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그 에세이는 『빼앗긴 자들』에 대한 에세이 모음집 ‘어슐러 K. 르 귄의 「빼앗긴 자들」에 나오는 새로운 유토피아 정치학」에 서문으로 쓴 글이었어요. 전 이 책에 실린 논의 대부분이 대단히 지적이고 전문적일 뿐만 아니라 친근하고, 아이디어만이 아니라 감정도 이용한다는 사실에 좀 놀랐어요.
저 역시 아이디어 자체에 대해 악감정은 없어요. 저도 결국엔지식인인 걸요. 하지만 아이디어가 교훈이 되거나, 독선이 되거나, 그냥 의견이 되면 성가시죠. 제가 맞서려고 애쓰던 건『빼앗긴 자들』에 대한 반응만이 아니에요. 그 작품이 유독 아이디어밖에 없는 것처럼 다뤄지긴 하지만, 제가 반대한 건 SF를 포함해 모든 문학을 지적으로만 분석하려 드는 경향이에요. 문학을 저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지?"라거나 "저자의 메시지는 뭘까?" 같은 질문으로 가르치는 경우가 많잖아요. (격분의 한숨을 내쉰다) 어떤 예술이든 다른 말로 바꿀 수 있는 언어적 사고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아요. 그 안에서 벌어지는다른 것도 비평에 포함해야만 해요. 어떤 소설이나 시도 분명한 한 가지 의미만으로 환원할 순 없어요. - P98

이런 사고방식은(디킨스는 그 점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다뤘어요)아이의 성장 전체에 손상을 입혀요. 상상력이란 우리의 정신이 작동하는 방식에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니까요. 상상력을 아끼거나 방해하거나 업신여기는 건 끔찍한 짓이고, 무엇에 대해서든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어리고 성장 중인 정신에는 특히 해로워요. 아이들은 상상하고, 상상과 실제를 구별하는 방법을 배워야 해요. 전 아이들이 대부분의 어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구별을 잘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아이들은 동화를 알아요. 그리고 거짓말도 알 때가 많아요. 어쨌든 이성과 상상, 둘 다 훈련이 필요하지요. 몸을 움직일 때처럼 이성과 상상도 운동을 해야 해요. 지금도 합리적인 사고는 어느정도 훈련하지만, 상상력은 미국의 교육에서 점점 설 자리를잃고 있어요. 이건 굉장히 무서운 일이에요. - P101

「사용 설명서」 중에서시인이 대사로 지명됩니다. 극작가가 대통령으로선출됩니다. 새로 나온 소설을 사려고 건설노동자들이 사무장들과 같이 줄을 섭니다. 어른들이 전사원숭이들, 애꾸눈 거인들, 그리고 풍차와 싸우는 미친 기사들의 이야기 속에서 길잡이와 지적인 도전을 찾습니다. 문해력은 끝이 아니라 시작으로 여겨집니다.
글쎄요, 어디 다른 나라라면 그럴지도 모르지요.
이 나라에서는 아닙니다. 미국에서 상상력이란 보통 TV가 고장 났을 때나 쓸모 있을지 모르는 뭔가로 간주되거든요. 시와 희곡은 실제 정치와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소설은 학생과 주부, 그리고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읽는 겁니다. 판타지는 어린아이와 모자란 사람들이나 보는 것이고요. 문해력이란 사용 설명서를 읽을 수 있다는 거랍니다! 저는상상력이 인류가 가진 가장 유용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마주 보는 엄지의 유용성을 넘어설 정도죠.
저는 엄지손가락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지만, 상상력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미국만은 아니에요. 유럽 문학도 포함이죠. 문제는 우리가 예전처럼 다른 동물들과 어울려 살지 않는다는 거예요. 지난200년간 관계가 엄청나게 달라졌죠. 예전에는 동물들에게서벗어날 수가 없었어요. 삶의 일부였고, 밭에서 함께 일하는동료로서나 식량 공급원으로서, 양털 공급원으로서 인간의복지에 꼭 필요한 존재였죠. 지금 우리는 그 모든 것을 까마득한 거리에 두고 얻어요. 지금은 다른 동물과 한방에 있지도못하는 사람들이 있죠. 100년 전이었다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을까. 전 정말 모르겠어요. 아마 그 상황을 어떻게든좋아하거나 아니면 참는 수밖에 없겠죠. 요새 아이들은 인간외에 다른 생물은 만져본 경험도 없이 성장해요. 우리가 소외된 건 당연하죠. 우린 지구상에 다른 생물이라곤 존재하지도않는다는 듯이 도시에 살 수 있어요. 사람들이 무관심해지고,
종 하나쯤은 멸종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놀랍지 않아요. 우린 계속 다른 존재를 접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아요.
전 동물을 다루는 문학과 어린이책 같은 문학이 그들과 최소한의 접촉이라도 하기 위한 창의적인 방법이라 생각해요. 그러니 아주 중요하고요. 그렇지만 나와 같은 의견을 가진 문학계 사람이 많진 않아요. 문학계 사람들은 동물을 다룬다면 감상적인 이야기일 거라고 추측해버리죠. 그리고 그 사람들은감상주의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나쁜 죄악이라고 생각해요. - P104

「책 속의 짐승」 중에서


왜 대부분의 아이와 많은 어른은 진짜 동물과 동물에 대한 이야기 양쪽에 반응하고, 우리의 지배 종교와 윤리들은 인간이 이용할 대상이라고만 보는 존재들에게 매혹되고 또 그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할까요. 산업사회에서는 예전처럼 우리와 일하지도 않고, 그저 우리 식량의 원재료나 우리에게 이득이 될과학 실험 대상, 동물원과 TV 속 자연 프로그램에서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진기한 존재들, 우리의 심리 건강을 개선하기 위해 두는 애완물일 뿐인데?
어쩌면 우리가 아이들에게 동물 이야기를 주고 동물에 대한 관심을 북돋아주는 건, 우리가 아이들을온전한 인간이 아니라 열등한 존재로, 정신적인 ‘원시‘인으로 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우린 애완동물과 동물원과 동물 이야기들을 어린이가어른으로, 배타적인 인류로 발전하는 길의 ‘자연‘스러운 단계로 보는 거죠. 지성도 없고 무력한 아기에서 시작해서 지적인 성숙과 지배의 영광을 획득하기까지 거쳐야 할 사다리쯤으로요. 존재의 대 사슬만물이 가장 낮은 무생물부터 가장 높은 신까지 계층적으로 연결되어질서를 이룬다는 개념이라는 계통 발생의 단계를 반복하

는 개체 발생이랄까요.
하지만 그 아이가 찾는 건 뭘까요. 아기 고양이를보고 흥분하는 아기, 「피터 래빗』을 또박또박 읽는여섯 살짜리 블랙 뷰티』를 읽으면서 우는 열두 살짜리라면? 문화 전체가 부정하는데 그 아이는 알아차리는 게 무엇일까요?

네이먼

그 후에 작가님은 "우리는 세상을 우리 인간들과 우리의 소유물만으로 축소했지만, 그 세상에 맞게 태어나지는 않았다"고하셨죠. 마치 비극적인 공포소설 같네요. 우리가 어떤 세상을만들어놓고서, 우리에게 잘 맞지 않고 우리 스스로만을 이야기하는 그 세상에 대한 문학을 만들다니요.



르 귄


우리가 그 세상에 살도록 맞춰지기는 했죠. 하지만 그 세상은우리가 살 수도 있을 세상에 비하면 너무 작은 일부예요.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요. 그러면 공포소설 느낌은 덜하고 실존적인 실수라는 느낌이 더해지니까요. - P109

사라지는 할머니들 중에서


예외
남자의 소설을 논하면서 저자의 성별을 언급하는경우는 몹시 드물다. 여자의 소설은 저자의 성별과함께 논의되는 경우가 아주 잦다. 표준은 남성이다.
여성은 표준의 예외, 표준에서 배제된 존재다.
비평에서나 서평에서나 이 예외와 배제를 실천한다. 예를 들어 버지니아 울프가 위대한 영국 소설가라는 점을 인정해야 하는 비평가는 애써 그녀가 예외임을 보여줄 수 있다. 멋진 요행이라고 말이다.
예외와 배제의 수법은 다양하다. 여자 작가는 소설의 ‘주류‘에 속하지 않음이 드러난다. 그 작가의 글은 ‘독특하며 후대 작가들에게 아무 영향을 미치지않는다. 어떠한 ‘컬트‘의 대상이다. 그녀는 매력적이고, 우아하며, 마음을 저미고, 감성적인) 연약한 온실의 꽃이며 그러니 남성 소설가의 (강력하고, 선이 굵고, 대가다운 활력과 경쟁한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제임스 조이스는 거의 나오자마자 정전에 올랐다.
버지니아 울프는 정전에서 배제되거나 마지못해 받아들여졌으며 그러고도 수십 년간 의구심을 샀다.
정교하고 효과적인 서술 기법과 장치를 갖춘 『등대

로가 기념비적으로 막다른 길인 『율리시스』보다후대의 소설 쓰기에 미친 영향이 훨씬 크다는 주장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침묵, 유배, 교묘함‘을 선택하고 은둔 생활을 한 제임스 조이스는 스스로의 글과 경력 외에는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 나라에서 지적, 성적, 정치적으로활발한 사람들이 이루는 비범한 집단으로 꽉 찬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어른이 된 후 내내 다른 작가들을 읽고, 서평을 쓰고, 출간했다. 제임스 조이스가 연약한 쪽이고, 버지니아 울프가 굳센 쪽이다.
조이스가 컬트의 대상이고 우연이며, 울프는 20세기 소설의 중심에서 지속적으로 풍부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정전주의자들은 결코 여자에게 중심을 부여하지 않는다. 여자들은 반드시 주변에 남겨져야한다.
어떤 여자 소설가가 1급 예술가라는 사실이 인정되더라도, 배제 수법은 여전히 작동한다. 제인오스틴은 존경을 많이 받지만, 그래도 어떤 본보기로 여겨지기보다는 독특하고 흉내 낼 수 없는 놀라운 우연으로 여겨질 때가 많다. 실종될 순 없어도, 완전히포함되지도 않는다.
작가의 생존기에 일어나는 폄하, 누락, 예외는 작가의 죽음 이후 일어나는 실종의 준비 작업이다.

르 귄


오, 데이비드. 그건 완전 벌집을 쑤시는 질문이에요. 사람들은 수십 년째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죠. 다른 문화에서 자란 사람을 어디까지 대변할 수 있는가? 제 아버지는 인류학자였고 이 질문과 정면으로 부딪쳤어요. 이해하려는 시도는언제 동의 없는 가져다 쓰기가 되어버리는가? 이 문제는 물론 백인이 인디언 권은 당사자들의 의사가 중요하다는 이유에서 ‘북미 원주민‘이라는 표현보다 인디언이라는 표현을 고수했다의 목소리로 쓸 때 극심하게 눈에 띄었죠. 페니모어 쿠퍼 19세기 작가로, ‘개척자』 『모히칸족의 - P116

최후』 『대평원』을 포함해 5개의 소설을 엮은 ‘가죽 스타킹 시리즈‘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시리즈는 특히 백인과 인디언의 관계를 그린다 때부터요. 그 작가들은, 당시에는 문학적인 목소리가 없었지만 분명 자기들만의구술 문학과 자기들만의 목소리와 자기들만의 견해가 있었던인디언들의 목소리를 멋대로 가져다 썼어요. 인디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죠. 다 백인들을 통해 해석되어야 했어요.
이런 일은 계속 일어나요. 여자들에게 문학에서든 다른 어디에서든 목소리가 없었던 수천 년 동안은 남자들이 여자를 대변했죠. 그것도 여전히 일어나는 일이에요. 하지만 좋아요, 그렇다고 아무도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말할 수 없다는 데까지정치화해버리면, 난장판이 되어버려요.  - P117

그러다 보면 아무도목소리가 없는 사람들을 대변할 수 없다고 해야 하니까요. 이게 다른 동물에 대한 이야기가 되면 또 꼬이지만요. 물론 다른 동물에게 목소리는 없죠. 원래 그렇게 타고났고, 우리처럼언어를 쓰지 않으니까요. 그렇다면 우린 어느 정도까지 대변할 수 있을까요? 아주 제한적인 정도까지밖에 안 돼요. 그렇다고 우리가 동물들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건 동물에게감정이 없어서라거나, 우리가 동물들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동물이 생각을 하지 않아서라고 말하는 행동과학자들처럼 굴 필요는 없죠. 심지어 비트겐슈타인처럼, 사자가 말을 할 수 있다 해도 우리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할필요는 없어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다만 우리는 다른 존재의마음을 상상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상대를 멋대로 이용하지 않도록, 매 걸음을 아주아주아주 조심해야죠.  - P117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을 기반으로 추론할때도 많은데, 사실 그게 애트우드의 SF가 하는 일이죠. 지구에서 일이 돌아가는 방식, 특히 정치적인 방식을 가져다가 그걸 기반으로 추정한 미래를 그리면서 끔찍한 가정, "세상에, 이렇게 되고 말 거야"를 보여주는 거예요. 하지만 사실 그건오래된 SF 기법이에요. 왜 자기 작품이 SF라고 불리기를 싫어하는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몇 가지 이유를 상상하기가 어렵진 않죠. 분명히 출판사에서도 애트우드가 ‘장르 작가‘라고불릴까 봐 싫어할 테고요. 잘 팔리지도 않을 테고. 하지만 마거릿 애트우드는 그런 우둔한 이유에 영향받기에는 너무 영리하고 복잡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게 서로를 좋아하는 작가들로서 우리가 계속 나누는 대화에 가끔 굉장한 불편을 초래하죠. 그냥, 제가 SF를 쓸 때는 그게 무엇인지 알고, 내가SF를 쓴다는 것도 안다고만 해두겠습니다. 그리고 전 그 작품에 다른 이름이 붙게 하지 않을 거라는 말도요. 다만 그건 제가 SF를 쓰지 않을 때도 똑같아요. 제가 ‘SF 작가‘라는 이유만으로 SF가 아닌 작품을 SF라고 불러주는 것도 원치 않아요.
이런 범주가 개인적으로 제게는 아주 많이 중요하거든요. 전언제나 애트우드의 책을 리뷰할 때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에요. 하지만 언제나 흥미로운 작업이기도 하죠애트우드는 나중에스스로가 SF를 쓴다는 점을 시인했고, 르 귄과 이 문제를 두고 주고받은 대화에 대한 에세이를 쓰기도 했다. - P124

진지한 문학에 대하여밤중에 뭔가가 그녀를 깨웠다.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젖은 운동화를 신고 아주 천천히 계단을 오르는....… 그런데 누구지? 왜 신발이 젖었지? 비는 오지 않았는데, 저기, 다시 그 무겁고 젖은 발소리다. 하지만 몇 주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았는데, 폭염만 계속됐는데, 갑갑한 공기와 곰팡이 냄새, 아니 썩은 내인가, 아주 오래된 살라미 아니면 초록색이 되어버린 간 소시지에서 나는 것 같은 달콤한 썩은 내. 아, 또다. 삑삑 소리가 나는 느린 발걸음, 그리고 썩은 냄새가 더 강해졌다. 뭔가가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문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썩어가는 살을 뚫고 나온 발꿈치뼈가 부딪치는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그게 뭔지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건 죽었는데, 죽었단 말이야! 저주받을 셰이본 다른 진지한 작가들과 힘을 합쳐 그것의 오염된 손길에서 진지한 문학을 구하기 위해 묻어놓았더니 그걸 무덤에서 끌고 나왔어. 그 텅 빈 데다 뾰루지투성이인 얼굴, 썩어가는 눈동자의 무감각하고무의미한 눈길이 얼마나 무서운지! 셰이본 그 바보는 뭘 한다고 생각한 거야? 진지한 작가들과 진지

한 비평의 끝없는 의식들에 관심도 안 둔 거야? 공식적인 추방 의식들에 반복된 저주, 심장을 관통하고 또 관통한 말뚝들, 신랄한 비웃음, 무덤 위에서끝도 없이 춘 엄숙한 춤들에 하나도 관심을 안 뒀어? 그 작자는 야도 Yaddo, 뉴욕의 예술가 커뮤니티의 순결을 보존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사이파이와 반리얼리즘 소설을 구별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도못 한 거야? 코맥 매카시는, 비록 터무니없이 애매한 어휘를 훌륭하게 사용해대는 걸 빼면, 그의 책에있는 모든 것이 홀로코스트 이후에 나라를 가로지르는 사람들을 다룬 많고 많은 초기 SF 작품들과 놀랍도록 흡사하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결코 어떤 상황에서도 사이파이 작가라곤 할 수 없다는 걸, 코맥매카시는 진지한 작가고 그러니까 정의상 장르를 쓴다는 품위 떨어지는 일을 할 수가 없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단 말이야? 셰이본은 어떤 미친 멍청이들이 퓰리처상을 줬다는 이유만으로 ‘주류‘라는 말의성스러운 가치를 잊어버렸단 말이야? 아니다. 그녀는 삑삑 젖은 발소리를 내며 침실까지 들어와서 이제는 그녀를 굽어보는 그 물건을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 로켓 연료와 크립토나이트슈퍼맨의 고향 크립톤에서 온 물질로, 슈퍼맨의 힘을 약화한다의 악취가 풍기고, 세찬바람 속 황야의 낡은 저택처럼 삐걱거리며, 뇌는 과일처럼 속에서부터 썩어가고, 두 귀에서 작은 회색

세포들을 뚝뚝 흘리는 그 물건을 하지만 그녀의 주목을 요구하는 그 물건의 힘은 강력하고, 그 물건이손을 뻗자 그녀는 반쯤 썩은 손가락 하나에 낀 타는 듯한 금반지를 보았다. 그녀는 신음했다. 어떻게그 물건을 그렇게 얕은 무덤에 묻고는, 버려두고 그냥 걸어올 수가 있었을까? "더 깊이 파요, 더 깊이파!" 그렇게 외쳤건만, 그자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않았다. 그래서 이제 그자들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녀에게 꼭 필요한 다른 진지한 작가와 평론가들은 지금 어디 있나? 그녀의 『율리시스』 책은 어디있을까? 침대 옆 협탁 위에는 독서등을 받치는 데쓴 필립 로스 소설책 한권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얇은 책을 들어 끔찍한 골렘히브리 신화에서 사람의 형상을하고 움직이는 존재. 현대 판타지에서는 종종 마법의 힘으로 움직이는흙 인형이나 괴물을 가리킨다 앞으로 들어 올렸다. 그러나그걸로는 부족했다. 필립 로스도 그녀를 구할 순 없었다. 괴물이 비늘 덮힌 손을 그녀에게 얹자 반지가타는 석탄처럼 그녀를 지졌다. 장르가 그녀의 얼굴에 시체의 입김을 불어넣자 그녀는 지고 말았다. 그녀는 더럽혀졌다. 죽는 편이 나을지 몰랐다. 그녀는이제 결코 문예지 집필 의뢰를 받지 못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