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자


일생을 연기에 바친 배우는 시청자와 관객의 마음만이 아니라 시대의마음을 사로잡는다. 현실과 허구를 오가면서 모두의 희망과 아픔과 욕망이 그녀를 통해 경이롭게 표현된다. 그리하여 세상의 찬탄을 받는 스타가 되지만 그만큼 그녀는 거대한 고독과 허무 속에 놓인다. 그리고 그고독과 허무가 토대가 되어 스크린 속에 또 다른 얼굴로 재탄생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 김혜자는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여중·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학창 시절부터 배우를 꿈꾸었으며안소니 퀸이 주연한 영화 「길」을 본 후 젤소미나 같은 역을 마음에 품었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62년 KBS 공채 탤런트 1기에 합격했으나 자신의 연기에 실망해 이내 그만두고, 도망치듯 떠나 결혼해 첫아이를 낳고육아에 마음을 쏟았다.
하지만 연기에 대한 갈망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고, 스물일곱 살 때 연극으로 다시 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한국의 대표적인 극단 ‘실험극장‘에서 연기의 기본부터 다시 배웠으며, 열망에 훈련을 더한 시기를 거쳐 ‘민중극장‘, ‘자유극장‘ 등에서 주인공으로 활약하면서 ‘연극계의 신데렐라‘ 로 떠올랐다. 이후 1969년 개국한 MBC에 스카우트되어 본격적으로TV 드라마에 출연하며 수많은 배역으로 살아왔다.
「전원일기」 「모래성」 「겨울 안개」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사랑이 뭐길래] [엄마의 바다] [여 ] [그대 그리고 나」 [장미와 콩나물] [엄마가 뿔났다] ]청담동살아요」 「디어 마이 프렌즈」 [눈이 부시게] [우리들의 블루스」등 100여 편의 드라마에 출연했다. 연극 [유다여 닭이 울기 전에] [사할린스크의 하늘과 땅」 「19 그리고 80」 「셜리 발렌타인 오스카! 신에게 보내는 편지」 등의 주인공 역을 했으며, 영화로는 「만주」 「마요네즈」 「마더」[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이 있다.
작품을 선택할 때는 비록 현실이 고통스럽고 절망적이더라도 그 사이에서 바늘귀만 한 희망의 빛이 보이는가를 기준으로 삼았다. 연기를 하는동안 살아 있음을 느꼈고, 동시에 보는 사람들을 살리고 싶었다. 1966년제2회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신인연기상을 시작으로 MBC 연기대상,
KBS 연기대상, 마닐라 국제영화제, 부일영화상, LA 비평가협회상 등에서수차례 수상했으며, 백상예술대상에서 TV부문 대상 4차례, 여자최우수연기상 4차례를 수상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것은 연기밖에 없습니다. 배우나 정치인이나 다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자고 하는 것인데, 정치보다는 연기를 통해 줄 수 있는희망이 더 크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나는 배우가 훨씬 더 좋습니다.
하지만 나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걱정이 많습니다. 나이가많아서이기도 하지만 어떤 날은 나라에 대한 걱정으로 잠이오지 않습니다. 국민들의 수준은 나날이 높아져 가는데 정치인들은 왜 맨날 그 모양일까요? 무식하고 천박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무조건 어거지를 쓰고 선동을 해서 국민을 갈라치기해한쪽의 표만 얻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국민이 몹시 불편해한다는 걸 왜 모르는 걸까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이 나라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 불안해한다는 걸. - P353

우리가 누가 잘하고 누가 못하고를 논하기 전에 정말 이 사람들이 나라를 생각하나, 이 사람들이 정말 통치 철학이 있는 사람들인가, 라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자신이 저지른 짓을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면 패거리들이 모여 그 거짓말을 옹호합니다. 경제를 살리겠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자기들 패거리끼리 나눠 먹으면서 나라를 망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것을 보고 있으면 가장 저질 드라마를 - P353

보는 것 같습니다.
배우는 훌륭한 대본이 있어야 빛이 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대본도 형편없고 출연진도 형편없습니다. 그냥 삼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습니다. 아무 철학도 없고 의미도 없는 그런걸 보는 것 같아서 가슴이 답답합니다. 초보 작가가 써도 저렇게 쓰지는 않습니다. 비서들이고 측근들이고 다 있는 사람들이, 나랏돈으로 월급 주는 보좌관이 아홉 명이나 된다는 이들이 형편없는 드라마를 매일 쓰고 있고, 형편없는 대사를 매일하고 있습니다. 나는 연기밖에 모르는 국민이지만 어떻게 저렇게까지 무식할 수가 있고, 저렇게까지 생각이 없을 수가 있나.
보는 사람이 창피할 지경입니다. 그런데도 얼굴 들고 다니는 거보면 수치심도 없고 부끄러움을입니다. - P354

문제는 저 드라마를 안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라의 운명이, 국민의 미래가 달린 일이니까. 더구나 피같은 국민의 세금으로 행세하는 자들이니까 더욱 안 볼 수가 없습니다. 자기돈으로 밥 먹고 헛소리하는 것은 자유이니까 뭐라 할 수 없지만, 다 국민 돈을 물쓰듯 쓰는 사람들입니다. 다시보기 싫은데 안 볼 수가 없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이 나라에 태어난 숙명일까요?
뛰어난 영화, 뛰어난 드라마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고 감동을 주는 예술입니다. 관객을 매혹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이 나 - P354

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사람들이 하는 대사가 관객을 창피하게 만듭니다. 그들은 감동과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선동하고 거짓말하고, 자신이 한 일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거기에 되지도 않는 연예인과 소위 작가라는 자들까지 가세해편가르기를 부추깁니다. 코미디에 빗대는 이들도 있는데, 그것은 코미디라는 장르를 모독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사악한 코미다를 하는 자들입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말로 자존심이 상합니다. - P355

그러면서도 이 나라가 무너지지 않는 게 나는 너무 감사합니다. 곧 망할 것 같은데 이렇게 유지되고 발전하는 것이 국민이성실하게 살아서 그런 것입니다. 아침에 보면 출근길에 그렇게차가 막히는데도 매일 출근하고, 밤낮없이 열심히 일하는 그런사람들의 힘 덕분입니다. 그 마음이 합쳐져서 나라가 지탱되고있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정치하는 사람이라면 웬만큼 머리가 있고, 지성이있고, 철학이 있었습니다. 일본의 식민지 정치를 겪고 전쟁을치르면서 진정한 애국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청문회나
"국정감사 같은 것을 보면 유치해서 볼수가 없습니다. 저들은절대로 나라를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을 뜨고 봐 줄 수가 없는 하류인생들입니다. 정당정치가 패거리 정치라는 의미는 아닐 텐데, 웃기는 게 아니라 슬픔 뿐입니다. - P355

사람이 근본은 있어야 합니다. 설령 가난하게 자랐어도 사람의 근본을 잃지 않은 사람이 정치에 나서야 합니다. 국민들은계속 마음이 허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누가 옳은가, 어떻게 해야 이 나라가 바로 서고 앞으로 나아가나, 이러면서 정치하는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하는 짓을 보면 ‘나도 저 자리에 앉아 있으면 저럴래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나만 그런 걸까요? 눈 가지고 귀 가진 사람은 정치인이라는 자들이 하는 짓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세운 나라인데, 얼굴 두꺼운 인간들이자기 패거리들의 권력 유지만을 위해 이 나라를 망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만 나와도 저 정도는 아닙니다. 내가 살아가면서본 가장 무능력하고 질 낮은 사람들입니다. 기회주의적이고 후안무치한 연기를 하는 데는 대종상 감입니다. - P356

리젯 우드워스 리스라는 시인이 쓴 ‘삶에 대한 작은 찬가‘라는 시를 벽에 붙여 놓고 가끔씩 소리내어 읽습니다.


살아 있음이 기쁘다. 하늘의 푸르름이 기쁘다.
시골의 오솔길이, 떨어지는 이슬이 기쁘다.
개인 뒤엔 비가 오고 비온 뒤엔 햇빛난다.
삶의 길은 이것이리, 우리 인생 끝날 때까지.
오직 해야 할 일은 낮게 있는 높이 있든
하늘 가까이 자라도록 애쓰는 일.


나는 살구꽃 필 때가 좋습니다. 커다란 나무에 조그만 꽃들이 자욱하게 서려서 멀찌감치 서서 보면 분홍색이 연하게 떠오릅니다. 한 2, 3일 행복하게 해 주고 나서, 우리가 모르는 미풍에도 후룩 집니다. 무게도 안 느껴질 듯한 자그마한 새가 앉아도 떨어집니다. 눈송이보다 더 가벼운, 손톱만 한 나비들이 내려오는 것처럼, 그리고 곧이어 라일락이 한창입니다. 담 밖으로가지가 나도록 라일락을 많이 심었습니다.  - P364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이상합니다.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다똑같은 현상이 일어날까요? 세상에서가장 아름다운 사람도,
볼품없는 사람도,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 이게 나이를 먹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약간 슬프기도 하고 약간 기쁘기도 합니다.
밤에 잠을 푹 안 자서 그런지 불안이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쓸쓸한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나이를 떠나서 인생을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밀려드는 감정일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누군가가 나를 생각하며 대본을 쓰고 작품을 구상하고 있을 거야."
하고 생각하면서 그 불안감을 밀어냅니다. - P366

 ‘끝나는 날까지 단정하게 살리라.‘라고 피곤하고 귀찮아서 흐트러져 있고 쓰러져 있다가도 ‘아니야, 누가 보지 않아도 나 자신에게도 단정하게 사는 나의 모습을 보여 주고 이야기해 주고 싶어‘ 하면서 힘을 내어 일어납니다. 나 자신도 그렇게 느끼고 싶습니다.
배우는 속옷도 잘 갖춰 입고 다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날 사고가 나거나 갑자기 죽었을 때 병원이나 사람들이 내몸을 수습해줄 때 창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귀찮을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를 단정히 합니다.
- P367

이제는 실수하면 만회할 기회가 별로 없는 나이입니다. 매일나를 돌아보고 반성하면서 삽니다. 배우로서 마지막 생을 잘끝마치고 싶습니다. 인생 고비 때마다 ‘이만하면 감사하다‘며나를 다독였습니다.
배우는 죽지 않으면 연기해야 합니다. 누구도 내 역할을 대체할 수 없으니까. 링거 맞고 촬영장에 나간 적도 수없이 많고, 빙판에 넘어져 다리가 부러졌는데도 병원에서 녹화했습니다. 대중에게 늘 그리운 배우로 기억되고 싶은 것이 소망입니다. 연기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나. 연기하는 것,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 두 가지만으로도 벅찹니다. 둘 다 잘마무리하고 싶습니다. - P370

늙어 가는 사람은 늙음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나는 김남조 시인의 이 시를 좋아합니다. ‘자책과 놀며‘라는 제목의시입니다.


내가 지쳤다는 사실을
자책한다
나태와 안일 그 피부병을
자책한다

이다지 감미로운 - P370

시간 죽이기를
자책한다

미지근한 온도
희석된 긴장
절망보다도 무개성한 허탈을
자책한다

달력엔
자책의 날짜들만 잇달아
숙달 외길을 달리는
자책 취미를
자책한다

많지 않은 세월에
자책과 노느라
나의 밤낮이 바쁘다
하여 바쁘게
자책한다 - P371

그리고 저녁이 옵니다. 3층 내방 창문 너머로 저녁이 오는풍경을 바라보며 앉아 있습니다. 옅은 색조의 어둠이 점점 짙어져 가면서 나중에는 나무들도 꽃들도 그 어둠에 몸을 맡깁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자세히 보면 어슴푸레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연약하고, 또 강하게.
나를 깨우는 사람이 정말 많습니다. 연기할 때가 아니면 이렇게 늘쩍지근하고 게으른 사람인데, 그럴 때마다 내 생각을깨우쳐 주고, 자극을 주는 분들이 있어 왔습니다. "김혜자, 일어나!" 하고 말해 주는 것 같은 이들이 나를 정신나게 하고움직이게 하는 사람들이 살다 보면 알게 됩니다. 고비고비마다
‘그 사람‘을 통해서 살게 했구나 하는 것을. ‘아, 정말 기가 막힌다. 신은 나만 보고 있는 게 아닐 텐데, 어떻게 굽이굽이마다 고마운 사람들을 보내 주셨을까?‘ 하고 깨닫습니다. 내가 일부러계획을 한 것도 아닌데, 나를 생각해 주고 끊임없이 일을 하게해 주는 사람들, 살아야 할 이유를 갖게 해 준 그 사람들이 얼 - P372

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인생은 기억할 단 하루만 있으면 된다고 하는데, 많은 아름다운 기억들로 빛나고 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생을 살았다생각합니다. 나는 참 축복받은 배우이구나 합니다. 언제까지가나의 삶일지는 모르지만, 남은 삶도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성실하고 아름답기를 바라봅니다. 그리 해 주시기를 신께 기도하며 창을 닫습니다. - P373

김혜자


일생을 연기에 바친 배우는 시청자와 관객의 마음만이 아니라 시대의마음을 사로잡는다. 현실과 허구를 오가면서 모두의 희망과 아픔과 욕망이 그녀를 통해 경이롭게 표현된다. 그리하여 세상의 찬탄을 받는 스타가 되지만 그만큼 그녀는 거대한 고독과 허무 속에 놓인다. 그리고 그고독과 허무가 토대가 되어 스크린 속에 또 다른 얼굴로 재탄생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 김혜자는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여중·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학창 시절부터 배우를 꿈꾸었으며안소니 퀸이 주연한 영화 「길」을 본 후 젤소미나 같은 역을 마음에 품었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62년 KBS 공채 탤런트 1기에 합격했으나 자신의 연기에 실망해 이내 그만두고, 도망치듯 떠나 결혼해 첫아이를 낳고육아에 마음을 쏟았다.
하지만 연기에 대한 갈망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고, 스물일곱 살 때 연극으로 다시 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한국의 대표적인 극단 ‘실험극장‘에서 연기의 기본부터 다시 배웠으며, 열망에 훈련을 더한 시기를 거쳐 ‘민중극장‘, ‘자유극장‘ 등에서 주인공으로 활약하면서 ‘연극계의 신데렐라‘
로 떠올랐다. 이후 1969년 개국한 MBC에 스카우트되어 본격적으로TV 드라마에 출연하며 수많은 배역으로 살아왔다.
「전원일기」 「모래성」 「겨울 안개」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사랑이 뭐길

‘엄마의 바다 「여 그대 그리고 나」 「장미와 콩나물 엄마가 뿔났다」청담동살아요」 「디어 마이 프렌즈」 눈이 부시게 우리들의 블루스」등 100여 편의 드라마에 출연했다. 연극 유다여 닭이 울기 전에 사할린스크의 하늘과 땅」 「19 그리고 80」 「셜리 발렌타인 오스카! 신에게 보내는 편지」 등의 주인공 역을 했으며, 영화로는 「만주」 「마요네즈」 「마더」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이 있다.
작품을 선택할 때는 비록 현실이 고통스럽고 절망적이더라도 그 사이에서 바늘귀만 한 희망의 빛이 보이는가를 기준으로 삼았다. 연기를 하는동안 살아 있음을 느꼈고, 동시에 보는 사람들을 살리고 싶었다. 1966년제2회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신인연기상을 시작으로 MBC 연기대상,
KBS 연기대상, 마닐라 국제영화제, 부일영화상, LA 비평가협회상 등에서수차례 수상했으며, 백상예술대상에서 TV부문 대상 4차례, 여자최우수연기상 4차례를 수상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삼십 대 끝자락이던 때, 혜자 님과 산으로 들로 긴 여행을 다녔습니다. 영화 ‘마더」촬영지가 전국에 흩어져 있었던 덕분이었는데, 그만큼 저나 촬영감독, 프로듀서 모두 아름다운 로케이션 찾기에 한껏 욕심을 낸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완성된영화를 보았을 때, 모두가 단번에 깨닫고 말았습니다. 이 영화 최고의 풍광은 무엇보다도 혜자 님의 얼굴 그 자체라는 것을.
그리고 카메라는 점점 더 혜자 님의 커다란 두 눈을 향해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는것을. 그 신비로운 두 눈을 통해 그분의 영혼을 들여다보았다… 라는 식의 상투적인표현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해 가을과 겨울. 그분의 두 눈이 어떻게 시네마스코프의 드넓은 캔버스를 집어삼켜 버리는지 카메라를 통해 생생히 지켜보았습니다. 경이로웠습니다.
수십 년간 수많은 사람이 칭송해 온 혜자 님의 명연기에 대해 제가 굳이 어떤 말을덧붙일 필요는 없겠지요. 다만, 그 놀라운 섬광 같은 순간들이 필름에 담겨지기도 전에, 이 세상 누구보다 가장 먼저 맨눈으로 목격했다는 것은 저에게 분명 크나큰 행운이었습니다. 저는 또 한 번의 행운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혜자 님의 눈빛에 어울리는 맑고 깊은 이야기를 써낼 수 있기를 꿈꾸면서 말입니다. - 봉준호(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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