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대화
호르르, 바람이 세월을 밀어낸다. 그의 시간 한 줌이 바람속에 흩어져 흘러간다. 잣나무 가지가 쉴 새 없이 살랑이고그 사이로 갓난아이 눈망울같은 햇살이 어룽거린다. 아내가 묻힌 자리, 1년도 채 지나지 않았건만 눈 밝은 사람이 아니라면 찾을 길 없이 녹음 짙푸러 여기가 거긴지 거기가 여긴지 풍경 사뭇 다르다. 매일 오는데도 한재정상 잣나무숲은 매일 모습을 바꾼다. 호르르, 바람결에 흔들리며 어어룽 숲 바닥에 내려앉는 햇살이 아내의 웃음처럼 수줍다. 이러고 있으니 좋은가? 평생 고생하여 마련한 선산이며 뒷산 놔두고 하필 여기에 묻히길 원한 것은 아내였다. 죽음을 예감한 순간, 아내는병원 창밖, 이제 막 새 움을 틔운 은행나무를 보며 말했다. - P9
한재 잣나무숲에 가면 열십자 모양의 바우가 한나 있을것이요. 그 근방암 디나 뿌려주씨요. 한재, 라는 말이 아내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 순간, 거무죽죽다 죽어가던 심장이 벌떡살아나 타닥타닥 시퍼런 불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백운산에서 1년. 85년 중 찰나와도 같은 그 짧디짧은 기억이 아직도 자네 돌아갈 곳이었단 말인가. 노여움인지 슬픔인지 질투인지 뒤범벅인 감정을 헤아릴길 없어 그는 묵묵부답, 일가친척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유지를 따랐다. 그 뒤로 그는 매일 한재에 오른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른 적이 없다. 아이 넷 낳고 아이가 기억을 지워 아무일 없이 잘사는 것 같던 아내의 얼굴에는 문득문득 깊은 소(沼)의 바닥처럼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 P10
가서 바람은 오동나무 잎사귀를 조심조심 흔들고 포플러 잎사귀를 요동치게 하고 아낙 잃은 외로운 남정네의 한숨을 실어 늙은 과부 시리디시린 가슴팍을 두드릴 것이다. 바람은 그렇게 유정(有情)한 것들의 설움을 무심하게 실어나른다. 마당의 은행잎이 어지러이 흩날리는 늦가을, 아내는 저녁을 짓다 말고 불길이 제 치마폭을 삼킬 듯 너울거리는 것도 까맣게 잊은 채 바람의 노니는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이상하지라. 바람이 불면 시상이 한숨 같은 것으로나 꽉찬 것맹키 아득하고 서글프고 그래라. 그러면서 아내는 무안한 듯 황급히 눈물을 훔쳤다. 잣나무숲에 일렁이는 바람은 누구의 한숨일까? 아내가 마음에품었던 그 썩을 놈이나 그놈 같은 어떤 이들의 서러운 한숨일까? 어쩌면 이 바람 속에는 아내 묻은 날 그가 뿌렸던 눈물이나 그날 이후 오늘까지의 묵묵한 그의 숨도 섞여 있을지 몰랐다. - P15
젊은이의 눈길이 잣나무숲, 햇살 어룽거리는, 지난가을의 낙엽 아직도 미처 썩지 않은 푹신한 땅바닥을 더듬는다. 아내 묻힌 거기 어디쯤, 아마 아내 아닌 다른 사람들도 거름이 되어 잣나무를 쑥쑥 키웠을 것이다. 사람의 몸뚱이를먹고 자란 잣나무는 그 어느 곳보다 무성히 짙푸르고 사람의 슬픔을 먹고 자란 바람은 그 어느 곳보다 처연히 서늘하다. 제 슬픔을 먼저 간 혹은 후에 간 사람들의 슬픔을 다독이듯 도련님은 잣나무숲 여기저기를 눈빛으로 어루만진다. 도련님의 눈빛이 더듬는 곳, 햇살이 반짝 빗방울처럼 튕겨오른다. 목심은 하난디라. 되련님도 나도………. 목숨을 버릴 생각 같은 건… 그는 해본 적이 없다. 도련님 따라 간이학교에 가서도 그는 갓 태어난 송아지 눈망울이 아른아른, 갓 돋아난 가지 떡잎이 어어, - P22
사람이 좋아 목숨을 거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도련님은 몰랐다. 혼령이 되어서도 도련님은 여전히 모른다. 도련님에게 신념은 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무엇이다. 저 하나 바꾸기도 어려운 게 인생이란 걸, 부잣집도련님은 모른다. 아니 도련님은 아는 무엇을 그가 모르는것인지도 모른다. 그걸 굳이 부정할 생각도 없기는 했다. 도련님과 그는 타고난 태생만큼 다른 사람, 그러니 달리 산것이라고 그는 그렇게 믿었다. 사랑이 신념인 사람도 시상에는 있어라. 니 말이 맞다믄... 니도 고런 사람이겄제. 그래서 니헌티순심이를 보냈을랑가………. 그건 나도 모린다. 순심이를 살릴라고 생각형게 니배끼 생각나는 사람이 없드라. 그래 니헌티보냈다. 그래 니가 괴로웠을랑가, 고것까지는 나는... 생각을못 혔다. 아니 안… 혔다. 사람 살리는 것이 더 급했응게. 혀서 니는... 내가 미웁냐? - P25
죽어서 그의 곁이 아니라 도련님의 곁을 택한 것은 함께하지 못한 미안함 때문이었을 것임도, 함께하여 미련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임도, 그는 짐작한다. 그러면서도 아내의마음 전부를 갖지 못하여안절부절, 몸의 욕망이 끊긴 뒤에도 질기게 살아남은 마음의 욕망이 서글프다. 아내 묻힌 자리, 처연히 더듬고 있을 도련님의 시선조차 소화되지 않은채 그의 뱃속에서 부글부글 끓는다. 그러나 뜻밖에, 그 자리 더듬는 도련님의 시선은 청포묵처럼 담백하다. 사상이고 무엇이고 도련님만 해바라기하는 그 여자, 답답하여 내려보낸 그 순간, 도련님은 여자 향한 제 마음도 싹둑, 작두로 콩대 자르듯 잘라낸 것인가. 도련님은 왜 하필 그로 와 죽었소? - P31
나가 참말 죽었으까 운학아? 죽어 젊은 도련님이 살아 늙은 그를 응시한다. 아, 잣나무숲이 바람에 출렁인다. 바람이 잣나무숲에 고인 어떤 것들의 세월을 소환하여 거기 숨을 불어넣는다. 순심이가 눈물 떨구며 뒤돌아보고 도련님이 물푸레나무 지팡이 짚은채 잣나무숲으로 들어서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림자처럼으로 숨어든다. 바람의 숨결 닿는 곳마다 잣나무숲, 출렁이며 싱싱하게 살아난다. 이것이 시방 꿈이끄나. 그는 깨어나는 숲을 멀뚱멀뚱 바라본다. 동고새가 융단처럼 푹신한 낙엽더미에 입을 묻고 박수라도 치듯 머리를끄덕인다. 꿈틀꿈틀 싱싱한 벌레 한 마리 동고새 입에 낚인다. 먹이를 먹은 동고새가 날개를 활짝 펴고 휘휘휘 호로롱, - P33
봄날 오후, 과부 셋
봄바람이 앙탈하는 아이처럼 마당을 휩쓴다. 어지간한바람에는 끄덕도 않던 남보라 빛 수국마저 미친년 널뛰듯몸을 뒤챈다. 간신히 매달려 있던 무거운 꽃송이가 뚝 부러질 것만 같다. 가만보니 그것은 수국이 아니라 빨랫줄에서펄럭거리는 남보라 빛 치마다. 요즘은 자꾸 헛것이 보인다. 헛것이 보인다고 한숨결에 한마디했더니만 서울사는 딸년은 짜증스럽게 헛것은 무슨, 백내장이 심해 그렇지, 무안하게 쏘아붙였다. 썩을년. 딸 말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백태 낀 눈이 빚어내는 착각이 그녀에게는 잠시의 현실이다. 그녀는 보송보송 마른 빨래를 걷는다. 반나절 만에 빨래를말린 성급한 바람처럼 그녀의 80년도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누군가 그녀의 세월 밖에서 그녀의 한 삶을 지켜보고 - P37
사다꼬도 그게 부러웠구나. 어쩐지 그녀는 그런 사다꼬가 가깝게 느껴진다. 언제였는지, 갓 구운 카스텔라를 들고서점에 간 적이 있다. 학생들 등하교 시간이나 되어야 손님이 드는 서점은 고즈넉했다. 그렇게 자주 봐도영말이없는 하루꼬 남편이 불편해서 그녀는 창밖에서 서점 안을 기웃거렸다. 참고서를 들이는 참인지 두 사람은책뭉치를 풀고 있었다. 하루꼬의 앞머리가 흘러내리자 남편이 장갑을벗고는 천천히 쓸어올렸다.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정성스럽게 귀 뒤로 넘긴 남편은 몇 번이고 하루꼬의 뺨을 쓰다듬었다. 다정하고 정성스러운 손길이었다. 하루꼬가 부끄러운 듯 배시시 웃었다. 그 웃음 또한 다정하고 따뜻했다. 단 한 시간도 그런 세월을 살아보지 못했노라는 사다꼬의말을 그녀는 속속들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 P59
하루꼬의 웃음을 참으로 오랜만에 본다. 하루꼬도 그 사실을 의식했는지 머쓱하게 웃음을 거둔다. 그러나 잠시의 웃음은 소녀 시절처럼 해맑다. "자주 좀 모이자 영감도 없으니 나도 이제 놀러도 다니고 해야겠다." 웃음 끝에 사다꼬가 덧붙인다. 사다꼬는 지난 5년, 남편이 앓아누운 뒤로 아예 문밖출입도 하지 못했다. "아이구, 언제는 사는 게 덧없다더니………." "에이꼬 네 말이 맞다. 죽지 못할바에는 재미나게 살아야지." 사다꼬는 이렇게 불쑥 물러나서 사람 맥 빠지게 하는 데도사다. "나 배고파. 뭐 먹을 거 없어, 사다꼬?" 그녀가 산해진미를 올려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던 하루꼬가 먹을 것을 찾는다. 하루꼬의 염장질은 이런 식이다. - P63
그는 얼룩 하나 없이 새하얀 행주로 상을 닦는다. 엊저녁 삶아놓은 것이다. 자기부터 자기를 대접해야 남한테도대접을 받는 법이야. 그래서 어머니는 입고만 나서면 흙투성이가 되고 마는 옷을 그악스럽게도 갈아입히고, 사과 하나 귤 하나도 예쁘고 좋은 것으로만 골라 먹였다. 그래 봐야 남들에게는 병신이었을 테지만 어머니만큼은 그를 부잣집 도련님처럼 위했다. 그는 보란 듯이 밥상을 차린다. 언젠가 어머니 간 뒤 군청 복지과라나 사회과라나에서 사람들이 나왔다. 중풍으로 쓰러진 아버지에 병신 아들 사는 꼴이안타까워 누가 민원이라도 넣은 모양이었다. 마침 밥을 먹으려던 차였다. 군불 지피고 나온 숯으로 구워낸 고등어자반까지 떡하니 놓인 밥상을 본 여직원이 어머, 호들갑스럽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어머, 저보다 훨씬 낫네요. 여직원은 염치도 좋게 자반을 손으로 죽 찢어 맛을 보았다. - P75
가슴이 두근거린다. 호아가 집에 있다면 아이가 저렇게 울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몸조차 가누지 못할 만큼 맞은 것일까. 아니면 호아도길호 어머니처럼 집을 나간 것일까. 어머니가 떠난 날처럼등골이 서늘하다. 드르륵, 문이 열린다. 저거침없는 손길은호아가 아니다. 그는 재빨리 고개를 돌린다. 뒤통수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길호형의 마음을 그는 알 것 같기도하다. 동네 아이들에게 병신 소리를 듣고 온 날이면 아버지는 그를 때렸다. 맞는 것은 그였으나 괴로운 것은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주먹이 향한 것은 그가 아니라 아버지의 어긋난 유전자, 그러니까 곧 아버지 자신이었다. 호아를 때리는길호 형의 주먹도 어쩌면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인지 모른다. 그게 아버지가 견디는 방식이란다. 막막해서, 하도 막막해서 그러는 거야. 네가 이해하렴.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맞은상처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길호 형도 아버지처럼 막막한것일까. - P79
손에 잡혀나오는 것은열쇠다. 버둥거리는 손으로 그는 허리춤의 쇠사슬에서 열쇠를 빼낸다. 정처 없이 흔들리는 손에 열쇠를 쥔 채 그가손을 뻗는다. 그의 말없는 말을 호아는 알아듣는다. 조심스레 열쇠를 잡는다. 이제는 담벼락 아래서 멍든 얼굴을 가린 채 숨어 있지 않아도 될까. 이곳이라면 취한 남편도 찾아오지 못할 것이다. 호이는 열쇠를 쥔 채 문을 열고 나선다. 끼이익, 돌아가야 할 곳의 냉혹함을 일러주기라도 할듯 쇳소리가 귀청을 긁는다. 비탈길을 내달리기 전에 그녀는 마지막으로 뒤돌아본다. 눈송이 같은 하얀 꽃이 철조망위로 조랑조랑 매달려 있다. 꽃송이가 바람에 살랑인다. 꽃송이를 흔든 바람이 향기를 안고 그녀의 품으로 달려온다. 그것은 그의 향기다. 열쇠를 꼭 쥔 채 그녀는 마을을 향해내달린다. - P90
맏이의 말이 가슴을 후빈다. 그는 묵묵히 도끼를 놀린다. 퍽, 퍽, 나무 쪼개지는 소리에 겨울 햇살이 시들어간다. "아부지는 시방도 경우 쟈가 사람노릇 허고 살 것 같소? 꿈 깨씨요. 23년 만에 지 팔도 보돕씨 움직이는디 쟈가 지발로 걷는 꼴을 아부지 살아생전에 볼 수나 있을 것 같소? 행운의 사나이 좋아하시네. 그놈의 행운 개나 주라고 허씨요. 저놈 명운(命運)이 어매아배 다 잡아묵고 인자 나꺼잡아묵게 생겼단 말이요." 도끼가 갈 자리를 잃고 받침대에 꽂힌다. 한치만 어긋났으면 그의 정강이에 꽂혔을 것이다. "주뎅이 못 닥치냐!" 순간, 우어, 우어어, 기이한 비명 소리가 그의 일갈을 눌러 앉힌다. 그의 귀가 경우 방을 향해 곤두선다. 어어. 분명경우 방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다. 도끼를 집어던지고 신발을 벗을 겨를도 없이 아들 방으로 내달린다. - P149
머리를 침대 머리맡에 박으며 우어어, 비명을 지르고 있다. 놀란 그가 아들의 머리를 두 팔로 감싸 안는다. 지난 23년간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아들의 목이 그의 팔 안에서 버둥거린다. 아들의 볼은 눈물로 온통 흥건하다. "씨발! 벵신 자석만 끼고돌다가 인자 산 자석 죽는 꼴 보게 생겠네. 조오컸소!" 콰당, 대문이 거칠게 닫히고 아내의 곡소리가 늦가을 바람처럼 어지러이 집 안을 휘돈다. "아이고오! 우리 경우가 그때게, 사고 났을 때게, 팍 죽어부렀으면, 그랬으면 좋았을랑가……." 울음 끝에 아내가 탄식한다. 아직도 경우는 그의 품 안에서버둥거린다. 버둥거림이 점점 힘차지는 것을 그는 온몸으로느낀다. 이것은 기적이다. 경우는 또 기적을 만들어냈다. 그의 가슴이 벅차오른다. 시들어가는 햇살이 눈물로 번들거리는 아들의 뺨 위로 힘없이 내려앉는다. 벌써 짧은 겨울 낮이저물고 있다. - P150
핏줄
왕시루봉이 구름 한 점 없이 말갛다. 오늘도 비 오기는글렀다. 장마철이 열흘 남짓 지났는데도 뜨거운 뙤약볕만내리쪼인다. 60년 경력의 농사꾼인 그도 철을 종잡을 수 없게 된 지 오래다. 매화와 동백이 시들 무렵 연노란 산수유가 들판에 봄빛을 불러오고, 아련한 연노랑 빛이 성에 차지않는다 싶을 즈음 진달래가 산등성을 벌겋게 물들이고, 그꽃들이 죄 사라진 뒤에야 봄볕에 지친 보랏빛 오동이 숨을헐떡이며 커다란 꽃잎을 축 늘어뜨려 여름을 알렸는데 요즘은 온갖 꽃들이 동시다발로 피어난다. 지난겨울에는 제가 무슨 고결한 매화나 되는 양 한겨울 눈 속에 움튼 버들강아지를 보기도 했다. 농사일에도 철이 사라진 지 오래다. 철따라 농사를 지었다가는 빚더미에 올라앉기 십상이다. - P153
"밥 차례! 시방이 몇 신디……그는 괜히 아내에게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내는 느릿느릿 얼갈이배추를 씻으며 콩닥콩닥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말대답이었다. "넘들은 나이가 들면 둥글둥글 부처를 닮아간당만 우리집 영감은 먼 영문으로 늙을수록 심통만 늘어가 모리겄네. 묏자리를 잘못 썼능가, 집터가 안 좋응가…………" 제발 사근사근 말 좀 했으면 싶던 젊은 날에는 꿀 먹은벙어리마냥 입을 꽉 다물어 애를 태우더니 뒤늦게 말문이터졌는지 요즘에는 그가 한 마디 하면 백 마디로 돌아왔다. 늙은이 살가죽처럼 질긴 아내의 잔소리는 피하는 게 상책중 상책이었다. 아침부터 뭘 볶는지 온 집 안에 기름내가진동했다. 아침 밥상 위에 떡하니 올라온 것은 모양도 요상한 샛노란 부침개였다. - P172
내는요즘 들어 끼니마다 베트남 음식이 밥상 위에 올라왔다. 아내가 베트남 요리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지난봄, 쑤언의생일이 지난 뒤였다. 한국에서 맞는 첫 번째 생일이라고 아내는 오랜만에 옛 실력을 발휘하여 백설기에 약밥까지 한국식으로 떡 벌어진 한 상을 차렸다. 쑤언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맙게 그 상을 받았다. 그날 밤 화장실에 다니러 간 아내가 찬바람을 몰고 혀를 차며 돌아왔다. 초봄이라 쌀쌀한밤공기에 잠이 깬 것인지 한참 뒤척이던 아내가 넌지시을 건넸다. "영감, 쑤언이 봄이라요. 봄에 태어났다고 쑤언이랑마." 봄이 그렇게 예쁜 이름인 줄 그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쑤언은 베트남 얘기를 단 한 번도 입에 올린적이 없었다. "초승달을 봅시로 울고 있어라. 월남이 그리운서. 하기사 여우도 죽을람시로 고향 쪽을 보고 죽는단디 워째 고향이 안 그립겄서. 짠하고 안됐어라." - P173
간간히 쑤언의 억눌린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비명조차 마음껏 지르지 못하게 만든 것은 비명을 질러봐야무용지물인 오랜 세월이었으리라. 으앙! 어미 대신 우렁찬비명을 지르며 아이가 나왔다. 잠시 후 분만실 문이 열렸다. "사내아입니다." 간호사가 얇은 천에 둘둘 말린 아이를 그의 품에 안겨주었다. 저도 모르게 움찔 그는 눈을 감았고, 심호흡을 하며지발, 간절한 기도와 함께 천천히 눈을 떴다. 순간, 눈앞이캄캄했다. 까맸다! 어미를 쏙 빼닮아 새까맣고 오종종한 아이가 벌써 눈을 뜨고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유난히눈동자 검은 이 아이가 한산 이씨 28대손 이강호였다.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그는 엉거주춤 아이를 안은 채 화석처럼 굳었다. 아이고, 아가! 우당탕 문이 열리며 저만치 아내의 고함 소리가 아득하게 멀었다. - P178
고등학교 때부터 술 좋아하고 문학 좋아하던 박은 문청들의 잡소리 듣는 재미에 빠져 그냥저냥 식객으로눌러앉았다. 그러다 전쟁이 터졌고, 경기고에 다니던 박은영어 좀 안다는 죄로 선배 따라 켈로 부대원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사람들은 잘도 일상으로 복귀했다. 박은 그게쉽지 않았다. 전쟁은 박에게 술로 남았다. 술 없이는 도무지시간이 흘러가질 않았다. 술을 마시면 시간이 훨훨 날아갔다. 술과 더불어 한평생을 하룻밤처럼 흘려보내는 것이 스물둘 박의 소원이었다. 그래도 평생이 하룻밤과 같지는 않았다. 술에서 깨고 보면 또 지루한 시간들이 막막하게 놓여있었고 하여 다시 술잔을 잡았다. - P182
"얘, 너는 어디서 빌어먹니?" 발로 걷어차인 데다 곤한 잠을 깨웠는데도 취객은 성을내지 않았다. 나? 하고 반문하더니 가만히 제가 기대앉은집을 가리켰다. 그곳은 전쟁 전 최의 집이었다. 최의 가족은 죄 월북하고 남도부 부대원이었던 최는 홀로 남에 남았다. 복역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집은 백부가 차지하고 있었다. 자기 집에서 최는 더부살이를 하는 셈이었다. 최의 백부는 집안 말아먹은 좌익이라면 치를 떨었고, 하여 빨치산이었던 최에게 더 엄격했다. 늦잠을 자도 술을 마셔도 저놈이 저러니 빨갱이지, 귀에 딱지가 앉았다. 취한 최는 그놈의빨갱이 소리 또 들을까 싶어 통금 가까운 야밤에 집을 지고앉아 노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잠자는 동안 취기가 걷혔는지 최는 또랑또랑 되물었다. - P183
박은 이내 아쉬운 시선을 거둔다. 젊어서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여자는 놓쳐도 술을 놓치는 법은 없던 박이다. 그러나 지금은 지팡이 짚고 돌아갈 길이 아득하다. 생각난 김에 박은 지팡이를 잡는다. 언제나처럼 김이 동작 빠르게 계산을 한다. 평생을 김에게 얻어먹었으나 박도 최도 미안한 기색조차 없다. 있는 놈이겨우 짜장면으로 생색이야. 그런 지청구나 먹지 않으면 다행이다. 평생 마음 놓고 얻어먹을 친구가 있다는 것도 생각하면 복이다. 부모 잃고 형제 잃고 꿈도 잃고 대신 친구 등쳐먹을 복은 챙겼다. - P206
혜화동 로터리에 차들만 분주하다. 로터리를 둘러싼 널찍한 인도에서 최와 박은 머뭇거린다. 택시를 잡을 곳이 마땅치 않다. 로터리를 돌아 나가는 차들이 대낮인데도 뒤엉켜 있다. "여기서는 택시 잡기 어려워요. 성대 쪽으로 조금 올라가죠." "흥, 너는 아는 것 많아 좋기도 하겠다. 예순 넘으면 잘난놈이나 못난 놈이나 똑같고, 일흔 넘으면 배운 놈이나 못배운 놈이나 똑같고, 여든 넘으면 산 놈이나 죽은 놈이나똑같다더라." 1-45지팡이 짚고 김의 뒤를 따라 로터리를 돌아나가며 박이또 쏘아붙인다. 최도 한마디 거든다. "하나 더 있다. 얘. 빨치산이나 켈로나." - P207
김이 택시를 잡고, 몸 제일 불편한 최가 먼저 오른다. 지팡이 한 손에 들고 겨우 차에 오른 최가 문을 닫기 전, 박과김을 일별한다. "간다." 김과 박은 고개를 끄덕인다. 작별은 평소처럼 무덤덤하다. 이내 문이 닫힌다. 멀어지는 차의 꽁무니를 박과 김이물끄러미 바라본다. 또 보자, 라는 인사가 언젠가부터 간다, 로 바뀌었다. 그러고도 몇 번 또 보았다. 끊임없이 차들이 로터리를 돌아 나오고 그중에는 박 태울 빈 차도 있다. 박의 인사 또한 간결하다. 간다." 언제나처럼 김이 마지막으로 남는다. 박과 최가 떠난 자리, 제 몸뚱이보다 더 무거운 한 삶을 지고 그 삶에 짓눌려허덕이던 그들의 무게 따위 존재도 하지 않았던 듯, 거리는평온하다. - P208
땅은 파도 파도 끝이 없다. 일을 하는 순간에는 끝이 없다는 생각을 지워야 한다. 농사일과는 다르다. 아무리 넓은논도 밭도 끝은 보인다. 끝까지 갈 일이 아득해도 하다 보면 어느 샌가 끝이 나 있곤 했다. 그는 고추 따기가 가장 싫었다. 계집처럼 쭈그려 앉아 고추를 따다 보면 허리가 끊어지거니와 무슨 놈의 고랑이 그렇게 긴지, 검푸른 고추 터널의 끝 부근에서 어룽거리는 빛 때문에 아득히 현기증이 일었다. 고추 딸 때가 다가오면 온종일 술에 취한 듯 세상이어지러워 차일피일 핑계거리를 만들었고, 꼭지가 말라들즈음에야 그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집을 나섰다. 벼룩처럼 들러붙어 등골을 뽑아먹는 자식들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지게를 내던지고 훌훌 세상으로 날아가고 싶었다.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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