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의 힘2]
첫번째 챕터인 <오스트레일리아, 지리적 위치와 면적이강점이자 약점이 된다>를 읽는데 지금 우리는? 지금 우리의 외교는? 씁쓸하게도 물음이 많아진다. 우리는 뒤로 가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지리적 위치와 면적이강점이자 약점이 된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아무데도 아닌 곳의 한복판에 있다가, 매우 중요한 어딘가가 되더니, 이제는 중심 무대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른바 <다운 언더down under> <유럽에서 보면 아래쪽에 있다는 의미로 여기서는 오스트레일리아를 뜻함)라는 땅은 섬이다. 하지만 보통 섬이 아니다. 이 섬은 무엇보다 엄청나게 크다. 얼마나 큰지 무성한 아열대 우림지대와 타는 듯이 뜨거운 사막지대, 완만한 사바나 지대와 눈 덮인산맥까지 품고 있을 정도다. 동쪽의 브리즈번에서 시작해 서쪽의 퍼스까지 운전해 간다면 이 나라를 횡단하는 셈인데 그 거리가 무려 런던에서 베이루트까지, 즉 프랑스와 벨기에,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세르비아, 불가리아, 터키, 시리아 모두를 경유해 가는 거리에 버금간다.
아무데도 아닌 곳의 중심에 있다 보니 브리즈번에서 태평양 너머 - P22

북동쪽을 바라보면 미국은 1만 1천5백킬로미터, 남아메리카는 동쪽으로 1만 3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아프리카는 퍼스에서 서쪽으로인도양을 8천 킬로미터나 건너야 도달한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이웃이라는 뉴질랜드조차 남동쪽으로 2천킬로미터 떨어져 있는데, 여기서 남극 대륙에 도달하려면 5천 킬로미터의 물길을 더 가야 한다. 하지만 지정학적인 측면에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진면목을 보려면 북쪽을 바라봐야 한다. 엄청나게 넓은 영토를 가진 이 나라는 서구 지향적이며 발전된 민주주의를 이뤄왔다. 그리고 그 위에는 바로 지구상에서 군사적, 경제적으로 가장 강력한 독재 국가라 할 중국이 있다. 이모두를 종합해 볼 때 하나의 국가이면서 대륙이기도 한 오스트레일리아를 인도-태평양 지역의 중심에 위치한 21세기 경제 강국이라고이해할 수 있다. - P23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는 것은 많은 도전을 의미한다. 먼저 섬이 되고 인간이 도착하기 전까지는(대략 6만 년 전) 이곳만의 독특한 생태계가 번성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것을 고려하면 그토록 물리고,
찔리고, 쏘이고, 독 공격을 받았을 텐데도 인간들이 출현해서 3만년내에 대륙 전체로 퍼져나갔다는 점은 놀라울 따름이다.
그보다 더 어려웠던 도전은 땅과 기후일 것이다. 이곳 지형의 대부분은 넓고, 평평하고, 몹시 건조한 평야지대인데 그 중 해발 6백 미터이상은 6퍼센트에 불과하다. 대륙으로서 오스트레일리아는 사막부터열대우림, 눈 덮인 산에 이르기까지 극도로 다양한 기후와 지형을 보여준다. 하지만 국토의 70퍼센트를 차지하는 대부분은 이른바 아웃백Outback 이라 알려진,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이다.  - P25

천 년 이상의 세월 동안 인간이 행동에 옮길 때마다 이곳의 지리는 무소불위의 힘을 휘둘렀다. 원주민들이 아웃백에서 워크어바웃(walkabout, 아웃백에서 혼자 지내도록 하는 일종의 통과의례 의식을 치르던 시절에 유럽에서 온 정착민들은 주로 해안 쪽으로 모였다. 그 현상은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어서 이 나라의 인구 분포는 동부 해안의중간 지점에 있는 브리즈번에서 시작해서 초승달 형태를 띠고 있다.
즉 시드니, 캔버라, 멜버른을 거쳐 남쪽 해안의 애들레이드로 내려가면서 해안을 빙 두르고 있는 모습이다. 서쪽으로 향하는 초승달 모양을 따라 교외와 위성도시들이 형성되는데, 산맥을 넘고 내륙으로 320킬로미터까지 확장되는 등 머나먼 지역으로 깊게 들어갈수록 인구 분포도도 점차 옅어진다. 서부 해안에는 퍼스가 자리 잡고 있고 북쪽으로 올라가면 다윈(노던준주의 주도)이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사람들은 해안 지역에 몰려 산다. 아무래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P26

 조지프 뱅크스 경의 일기. 1768년부터 1771년까지 엔데버호의 첫번째 여행에동반하다」라는 글에서 쿡의 수석 과학 장교인 조지프 뱅크스는 문명의 충돌과 그들과의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숙고하고 있다.
"그 사람들이 여기 살고 있다. 나는 그들이 거의 행복하다고 말할수 있겠다. 아주 작은 것에도, 아니 아무것도 없는데도 만족하는 사람들……. 부자가 되고 싶어 안달하지도 않고, 심지어 유럽인들이 필수불가결하다고 말하는 것들이 없어도……. 그들을 보면 인간이라는존재가 얼마나 적은 것을 바랄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우리 유럽인들은 이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믿기 어려우리만치 너무도 많은 것을 점점 더 바라고 있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이 만남이 훗날 뱅크스가 영국이 보터니만을 죄수들의 유형지로 탈바꿈하는 것을 막게 해준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당시 영국 감옥의 끔찍한 과밀화를 해소할 수 있는 데다 범법자들이 절대로돌아오지 못할 곳에 그들을 데려다 놓는다는 일거양득의 생각이 깔려 있었다. 또 제국의 중심부에서 1만 7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영국의 깃발을 꽂는다는 전략적 함의 또한 고려됐을 것이다. - P31

시드니 주변으로 정착촌이 자리 잡자 멜버른 브리즈번, 태즈메이니아 등지의 정착촌도 성장해 갔다. 이것이 훗날 개척전쟁(FrontierWars, 1788-1934년)으로 알려진 과정이다. 역사가들 사이에선 그 과정에서 벌어진 폭력의 수위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략 2천 명의식민지 주민들과 그보다 몇 배 많은 원주민이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특히 원주민들은 대량 학살을 당했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아무런 권리도 없는 존재로 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실제로 원주민들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은 식민지 주민들이 많았다.
이러한 문화 파괴 행위는 일찍이 1856년에 발표된 한 글에서도 또렷이 드러난다. 당시 저널리스트인 에드워드 윌슨은 멜버른의 <아르고스Argus》라는 신문에 다음과 같은 섬뜩하기 짝이 없는 글을 실었다.


20년도 채 못 돼 우리는 지구상에서 그들을 거의 쓸어내 버렸다. 우리는 개들에게 하듯 그들에게 총질을 퍼부었으며…… 전체 부족들을극심한 죽음의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우리는 그들을 술독에 빠뜨리고, 질병을 퍼뜨려서 성인들의 뼈를 썩게 하고, 그들의 아이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슬픔과 고통을 겪게 했다. 우리는 그들을 그들 땅에서 쫓아냈으며 머지않아 전멸될 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이러한 살벌한 장면은 19세기와 20세기 내내 진행되었다. 노골적인 학살이 멈춘 뒤에도 한참이나 이어졌다.  - P33

1965년에 민권운동가인 페이스 벤들러는 이렇게 일침을 놓았다.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이라면 키우는 개나 고양이를 등록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정작 원주민들의 수가 얼마인지는 모르고 있다."
전 국민의 93퍼센트가 참여한 국민투표안은 90퍼센트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비록 단기적인 실질적 효과는 제한적이었지만이 투표를 하나의 전환점으로 보는 시각은 많다. 이것을 통해 평등을확대하고자 하는 국민적 열망이 드러난 것이다. 비록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는 원주민들의 기나긴 투쟁의 여정이 뒤에 남아 있었다 해도 말이다. 원주민 남성과 여성은 대학을 졸업하고 중산층에 편입되는 등 어느 모로 봐도 현대 오스트레일리아 국민의 삶에 어울리는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수명은 국민전체 평균에 못 미치고, 만성질환이나 유아 사망률, 수감률은 평균을 웃돈다. 또 일부 원주민 공동체에서는 1970년대부터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하면서 가중된 소외감에 따른 심리적 문제와 더불어 실업과 알코올 중독, 질병 등이 만연하고 있다. - P34

에어즈 록이라고 알려진 녹빛 바위산의 명칭이 1990년대에 에어즈록/울루루Ayers Rock/Uluru로 바뀌었다. 이곳을 성스럽게 여겼던 아나구족이 원래 부르던 이름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다가 2002년에는 이 이름도 아예 울루루/에어즈 록으로 부르기로 했다. 2008년에는 2백 년이 넘는 대대적인 파괴, 탄압과 방치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면서 원주민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던 잔학 행위에 대해 케빈 러드 총리가 공식적인 사과를 했다.
원주민 인구는 온갖 탄압과 파괴 행위에도 불구하고 20세기를 지나오면서 오히려 증가했다. 1920년대에 6만여 명으로까지 줄었던 그인구는 퀸즐랜드, 뉴사우스웨일스,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와 노던 준주에 주로 거주하는 원주민들과 민족학적으로 다른 토레스 해협 (오스트레일리아 대륙과 뉴기니섬 사이의 해협의 섬 주민들까지 합쳐 현재는 80여만 명으로까지 늘었다. 그러나 수백 가지나 되었던 원주민 언어 대다수는 사라졌고 그나마 남아 있는 언어 중 적어도 한 가지를 말할 수있는 사람은 5만 명도 넘지 않는다. - P35

사실 이 현상은 거슬러 올라가면 1901년, 아니 훨씬 이전인 1788년부터 시작된 기나긴 여정의 결과다. 그렇지만 이는 비단 시간에 관한문제가 아니다. 2019년 케빈 러드 전 총리의 연설은 아직도 인종차별과 불평등이 남아 있는 나라 중 하나지만 이곳에서 불고 있는 변화의바람을 압축해서 보여주었다.
"우리가 오스트레일리아라는 국가 정체성을 규정할 때는 민주주의사회라는 이상과 제도와 관례에 뿌리를 두어야지 인종적인 구성에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주노동자들과 난민을 포함한 외부인들에게 오스트레일리아는 여전히 매력적인 종착지로 남아 있다. 너무 인기가 많다 보니 어떻게 해서라도 이 나라로 가고 싶은 이들에게 때론 좌절을 안겨주기도 한다.
금세기에 들어서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불법 이민자들에게 철퇴를가하는 가혹한 법들을 잇달아 제정했다. - P41

전쟁은 오스트레일리아도 비껴가지 않았다. 1942년 2월 19일, 10주2전에 진주만을 공격했던 것과 동일한 일본 항공모함 함대 소속 전투기들이 다윈의 연합군 진지에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그보다 한 달전에 일본군은 현재 파푸아뉴기니와 인도네시아 일부를 아우르는뉴기니를 침공한 뒤 그 넓은 섬의 북부를 속전속결로 장악했다. 오스트레일리아 바로 위에 있는 이 광활한 땅덩어리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다. 그래서 이 섬이 넘어갔다는 것은 그곳이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한 공격 또는 봉쇄를 위한 전초기지로 이용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 파푸아 뉴기니의 수도인 포트모르즈비로 상륙한다는 일본의 수륙양용 계획은 코럴해 전투Battle of Coral Sea‘에서 입은 피해로 좌절됐다. 이로써 연합군을 겨냥한 일본군의 계획은 수정됐고 맥아더 장군은 뉴기니를 발판으로 삼아 향후 일본을 패배로 몰고 가는 군사 작전의 일부가 된 필리핀 수복작전을 펼쳤다.
그때 이후로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의 관계는 영국과 맺었던 관계와 비슷한 양상을 띠어갔다. - P49

오스트레일리아는 금세기 중반까지 미국이 중국보다 방위비에 더많은 투자를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냉전시대와 현재는 엄격한 차이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요컨대 과거 저물어 가는 소비에트연방은 경제적 측면에서 미국에 크게 뒤처져 있었고 결국은 군비 경쟁에서도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현재 중국은 떠오르는 강국으로 늦어도 금세기 중반에는 GDP가 미국을 추월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사안들에 관한 미국의 입장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중국 선택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리는 오스트레일리아와 중국이 상대적으로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지도상으로 보면 동, 서, 남쪽이 큰 대륙과 동떨어져 있다. 그런데북쪽을 올려다보면 중국이 보이다 보니 심리적으로 이 두 나라를 한꺼번에 묶게 된다. 그런데 우리 대다수가 이용하는 고전적인 지도인메르카토르식 지도는 평면 위에 곡선으로 휘어진 거리를 표현함으로써 우리의 시각을 왜곡시킨다.  - P51

중국에 대해서라면 오스트레일리아는 경제적 이해, 방위 전략, 그리고 외교 사이에서 힘겨운 줄타기를 해야 한다. 가끔 외교상의 온도차에 따라 그 투자 수위가 들쭉날쭉하긴 해도 중국이 단연코 오스트레일리아의 최대 교역 상대국인 것은 분명하다. 최근 몇 년간 해마다대략 140만 명의 중국인이 오스트레일리아로 여행을 왔고 해외유학생의 30퍼센트를 중국인 학생들이 차지하고 있다. 중국은 오스트레일리아 수출 농산품의 3분의 1을 사들이는데 여기에는 소고기 수출량의 18퍼센트, 보리의 절반이 포함된다. 또한 중국은 철광석, 천연가스, 석탄, 금의 주요 고객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지역에 대한 중국의 보다 큰 관심사는 영유권 주장과 영향력 확장이어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이해와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 P52

수도그것이 중국에 무슨 이득이 되느냐고? 영향력은 접근권과 같다. 중국이 바라는 것은 어업 수역 접근권, 자국의 함대를 위한 항구들, 그리고 해저 채굴 가능성이다. 그런데 여기서 자주 간과되는 다른 무엇이 있는데 바로 유엔과 다른 국제기구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곳나라들의 투표권이다. 중국은 다수의 아프리카 국가들을 성공적으로포섭해서 타이완을 국가로 인정하지 못하게 하더니 이제는 태평양에서도 같은 시도를 하고 있다. 이런 배경에서 2019년,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의 강력한 로비에도 불구하고 키리바시와 솔로몬 제도가 타이완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중국과 수교한 일이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태평양 전진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로서는 신중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다. 태평양의 섬 주민들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식민 역사를 통렬히 인식하고 있으며 약간의 온정주의적인 기미만 보여도 의혹의 눈길로 바라본다. 따라서 바누아투같은 섬나라들을 그들이 현재 선호하듯 <작은 섬나라>라기보다는 넓고 배타적인 해상 수역을 바탕으로 한 <대양 국가>로 인정해 주는 것이 도움이 된다. 해상 수역을 포함하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이 지역은 지구 표면의 15퍼센트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55

중국의 기술력과 힘은 오스트레일리아를 넘어서고 있다. 중국 탄도미사일의 사정거리 또한 오스트레일리아를 에워싼 바다조차 소용없게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사이버 무기를 가지고 있다면 목표물에 타격을주기 위해 굳이 커다란 쇳덩어리를 날려 보낼 필요가 없다. 전력망, 상수도, 식량 공급망, 운송 시스템 등 주요 기반시설이 사이버 공격을 받으면 전 세계 어느 나라치고 심각한 피해를 입지 않을 나라가 없을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가 물리적인 원조를 받기엔 여전히 먼 거리에 있는 건 사실이지만 기술적으로 세계는 더욱 가까워지고 있다.
코로나19는 오스트레일리아로 하여금 적기 공급 경제 시스템의 한계를 여실히 깨닫게 해주었다. 다른 많은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오스트레일리아도 중국에 의존하면서 민감한 주요 인프라 사업에 중국의참여를 확대하던 중 5G 통신망 구축에서 화웨이를 퇴출시키는 등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 관계는 깨지기 쉽다.  - P56

지금까지 오스트레일리아는 최고 우방들과 밀착관계를 유지해 오고있다. 이 나라 외교관들은 80여 년 이상 다져온 관계를 지키기 위해늦은 시간까지도 미 의회, 국방부, CIA와 협업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미국, 영국, 뉴질랜드, 캐나다가 가입한 지구상에서 가장 효율적인 정보 수집망인 파이브 아이즈Five Eyes의 열성적인 회원국이기도 하다. 또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미국 정보 수집 시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시설 중 하나인 파인 갭Pine Gap 군사기지를 자국의 앨리스 스프링스 부근에 설치하도록 허락했다. 이곳은 정보 통신을 탐지하는 CIA위성들의 지상기지 역할을 하고, 아프가니스탄 같은 지역에서 작전을 펼치는 미군에게 전장 정보를 제공하고, 탄도미사일 발사를 탐지 - P58

하고, 미국과 일본의 미사일 방어 시스템을 지원하고, 새로 창설된 미우주군 사령부 내에서도 그 역할을 점점 확대해 가고 있다. 이 기지는미국으로서도 떠나고 싶은 곳이 아닐 것이고, 오스트레일리아에게도태평양 지역에 대한 미국의 헌신을 가늠하는 협상 카드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세상은 파이브 아이즈나 다른 방위시설들이 설치되던시대와는 현저히 달라졌다. 파이브 아이즈가 결성된 1956년 당시에는 미국의 서약은 굳건하다고 여겨졌고, 일본은 패망했으며, 중국은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때는 냉전의 중심축이 멀리 있었고 오스트레일리아의 방어 태세로는 그 지역에 위협이 임박하려면 향후 10년은내다봐야 할 것으로 추측했다. 현재는 분쟁 가능성을 알리는 사전 통고는 줄어들었지만 중국이 주요 주자로 올라서고 있다. 따라서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워싱턴과의 관계에 크게 투자하는 한편으로 약간의 부차적인 내기도 걸어보는 중이다. 물론 그 내기가 본질적인 것은아니고 단지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들이긴 하지만 말이다. - P59

일본과 오스트레일리아는 그와 같은 상황을 막기 위해 미국도 참여하고 있는 쿼드Quad 안에서 인도 해군과 협력하고 있다. 쿼드는 동맹체라기보다는 미국, 인도,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등 4개 나라의 해군이 태평양에서 협력하는 전략적 협의체라는 측면이 더 강하다. 대놓고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이들은 늘 해상 항로를 열어두고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하는 데 힘을 합치자는 명분에 뜻을 함께하고 있다. 이 구상은 2020년 팬데믹 상황에서 각 나라가 중국의 호전성에 주목하고있을 때 중국과 인도 국경에서 양측 군인들의 격렬한 육박전이 벌어지고 난 뒤 더욱 힘을 받았다. 인도는 자국의 해군력이 성장해 감에따라 인도-태평양 지역을 오스트레일리아와 함께 핵심적인 역할을하는 하나의 공간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고 있다. 현재는 뉴질랜드, 한국, 베트남까지 포괄해서 더욱 확장시킨 쿼드 플러스Quad Plus라는 구상까지 언급되는 상황이다. 물론 한국과 베트남은중국과의 지리적 인접성 때문에 조심스럽게 두드려 보고 있는 입장이다. - P60

이 나라는 쉽지 않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자칫 발을 잘못 디뎠다간 오늘날 지구상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심각한 파급력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터라 신중하게갈등 조정을 해야 한다. 일부 분석가들은 인도-태평양 지역을 아프리카 동부 해안부터 미국 서부 해안까지 뻗어 있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기도 한다. 구식으로 여겨졌던 이 관점이 세상이 변하면서 다시 뜨고있다. 현시점에서 일찌감치 이 관점을 주창한 사람은 일본의 전 총리아베 신조였다. 2007년 그는 인도 의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다라쉬코라는 무굴제국의 왕자가 쓴 두 바다의 합류The Confluence of the TwoSeas』 (1655년)라는 책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태평양과 인도양은 자유와 번영의 바다로서 역동적인 결합 관계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모두에게 투명하게 개방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서쪽으로는 인도양을, 동쪽으로는 태평양이라는 거대한 두 수역 사이에 자리 잡은 오스트레일리아는 북쪽으로는 중국이라는 거대 세력을 두고 있다. 현재로서는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도 경제적인 측면에서 베이징과 건설적인 대화를 이끌어가고 미국과는 방위를 비롯한여러 연결고리를 유지하는 데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겠지만, 어쨌거나 힘든 경기를 치러야 할 것임은 분명하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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