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음식, 하면 가장 먼저 어떤 음식이 떠오르는가? 어떤사람은 피자를, 어떤 사람은 파스타를, 또 다른 사람은 치즈를 떠올릴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피자와 파스타는 이탈리아를 넘어서 서양요리를 대표하고 있다. 이탈리아뿐 아니라 영국 런던이나 미국 뉴욕그리고 일본 도쿄에 가도 유명한 이탈리아 레스토랑은 어디에나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분식집만큼이나 많은 피자집이골목골목마다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내 기억에 파스타와 피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는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내가 태어나 가장 처음 스파게티를 먹었던것은 서울 신촌의 어느 음식점에서였다. 1988년에 맥도널드햄버거가 처음 한국에 들어오고, 그 후 피자헛이 들어오더니 어느새미국의 새로운 음식 문화가 물밀듯이 들어오던 1980년대 말이었다.
당시 새로운 음식 문화를 접하는 수업료는 꽤 비쌌다. 그때 나는 젊은층 사이에서 핫플레이스였던 종로2가 종로서적에 갈 일이 있으면근처의 맥도널드에서 친구들과 햄버거를 먹었다. 시집이 한 권에 있2,000원이고, 구내식당의 장국밥이나 돈가스가 500원, 1,000원 하던시절이었다.  - P21

빅맥 세트는 4,000~5,000원이나 했다. 교내 매점의 햄버거가 250원인것에 견주면 엄청나게 비싼 가격이었다. 요즘 물가로 환산하면 요즘괜찮은 레스토랑에서 점심 세트 메뉴를 먹을 수 있는 20,000원정도다.
피자는 한술 더 떴다. 국내에 가장 먼저 들어온 피자 체인점인피자헛의 피자 한 판 가격이 당시 가격으로 무려 20,000원이었다.
심지어 샐러드 작은 그릇 한 접시가 2,000원이었는데 한 번밖에 담을수 없었다. 그래서 샐러드를 켜켜이 눌러 담는, 다소 점잖지 못한기술을 익히려 애쓰기도 했다. 피자를 맘껏 먹을 수 있게 된 것은1990년대 말 피자가 본격적으로 대중화되면서부터였다. - P22

피자도 사정은 비슷해서 한국인이 알고 있는 프랜차이즈피자와 이탈리아 피자는 많이 다르다.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는절대 미국의 파르메산 치즈처럼 공장에서 만든 치즈를 식사와 함께내놓지 않는다. 이는 대부분 미국에서 건너온 미국식 이탈리아음식의 특징이다. 이탈리아 북부의 레스토랑에서는 대부분 피자를팔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동네에나 피자만 파는 피체리아pizzeria가따로 있다. 피자 가격은 한 판에 10유로선으로 저렴하고푸짐하면서도 맛있다. 당연하게도 피체리아는 내가 이탈리아에서가장 많이 간 음식점 중 하나였다. 또 피자의 원조인 이탈리아 남부식피자는 도우가 두껍지 않다. 나폴리 피자협회AVPN에서는 피자 중심의두께가 3밀리미터를 넘으면 나폴리 피자라는 말을 붙일 수 없다고규정했다. 그래서 두툼한 도우를 쓰는 중부 지방의 피자는 피자가아니라 ‘핀자pinzza‘ 등 다른 이름을 쓴다. 나는 토스카나 Toscana의두툼한 핀자를 좋아하며 두툼한 라치오 Lazio식 피자도 좋아한다. - P24

그렇다면 이탈리아 남부의 음식인 스파게티와 피자는 어떻게이탈리아 음식을 대표하게 된 것일까? 이탈리아 남부는 오랫동안스페인의 식민지였기에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다. 1861년 이탈리아통일 후에도 이런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탈리아 남부 사람들은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미국을 포함해 아르헨티나, 브라질, 호주등의 신대륙으로 이민을 떠났다. 특히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많은이탈리아인이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미국에 건너간 이탈리아 이민자는 500만 명이 넘는데, 이 가운데80퍼센트는 남부 사람들이었다.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남부사람들의 음식인 피자와 스파게티가 이탈리아 음식의 전부인 것처럼알려지기 시작한 계기였다. 미국 문화권인 우리나라도 그중하나였다.
핀자에는 피자처럼 바질이 아니라 민트를 뿌려주는데 그 향과 맛이 매우 독특하다. - P26

이탈리아 파스타를 둘러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북부의 토마토 고기 소스인 라구 소스를 남부의 스파게티 면에버무려주면 큰일이 난다. 쫄면으로 만든 평양냉면처럼 경계를허무는 음식이 되는 것이다. 이탈리아에서는 이런 경계를 오가는음식을 ‘불경‘으로 간주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창의적‘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는 시도가 이탈리아에서는 완전히 금지되는 것이다.
그런 음식을 이탈리아인에게 대접하면 그 음식을 받아든 사람이접시를 요리사 얼굴에 집어던질지도 모른다. 파스타는 자국 음식을대하는 이탈리아인들의 보수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식재료다. - P26

이들의 보수성은 좀 더 근본적이다. 이들에게 ‘전통‘은 자신의정체성이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이탈리아인은 완전히 별개의지역에서 별개의 역사를 일구어왔다. 이들에게는 지금도 이탈리아의국가적 정체성보다 자기가 사는 지역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더강하다. 내 이탈리아 친구들은 "이탈리아는 월드컵 기간에만 한국가이고 그 외의 시간에는 20개의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어"라고말하기까지 했다. 이토록 지역을 중시하는 이탈리아인의 특징을증명해주는 게 바로 음식이다.
그중에서도 파스타는 이탈리아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열쇠다. 이탈리아의 파스타는 지역마다 완전히 개성이 다르다. 같은북부 지역이라도 피에몬테 주에서는 파스타 반죽에 계란을 넣고,
리구리아 Liguria 주에서는 계란을 넣지 않는다. 리구리아주의 파스타로는 - P27

바질 페스토를 이용한 파스타가 대표적인데, 대부분 건면인 링귀니를쓴다. 바질 페스토는 바질 잎과 구운 잣을 찧어 올리브 오일과양젖으로 만든 페코리노 치즈 가루에 버무린 소스다. 바질 특유의상큼한 향과 오일의 부드러움, 치즈와 잣의 고소함이 잘 어우러진소스로 파스타는 물론이고, 샐러드나 생선구이 등에도 어울린다.
리구리아주는 바질과 올리브의 대표적인 산지 가운데 하나다. 고도가 높은 편인 리구리아주의 올리브는 남부의 올리브에 비해열매는 작지만 풍미가 뛰어나다. 리구리아의 바질 역시 원산지보호"를 할 정도로 명성이 높다. 그런데 바질 페스토처럼 산뜻한소스의 파스타에는 계란으로 반죽한 생면보다는 건면이 더어울린다. 리구리아주가 북부인데도 생면을 잘 먹지 않은 이유는, 오래전부터 시칠리아Sicilia에서 밀을 수입해 건면을 만들어 주변지역에 판매해오던 그 지역의 상업적 전통 때문이다.
리구리아에서는 심지어 치즈도 북부의 치즈가 아니라 남부의페코리노 치즈를 수입해 먹었다. 이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파스타에는 저마다의 역사적 배경이 있다. - P28

볼로냐 역시 또 다른 파스타의 성지다. 시칠리아가 건면의 성지라면, 볼로냐는 생면 파스타의 성지다. 이탈리아의 생면 파스타는 기원전에트루리아인들이 최초로 만들었다고 전한다. 1세기 고대 로마의작가 아피키우스Apicius는 파스타에 고기와 생선을 곁들인 양념에 대한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러한 기록과는 별개로, 볼로네제 파스타는 전 세계에서즐겨먹는 토마토 고기 소스 파스타의 원조다. 현재 지구에서 가장많이 먹는 파스타가 바로 이 볼로네제 파스타다. 내가 대학 때 처음먹었던 미트볼 스파게티도 이 볼로네제 파스타의 미국적 해석이다.
볼로네제 bolognese란 ‘볼로냐의‘란 뜻의 이탈리아 형용사다. 영어 단어차이니즈나 재패니즈와 비슷하게 ‘-ese‘라는 접미사가 붙는다. 볼로네제 파스타는 아마 이탈리아의 파스타 이름 가운데 도시지명이 붙은 보기 드문 예일 것이다.
대부분의 파스타에는 각양각색인 파스타 면의 이름이 붙는다. 바질 페스토 파스타Pesto Genovese에 ‘제노바의‘란 뜻의 제노베제 Genovese가붙기는 하지만 볼로네제의 명성에 견주기는 어렵다.  - P29

볼로냐에서는 건면 파스타를 제외한 거의 모든 파스타를 만날수 있다. 파스타 가운데 가장 면적이 넓은 라자냐에서부터 볼로네제라구 소스와 어울리는 두꺼운 면인 탈리아텔레tagliatelle와 같은 다양한길이와 모양의 파스타를 파는 생면 파스타 레스토랑을 도시곳곳에서 접할 수 있다. 젊은이들이 많은 거리에는 키오스크 매장이있는가 하면, 클래식한 미슐랭 레스토랑에서도 단품 메뉴로 생면파스타를 즐길 수 있다.
볼로냐 파스타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맛도 맛이지만 가격이매우 합리적이라는 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피에몬테의 고유한생면 파스타인 타야린이나 수제 라비올리인 아뇰로티는 가격이 좀비싼 편이다. 반면 시칠리아의 스파게티는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노점이 아닌 레스토랑에서도 10유로도 안 되게 파는 파스타를심심찮게 볼 수 있다. 심지어 반 인분씩 팔기도 한다. 여행 중에 자주갔던, 시칠리아 팔레르모 중심가에 위치한 어느 레스토랑 파스타작은 접시의 가격은 6유로였다(와인 반병은 5유로, 맘마미아! 저렴한가격임에도 엄청 맛있었다). - P32

내가 요리학교 인턴을 마치고 볼로냐와 시칠리아 딱 두 곳만을선택해서 각각 한 달씩 머문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시칠리아를 선택한 것은 우리 요리학교인 ICIF에 강의를 하러온셰프들이 이구동성으로 "이탈리아 요리를 배우려는 사람이라면시칠리아는 반드시 가봐야 한다"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들은우리에게 시칠리아를 거의 이탈리아 미식의 원류쯤으로 강조했다.
평양냉면을 먹으려면 서울의 냉면집이 아니라 평양 옥류관을 가봐야한다는 식이었다. 나중에 시칠리아에 가서야 그 이유를 깨달았다.
시칠리아는 이탈리아 거의 모든 음식의 고향이었다.
시칠리아는 이탈리아의 밀, 소금, 쌀의 고향이다. 또 오렌지,
아몬드, 피스타치오, 체리 같은 과일과 가지, 펜넬 같은 채소가시칠리아를 통해 이탈리아에 전달되었다. 다소 과장해서 말하자면,
시칠리아가 없었다면 오늘의 이탈리아 음식은 없었을 것이다.
시칠리아의 밀이 파스타가, 시칠리아의 쌀이 리소토가, 시칠리아의과일이 젤라토와 디저트가 됐다. 이탈리아인들이 왜 볼로냐를
‘미식의 수도‘라 부르고, 시칠리아를 ‘미식의 고향‘ 혹은 ‘미식의조국‘이라 칭하는지 알 수 있었다. - P34

볼로냐에서 특히 생면이 발달한 까닭은 넓은 평야를 끼고 있는자연환경 덕택이다. 볼로냐보다 더 북쪽에 위치한 리구리아주제노바와 베네토 Veneto주 베네치아에서는 건면을 주로 먹은 반면에, 볼로냐에서는 생면을 먹었다. 제노바와 베네치아가 각각 시칠리아와 풀리아, 동유럽의 경질밀로 만든 스파게티나 링귀니를 먹었던 반면, 볼로냐는 일반적인 밀에 계란 노른자를 넣어 만든 손칼국수를 먹은것이다. 볼로냐 사람들은 왜 이렇게 생면을 고집했을까?
볼로냐 사람들이 먹는 생면 파스타를 탈리아텔레라고 부른다.
탈리아는 ‘자르다‘라는 뜻의 동사 ‘탈리에레tagliere‘에서 왔다.
우리말에도 비슷한 단어가 있다. 칼과 국수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칼국수‘다. 여기에 사람 손으로 만들었다는 뜻의 ‘손-‘이 붙으면 ‘손칼국수‘가 된다. 이탈리아의 손칼국수 면이라 할 수 있는 게 바로 탈리아텔레다. - P39

볼로네제 파스타 외에도 볼로냐 사람들이 자주 먹는 파스타가 있다.
관광객들보다는 볼로냐 사람들이 더 즐기는 로컬 음식이라고 해야할 듯하다. 관광객이 뜸한 볼로냐 주택가나 대학가에 들어서면볼로네제 파스타 가게는 찾아볼 수 없고 그 대신 무수히 많은토르텔리니 가게가 나타난다. 볼로냐는 손가락 마디 하나만 한 작은만두, 토르텔리니의 성지이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라비올리는 이탈리아 만두를 총칭하는말이다. 이 중에 토르텔리가 있는데 보통 네모나게 만드는 북부식라비올리를 가리킨다. 토르텔리 가운데에서도 조금 큰 만두 형태로빚는 것을 ‘토르텔로니‘라고 하고, 아주 작게 만드는 만두를
‘토르텔리니‘라고 한다. 따라서 레스토랑에 가서 주문할 때에는 어떤 것을 주문할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 P45

나는 해외여행을 다닐 때 늘 말린 다시마를 가방 속에 가지고다닌다. 언제든 한식을 손쉽게 해먹기 위해서다. 다시마의 감칠맛을내는 아미노산은 소고기의 감칠맛을 내는 아미노산과 비슷하다.
말린 다시마는 부피도 많이 차지하지 않으니 유용하다. 타지에서한국식 국물이 간절할 때 다시마와 파를 넣고 간단히 계란탕만끓여도 충분하다. 어느 날엔가는 이렇게 아끼던 다시마에 양파와당근, 샐러리 등을 넣고 간단히 채수를 내어, 삶은 토르텔리니나토르텔로니를 넣고 만둣국처럼 끓여먹기도 했다. 이 레시피는한국의 사찰 요리 레시피를 변주한 것이다. 사찰에서는 떡국을 끓일때 다시마와 표고버섯 육수를 사용한다. - P49

실제로 볼로냐와 모데나는 특이한 동네다. 이 지역프로슈토prosciutto와 경성 치즈가 이탈리아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인기 있는 농산물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지역에는 이런 독특한 특산품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세계에서 가장비싼 식초 중의 하나로 꼽히는 발사믹이다.
나는 발사믹 식초의 고향인 모데나에 가서 식초 박물관과거기에 달린 매장을 돌아봤다. 이곳에 가면 5년, 10년 숙성 식초는물론이고, 50년, 100년 숙성된 발사믹 식초도 있다. 10년이 넘은발사믹은 그냥 먹어도 시큼한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이미식초가 아니라 풍미 진한 음료에 가깝다. 개인적으로는 25년 된식초가 가장 맛있었는데, 식초의 향도, 설탕의 맛도 느껴지지 않는완숙미가 있었다. 와인을 응축해 놓은 것 같은 세월의 맛이었다.
모데나에서는 이 발사믹을 별다른 양념 없이 고기와 음식에는 물론디저트 위에도 무심하게 뿌려먹는다. - P59

한편 볼로냐를 비롯해 많은 에밀리아로마냐의 도시에서는여전히 고집스럽게 손으로 생면을 만들어 먹는다. 그리고 자신들의소스인 볼로네제 라구 소스는 기계로 뽑은 스파게티에 얹어먹어서는안 된다며 열을 올린다. 나는 볼로냐 사람들의 이 고집스러운
‘면부심‘이 재미있다. 볼로냐가 미식의 수도라는 칭호를 얻은 것은,
그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특이하게도볼로냐는 음식과 관련해서는 처음부터 끝을 생각했던 것 같다.
프로슈토도, 치즈도, 파스타도 그렇다. 서양 요리와 음식 문화의정점인 와인에 있어서도 그렇다. 볼로냐는 언제나 이탈리아 음식의시작과 끝에 서 있으려 한다. 그래서 볼로냐는 ‘뚱보의 도시‘라는별명과 ‘현자의 도시‘라는 별명을 동시에 차지했나 보다. - P61

이탈리아 북부 에밀리아로마냐의 중심 도시인 볼로냐 중앙역첸트랄레에 내리면 두 가지에 놀란다. 먼저 역사의 규모에 놀란다.
생각보다 작아서다. 볼로냐는 우리나라의 경부선과 호남선이갈라지는 대전과 같은 전통적인 교통의 요지다. 나폴리와 로마에서출발하여 밀라노, 토리노를 거쳐 프랑스로 뻗어나가는 철도 노선과,
베네토, 베네치아, 트리에스테를 거쳐 오스트리아와 동유럽으로가는 노선의 분기점이다. 역사적으로 이탈리아와 가장 빈번한전쟁과 교역을 해왔던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로 가는 갈림길이 바로볼로냐에서 시작된다. 프랑스와 스페인은 도시 국가로 분리되어있던 이탈리아의 지배권을 두고 중세 내내 전쟁을 벌였다. 이 지난한전쟁은 18세기까지 이어졌는데, 전쟁을 벌인 두 세력은 스페인이나헝가리 등의 동유럽에까지 걸쳐 넓은 영역을 장악했던 오스트리아의합스부르크 왕가와 프랑스를 지배했던 발루아 부르봉 왕가였다.
볼로냐는 이 두 국가의 왕가와 계속해서 전쟁을 벌여왔다. - P63

살루미는 사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음식인 피자나파스타보다 한 수 위다. 고대 로마 시대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그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지켜오고 있는 음식으로, 파스타나 피자가중세 이후 외국과 교류하던 중에 자연스레 탄생했던 것과는대조적이다. 파스타는 아랍에서, 피자는 대항해시대 이후 토마토가신대륙에서 들어온 뒤에 등장했다. 따라서 살루미는 세계에서인정받는 가장 오래된 이탈리아 음식의 대표 주자다.
멀쩡하던 이탈리아인들이 잠시 이성을 잃고 떠들게 만드는대화 주제가 있다. 하나는 축구이고, 다른 하나는 음식이다.
이탈리아인들은 음식에 대해서 정말 열정적으로 이야기한다. 왜그럴까? 이탈리아인들은 19세기 말까지 도시 국가에서 살아왔다.
우리나라처럼 1,000년 넘게 한 나라로 통일되어 살아온 게 아니다. - P84

그래서 "이탈리아는 도시가 시골이고 시골이 도시"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작은 소읍이라도 자기들만의 탄탄한 이야기와 역사를 지니고있다는 뜻이다. 이들 이야기의 첫 장은 거의 대부분 음식에서시작한다. 아무리 작은 동네라도 자기 동네만의 와인이 있고, 치즈가있고, 살루미가 있다. 뭐든지 서울식으로 통일해야 직성이 풀리는한국과는 퍽 다른 사고방식이다.
그래서 이탈리아인들은 음식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전통‘을강조하곤 한다. 내가 다녔던 ICIF에서나 현지 레스토랑에서 인턴을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는 전통이란 뜻의 ‘트라디지오네radizione‘
였다(두 번째로 많이 들었던 단어는 ‘빠삭빠삭하게‘라는 뜻의
‘크로칸테(croccante였다). 이들은 음식이 전통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큰일 나는 것처럼 군다.
이렇게 먹는 것에 유별난 이탈리아인들은 전통 햄도 유별나게만든다. 이들은 살루미를 만드는 돼지를 숲에 방목해서 적어도 2년동안 키운다. 그래야 육질이 더 맛있단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다른많은 나라에서 돼지를 6개월 정도 키운 후에 도축하는 것과는 사뭇다르다. 그만큼 가격도 비싸서 잘 만들어진 프로슈토 한 덩이는100만 원을 훌쩍 뛰어넘는다. - P85

이탈리아 햄은 생햄(프레스코)과 조리햄(코토)으로 나뉘는데, 보통생햄을 더 쳐준다. 이탈리아식 생햄에는 소금이나 향신료를제외하고는 인공적인 것을 가급적 첨가하지 않는다. 그게 전통이기때문이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편리와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햄을만들 때 밀가루도 넣고 인공 조미료에 발색제에 방부제까지 넣는다.
대량 생산을 하니 그만큼 가격도 저렴하다. 반면 이탈리아에서는아직까지도 고집스럽게 전통을 지켜서 만든다. 대신 가격이 비싼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동네가 이 제품을 칭찬하고 격려하며앞장서서 소비한다. 그리고 자기 동네 음식이 이만큼 독특하다는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긴다.
맥도날드가 자기 나라에 매장을 열자마자 그에 반대해서 ‘슬로푸드 운동‘을 한 것도 이탈리아인들이었다. 또 스타벅스가 가장늦게 들어온 나라 중 하나도 이탈리아다. 지금도 이탈리아 전역에서밀라노와 토리노 단 두 도시에만 스타벅스가 들어와 있다. 그래서내게 이탈리아 하면 떠오르는 추상명사는 ‘전통‘과 ‘지역‘이다. - P87

그는 수업에서 이탈리아 요리를 배우러 온 외국의젊은이들에게 "햄을 맛있게 만드는 비결은 숨겨진 제조 비법이아니라 돼지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먼저"라고 강조했다. 돼지를미국의 공장식 축산 방식으로 넓이가 1제곱미터도 채 되지 않는축사에 가둬놓고 유전자변형GMO 사료를 먹여 키울 경우, 소금만써서 자연 바람에 말리는 이탈리아 전통 프로슈토를 만들 수가없다는 그의 이야기는 큰 울림이 있었다. 레지노 대표는 학교에서강의를 했던 강사 가운데 가장 연장자였고, 가장 기억에 남는강사였다. 내가 수업을 마친 후 다가가서 개인적으로 사진을 찍자고청했던 사람은 주로 셰프가 아니라, 살루미 장인과 치즈 장인 그리고와인 소믈리에였다. 생각해보면 이탈리아에서 유학할 당시 나는요리법보다는 식재료 그 자체에 호기심을 더 가졌던 것 같다. - P89

완벽한 프로슈토를 만드는 데 필요한 3대 요소는 방목해서 키운 돼지뒷다리와 소금 그리고 풍부한 바람이다. 산맥과 평원을 모두 끼고있는 에밀리아 지역에는 돼지와 바람이 풍부하다(에밀리아로마냐주와함께 프로슈토가 유명한 프리울리 Friuli주 역시 알프스산맥과 아드리아해를끼고 있다. 둘을 비교해보면 프리울리주의 산 다니엘 프로슈토가 좀 더짜다). 이탈리아 반도의 서쪽에 위치한 데레니아해 (우리로 치면 서해에 해당하는 위치다)에서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이 아펜니노산맥과 부딪쳐 습기를 잃고 건조해진 뒤 에밀리아를 향해 분다. 이런 바람은에밀리아가 프로슈토의 중요한 산지가 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 P91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로냐 사람들은 다른 지역에서는 이미 대중화되어 많은 귀족과부자들이 가난한 자의 음식이라고 여기던 파스타를 좀 더 맛있게 만들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미식의 도시라는 볼로냐의 명성은 프로슈토를 얇게 썰 수 있는기계인 고기용 슬라이서가 볼로냐에서 세계 최초로 만들어지면서더욱 공고해졌다. 1873년 볼로냐의 젊은 엔지니어 루이지 주스티 LuigiGiusti가 고안한 이 기계는, 오직 숙련된 장인만이 할 수 있었던프로슈토를 얇게 저미는 일을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게 해주었다.
기계식 슬라이서 덕분에 종잇장처럼 얇게 썬 프로슈토와모르타델라를 꽃처럼 돌돌 말아서 접시를 화려하게 장식할 수 있게되었다. 그때부터 볼로냐의 식자재는 탄탄한 스토리와 독특한맛에다가 멋진 형식미까지 갖추게 된다. ‘볼로냐 사람들은 늘산해진미를 멋지게 차려놓고 먹는다‘는 시샘이 다른이탈리아인들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 P99

세계에서 토마토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나라는 어딜까? 토마토생산량 1위를 차지하는 국가는 의외로 중국이다.
유엔식량농업기구 FAO 통계자료를 보면 중국은 2017년 1,033만 톤의토마토를 생산했다. 이는 세계 전체 생산량의 20퍼센트에 이른다.
2, 3위도 다소 예상 밖인데, 인도와 나이지리아다. 이탈리아는 10위로세계 생산량의 불과 2.1 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토마토 하면 이탈리아가 떠오른다. 아마 이렇게생각하는 게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언젠가부터 ‘토마토=이탈리아‘
라는 불문율이 성립된 것이다. 이제는 이탈리아의 음식이 아니라 전세계인의 음식이 된 파스타와 피자 덕분이다. - P101

만들었다. 볼로냐 특유의 ‘볼로네제 소스‘가 비로소 탄생한 것이다.
볼로냐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랑하는 생면 파스타에 이 라구 소스를얹어서 볼로네제 파스타를 만들었다. 향신료와 설탕 범벅이던과시적인 음식이 볼로냐에서 비로소 미식의 음식으로 재탄생한것이다.
볼로냐와 나폴리의 토마토소스 대결은 어떻게 보면 사골국물로 만든 손칼국수와 멸치국수의 대결처럼 기호의 차이 때문에벌어진 큰 의미 없는 싸움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손칼국수와멸치국수 사이에서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것처럼, 이탈리아에서는그날의 날씨나 기분에 따라 골라먹으면 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서로 다른 맛을 자랑하는 북부의 파스타와 남부의 파스타는 전혀다른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맛도 매우 다르다. 이렇게 맛과역사가 다른 파스타가 미국으로 건너가 뒤섞이면서 문제가 시작된것이다 - P122

볼로냐, 아니 이탈리아에서는 정작 먹지 않는 미트볼스파게티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여겨지니 이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황당한 일일까. 사실 이탈리아에서는 스파게티같은 가는 면은 주로 해산물이나 바질 페스토처럼 가벼운 소스에 곁들여 먹었고, 주로 이탈리아 남부나 남부의 밀로 파스타를 만드는 해안 도시에서 주식으로 먹었다. 목축이 발달해 버터와 치즈가풍부한 이탈리아 북부는 눅진한 소스를 만들어 두께가 넓은 면에 비벼먹었다. 그들에게 파스타는 끼니를 때우는 용도가 아니라 명절이나 손님이 찾아왔을 때 내놓는 정성스러운 음식이었다.
이렇게 각 지역마다 파스타에 대한 역사와 기호가 다른데 그걸하나로 뭉뚱그려 제멋대로 바꾸어버리니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손칼국수와 멸치국수가 엄연히 다른 음식인 것처럼, 이탈리아인에게 파스타는 제각기 다른 역사와 맛을 지닌 존재다. - P122

이탈리아는 아마 세계에서 가장 음식과 관련해 ‘하면 안 된다‘는규제가 많은 나라다. 그중에 가장 강력한 원칙 중 하나가 볼로네제소스를 스파게티 면과 먹으면 안 된다는 거다. 볼로냐 사람뿐 아니라이탈리아인에게는 상식인 이야기다. "볼로네제 소스에 스파게티면을 쓰는 건 개인의 자유다"라고 이야기하는 이탈리아 정치인이있다면 적어도 에밀리아로마냐에서는 정치적으로 매장을 당할지도모른다. ‘근본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인신공격을 감내해야 할 수도있다. 이렇듯 이들에게 파스타는 이념보다 앞서는 정체성의 문제다.
- P123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볼로냐 사람들의 자부심 때문이아닐까 싶다. 고대 에트루리아인이 세운 도시였던 볼로냐는켈트족이 다스리면서 ‘볼로냐‘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켈트족의목축 기술을 전수받은 그들은 다시 게르만족의 새로운 유목 문화를흡수했다. 특히 그들은 롬바르디아인의 돼지 사육에 대한 지식을그대로 배워 프로슈토나 모르타델라 같은 새로운 살루메를만들어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치즈인 파르미지아노-레지아노도, 또 가장 독특하면서 가장 비싼 식초인 발사믹 식초도 이 지역의 작품이다. 이들이 잘 만드는 것에는 볼로냐와 모데나에서 생산하는슈퍼카 페라리, 람보르기니, 마세라티도 포함된다. 볼로냐를 포함한 에밀리아로마냐 사람들이 "우리는 필요하면 우리가 직접 만든다. 그리고 잘 만든다"라고 자신하는 이유다. - P125

이탈리아에서 토마토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주는 시칠리아다. 그다음으로는 캄파니아(주도는 나폴리), 라치오, 풀리아 순이다(2018년기준 유엔식량농업기구 통계). 이탈리아 중부의 라치오를 제외하고는전부 남부에 위치해 있다. 이탈리아인들은 1년에 1인당18.2킬로그램의 토마토를 먹는데, 유럽에서 1인당 토마토를 가장많이 먹는다. 아울러 이탈리아는 토마토 관련 소스를 생산해가공수출을 많이 하는데, 이탈리아의 토마토 관련 식품기업은대부분 볼로냐와 그 주변에 자리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토마토가공식품 회사는 미국의 ‘모닝스타Morning Star‘다. 2위, 3위는 중국기업이다. 중국과 미국의 ‘규모의 경제‘에 밀려 이탈리아 회사는 세계13위를 차지하고 있다. 콘세르베이탈리아ConserveItalia가이탈리아에서는 1위의 기업이다 - P126

콘세르베이탈리아는 볼로냐의 협동조합에서 시작한 기업이다.
‘콘세르베cconserve‘는 이탈리아어로 ‘보존‘이라는 뜻이다. 이협동조합은 1976년에 설립되었으며 약 1만 4,500 명의 회원을 둔51개 이상의 대형 협동조합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탈리아와 유럽각국에 12개의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2017년 기준으로 매출은 9억유로나 된다. 이탈리아 내에서 매출 2위인 카살라스코(롬바르디아),
3위인 무티(에밀리아로마냐)도 볼로냐 주변 지역의 기업이다.
카살라스코 역시 롬바르디아와 에밀리아로마냐의 접경 지역인크레모나에서 출발한 협동조합이다. 무티는 볼로냐 인근 파르마에서시작한 주식회사다.
이탈리아는 2015년 기준으로 유럽에서 협동조합에 고용된인구가 전체 생산가능인구에 대비해 가장 많을 정도로 협동조합이 - P126

발달되어 있다. 유럽 협동조합 가운데 매출이 가장 큰 상위 8개기업이 이탈리아 협동조합이며, 이 가운데 에밀리아로마냐가협동조합이 가장 발달한 곳이다. 볼로냐에 발달한 협동조합은볼로냐의 생활물가와 실업률을 낮추는 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전체실업률은 물론, 30퍼센트에 육박하는 이탈리아의 청년실업률이 가장낮은 곳도 볼로냐를 비롯한 에밀리아로마냐의 도시들이다. 더불어여성의 취업률도 가장 높다. 볼로냐에 가면 느낄 수 있는 이곳사람들의 친절함은 이런 경제적인 이유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볼로냐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넉넉한 풍경이었던 듯하다.
러시아의 작가 파벨 무라토프 Pavel Muratov, 1881~1950는 19세기 말《이탈리아의 이미지》라는 책에서 볼로냐를 이렇게 찬양했다.
"볼로냐는 복잡하지 않고 경쾌하며, 눈을 즐겁게 하는 가벼운무언가가 있다. 이곳 사람들의 마음에는 기쁨이 가득하고 신체는건강하다. 이곳은 기름진 곡창지대와 유명한 와인을 생산하는 포도밭으로 둘러싸여 있다. 풍성함과 다양함에서 볼로냐를 따라올 도시는 없다."
볼로냐에 가면 100년 전 러시아 작가가 느낀 감정이 과장이아니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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