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대기업들까지 비정규직 제도를 임금을 삭감하고 노동조합을 파괴하는 데 악용했다. 사내하청, 파견 등의 명목으로 자기네회사 제품을 만드는 노동자들에 대한 직접고용을 거부했으며 계약해지 방식으로 비정규직의 노조설립을 막았다.
‘낙수효과 약화도 무시할 수 없다. 예전에는 대기업이 돈을 벌면 전후방 연관 효과 때문에 원료나 중간재, 부품을 공급하는 관련 산업과 협력업체도 함께 호황을 맞았다. 그러나 수출대기업들이 가격이더 저렴한 외국업체의 중간재와 부품을 직접 조달해 쓰는 ‘글로벌 소싱"global sourcing을 본격화하자 낙수효과가 급격히 약화되었다.
국민들은 2007년 12월 대선에서 기업인 출신 이명박 후보를 당선시킴으로써 정부에 대한 불만을 표출시켰다. 많은 국민이 7퍼센트 경제성장으로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와 세계 7위 경제대국을 만들겠다는 소위 747공약‘에 기대를 보냈다. 유권자들은 2012년에도 보수정권 연장을 선택했다. 여론조사 회사들이 발표한 통계를 보면 소득수준이 낮은 유권자일수록 보수정당 후보를 더 높은 비율로 지지했다.  - P168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경제성장률을 높여야 서민의경제생활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도 적지 않은 영향을미쳤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보수정권이 진보정권보다 경제성장을 더 잘 이루었다는 증거는 없으며, 경제성장률이 높아진다고 해서 저소득층의 소득이 향상되는 것도 아니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부자감세다. 이명박 대통령은 법인세와 소득세율을 인하함으로써 재임중 누적효과가 100조 원에 육박하는 감세를 했고 혜택은 대부분 대기업 주식 소유자와 고소득층의 몫이었다. 자영업자와 임금근로자 - P168

절반이 소득세 면세점보다 낮은 소득을 얻기 때문에 직접세 감세는중간소득 이하 계층의 국민들에게는 단 한 푼의 혜택도 주지 않는다.
대기업의 투자와 부유층의 소비를 유도한다는 목적을 내세웠지만 감세의 투자촉진 효과는 별로 없었다. 둘째는 부동산 거래 규제완화로단기적 경기부양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부동산 가격은 오히려 하락했다. 부동산 투기 시대의 거품이 덜 걷힌 상황에서는 규제완화로부동산 경기를 살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셋째는 4대강 사업이다. 초대형 토목공사를 벌려 경기를 부양하려 했지만 환경을 파괴하고 국가의 돈을 건설회사 금고로 이전시켰을 뿐 고용증대와 경기진작 효과는 거의 없었다. 넷째는 수출을 증진하기 위해 환율을 인위적으로 올린 정책이다. 이 정책은 미국의 리먼브러더스 파산사태와 맞물려 환율 폭등을 일으킴으로써 달러로 표시한 1인당 국민소득의 대폭 하락을 불렀다. 양극화의 원인이었던 경제력 집중과 오남용,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확산, 낙수효과 감소에 대해서는 사실상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 - P169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은 이명박 정부 경제정책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는 부자감세 정책을 철회하지 않았다. 박근혜정부가 처음 편성한 2014년도 정부 예산안에는 기초노령연금 수급액을 두 배로 올리는 것 이외에 복지지출을 크게 확대하는 정책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부는 철도 민영화 정지작업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수서발 KTX 자회사를 설립했고 비영리 의료법인이 영리 자회사를 세울 수 있게 하는 의료법 개정을 추진했다. 공공부문의 사유화 또는 시장화 정책을 강행한 것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위한 입법과 정책은 전무했고 재벌 경제력 집중의 폐해를 시정하는 경 - P169

제민주화 공약도 완전히 실종되었다. 2014년 들어서는 규제를 ‘암덩어리‘, ‘쳐부숴야 할 원수‘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규제철폐 작업을 시작했다. 결국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은 2007년 이명박 후보와의 후보경선 때 내세웠던 ‘줄푸세‘ 공약, 다시 말해서 세금을 줄이고 규제를 풀고 법질서를 세우는 것으로 귀착되었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에서 4대강 사업 하나를 빼면 곧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이 된다.
소득분배의 개선과 양극화 해소에 관한 한 특별한 기대를 할 수 있는근거는 찾을 수가 없다. - P170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는 개혁이 불가능한 전제정치에서 폭력 행사는 정당하다. 그런데 그 목적은 오직 폭력을 쓰지 않고도 개혁을 할 수 있는민주정치를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 민주 헌법과 민주주의적 방법을 파괴하려는 안팎의 공격에 대항하는 폭력 행사 역시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시민의 저항권을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L』 - P172

1984년 가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서 롯데 자이언츠 최동원 투수가다시는 볼 수 없을 전설을 썼다. 그는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일곱경기를 치르는 동안 선발과 중간계투, 마무리를 오가며 4승을 거두어팀을 정상에 올려놓았다. 나는 7차전 경기를 관악경찰서 유치장에서보았다. 그리고 그 겨울을 영등포구치소 0.7평짜리 독방에서 보냈다.
사실 나는 평생 누군가를 때린 일이 ‘거의‘ 없다. 초등학생 때 얄밉게구는 누이동생을 한 번 쥐어박은 것, 그리고 말년병장 시절 상습적으로 후임병을 괴롭힌 상병 하나를 슬리퍼로 때려본 게 전부다. 그런데도 그때 ‘폭력행위등처벌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죄로 옥살이를 했다. "하필이면 왜 이런 나라에 태어났단 말인가. 프랑스나 독일, 영국, 미국 같은 나라에 태어났다면 좋았을걸!" 그렇게 운명을 원망했다. 그 나라들이 부자나라여서가 아니라 자유로운 나라여서 그랬다.
우리 세대는 세상과 삶에 대한 생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고자랐다. 그래서인지 나는 무엇보다도 자유가 좋았다. - P173

민주주의 선진국도 원래부터 그런 나라였던 것은 아니다. 중세 유럽에는 엄격한 신분제도가 있었으며 교회와 귀족계급이 종교적 도그마와 무자비한 폭력으로 민중을 억압했다. 미국에는 19세기 중반까지 노예제도가 있었다.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피가 강물처럼 흐른 폭동, 반란, 혁명과 반혁명, 내전과 전쟁을 겪었다. 그들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거저 얻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앞에는 두 갈래 길이 있었다. 하나는 대한민국을 떠나 더 자유롭고 풍요로운 나라로 가서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찾는 길이었다.  - P173

민주화의 역사를 서술하는 데는 20세기의 대표적 자유주의 철학자 칼 포퍼Karl R.
Popper(1902~1994)의 정치이론을 활용할 수 있다. 포퍼는 어떤 국가가 민주주의 체제인지 전제정치 체제인지 가리는 기준을 하나로 정리했다. 다수 국민이 마음을 먹었을 때 정권을 평화적으로 교체할 수있으면 그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다. 그게 불가능한 나라는 독재국가다. 평화적 정권교체를 가능하게 하는 법률과 제도가 아예 없으면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런 제도가 있다고 해도 정상적으로 작동하지않아서 평화적 정권교체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면 그 역시 민주주의가아니다. - P177

칼 포퍼는 특정한 계획이나 목표에 입각해 사회 전체를 개조하는 사회혁명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는 인간의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았다. 사람은 현실조차 있는 그대로 인식할 능력이 없으며, 미래를 옳게 설계할 능력은 말할 나위도 없다. 특정한 목표 또는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사회 전체를 재조직하려는 혁명가들의 동기는 고상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청사진이 옳고 훌륭하다는 증거는 없다. 그들이 국가권력을 장악한 다음 그 청사진에 따라 재조직한 사회가 혁명 이전의 사회보다 확실히 훌륭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정의, 평등, 인간해방 등 혁명가들이 내거는 목표가 무엇이든, 어떤 추상적인 선을 실현하기 위해 폭력으로 사회를 재조직하는 혁명은 반드시 전체주의 독재로 귀결된다. 이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불행하게도 20세기 세계사는 포퍼가 옳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포퍼는 추상적인 선을 실현하려고 혁명을 하기보다는 현실의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기 위한 사회적 개혁과 개량에 집중하자고 호소했다. - P178

항쟁은.
전제정치를 타도하는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유일한 방법은 민중이저항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시민들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궐기해 경찰과 군대, 사법기관과 정보기관을 동원한 권력집단의 폭력을 힘으로 제압해야 정치혁명을 할 수 있다. 저항권을 행사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은 그 나라의 환경과 특성에 따라 달라진다. 대한민국은 국토가 좁고 인구가 도시에 밀집해 있다. 역사적·문화적 · 인종적 균질성이 매우 높다.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하고 겨울이 너무 추워서 난방시설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정글도 넓은 산악지역도 없다. 북쪽은철책으로 단절되었고 나머지는 바다로 가로막힌 사실상의 섬나라다.
중국과 베트남, 중남미와 달리 특정 지역을 근거지로 삼아 장기항전을 벌일 수 없다. 중동 국가들처럼 인접국가에 무장투쟁 기지를 만들수도 없다. 게다가 국가는 엄청난 규모의 상비군과 경찰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민중이 저항권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은 ‘연속적 • 동시다발적 · 전국적 도시봉기‘뿐이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유일한, 그리고 가장 적합한 저항권 행사 방식이었다. - P179

민주화운동가들이나 1980년대의 사회주의운동가들이 테러를 투쟁방법으로 쓰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남조선민족해방전선‘ (남민전) 활동가들은 자금을 마련하려고 동아건설 최원석 회장 집을 털려 했을 뿐 사람을 해치려고 하지는 않았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나 동의대학교 사태에서 무고한 시민과 경찰관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일부러 사람을 죽이려고 일으킨 사건은 아니었다. 독일과 일본 적군과가 벌인 시설파괴, 요인 암살, 항공기 납치와 같은 일은 우리 민주화운동 역사에서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전국적 · 동시다발적.
연속적 도시봉기를 일으키려면 대중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데 테러는이에 적합한 방법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가들은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였다. 스스로 목숨을 버림으로써 대의를 알리고대중의 관심과 각성을 일으키려 한 것이다. 테러와 암살이 아니라 분신과 투신을 선택한 투쟁방식은 세계사에서 매우 드문 일이었다. - P180

그렇게 목숨을 버린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이 역사와 인간에 대한예의일 것이다. 전태일 이후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대부분 분신과 투신이었고, 그들이 원한 것은 민주화,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 미국의 독재정권 지원 중단, 노동조합활동의 자유 보장, 임금과 근로조건개선 같은 것이었다. 직업은 주로 대학생과 노동자였다.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1970), 서울대 학생 김상진(1975)과 김태훈(1981), 운수노동자 박종만(1984), 경원대학생 송광영(1985), 구로공단 신흥정밀 노동자 박영진, 서울대 학생 이재호·김세진 · 이동수·박혜정(이상 1986), 서울교대 학생 박선영, 하남 신흥정밀노동자 표정두(이상1987), 성남 고려피혁 노동자 최윤범, 운수노동자 이문철(이상 1988), (주)통일 노동자 이영일, 노동운동가 최동(이상 1990), 전남대 학생 박 - P180

승희, 안동대 학생 김영균, 경원대 학생 천세용,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성남피혁 노동자 윤용하, 광주시민 이정순과 차태권, 보성고학생 김철수, 인천 운수노동자석광수(이상 1991) 등이 널리 알려진 사람들이다. 분신과 투신은 1986년과 1991년이 가장 많았다. 1986년은 전두환 정권의 인권탄압이 절정을 이룬 가운데 민주화운동이 폭발적으로 확산된 시기였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이 알려지면서 전두환과 미국에 대한 청년들의 분노가 크게 고조된 시기이기도 했다.
노태우 정부 중반기였던 1991년은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크게 허물어진 시기였다. 특히 명지대생 강경대 씨가 시위 도중 경찰에 타살당한 사건으로 학생들의 반정부투쟁이 격화하면서 ‘분신정국‘이라는말이 나올 정도로 많은 청년이 죽음으로 정부를 규탄했다. - P182

‘연속적 · 동시다발적 · 전국적 도시봉기‘로 민중이 저항권을 행사한 최초의 사례는 3·1운동이다. 3·1운동의 목적은 민주화가 아니라민족해방이었지만 그 방식은 민주화운동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것이었다. 두 번째 사례는 4·19혁명이다. 4·19는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한국적 전형典型이었다. 우리 국민은 ‘연속적 ·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통해 독재자를 축출하고 정권을 교체하는 최초의 역사적 위업을 이루었다. 세 번째 사례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이다. 승리한 6월 민주항쟁과 비극으로 끝난 광주민중항쟁의 차이는 딱 하나였다. 광주민중항쟁은 ‘국지적 도시봉기‘였다. 만약 그때 서울, 부산, 대구, 울산, 대전 등 다른 대도시 주민들이 용기를 내서 함께 궐기했 - P182

다면 신군부가 광주 한 곳에 그토록 많은 병력을 집중 투입해 시민들을 살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를 상세하게 알고 싶은 독자에게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가 엮은 『한국민주화운동사』를 권한다. 본문만 합쳐서 2,300쪽이나 되는 세 권짜리 책이다. 정부 수립 이후 노태우 정부까지, 넓은 의미에서 민주화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사건을 체계적으로 정리해두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면 마치 같은사건들이 무한 반복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것은 민주화운동이 수십년 동안 같은 ‘패턴‘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이 패턴을 최대한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알고리즘‘이 된다. - P183

또는 정부가 독재, 인권탄압, 부정부패를 저지른다. 야집권세력당과 재야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한다. 여기서인사들이재야인사란 정치인이 아닌 지식인, 종교인, 문화인 등 영향력 있는시민사회 리더를 가리킨다. 대중이 크게 호응하지 않으면 집권세력은 신경 쓰지 않고 같은 행태를 반복한다. 그러면 야당과 재야의 투생대열에 청년학생들이 가세한다. 교내에서 규탄선언문을 발표하고항의집회를 하다가 거리시위를 벌인다. 시민들이 여기에 합세하지않으면 정부는 적당히 진상을 은폐하고 몇몇 책임자를 처벌하는 시늉을 한다. 주동자를 구속하고 경찰을 동원해 시위를 진압한다. 그렇게 해서 투쟁이 끝나고 나면 집권세력은 또다시 독재와 부정부패를저지른다. 같은 패턴의 투쟁이 또 벌어진다. 이것이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호응을 불러일으킬 조짐이 보이면 공안당국이 나선다.  - P183

우리의 민주화 역사는 세 단계를 거쳤다. 4·19에서 10월 유신까지는 민주주의 맹아기라고 할 수 있다. 4·19혁명은 곧바로 5·16쿠데타와 박정희 정권이라는 북풍한설을 만났지만 죽지 않고조금씩 생명력을 키웠다. 10월 유신부터 6월 민주항쟁까지 유신체제9년과 제5공화국 7년은 성장기였다. 그 한가운데 광주민중항쟁이있었다. 이 시기 국민들은 민주화를 이루는 데 필요한 열망과 능력을축적했다. 시민의 힘으로 국가폭력을 이겨내지 않고는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세울 수 없었기 때문에 성장기의 민주화운동은 민주주의정치혁명을 지향할 수밖에 없었다. 6월민주항쟁 이후 현재까지는 민주주의 성숙기다. 우리는 두 차례 평화적 정권교체를 경험했다. 헌법정신에 맞게 국가를 운영하도록 권력집단의 행태를 개선했다. 시민들은 더 높은 수준에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
양한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 - P188

그런데 최근 우리의 민주주의가 과연 성숙해가고 있는지 의문이제기되고 있다. 역사가 거꾸로 돌아가고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개탄도 나온다. 그러나 2014년의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라는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민주주의가 거의 완성된 것처럼 보인 때도 있었다. 검열과 통제가 사라져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만개했고 대통령과 정부가 권력 행사를 절제했다.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어제 내린 눈처럼 새롭지도 귀하지도 않은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2008년 이후 이것은 착시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다. 우 - P188

리의 민주주의는 대통령과 정부, 집권세력이 헌법을 존중하려고 노력할 때만 제대로 작동한다.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것이다.
헌법을 무시하고 법치주의를 파괴하는 정부는 범죄조직과 비슷한 행동을 한다. 예컨대 국가정보원과 국군기무사령부, 국가보훈처등 여러 국가기관이 온라인 여론을 조작하는 방식으로 2012년 대통령 선거에 개입한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이것 자체도 문제지만더 심각한 것은 대통령과 집권당의 대응방식이었다. 대통령과 정부는 헌법정신을 파괴하고 법률을 위반한 국가기관들의 조직적 불법행위를 관련자들의 ‘개인적 일탈‘로 규정했다. 청와대와 국가정보원은원세훈 국정원장 등 대선 불법개입 주모자들에게 선거법 위반혐의를적용한 검찰총장을 내쫓으려고 ‘혼외아들‘로 지목한 어린이의 개인정보를 불법적으로 수집해 언론에 유포했다. 2014년에는 서울시 공무원이었던 탈북자 유우성 씨를 간첩으로 만들기 위해 국가정보원과검찰이 중국 정부의 공문서를 위조해 법원에 제출한 사실이 드러났다. 국정원장과 검찰총장은 아무 책임도 지지 않았고 몇몇 실무자들의 사표제출과 구속으로 끝내려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범죄조직의행태를 보인 것이다. - P189

집권세력의 반민주적 행태는 대통령과 여당 정치인들의 교만과 성숙하지 않은 시민의식을 반영한다.
이승만 정부 시절 어떤 외국 기자는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기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주한미군사령관을 지낸 미군 장성은 한국 국민이 강자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쥐떼와 같다고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쓰레기통이 아니었으며, 국민은 쥐떼가 아니었다. 세계인이 주시하는 가운데 우리는 보란 듯이 자유를 쟁취하고 민주주의를 세워냈다. 평화적 권력교체를 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고 그에 맞는 시민의식과 행동양식을발전시켰다. 우리의 민주화 역사는 자유에 대한 욕망과 꿈, 정의를 향한 열정과 헌신, 존엄을 지키기 위한 분투와 희생으로 점철된 고난과 영광의 여정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 길을 다 걷지 않았다. 어지러운 오늘의 현실은 민주화의 역사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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