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긴요. 딴 애들이 불쌍해서죠. 소설에 쓴 모든 문장이 그 ‘한방을 위해 쓰이는 것 같잖아요. 그 한순간을 들어올리기 위해 팔을 벌벌 떨며 벌을 서고 있는 것 같잖아요. 그렇다고 제가 뭐 소설계의 대장장이가 되어 모든 문장을 평평하게 두들겨 신scene들의평등을 꾀하겠다. 그런 건 아니고요. 그럴 주제도 못 되고요. 그저모든 자잘함을 지우며 홀로 우뚝 선 한순간을 지지하는 것을 찜찜해한다는 거죠."
"네가 못해서 그래. ‘결정적 순간‘을 만들어내는 건 소신이 아니라 능력의 문제야 할 줄 아는데 안 하는 거랑 못해서 못하는 건깔이 다르단다."
"언니."
동생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못해서 못하니까 좋은 거예요. 무능해서 귀한 거예요. 잘하는데 억지로 안 하는 사람은 반드시 흔적을 남겨요.  - P11

틈 없는 정신과 틈뿐인 몸의 간극을 메운 것은 무수한 규칙이었다. 천가방을 챙기지 않았다면 맨손으로 모든 물건을 옮겨야한다. 유리 용기가 없다면 생고기든 굴이든 가지고 있는 것으로싸야 한다-올드 셀린, 언니가 갈색 핏물이 밴 스카프를 펼치며말했다. 그래야 버릇을 고칠 수 있다.  - P13

두 사람이 손을 잡거나 살을 비비거나 땀방울을 빨아먹는 일 따위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서로를 못박힌 듯 강렬히 보는 눈빛에서 목경이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을 원감이, 깊은 이해가 일어나고 있었다.
"왜 그랬니?"
고모가 물었다.
"나도 해봤어요."
무경이 말했다.
"할 순 있지만 정말 하기 싫은 일. 고모의 그 일을, 내가 했어요"
고모는 만화에 나오는 사람처럼 웃었다. 그러더니 이런 소릴-목경은 억장이 무너졌다하는 게 아닌가.
"너는 내 딸이구나."
"고모, 나 열나요."
목경이 말했다. 그날이 목경이 고모에게 처음으로 존댓말을 쓴날이었다. - P39

"다른 괄호들은 어땠어요? 한 번에 다른 사람 꿈으로 갔어요?"
눈에 덮여 차선이 사라진 도로를 건너며 나는 바에게 물었다. 규희 다음으로 나는 세모를 생각하고 있었다. 일 년에 서너번, 계절이 바뀔 때나 안부를 묻던 친구보다 서로의 벗은 몸을 본 연인이 나을 듯했다. 싸우면 경쟁하듯 저주를 퍼붓던 애인이 아무래도 덜 미안하겠지. 좀 아프게 해도 괜찮은 사람, 서로에게 준상처보다 사랑했던 기억이 큰 사람, 그런 사람이라면 세모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 P79

이혼녀, 정체성이란 스스로 밝히는 게 아니라 말하지 않아도 알게 하는 것이라고, 안다는 것을 알아챌까 오히려 눈치보게 하는 강한 힘이라고 말하던 사람. 힘이 정체성이라니. 세렝게티에 사는 초식동물도 아니고 왜 세상을 온통 적으로 보느냐고 내가 물으면, 세모는 그 경계심이 자신의 유일한 방어수단이라고 했다. 잡아먹히기 전에 들이받을 수 있는 뿔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않겠느냐고 했다.
세모는 치과에 갔을까. 사랑니를 뽑았을까.
내가 꿈에 나타나면 세모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 P84

읽고 쓰는 것만이 제 고집과 고립을 이 불가능성을 잠시라도넘어서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병과 관련된 기억과 감정들은 여전히 저의 내면 한구석에 뿌리박고 있고 저는 자주 그리로 되돌아갑니다. 병에 걸린 몸의 고통과 고독을 잊지 않아야 또 아프게 되었을 때 조금이나마 태연한척할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야기를 읽는 동안 때때로 저는멀리 달아납니다. 저에게서 벗어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것이 순간의 착각일지라도, 결국 같은 문제로 돌아오게 되고 현실은 변하지 않을지라도, 여러 번 당겨서 느슨해진 고무줄처럼 제마음도 조금씩 고집스러운 탄력을 잃어가며 확장되고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혹시나 여러분도 잠시나마 기진과 진화를 따라 어둡고 축축한버섯 농장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셨다면, 이 이상한 이야기를 어리둥절한 채나마 끝까지 읽어주셨다면 정말 기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P140

-노출 관종이네. 가족들이 모르나? 알면 좀 말리지.

나는 곧바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이럴 줄 알았다. 가족까지욕먹게 할 줄 알았어!
오후 업무를 어떻게 해냈는지도 모르겠다. 퇴근 시각이 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처음엔 악플에 휘둘려 오근희를 끝까지 말리지 않은 나를 탓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지가 뭔데 남의 가정에 참견인가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 속이 터질 듯 갑갑해서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 편의점으로 뛰어들어가 캔맥주를 사서 원샷했다. 식도를 훑고 내려가는거칠고 시원한 느낌이 나를 다시 살게 했다.
지들이 뭔데 내 동생을 욕해?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수 있는 권한은 나한테밖에 없었다. - P176

언니, 관종이 되려면 관종으로 불리는 걸 참고 견뎌야 해. 그게얼마나 힘든 일인지 언니는 모르지? 한가지 더 언니가 모르는 게있어. 관종도 직업이 될 수 있다는 거야. 그걸 왜 모를까. 왜겠어.
언니가 꼰대라서 그런 거지.
언니, 나는 언니가 그리 많지 않은 나이에 꼰대가 되어버린 게슬퍼. 혹시 우리 가족이 언니를 그렇게 만든 걸까. 나는 맨날 부동산 얘기, 연금 얘기만 하는 언니가 차라리 대놓고 자긴 꼰대라고말했으면 좋겠어. 정색하면서 안 그런 척해서 얼마나 꼴 보기 싫은지 몰라. 언니는 자기가 지성인이라고 생각하지? 다른 사람을깎아내릴 때 쾌감을 느끼는 언니를 볼 때마다 참 속물적이라는생각이 들어. 그런 걸 스노비즘이라고 한대. 책에서 봤어. 나 북튜버 하면서 많이 똑똑해지고 있어. 사기를 당한 이유도 똑똑해져서인 것 같아. 옛날 같았으면 사기꾼이 설명하는 수익 구조가 알아듣기 힘들고 귀찮아서 하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지금은 진지하게 수익을 따져본다니까. 그래서 내가 사기를 당한 것 같아. - P184

그때 근희는 무슨생각을 했을까. 언니의 실패가 자신의 실패는 아닐 거라는 생각?
언니의 실패는 자신의 실패이기도 하다는 생각? 한 가지는 알 것같았다. 근희의 행진은 나의 행진과 명백히 다를 것이란 걸.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댓글을 달았다. 처음엔 악플러 못지않게지저분한 욕을 쓰다가, 너는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고 묻다가 너를 낳고 너희 엄마도 미역국을 드셨냐고 모욕하다가 결국 다 지우고 한참을 고심했다. 이걸 근희가 볼 수도 있다. 나는 뺨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콧물을 훌쩍이며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어쩐지 졌다는 심정으로, 나의 동생 근희와 관종 오근희를 바라보는 이 세상을 향해.

-나의 동생 많관부.

나의 동생,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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