와 검은 원유밖에 없는 국토, 다루기 힘든 국민들, 정통성 시비에다 안팎의 적들에게까지 시달리는 사막 국가의 왕조는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이 나라에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현대화다.
21세기에 살아남으려면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활용하는 기술을 이용해야 한다. 물론 이 길은 쉽지 않다. 그러나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이 시도는 중동의 보다 넓은 지역과 그 너머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은 분명하다. - P118

이 사건이 장기간에 걸쳐 끼친 영향은 이 사태로 겁을 먹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이 나라의 사회 영역을 현대화하려는그 어떤 시도조차 지레 포기하게 만든 것이다. 할리드 국왕은 다수의반정부 세력이 국가보안대에 부대원 대부분을 공급하는 부족들 출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한 그의 해답은무엇이었을까? 더욱더 종교에 기대는 것이었다. 이슬람교 말이다.
신문에서 여성들의 사진이 사라졌고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여성 진행자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은 추가 지원금을받았고, 극장들은 문을 닫았으며, 공교육 과정에서 종교 교육 시간이더욱 늘었다. 이후 종교 경찰의 야외 실전 훈련도 40년이나 지속되었다. 학교와 대학은 보다 더 많은 이슬람 성직자를 채용해서 와하비즘만이 진정한 이슬람이라고 젊은이들에게 가르쳤다. 그러니 훗날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무신론자 소비에트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기 위해 수만 명의 사우디아라비아 청년들이 그리로 달려간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 P135

여기서 알카에다의 전략이 확연히 드러났다. 혼란을 조장하고 보상을 얻어내는 것이다. 영국과 미국의 정보에 따르면 고숙련 외국인 노동자들의 20퍼센트 정도가 사우디아라비아를 떠났다고 한다. 그로부터 몇 달 뒤에는 더 많은 수가 짐을 쌌고 브리티시 에어웨이는 사우디아라비아행 비행 편을 잠정 중단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이 나라의 첨단산업, 특히 가장 중요한 에너지 부문이 서서히 멈춰버릴지도 모른다. 국민들의 생활 보조금을 보장해줄 수익이 없다면 정부에대한 그들의 반발은 커질 수밖에 없다. 이론적으로만 보면 이 상황이국가를 붕괴시키고 알카에다가 정권을 장악하도록 할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당국은 강경하게 대응했다. 1990년대 중반의 탄압을 넘어서는 강한 탄압이 재개됐고 다시 정보 기관이 상황을 장악했다. - P140

그들 대다수는 방글라데시에서 온 사람들이었고 사우디아라비아 사람은 단 한 명도 볼 수 없었다. 그러니 나 또한 이곳 사람들이 조상의 오래된 기술을 이어받고 싶어 한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24세 이하 청년 실업률이 28퍼센트에 달하지만 그렇다고 이곳 청년들은 제다의 부둣가에서 쪼그리고 앉아 어망을 수리하고 싶지는 않은가 보다.
이 노동자들을 사우디아라비아 사람들로 대체하는 것과 석유를 기술로 대체하는 것은 일종의 도박이나 다름없다. 서둘러 미래로 가려는 시도를 이 나라의 보수주의자들은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 시도는곧 종교와 부족의 정체성을 무시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계획은 지역 간 긴장감을 높일 위험도 있다. 이 나라의 13개 행정 구역가운데 리야드와 제다가 속해 있는 2개 지역은 일찌감치 투자가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식으로 계속되면 시아파가 다수를 차지하는이스턴 주와 예멘과 접경지대에 있는 주민들은 "이 계획에서 과연 우리를 위한 것은 뭐가 있지?"라고 물으면서 중앙 권력과 점점 더 거리를 두려 할 것이다. - P153

이 나라는 태양광 패널을 생산하는 공장, 패널을 설치할 공간, 그리고 연료가 될 태양빛이 풍부하다. 게다가 발전에적합한 태양광의 세기가 전 세계에서 가장 높다. 정부는 2032년까지그 수치를 20퍼센트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구상을 제시하고 있다. 비즈니스적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공격적인 목표라 할 만하다.
그런데 걸핏하면 <역사적 순간>이라고 말하기 좋아하는 정부이다보니 태양력 발전 계획도 지나치게 야심차고 거창한 목표가 돼버린듯하다. 관료주의적 논쟁과 기술적 어려움 때문에 일부 계획은 무산되거나 중단되기도 한 상태다. 하지만 당국은 뭐라도 해야 될 때라는것을 알고 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는 또 다른 균형화 조치가 행해지고 있다. 요컨대 석유에서 탈피해 산업을 다각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석유에서얻는 수입으로 지불하는 보조금을 급격하게 철회해서 국민들이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지 않게 하면서도 나라의 장부를 맞추는 게 관건이다. 재생 에너지, 해외 투자, 관광과 홍해 항구들 같은 성공적인 인프라 개발 등이 도움은 되겠지만 유조선의 방향을 돌리는 것은 아무래도 크나큰 도전이 될 것이다. - P156

전략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는 향후 몇 년간은 미국에 밀착할 수밖에없을 것이다. 미국이 그들과 관계를 끊지 않는 한 말이다. 미국이 안보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면 이곳의 해상 방위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페르시아만과 홍해는 비좁은 데다 하나같이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강력한 자국 해군력이 없다면 적대 세력은 인도양이나 수에즈 운하로 가는 이 나라의 수출로를 봉쇄할 것이다.
그런데 안보 면에서는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도 중국과의경제적 끈은 더욱 단단해질 것 같다. 중국은 이곳에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팔았으며 지난 몇 년간 이 나라의 원유 수입을 급속도로 늘렸다.
또 사우디아라비아는 화웨이가 중동 지역에서 성사시킨 12건의 5G계약 가운데 한 건에 서명했다. 미국과는 달리 중국은 자국과 거래하는 나라들의 인권 문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권위 있는 중동 정치 분석가인 미나 알 오라이비는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국가 자본주의라는 중국 모델에 대다수 아랍 지도자들은 매료됐습니다. 정치적 자유주의와 별개로 경제적 자유주의는 대다수 이지역 정부들이 추구하는 것이어서 지난 20여 년간 중국은 성공한 모델로 칭송받고 있지요." - P157

이슬람 교단의 보수적인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결정한 종교 생활을 자유롭게 영위할 수 있는 한에서는 이 같은 변화를 받아들이겠지만, 살아남기 위해 나라가 현대화된다면 자신들이 사회에미치는 위력 또한 약화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와하비즘의수출 역시 축소될 수 있다. 만약 사우디아라비아가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덜 중요해진다면 세계는 부분적이나마 빈 라덴 또는 ISIS를배출한 그 이념을 마냥 용인해줄 수만은 없을 것이다.
위에서 열거한 일들이 현실화된다면 이는 거의 3백 년간이나 다져온 사우드 가문과 와하비파 연합의 기본 틀을 깨는 것이 된다. 왕세자의 조부인 이븐 사우드는 국민들이 복종한다면 오일 머니는 그들에게 윤택한 삶을 제공할 것이라는 계약을 제시했다. 하지만 왕세자가제시하는 새로운 21세기형 모델에서는 오일 머니의 역할이 한층 축소될 것이다.
개혁이 이행되지 않고 세계 또한 석유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새로운세계에서 사우디아라비아는 과연 무엇을 내놓을 수 있을까? 모래? - P160

이 나라의 지도자는 새로운 사회, 새로운 경제, 그리고 유능한 군대를 건설해야 한다. 아직은 그 검은 물질로 세계 경제의 바퀴가 잘 돌아가도록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를 위해 싸워줄 수 있겠지만 이곳의태양광 패널을 지켜주기 위해 싸워줄 리는 만무하다. 그리고 그 순간을 향해 우리는 점점 더 다가가고 있다. - P161

영국,
지리에서 파생된분리의 정서가 남아 있다

"영국인들이 오고 있다!" 이것은 지난 몇 세기 동안 전 세계 여러나라에서 많이도 외쳤던 말이다. 영국인들이 지구의 4분의 1을 지배하는 제국을 건설하는 동안 들어왔던 이 말을 지금 다시 들을 수 있게됐다. 물론 그때와는 매우 다른 의미이긴 하지만 말이다. EU를 탈퇴하기로 한 2016년의 브렉시트 이후 영국은 <새로운 동맹>을 찾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20세기 중반부터 지속적으로 국제적 역할을 모색해 오고 있었다. 탈식민지화가 가속화되는 동안 지도가 바뀌면서 영국도 많은 것을 잃었다. 이제 이 나라는 제국의 시대가 아스라한 기억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새로운 세계를 항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영국은 무엇이 그들에게 오고 있는지, 아니 자신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새로운 시대에도 북유럽평원의 서쪽 끄트머리에 있는 섬이라는 그 지리적 위치가 갖는 영향력은 여전할 것이다. - P166

북해의 혹독한 기후와 차가운 바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는몇 년 전 유럽에서 가장 큰 섬을 두 바퀴로 탐험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LEJOG(Land‘s End to John O‘Groats, 랜즈엔드에서 존 오그로츠지)라고 알려진 길을, 즉 영국의 북쪽 끝에서 남쪽 끝까지 총길이 1천6백 킬로미터를 사이클로 종단을 했다. 가는 내내 내 등 뒤로는 남에서 북으로 부는 기분 좋은 바람이 불었다. 완전히 종단하는 데 12일이 걸렸는데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운 희열을 선사했다. 그런데 무엇보다 내가 놀란 것은 따로 있었다. 하루를 마칠 때쯤 되면 사람들의억양은 물론 방언, 장소의 명칭들이 너무도 뚜렷하게 달라지는 것이다. 심지어 50킬로미터 이내 정도의 짧은 거리인데도 그 안에서조차 선명한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현상에는 지리적, 역사적 배경이 있다. - P170

각 지역들은 상대적으로 고립된 상태로 발전해 오면서 로마인과 앵글로색슨족, 바이킹족과 노르만족의 출현에 영향을 받았다. 한 예로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이 현재 동앵글리아라고 부르는 곳에 정착했는데 ty라는 접미사는 마을을 뜻하는 덴마크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영국 동부 해안 지역에서는 휘트비 whitby 라든지 그림즈비Grimsby 같은 도시 이름이 사용되고 있다. 현재도 남부에서 온 사람이라면 북동부인 요크셔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들을 온전히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이 지방에서는 아이를 bairn, 개울을 beck이라고 한다. 물론 대다수 나라들에도 고유한 지방색이 있지만 영국처럼 작은 지역에서 이처럼 두드러진 경우는 흔치 않을 것이다.
이 나라의 주요 지리적 구분은 흔히 생각하듯 남과 북이 아니라 동과서, 즉 고지대와 저지대로 구분된다. 북동쪽의 티스에서 시작해 - P170

서 남서쪽 데번의 엑스강까지 내려오는 선을 긋는다면 잉글랜드와웨일스의 저지대와 고지대 사이의 차이가 선명히 드러난다. 서쪽에는 단단한 바위가 많은 고지대인 레이크 지역, 캄브리아 산맥, 다트무어 같은 황야지대가 펼쳐져 있다. 반면 동쪽은 보다 평평하고 바위들도 마치 분필처럼 좀 더 잘 부서지는 무른 지형이다. 이런 특색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도버의 화이트 클리프(white Cliffs, 영국해협과접해 있는 높이 250미터의 절벽)다. 이 같은 분리는 영국의 서쪽이 동쪽보다 더 포근하고 비도 더 자주 내리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카리브해에서 시작된 멕시코 만류는 대서양을 지나 영국의 서부 해안까지 온다.
멕시코 만류가 몰고 오는 바람은 습기를 빨아들이는데 서쪽 지역의고지대에 부딪히면서 수증기로 떨어뜨린다. 영국이 열대 낙원이 될것까지야 없겠지만 대체로 러시아나 캐나다처럼 위도가 비슷한 다른나라들에 비해 이런 이유들 때문에 기후가 온화해서 작물 재배가 유리한 것은 사실이다. - P171

북쪽과 남쪽을 가르는 특징도 있다. 산은 주로 섬의 서쪽 절반에 대부분 있다. 하지만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지대도 점점 더 높아진다. 스코틀랜드에서도 고지대의 대부분은 북서쪽에 치우쳐 있다. 사회 기반시설은 평지에 건설하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에 이러한 분리는 발전의 측면에서 차이를 낳았다. 북동쪽에는 리즈, 셰필드, 뉴캐슬, 요크셔, 북서쪽에는 맨체스터, 리버풀 같은 산업혁명으로 유명해진 도시들이 포진해 있다. 하지만 면화 산업, 광업, 중공업의 쇠락이 유독이 지역을 세게 강타했다. 상대적으로 온화한 날씨, 평평한 강, 농사에 적합한 토양, 수도와 가까운 것 등은 남부가 북부보다 더 발전한이유가 된다. 땅덩어리의 절반 정도인 잉글랜드에 인구의 84퍼센트 - P171

가 모여 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스코틀랜드의 경우도 인구와 산업대다수가 잉글랜드 국경과 가까운 남부에 몰려 있다. 스코틀랜드의인구를 전부 합쳐도 잉글랜드의 5천6백만 명에 한참 못 미치는 550만 명에 불과하며 웨일스는 3백만 명, 북아일랜드는 2백만 명을 밑돈다. 잉글랜드 남부는 런던의 주요 기차역과 히스로 공항, 개트윅 공항을 경유하는 국내외 철도와 항공 여행의 허브이기도 하다. 또 가장 붐비는 항만들도 이곳에 있고 영불해협 터널도 이곳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남동부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런던은 사방팔방으로 뻗은 고속도로망의 허브이기도 하다. 수도 런던은 영국 의회를 비롯해금융 분야의 많은 대기업 본사를 유치하고 있는 등 세계 금융의 중심역할을 한다. 한마디로 이 나라는 현대화된 나라다. 이 나라가 이 같은 수준에 도달하는 데는 오랜 시간과 그만큼 많은 <피>가 필요했다. - P172

설상가상으로 스코틀랜드는 제국주의를 도모하다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1698년 다섯 척으로 구성된 함대가 파나마에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스코틀랜드를 출발했다. 당시 열렬한 국민적 호응에 힘입어 국민 모금으로 마련한 원정길이었다. 하지만 파나마에 정착한 수백 명 중에 살아남은 이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많은이들이 질병으로 사망했고 결국 스코틀랜드는 식민지 사업을 접어야했다. 나중에 스페인 해군이 이곳을 점령하게 된다. 애초에는 파나마식민지가 스코틀랜드를 부자로 만들어 줘서 스페인, 포르투갈 잉글랜드에 견줄 수 있는 국력을 키울 수 있게끔 하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는커녕 국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독립의 불씨마저꺼버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 안타까운 사연의 흔적은 현재 파나마의 지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지도에서 푼타 에스코세스(Punta Escocés, 스코티시 포인트)를 찾아보라.
이 잘못된 모험에 들어간 비용을 두고 역사가들마다 의견은 다르지만 스코틀랜드는 적어도 국부의 5분의 1은 잃었을 거라고 추정된다. - P180

그래서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와 후속 협정을 맺으면서 그들이 빚을 갚을 수 있게 재정 지원을 해주기로 했다. 양국 의회에서 이 협정안이 통과됐고이로써 이 섬나라는 역사상 처음으로 단일 정부를 갖기에 이른다.
이어지는 두 세기 동안 브리튼섬의 힘이 최정점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우연에 기인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전에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모두 서로의 국경을 감시하기 위해 상비군에게 엄청난 국방비를 투입했다. 하지만 이제 그 돈은 유럽 본토의 침공에 대비하고 제국의 확장을 위한 자금으로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더 많은 병력을 모을 수 있게 되었고 내부를 살피기 위해 소요되던 자원과에너지, 시간도 외부로 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영국인들에게 외부란, 바로 세계 world를 의미했다. - P181

나폴레옹은 영국에게는 소름 끼치는 악몽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는 유럽 대륙을 지배하고 있었고 프랑스가 주도하는 정치,경제, 군사 시스템을 유럽에 도입할 계획을 품고 있었다. 그렇게 모은 힘을 쓴다면 영국을 거의 굴복시키거나 적어도 프랑스의 뜻대로 할 수 있을거라 보았다. 아직 침공이라는 직접적인 위협이 시작되기 전이었지만 영국으로서는 이제 전쟁은 선택이 아니라 불가항력이었다.
당시의 침략과 방어계획 모두에서 지리는 제2차 세계대전 초반과현저하게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해협을 건너 프랑스 군대를 영국으로 실어나를 대형 선박들이 파리 교외 불로뉴의 해안선 양쪽에 집결했다. 나폴레옹의 계획은 일단 시어네스와 채텀(둘 다 켄트주)에 상륙해서 곧장 진격해 나흘 안에 런던을 접수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영국군과 민병대는 켄트 주와 서식스 주 주변 해안선을 따라 새로 지은요새 뒤에 배치해 있었다. 당시에 설치된 포좌와 요새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 하지만 막상 침공은 무산되었고, 나폴레옹은 그대로 워털루로 갔고, 유럽군들은 기진맥진했으며, 홀가분해진 영국은 자기네 제국 건설에 다시금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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