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와 19세기 소설을 읽으면서 자란 사람은 누구나 ‘전지적‘이라고 불리는 시점이 편안하기 그지없어요. 저는 이 방식을 ‘작가‘ 시점이라고 부르는데요, ‘전지적‘이라는 용어는 작가가 모든 것을 안다는 생각을 반영하다보니, 마치 그게 나쁜 것처럼 비판적으로 쓰일 때가 많아서예요. 하지만 작가는결국 이 모든 인물을 만든 저자이고, 창조자죠. 사실 솔직하게 파고든다면 모든 인물이 곧 작가예요. 그러니 작가는 모든인물의 생각을 알아 마땅하죠. 작가가 독자에게 인물들의 생각을 말해주지 않는다면…… 왜일까요? 이건 생각해볼 만한질문이에요. 많은 경우 이유는 그저 작가가 아는 내용을 독자에게 말하지 않음으로써 서스펜스를 자아내기 위해서일 뿐이에요. 뭐, 그것도 정당한 이유긴 하죠. 이건 예술이니까요. 하지만 지금 전 사람들이 선택의 폭에 대해 생각하게 하려는 거예요. 쓰이지 않는 아름다운 선택지가 정말 많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1인칭시점과 제한적 3인칭시점은 제일 쉬운 시점이고, 그만큼 제일 흥미롭지 않은 선택이에요. - P38

한 사람의 마음에서 다른 사람의 마음으로 옮겨갈 때 그런 일이 일어나죠. 톨스토이와 울프는 황홀하게 해내지만, 어색하게 하거나 스스로도 모르는 채 할 수도있어요.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알고 쓰느냐예요. 시점을 바꾸려면 강렬한 의식과어느 정도의 연습 및 이동 기술이 필요해요. 성공적으로 시점을 이동하면 쌍안경으로 보는 효과, 아니면 그보다 더 여러 개의 눈으로 보는 효과가 생기죠. 어떤 사건에 대해 한 가지 관점을 보여주는 대신, 영화 <라쇼몬>처럼 여러 관점을 제공하는 거예요. 그것도 <라쇼몬>처럼, 이야기 자체를 여러 번반복하지는 않으면서요. 작가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렇게 할수 있고, 복수의 관점은 지금 일어나는 일을 더 어리둥절하게만들거나 더 명료하게 만들죠. 작가가 둘 중 어느 쪽을 원하느냐에 따라서요. 저는 그런 이동을 허용하기 때문에 작가 시점이 모든 시점 중에서 가장 유연하고, 가장 유용하다고 생각해요. 가장 자유롭고요. - P40

이야기는 곧 갈등이라고 가르치고, 언제나 "네 이야기에서 갈등은 어디 있지?" 묻는 것, 이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있다는 뜻이에요. 이야기는 갈등을 다룬다고, 플롯은 갈등에바탕을 둬야만 한다고 말하면 세상을 보는 관점을 심각하게제한하는 거예요.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정치적인 선언이기도 하죠. 삶은 갈등이고, 그러니 이야기에서 정말 중요한 건갈등뿐이라고 말이에요. 이건 그냥, 사실이 아니에요. 삶을전투로 보는 건 시야가 좁은 사회진화론의 관점인 데다, 굉장히 남성적인 시각이기도 해요. 물론 갈등은 삶의 일부죠. 소설을 쓸 때 갈등을 끌어내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단지 갈등이 이야기의 유일한 생명줄은 아니라는 거예요. 이야기는 다른 많은 것을 다루니까요. - P41

전 무엇을 위한 ‘싸움‘, 무엇에 맞서는 ‘전쟁‘ 같은 표현을 피하려고 노력해요. 모든 것을 갈등 및 당면한 폭력의 해결책같은 용어에 밀어 넣는 데 반대해요. 전 노자가 갈등에 관해하는 말을 기억하려고 해요. 노자는 분쟁을 원래 있어야 할곳인 전장에만 제한해요. 모든 인간 행동을 갈등으로 제한하는 것이야말로 드넓고 풍성한 인간의 경험을 빼먹는 짓이에요. - P42

전 그저 문학에서 제일 오래된 형태가 환상성을 갖고 있었다고 짚었을 뿐이에요. 문학은 신화와 전설, 그리고 ‘오디세이‘
처럼 신화화된 영웅담에서 시작하죠. 장르소설이 문학이 아니라고 여기던 시절은 이제 과거라고 생각해요. 다만 제 경우는 장르소설도 『분노의 포도』와 다를 바 없는 문학이라는 주장을 하도 오래 했더니, 다른 방식으로 말하기가 어렵네요.
물론 대부분의 장르소설은 『분노의 포도』만큼 훌륭하지 않아요. 하지만 대부분의 리얼리즘 소설도 『분노의 포도』만큼 훌륭하지 않죠. 장르로 작품을 판단하는 건 그냥 틀렸어요. 어리석은 데다, 낭비죠. 이제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 사실을 알아요. - P43

바로 그거예요. 최근에 ‘북뷰 카페‘에서 했던 서사 소설에 대한 온라인 워크숍에서 저는 몇 번이고 사람들에게 패트릭 오브라이언의 해양 모험소설 ‘마스터 앤드 커맨더』를 비롯한 ‘오브리-머투린‘ 시리즈을 읽어보라고 권했어요. 그 긴 문장, 묘사를요. 해상전투를 어떻게 쓰는지 보고 싶으면 오브라이언을 찾아보라고요. 오브라이언은 놀랍도록 뛰어난 액션 작가예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쓰는 걸까요? 그 부분을 연구할 가치가 있어요.
이렇게 경이로운 글쓰기 사례들을 장르소설에서 찾을 수가있어요. - P45

네이먼


지금 인용할 말에 제가 과도한 뜻을 부여해서 읽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자아와 예술의 관계에 대해 하신이 말씀에서는 불교철학이 떠오르더군요.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죠. "어떤사람은 예술을 통제의 문제로 본다. 나는 예술을 주로 자기통제의 문제로 본다. 이런 식이다. 내 안에는 말해지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이 나의 목표다. 나는 그것의 수단이다. 내가 나 자신, 나라는 자아, 나의 소망과 의견, 나의 정신적인 쓰레기를 치우고 그 이야기에 집중해 따라갈 방법을 찾을 수만 있다면, 이야기가 스스로 말할 것이다." 이건 작심하고 뭔가를 종이에 쓰려는 사람과는 아주 다른 접근법 같아요. - P48

르귄


그래요, 상당히 도가적이죠. 무위無, 또는 하지 않음으로써 하는 것. 아주 수동적인 태도처럼 보여요. 물론 노자는 갈등을 지향하는 서구의 사고방식이야말로 수동적이라고 보죠.
"뭔가를 하지 말고, 그냥 앉아 있어라." 그게 노자가 정말 어려우면서도 정말 유용한 대목이에요. 그냥 앉아 있기에도 수많은 다른 방법이 있거든요. - P48

르귄


[글쓰기의 항해술] 에 썼듯이 ‘금욕‘은 제가 열네 살 때, 소설을 써보려는 시도가 딱히 화려하지도 않으면서 단어가 너무 많고, 형용사와 부사가 너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고안해낸 방법이에요. 그래서 전 일부러 어떤 형용사도 부사도 쓰지 않은 서술을 한 페이지 꽉 채워서 써보려고 했죠. ‘오직‘이나 ‘거의‘같이 꼭 필요한 단어도부사에 속하니 아주 힘들어요. 그러니 다 잘라낼 수는 없을 때도 있죠. 그래도 ‘~적-ly‘
같은 단어는 다 잘라낼 수 있고, 다채롭고 매력적인 형용사를다 없앨 수도 있어요. 그러고 나면 금욕적이고 소박한 산문이 남죠. 대신 모든 에너지를 동사와 명사에 쏟아야 하기 때문에글이 더 힘 있고 진해져요. ‘금욕‘은 제가 가르치는 거의 모든 워크숍에서 하는 연습방법이에요. 그리고 다들 그걸 싫어하죠! 그래도 마지막 연습인 이른바 ‘끔찍한 일‘ 만큼 싫어하진 않아요. 자기 글을 가져다가 절반으로 줄이면서, 그 절반의 양으로 똑같은 내용을 말하는 연습이거든요. - P49

이 워크숍을 하다 보니, 작가 생활 말년인 지금에 와서 사람들에게 제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말하는 게 제게도 도움이 되는 듯합니다. 너무 자기중심적이라는 느낌도 들지만, 지망생들도 거의 모든 작가가 좌절과 끔찍한 자기 의심을 경험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관심이 있을 테고 그 점을 알아두면 가치가 있을지도 몰라요. 작가들은 혼자 작업할 때가 워낙 많아서 그런지, 대부분의 예술가보다 더 스스로를 의심하는 경향이있어요. 그리고 출간은 만만찮은 장벽이죠. 시작할 때 저는 어쩌다 한 번씩 시를 발표할 수 있었어요. 독자가 여덟 명, 아홉 명쯤 되는 아주 작은 시 잡지였지만, 그래도 인쇄가 되긴했죠. 하지만 소설은 하나도 팔지 못했어요. 6년인가, 7년 동안 꾸준히 단편과 장편을 써서 세상에 내놓으려고 했지만 아무 데도 싣지 못했죠. 친절한 거절 쪽지는 잔뜩 받았고요 - P50

사실 저는 작가가 되는 데에, 제 글에 전념하고 있었고 자신감인지 오만함인지가 있었기에 계속할 수 있었어요. ‘난 해낼 거야, 그것도 내 방식으로 해낼 거야.‘ 그런 생각에 매달렸죠. 그리고 펑, 마침내 뚫었어요. 일주일 사이에 단편 두 개를 팔았죠. 하나는 상업 잡지였고, 하나는 작은 문학잡지였어요. 일단 살짝이라도 열리고 나면 문이 계속 열려 있는 것 같아요. 이제는 작품을 어디에 투고할지 알기가 쉬워지는 거죠.
제 단편은 전통적인 리얼리즘이 아니라 비현실적인 요소가 - P50

있을 때가 많았고, 전 판타지와 SF 잡지들은 제 글을 읽고 "이게 대체 뭐야?"라고 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전통 문학시장에서는 만나지 못했던 열린 마음이 그곳에 있었죠. 이렇게 한번 전진하고 나니 그 후에는 느리지만 꾸준하게 글이 채택됐죠.
물론 그러고 나서도 에이전트를 얻기 전까지는 계속 제 글을투고했는데, 그건 힘든 일이에요.
그리고 이건 제가 지금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모르는 영역이기도 해요. 인터넷과 전자출판, 자가 출판과는 너무 달라서요. 예를 들어 자가 출판에 대해서는 양가적인 감정이라는 말조차 할 수가 없어요. 자가 출판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 작가를 실제로 어디로 데려가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해볼 뿐이에요. 홍보망도 없고, 작품을 알릴 방법도 없이 자가 출판을 하고, 광고주들에게 팔지도 않겠다고 선택한다면. ..? 전 그냥 모르겠어요. 모르겠어요. 자기 작품이 인쇄된걸 보면 정말 좋기는 하지만, 주위 사람들과 친척들 말고는 아무도 읽지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죠? 저는 모르겠어요. 이 시점에서는 아무도 누군가에게 확고한 조언을 해주지 못해요. 우린 혁명기를 살고 있어요. 이 혁명 이후에 출판이 어떻게 정착할지짐작해볼 수밖에 없죠. 정착하기는 할 테니까요. - P51

시에 대하여


어슐러와 첫 인터뷰를 하기 전, 아내와 나는 워싱턴주와 캐나다 국경선근처에 있는 노스 캐스케이드 국립공원에 하이킹을 하러 갈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러나 태평양 북서부에서 여름의 새로운 기준이 되어버린산불이 공원을 닫아버렸고, 우리는 마지막 순간에 대안을 찾아 헤매야했다. 나는 어슐러가 오리건주 남동부제일 구석의, 외딴 고지대 사막에 있는 스틴스산을 오랫동안 사랑했음을 알았다. 어슐러의 소설 『아투안의 무덤의 세상에도 영향을 미쳤고, 시와 사진이 함께 수록된 협업작품집이었던 『이곳에 나와Out Here 에도 영향을 미친 풍경이다. 아직만나보지도 못했지만 나는 어슐러에게 전화를 걸어서 혹시 우리의 휴가를 구해줄 만한 제안이 있는지 물어보기로 했다. - P53

"어두운 하늘‘ 알아요?" 어슐러는 신이 나서 정보를 공유했다. "미합중국에 남은, 진정한 어둠을 경험할 수 있고 어떤 광공해도 없는 하늘 아래에서처럼 별들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거든요?" 어슐러는 바로 그 하늘 아래에서 보낸 무수한 밤의 경이로움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곧 아내와 나는 ‘그곳에 나가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눈부신 검은 하 - P53

늘 아래 아직도 야생마들이 돌아다니는 지역, 스무 명도 안 되는 작은마을 안, 다섯 세대째 오리건 사람이 운영하는 호텔이었다. "그 사람들에게 어슐러와 찰스가 보냈다고 해요." 어슐러는 그렇게 말했고, 그곳에 사는 보기 드문 사람들은 우리를 보살펴줬다.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 지역에 처음 찾아온 백인 정착민들까지 쭉 이어지는 농부와 목장사람들이었다. 나와 아내는 그 ‘타오르는 정적‘과 ‘끝없는 빛의 심연‘ 아래 나란히 앉아서, 세상과 우주 속의 우리 자리를 생각하면서, 부지불식간에 이 어두운 하늘과 그 하늘이 밝혀주는 사람들을 통해 어슐러에 대해 배우고 있었다. 어슐러와 내가 직접 얼굴을 마주하기 한참 전에 말이다. - P54

이제 나는 어슐러의 시를 생각할 때 이 순수한 하늘과 몇 세대나 그 하늘 아래 살아온 사람들을 제일 많이 떠올린다. 어슐러의 소설을 생각할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말이 상상이라면, 어슐러의 시에서 제일 많이떠오르는 말은 사색이다. 어슐러는 SF 시나, 상상 속의 다른 세상에서일어나는 시를 쓰지 않고 이 세상 속 우리의 자리를 사색한다. 하늘에서 인간의 빛을 제거해 다시금 ‘영원함을 볼 수 있는 하늘이 되게 한다면, 영양과 코요테와 펠리컨과 맹금류가 인간의 수를 훌쩍 넘는 땅에서시간을 보낸다면, 어쩔 수 없이 어떤 의미에 대한 질문들이 솟아오른다. 비인간 타자, 즉 짐승, 새, 식물, 땅 자체와의 진정한 유대감이란 어떤 모습일까? 인간의 어떤 도구와 기술 이야기와 언어들이 세대에서세대로 전해질 가치가 있을까? 우리가 수수께끼와 경이, 우리가 알지못하는 것. 알 수 없는 것들과 맺어야 하는 적절한 관계는 무엇일까?
어슐러의 세상은 어둠과 빛이 서로의 대척점에 있는 마니교의 세상이아니다. ‘음양‘은 ‘어둠과 빛으로 번역될 수 있고, 도가의 개념과 비슷 - P54

하게 어슐러에게도 이런 반대 항은 사실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이며 서로 얽혀 있고 서로에게 의존한다. 어스시의 사람들은 도가 사상 같은시노래들을 쓰고 전했는데, 이러한 그들의 문화는 그 시를, ‘어둠과빛과 그 안에서 사람들이 차지한 자리를 사색하기 위해 세대를 넘어전하기로 했다. 그리고 어슐러는 그중에서 발췌한 시 한 편을 어스시라는 세상을 우리에게 소개하는 책의 제언으로 삼았다. 여전히 타자와의조화와 균형을 위해 노력하는 세상을 말이다.

오직 침묵 속에 말이,
오직 어둠 속에 빛이.
오직 죽어감 속에 삶이 있네.
텅 빈 하늘을 나는
매의 비행은 찬란하여라. - P55

우리가 스턴스에서 여름을 보낸 후, 여름이 올 때마다 산불은 더 심해지고 더 멀리 퍼졌다. 자연에 대한 사색은 이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 하늘, 타자성을 비추고 우리가 경외심에 멈춰서서 사색하도록 하는 하늘이 아니라, 우리가 밝힌 빛과 우리 자신만을 반사해 비추는 하늘을 계속 올려다보는 한, 자연과 유대감을 자아낼 기회는 줄어들기만 할 것 같다. 그 기회를 계속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시, 그중에서도 특히 어슐러의 시가 발휘하는 관심 기울이기다. - P55

해안가의 별빛
(코스트 스타라이트 노선)을 타고서


가는 길, 넓은 계곡 속
아침 강물에서 떠오르는
하얀 펠리컨들을 보았지.
오는 길, 깊은 산맥 속,
구름에서 조용히 떠오르는
눈 덮힌 하얀 나무들을 보았지.
무겁고, 고상하고, 엄숙한
날개의, 나뭇가지의, 하얗게 써내는 파괴의 몸짓을.

애플게이트 하우스 앞, 작은 인디언 막자


조밀하고 무겁고 결 고운 검은 현무암
강물처럼 매끈하게 닳아
양쪽 끝이 둥글고 무딘 원통 모양의, 도구:절묘한 중심부나 그 전체적인 곡선
손에 들어맞는 그 모양을 만져보면
몇 년이고 몇 년이고, 손이, 여기를 쥔 여자들의 손이
그 모양을 빚어냈다는 걸 안다
그 무게가 딱 얕고 우묵한 그릇에 떨어지게 쥐고
씨앗을 짓이기고 들어 올렸다 다시 떨구면서부드럽고 무지근한 노래의 리듬에 맞추어
마침내는 돌 속을 파고들었으니,
내가 집어 들었을 때는
어떻게 잡고 들어 올릴지를 직접 말해주듯내 손을 빠듯 채우는 이 고운 형태로 부드럽게 마모시킨
그 손가락들의 자리에 내 손가락을 놓지.
아래로 떨어지고, 또 떨어지며 노래하고 싶어 하는 이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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