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배 속에서 마치 움직이는 공기 방울이라도 되는 것처럼 정신없이 움직여대는 바람에 잠을 자지 못하는 밤이면 나는 모두가 예상하고 있는 것과 다르게 아이가 아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했다. 니노를 닮은 아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니노의 마음에들었으면 좋겠다고, 니노가 제일 사랑하는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언제나 비참한 감정이나 폭력적인 감정을 현명하게 다스릴 줄 아는 균형 잡힌 성격의 소유자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이상적인 모습을 되찾으려 애를 써봐도 임신 말기에 나는도무지 안정을 찾지 못했다. 지진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에는지진이 내게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 같았는데 알고 보니 내면 깊은 곳, 배 속까지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 P251

하지만 내 기분을 엉망으로 만든 것이 지진의 여파만은 아니었다. 묘사력이 뛰어난 릴라의 암시도 한몫했다. 언젠가부터 나는 길을 가면서 밀라노에서는 별 생각 없이 보고 지나쳤던 주사기가 길가에 떨어져 있는지 유심히 살피게 됐다. 동네 공원에서 주사기를 찾아내면분노가 뭉게구름처럼 피어나 당장 마르첼로와 내 동생들에게 쫓아가 한바탕 해대고 싶어졌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결국 나는 가증스러운 말과 행동을 하고 말았다. 어느날 혹시 릴라에게 페페와 잔니 이야기를 했냐면서 나를 성가시게 하는 어머니에게 나는 쌀쌀맞게 쏘아붙였다.
"어머니, 리나는 그 애들에게 일자리를 줄 수 없어요. 마약쟁이 오빠만으로도 버겁다고요. 게다가 자기 아들도 걱정되겠죠. 우리 가족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리나에게 떠넘길 수는 없어요."
어머니는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단 한번도 마약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제서야 나는 입에 담아서는안 될 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 P252

그 시절 나는 너무나 우울해서 선의의 거짓말조차 할 수 없었다.
엘리사가 어머니에게 나 때문에 기분이 상했고 다시는 나를 보고 싶지 않다고 한 데다 페페와 잔니도 어머니에게 내가 무슨 경찰이라도되는 것처럼 자기들 앞에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게 하는 일이 다시는일어나지 않게 하라고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나는 결국 거짓말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릴라와 이야기를 했는데 릴라가페페와 잔니를 돌봐주겠다고 약속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는내가 자신 없어 하는 것을 알아채고 우울하게 말했다.
"그래, 잘했다. 이제 그만 가보렴. 아이들을 돌봐야지."
나는 내 자신에게 화가 났다. 며칠 동안 어머니는 더 불안해했다.
빨리 죽고 싶다고 투덜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를 병원에 모시고 갔는데 그날 어머니는 평소보다 편안해 보였다. - P261

"불안해하지 마. 모유 안 나올라."
모유 이야기는 확실히 내게 도움이 됐다. 나는 임마콜라타와 가까이 있어야만 젖이 잘 나오는 것처럼 요람 옆에 꼭 붙어 앉았다. 여성의 몸이란 무엇인가. 배 속에 있을 때 아이에게 영양분을 주었는데태어난 후에도 아이는 여전히 내 가슴에서 영양분을 취하고 있지 않은가.
나에게도 어머니 배 속에 있던 시절과 어머니의 가슴에서 젖을 빨았던 시절이 있었다는 생각이 났다. 어머니의 가슴은 내 가슴만큼이나 컸다. 아니 어쩌면 더 클 수도 있다. 어머니가 아프기 전까지만해도 아버지는 어머니의 가슴을 두고 야한 말을 하곤 했다. 나는 어머니가 브래지어를 푼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젊었을 때도 늙었 - P276

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아픈 다리 때문에 자기 몸에 자신이 없었다. 항상 몸을 감추려고만 했다. 그러면서도 포도주 한 잔이면 아버지 못지않은 야한 말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과시하면서 아버지의 외설적인 성향을 자극했다. 순전히 뻔뻔스럽게 연기하는 것이었다. 다시 전화벨이 울리기에 나는 달려갔다. 또 릴라였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퉁명스러웠다.
"여기 문제가 좀 있어, 레누."
"상태가 안 좋아지셨어?"
"아니, 의사들은 침착해. 그런데 마르첼로가 와서 미친 짓을 하고있어" - P277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관심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어머니는 자기어린 시절과 사춘기 시절 이야기를 시작했다. 5세 때로 돌아가는가하면 어느새 12세 때로, 그러고는 14세 때로 미끄러져 들어가 그 시절 자신이 겪었던 일과 친구들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어느 날아침 어머니는 내게 사투리로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사람은 결국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단다. 나는 항상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내 차례가 될 거라고는 한 번도생각해본 적이 없단다. 지금도 도무지 믿기지 않는구나."
한번은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웃음을 터뜨리더니 내게 속삭였다.
"아이에게 세례를 주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다. 다 부질없는 짓이야 이제 죽으면 나도 한낱 조그만 조각으로 부서져 버리겠지."
느릿느릿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나는 그제야 어머니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은 나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달았다. 어머니는 나와 작별인사를 할 때면 먼 옛날 내가 어머니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이제는어머니가 내 안에 쏙 들어와 계속 남고 싶다는 듯이 내 품에 꼭 안겼다. 어머니가 건강할 때는 어머니의 몸이 내 몸에 닿는 것이 싫었지만 지금은 좋았다. - P286

가끔 나를 다정하게 대해줄 때도있었지만 아버지는 대개 내 일에 무심했다. 어쩌다 어머니와 싸울때 내 편을 들어준 적이 있는 정도였다.
아버지와는 항상 피상적인 관계만을 유지했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필요에 따라서 아버지에게 역할을 부여하기도 하고 박탈하기도했다. 그런데 내 인생에 이래라저래라 참견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특히 나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아버지를 주변부로 내몰았다. 그런 아내가 기력을 잃자 이제 아버지는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인사하면 아버지는 내 인사를 받아주면서 말했다.
"네가 어머니와 함께 있는 동안 나는 나가서 담배나 한 대 피우고오마."
가끔 이토록 평범한 아버지가 그 험한 나폴리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의구심이 들 때도 있었다. 직장에서도 동네에서도 하물며 집에서조차 말이다. - P287

카르멘이나 알폰소와 보내는 아침시간은 기억에 남고 흥미로웠다. 두 친구와 있다 보면 몰락을 앞둔 어머니의 고향과 릴라의 영향아래 발전하고 있는 고향이 서로 가까워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카르멘에게 릴라가 내 어머니를 위해 한 일을 들려주었다.
카르멘은 만족스러워하면서 말했다.
‘누가 리나를 막을 수 있겠어."
카르멘은 릴라에게 무슨 신통한 능력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했다.
어머니가 진료를 받을 동안 알폰소와 함께 깨끗한 병원 복도에서15분 남짓한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됐다. 알폰소도 언제나처럼 릴라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는 데 열을 올렸다.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가감없이 말했기 때문이었다. 알폰소가 말했다.
"리나는 내게 전도유망한 일을 가르쳐줬어." - P289

알폰소가 말했다.
"리나가 없었으면 나는 뭐가 됐을까. 아마 보잘것없는 존재가 됐을 거야. 평생 성취감을 맛보지 못했을 거야. 그저 살아 숨 쉬는 고깃덩이에 지나지 않았을 거야."
1019알폰소는 릴라와 마리사를 비교했다.
"나는 마리사와 헤어졌어. 어차피 마리사는 마음 내키는 대로 바람을 피우고 다녔으니까. 자기 아이들에게 내 성을 물려주었는데도내게 화가 나 있었어.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나를 괴롭혀. 내 얼굴에 수없이 침을 뱉었어. 마리사는 내가 자기를 속였대."
알폰소가 변명했다.
"속이다니, 레누. 너는 지성인이니까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제일 크게 속은 사람은 바로 나야. 나 자신에게 속았거든. 리나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그렇게 살다 죽었을 거야."
알폰소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 P290

"리나가 내게 준 최고의 선물은 내가 명확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해준 일이야. 리나는 내가 여자의 맨발을 스칠 땐 아무것도 느낄수 없지만 남자의 맨발을 만지고 싶은 욕망에 죽을 것 같다고 말할수 있게 해줬어. 그의 손을 쓰다듬고 손톱깎이로 그의 손톱을 다듬어주고 거뭇한 여드름을 짜주고 싶다고 말할 수 있게 해줬어. 무도회장에서 그에게 왈츠를 줄 알면 내게 춤을 청해 달라고, 내게 얼마나 리드를 잘 하는지 보여 달라고 말할 수 있게 해줬어."
알폰소는 머나먼 과거 이야기를 꺼냈다.
"너랑 리나가 우리 집에 와서 아버지에게 인형을 돌려달라고 했던 일을 기억해? 그때 아버지가 나를 부르면서 비아냥댔지. ‘알폰소! 네가 인형을 가져간 게냐?‘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던 건 내가 가 - P290

문의 수치였기 때문이었어. 내가 누나 인형을 가지고 놀고 어머니의목걸이를 하고 다녔거든."
알폰소는 내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자기의 정체성에 대해 누군가 말할 대상이 필요한 것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랐어. 물론 내가 생각하는 것과도 달랐지. 나는 속으로 생각하곤 했어. ‘내안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어. 이름조차 없는 어떠한 존재가 내 혈관속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어. 하지만 나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어. 무엇보다도 그 존재가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몰랐어. 그러다 리나가내게 억지로 리나 모습의 일부를 취하게 한 거야. 달리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 리나가 어떤지 잘 알잖아. 리나는 이렇게 말했어.
‘이것부터 한번 해봐. 어떻게 되는지 한번 보자.‘ 그렇게 해서 우리는 섞이기 시작했어. 정말 재미있었어. 이제 나는 예전의 나도 아니고 리나도 아니야. 조금씩 뚜렷한 형태를 갖춰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거야." - P291

람이알폰소는 내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어 기뻐했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우리 사이에 새로운 신뢰 관계가 형성됐다. 학창시절 집까지 함께 걸어오면서 생겼던 신뢰와는 또 다른 감정이었다.
나는 카르멘과도 더 가까워진 것을 느꼈다. 그러다 카르멘과 알폰소둘다 각자 표현은 다르게 했지만 내게 더 많은 것을 바라고 있다는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는 두 사건을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두번 다 마르첼로가 병원에 왔을 때였다.
내 동생 엘리사와 조카 실비오는 평소 도메니코라는 노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병원에 왔다. 도메니코는 두 모자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가는 길에 아버지를 동네까지 태워다주곤 했다. - P291

하지만 명단의 일 순위는 누가 뭐래도 마르첼로였다. 알폰소 말로는 자기를 가장 증오하는 인간은 마르첼로라고 했다.
알폰소는 만족감과 불안감이 뒤섞인 말투로 말했다.
"마르첼로는 나 때문에 미켈레가 미친 거라고 생각해."
알폰소는 키득거렸다.
"리나는 내가 자기를 닮아가도록 나를 유도했어. 내가 자기를 닮으려고 애쓰는 게 좋았던 거야. 내가 자신의 모습을 어떤 식으로 왜곡하는지 보는 게 좋았던거야. 그 왜곡이 미켈레에게 끼친 영향도마음에 들었을 테고, 사실 나도 그래."
알폰소는 말을 멈추고 내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나는 알폰소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임마에게 젖을 먹였다. 알폰소와 카르멘은 내가 나폴리로 이사 와서 우리가 가끔 만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둘은 내가 고향에 완전히 동화되기를 원했다. 내가 수호신처럼 릴라를 보좌해주기를 바랐다. 그들은 나와 릴라에게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하면서 자기들을 언제나 곤경 - P293

에서 구해주는 신처럼 행동해달라는 무언의 압력을 보내고 있었다.
평소에 나는 자신들의 일에 더 관여해주길 바라는 그들의 요청이 부당한 압박으로 느껴졌다. 릴라도 나름대로 내게 항상 그런 압력을행사하곤 했었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내 마음이 움직였다. 나는 알폰소의 목소리에 동네 사람들에게 나를 자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것처럼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내 어머니의 힘겨운 목소리가 겹쳐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엄마를 품에 꼭 껴안고 바람을 막아주려고 포대기를 여몄다. - P294

릴라는 필요할 때마다 바로 나에게 달려와 주었다. 물론 카르멘이나 알폰소처럼 나를 병원에 데려다주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데데와엘사가 열이 나서 학교에 못 가게 될 때마다(임마가 태어난 후 약 3주 동안은 날이 추운 데다 비까지 와서 아이들이 자주 아팠다) 기꺼이 나서주었다. 릴라는 엔초와 알폰소에게 회사를 맡기고 타소 가까지 올라와 세 아이를 돌봐주었다.
나는 릴라가 내 아이들을 돌봐주는 게 좋았다. 아이들이 릴라와보내는 시간은 언제나 유익했다. 릴라는 데데와 엘사를 막내와 친해지게 하는 방법을 알았다. 데데에게 책임감을 키워주고 엘사를 통제할 줄도 알았다. 미렐라처럼 아이가 울 때마다 젖꼭지를 입에 물리지 않고도 임마의 울음을 잠재울 줄도 알았다.
유일한 문제는 니노였다. 내가 혼자 있을 때는 항상 바쁜 니노가하필 릴라가 세 아이와 있을 때 기적적으로 시간을 내 나를 도와주러 집에 오기라도 할까봐 두려웠다. 그런 생각 때문에 마음속 깊은곳은 잠시도 편안하지 않았다. 릴라가 도착하면 나는 릴라에게 온갖당부를 늘어놓았고 병원 전화번호를 써주고 이웃집 안토넬라에게급할 때 연락을 달라고 부탁한 뒤 카포디몬테를 향해 달려갔다. - P295

하지만 그보다 더 끈질기게 나를 괴롭히는 두려움은 따로 있었다.
운전하면서 생각하다보면 그 일이야말로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이가장 큰 것 같았다. 그 일은 바로 니노가 집에 있을 때 릴라의 산통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나는 겁이 나 죽겠으면서도 분별력 있는 어른 흉내를 내는 데데와 그 틈을 타 뭐라도 훔쳐보려고릴라의 가방을 뒤지고 있는 엘사와 배고픔과 기저귀 때문에 생긴 발진으로 괴로워서 흐느껴 우는 엄마를 요람에 내버려두고 니노가 급히 릴라를 병원까지 데려다주는 장면을 상상했다.
실제로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니노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어느 날 아침, 시간에 맞춰 30분 만에 집으로 돌아와 보니 릴라가 없었다. 산통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릴라는 사물이 진동하면서 형태가 망가지는 순간을 참지못했다. 릴라는 어떤 고통도 힘들어했고 언어가 의미를 잃고 공허해지는 순간을 끔찍해했다. 그런 릴라를 알기에 나는 릴라가 고통을잘 견뎌내기를 빌었다.  - P296

의사는 한층 더 격앙된 어조로 외쳤다.
"친구들끼리 있으니 하는 말이에요."
의사는 기분이 상했는지 갑자기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 의사는 뭔가 어색한 듯한 진지한 태도로 우리가 정말 릴라를 좋아한다면 (물론 여기서 우리란 니노와 나를 말한다) 릴라가 정말 좋아하는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릴라를 도와줘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춤추는 것처럼 가만히 있지 못하는 릴라의 불안한 머리가 그렇다. 의사는 그렇게 말했다) 릴라뿐만 아니라 릴라 주변에 있는 모든사람을 곤란하게 만들 거라고 했다. 의사는 그날 분만실에서 자연의 섭리에 반하는 투쟁, 즉 어머니와 아이의 끔찍한 싸움을 목격했다는말을 되풀이했다.
"정말이지 기분 나쁜 경험이었어요."
의사가 말했다.
그렇게 태어난 릴라의 피조물은 여자아이였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아들이 아니라 딸이 태어난 것이다. 내가 병원에 가자 릴라는정신을 잃을 정도로 지쳐 있었는데도 내게 자랑스럽게 자기 딸을 보여주었다. - P300

아이들이 태어나자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되었다.
릴라와 나는 서로 통화도 하고 두 갓난아이를 데리고 함께 산책도했다. 우리 이야기가 아닌 아이들 이야기를 끊임없이 나눴다. 적어도 우리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실제로도 서로의 아이에게 세심하게관심을 기울이면서 우리 관계는 예전보다 풍요롭고 완전해졌다. 우리는 한 아이의 건강과 질병이 다른 아이의 건강과 질병을 선명하게비추는 거울이라도 되는 것처럼 엄마와 눈치아를 모든 면에서 비교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두 아이의 건강을 지키고 병에 걸릴위험을 없애기 위해 언제라도 행동할 수 있는 태세를 갖췄다. 이우리는 아이들을 건강하게 키우는 데 좋고 유용한 모든 정보를 공유했다. 누가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유아식을 발견하고 더 편한 기저귀를 찾고 기저귀 발진에 가장 효과 있는 로션을 찾는지 선의의경쟁을 벌였다. - P301

어머니는 릴라가 가진 힘과 마르첼로가 가진 힘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양쪽에 똑같은 압력을 행사했고 그 결과 어머니에게는 세상의 전부인 고향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식들의 안위를 보장받아 그저 행복할 뿐이었다.
어머니는 평화로운 기쁨 속에서 이틀을 더 버텼다. 나는 어머니가 사랑해 마지않는 데데를 어머니에게 데려갔다. 임마도 어머니 품에 안겨드렸다. 어머니는 평소 별로 좋아하지 않던 엘사까지 다정하게 대했다. 나는 어머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100세도 아니고 이제 겨우 예순인데 어머니는 얼굴이 쭈글쭈글한 반백의 노인이 다 돼 있었다. - P304

나는 처음으로 세월의 힘을 실감했다. 세월은 이제 나도 마흔의문턱으로 이끌고 있었다. 세월의 속도에 삶이 마모되고 죽음의 가능성도 구체화되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어머니에게 일어나는 일이라면 언젠가는 나에게도 일어날 거야.
피할 수 없어‘
임마가 태어난 지 두 달이 조금 지난 어느 날 아침 어머니가 내게가냘픈 소리로 말했다.
"레누, 이제 나는 정말로 행복하구나. 이제 내 걱정은 너밖에 없다.
하지만 너는 너니까. 너는 언제나 네가 원하는 대로 상황을 바로잡 - P304

았지. 그러니 나는 너를 믿는다."
어머니는 그대로 잠이 든 후 혼수상태에 빠졌다. 어머니는 그 상태로 며칠을 더 버텼다. 죽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임마와 함께 어머니 병동에 있는데 어머니의 고통스러운 숨소리가 멈추지 않았던 것이 기억난다. 그 소리는 병원에서 들리는 일상적인 소리의 일부가된 것 같았다. 아버지는 그 소리를 참지 못해 그날은 울면서 집에 계셨다.
엘리사는 실비오에게 바람을 쐐주러 뜰로 나갔고 내 남동생들은어머니 병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작은 방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침대시트 밑으로 드러난 밋밋한 굴곡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부담스러울 만큼 거대했던 어머니가 이제는 거의 사라질 것같았다. 나는 어머니의 무게 때문에 평생을 거대한 바위에 눌린 벌레처럼 살아왔다. 나는 그런 어머니에게 보호와 억압을 동시에 받았다. 나는 이제 그만 어머니가 헐떡거리지 않기를 바랐다. 지금 당장그렇게 되기를 빌었다. - P305

놀랍게도 내 바람은 현실이 됐다. 갑자기 병실에 정적이 흘렀다.
나는 잠시 기다렸다. 일어나서 어머니 곁으로 다가갈 힘이 없었다.
그때 임마가 입술을 오물오물 빨면서 정적을 깨뜨렸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로 다가갔다. 우리 둘, 그러니까 나와 잠결에도 아직자신이 내 몸의 일부인 것처럼 느끼고 싶어 내 젖가슴을 열심히 찾는 내 아이는, 그 병든 공간에서 어머니가 남긴 것 가운데 유일하게건강하고 살아 숨 쉬는 것이었다.
마침 그날 나는 어머니가 20년도 더 지난 먼 옛날에 내게 선물해준 팔찌를 차고 있었다. 평소에는 시어머니 취향인 세련된 장신구를착용했기 때문에 정말 오랜만에 그 팔찌를 찬 것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어머니에게 받은 그 팔찌를 자주 찼다. - P305

나는 좀처럼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눈물 한 방울흘리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죽음에 따른 고통은 오래갔다. 아니 사실아직도 그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어머니가 무디고 속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두려워했고 그런 어머니에게서 도망치려고 했다. 그런데 어머니의 장례식을 마치고 나니 갑작스럽게 불어온 거센 비바람에 주변을 둘러 봐도 피할 곳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몇 주 동안 밤낮 할 것 없이 어머니의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거리고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어머니의 모습은 내 상상속에서 심지 없이 타오르는 수증기 같았다. - P306

어머니를 간호하던 때가 그리웠다. 그때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 다른 방식으로도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었다. 나는 내가 어렸을 적 젊었던 어머니와 좋았던 추억을 떠올리면서 그때의 느낌을계속 간직하려 했다. 내 죄책감은 어머니를 붙잡아두고 싶어 했다.
나는 서랍에 어머니의 머리핀이며 손수건, 가위 등을 넣어두었지만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팔찌도 마찬가지였다. 임신 중에 엉덩이께의 통증이 재발해 임마를 낳고 나서도 사라지지 않았는데도 병원에 가지 않은 것도 아마 그런 이유에서였던 것 같다. 나는 그 통증을 어머니가 내 몸에 남기고 간 유산처럼 키웠다.
어머니가 임종 직전에 내게 한 말("너는 너니까. 그러니 나는 너를 믿는다")도 오랫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타고난 - P306

내 성향과 내가 받아온 교육을 고려할 때 나라면 그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으며 돌아가셨다. 이런 생각은 나의 내면에영향을 미쳤고 궁극적으로 내게 도움이 되었다.
나는 어머니가 나를 제대로 봤다는 사실을 증명해보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다시 나 자신을 열심히 돌보기 시작했다.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책을 읽고 글을 썼다. 나는 지엽적인 정치적 현안에 완전히 흥미를 잃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다섯 개의 정당과 공산당 사이에 벌어진 싸움에 얽힌 음모에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것은 니노의 전문 분야였다.
그 대신 나는 부패와 폭력 속에 표류하는 이탈리아의 상황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예의 주시했다. 페미니즘 관련 서적도 꾸준히 읽었다. 두 번째 책의 성공에 힘입어 여성독자를 겨냥해서 새로 창간한 잡지에 기사를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새소설 작업이 꽤 진척되었다는 사실을 밀라노 출판사가 믿게 하는 데가장 많은 기력을 쏟아부었다. - P307

니노는 그전에도 내게 아이들을 돌보고 장을 보고 음식을 해주고집안일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구해보라는 말을 했었다. 하지만나는 니노에게 과한 요구를 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 언제나필요 이상으로 경제적인 부담을 지우고 싶지는 않다고 대답했었다.
평소 나는 내게 도움이 되는 일보다 니노가 좋아할 만한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으니까. 게다가 나는 지난날 피에트로와 겪었던 문제가 우리 사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나는 니노의 예상을 뒤엎고 바로 좋다고 답했다.
"그래. 좋아. 최대한 빨리 누군가를 좀 구해줘."
순간 내가 내 어머니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 같았다. 돌아가시기전의 가녀린 목소리가 아니라 전투력 충만하던 시기의 목소리 말이다. 돈이 무슨 상관이람. 나는 내 미래를 생각해야 했다. 여기서 내미래는 몇 달 내에 소설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훌륭한소설을 그 무엇도, 심지어 니노까지도 내가 내 일을 잘 해내는 것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 P311

나는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두 권의 전작은 내게 어느 정도의 수입을 가져다주었다. 여기에는 번역본 출간도 한몫했다. 하지만 얼마전부터는 인세가 들어오지 않았다. 새로 집필할 소설의 선금으로 받은 돈과 아직 받지 못한 돈은 곧 바닥날 것이다. 늦은 밤까지 기사를써봤자 소정의 원고료를 받거나 그마저도 받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러니 나는 결국 피에트로가 매달 꼬박꼬박 보내주는 돈과 니노가집 임대료와 공과금 명목으로 보태주는 돈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니노가 아이들과 내게 옷을 사 입으라고 종종 따로 돈을 줬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폴리로 이사 오면서 내가 겪게 된변화와 수많은 불편과 고통을 생각하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 P312

그날 저녁 나는 최대한 빨리 경제적으로 자립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정기적으로 글을 쓰고 책을 내야 했다. 작가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해야 했다. 글을 써서 돈을 벌어야 했다. 그렇게 마음먹은것은 문학적인 소명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의 미래 때문이었다. 니노가 과연 나와 내 딸들을 평생 보살펴줄까.
내가 약간이나마 (정말로 약간일 뿐이었다) 니노만 믿고 있을 수없다고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그 때문에 특별히힘들지도 않았다. 예전에 니노가 나를 떠날까봐 두려워했던 감정과는 달랐다. 갑자기 시야가 확 좁아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먼 미래를 생각하는 대신에 지금 당장 니노에게서 받는 돈보다 더 많은돈을 받기는 힘들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 돈이 과연 내게 충분한지 결정을 내려야 했다. - P312

나는 여전히 니노를 사랑했다. 나는 그의 길고 호리호리한 몸매와논리 정연한 지성을 좋아했다. 나는 그가 이뤄내는 일의 성과로도그를 매우 존경했다.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니노의 재능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발전해 많은 사람에게 각광받았다. 경제 위기와건축업, 금융업과 민영방송을 잠식한 비밀스러운 자본의 움직임을분석한 니노의 최근 글은 큰 호응을 얻었다. 시아버지 마음에 들었다는 글도 아마 이 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니노가 어딘지 거슬리기 시작했다. 예컨대 니노가 내전 시아버지가 다시 자기에게 호의를 보였다면서 좋아하는 모습에기분이 상했다. 니노가 언젠가부터 피에트로는 자기 아버지와 다르다고 말하기 시작한 것도 탐탁지 않았다. 니노는 피에트로가 오로지물려받은 이름과 공산당에 대한 미련한 집착 때문에 존중받는, 상상력이 부족하고 별 볼일 없는 교수 나부랭이에 불과하다고 했다. 반면 그의 아버지 아이로타야말로 진짜 교수이자 사회주의 좌파 투쟁의 대표적인 인물이라면서 헬레니즘 문명의 근본에 대해 그가 집필한 저서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 P313

니노가 시어머니에 대해 새삼 호감을 표현했을 때도 나는 상처를받았다. 니노는 계속해서 시어머니를 홍보 능력이 뛰어난 대단한 여자라고 칭송했다. 한마디로 니노는 권위 있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데 민감했다. 하지만 그만한 권위가 없거나 지금은 권위가 없지만앞으로 권위 있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은 밀어내버리거나 때로는 질투심 때문에 그들을 모욕하곤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때는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분위기가변하고 있었고 기존의 글과는 다른 종류의 글이 힘을 얻고 있었다.
이제 아무도 극단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 P313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을 좋아하지. 그건 정말 멋진 일이야. 그렇지만 엄마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잘 몰라. 그러니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마치 그게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전부 뒤엎자고 하지. 하지만 너는 선생님께 지금이미 존재하는 세계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씀드리렴."
"어떻게?"
내가 물었다.
"법으로."
"판사들이야말로 통제해야 할 대상이라고 네 입으로 말했었잖아."
니노는 지난날 피에트로가 그랬던 것처럼 못마땅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들어가서 책이나 쓰도록 해."
니노가 말했다.
"나중에 우리 때문에 일하지 못했다고 하지 말고."
니노는 데데에게 권력 분할에 대해 강의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들어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 P317

그제야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릴라와 사랑을 나눈 다음에 나타난 사내와 릴라와 사랑에 빠지기 전, 어린 시절 내가 사랑에 빠졌던 소년 사이에 분열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니노는 언제나 한 사람이었다. 나는 실바나의 몸을 범할 때 니노가 지은 표정에서 그 사실을 확인했다. 니노의 표정은 그의 아버지 도나토 사라토레의 표정과 똑같았다. 마론티 해변에서 내 처녀성을 빼앗을 때의표정이 아니라 빌라 아주머니의 부엌에서 침대 시트 아래로 손을 넣어 내 다리 사이를 만지던 때의 표정이었다.
외계인 따위는 없었다. 그저 지극히 추악한 인간이 있을 뿐이었다. 니노는 애초부터 자신이 그렇게도 되고 싶지 않아 하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실바나의 엉덩이에 리드미컬하게 배를 부딪치면서 친절하게도 그녀가 쾌락을 느낄 수 있도록 애쓰던 그 순간, 니노는 진심이었다. 잘못을 저지른 후에 내게 후회하면서 미안하다고 용서해달라고 애원하고 나를 사랑한다고 맹세할 때 진심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니노는 애초부터 그런 사람이었던 거야.‘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 사실이 위로가 되어주지는 않았다. 나는 끔찍한 공포가 희미해지기는커녕 내 생각 속에서 확실한 안식처를 찾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던 참에 무릎 아래로 뜨끈한 액체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벌거벗은 임마가 내 무릎에 오줌을 싼 것이다. - P331

내가 대답을 피하자 릴라는 나를 몰아세웠다. 릴라는 이런 식으로내 삶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내겐 다른 운명이 있다고 했다. 이렇게 살다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나 자신을 잃어버릴 거라고 했다.
나는 릴라의 목소리가 쌀쌀맞아지는 것을 느꼈다. 나를 릴라가 말리기 위해서 오랫동안 입을 다물어 왔던, 내가 알고 싶어 하던 일까지 말할 준비가 된 것을 직감했다.
나는 두려웠다. 하지만 그동안 몇 번이나 릴라에게서 진실을 들을기회를 엿보지 않았던가. 릴라에게 그 비밀에 대해 듣는 것도 지금릴라에게 달려온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던가.
"내게 할 말이 있으면 해."
내가 속삭이듯 말했다. - P341

그제야 릴라는 마음을 먹었다. 릴라가 나와 눈을 마주치려 했지만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릴라는 니노가 자기를 여러 번 찾았다고 했다. 나와 만나기 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자기랑 같이 살자고 청했다고 했다. 둘이 함께 병원에 내 어머니를 모시고 갔을 때는 평소보다 더 끈질기게 매달렸다고 했다. 릴라에 따르면 의사가 어머니를진찰하고 둘이 대기실에서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니노는 릴라에게나와 함께 사는 이유는 오직 릴라와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였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나좀 봐."
릴라가 속삭였다.
"이런 말을 하는 내가 못됐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보다 훨씬 못된 건 니노야 니노가 가진 최악의 악덕은 그가 얄팍한 인간이라는거야." - P341

그는 변명을 늘어놓으려 했다.
"가끔은 돈에 복종하고 가끔은 존경심에 복종하고 때에 따라서는내 생각을 따르지."
안토니오가 속삭였다.
"상대방의 배신은 말이야. 적절한 시기에 알게 되지 않으면 알아봤자 소용이 없어. 사랑에 빠져 있을 때는 뭐든 다 용서하게 되거든.
배신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려면 애정이 조금이라도 식어야만 해."
안토니오는 그런 식으로 눈먼 사랑에 대한 고통스러운 문장을 혼란스럽게 늘어놓았다. 안토니오는 그에 대한 예로 지난날 솔라라 형제의 명령에 따라 니노와 릴라를 미행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때 자기는 솔라라 형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었다고 안토니오는 당당하게 말했다.
안토니오는 릴라를 미켈레에게 갖다 바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릴라를 곤란한 상황에서 구출해달라고 엔초를 불렀다. 안토니오는 그때 자기가 니노를 두들겨 팼다는 이야기도 했다.
안토니오가 중얼거렸다. - P344

"내가 그렇게 한 건 무엇보다도 네가 나 아닌 그 자식을 사랑했기때문이야. 또 그 형편없는 자식이 리나에게 돌아가면 리나가 그 자식한테 정이 들어 평생 신세를 망칠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야."
안토니오가 결론을 맺었다.
"내 말 들어봐. 그때도 말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 리나는 내 말을 듣지 않았을 거야. 사랑에 빠지면 눈만 머는 것이 아니라 귀도 멀게 되거든."
나는 기가막혀서 안토니오에게 물었다.
"니노가 그날 밤 리나한테 돌아가려 했다는 사실을 지금껏 한 번도 리나에게 알려주지 않은 거야?"
"말은 해줬어야지."
"왜? 일단 내 머리가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하고는 다시는 그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 그렇게 해봤자 골치 아픈 일만 일어날 뿐이야."
- P345

안토니오는 그새 정말 현명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제야 나는 안토니오가 니노를 두들겨 패서 릴라에게서 억지로 떼어놓지 않았다면 릴라와 니노의 사랑이 얼마간 더 지속됐을 거라는 사실을 알게됐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평생 헤어지지 않고 릴라도 니노도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머리에서 바로 지워버렸다. 가능성이 없을 뿐 아니라 견디기 힘든 생각이었다. 나는 성마른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날 안토니오는 자기 나름대로 판단해 릴라를 구원했고 이제 릴라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 그를 보낸 것이다.
나는 안토니오를 바라보면서 여자들의 보호자가 나타나셨다며 대놓고 비아냥댔다. - P345

나는 피렌체에도 안토니오가 나타났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내가한창 불안정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을 때 안토니오가 나타나 그울퉁불퉁한 손으로 나 대신 결정을 내려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생각했다. 수년 전 릴라 대신 결단을 내렸던 때처럼 말이다. 나는 심술궂게 안토니오에게 물었다.
"그래서 지금은 무슨 명령을 받았어?"
"리나는 나를 여기로 보내기 전에 그 얼간이의 면상을 박살내지말라고 했어. 하지만 예전에 그랬듯이 이번에도 그렇게 하고 싶어."
"너는 믿을만한 사람이 못 되는구나."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
"무슨뜻이야?"
"상황이 복잡해, 레누. 너는 뒤로 빠져 있어. 만약 네가 사라토레아들 녀석이 태어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달라고 하면 내가 그렇게해줄게." - P346

나는 안토니오의 어설픈 진지함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말았다. 소년 시절 동네에서 배운 말투였다. 강인하고 과묵한 사내다운 말투였다. 본래 수줍고 겁 많은 안토니오가 그렇게 되기까지얼마나 노력했을까. 하지만 이제 그 말투는 완전히 안토니오의 것이되었다. 다른 식으로 말하고 싶어도 방법을 몰랐을 것이다. 예전과유일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표준어로 말하려고 애를 쓰다보니 힘들어서 외국어 억양이 나온다는 정도일 것이다.
내가 웃자 안토니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창문의 까만 유리를 바라보면서 속삭였다.
"웃지마."
나는 날씨가 추운데도 안토니오의 이마가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 P346

내게 우습게 보였다는 생각에 수치스러워서 땀까지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안토니오가 말했다.
‘내가 말주변이 없다는 거 알아. 나는 이탈리아어보다 독일어가더 편해."
나는 안토니오의 체취를 느꼈다. 먼 옛날 저수지에서 밀회를 즐길때와 똑같은 체취였다. 내가 사과했다.
‘난 지금 이 상황 때문에 웃은 거야. 너는 평생 니노를 죽이고 싶어했는데 나는 니노가 지금 이 순간 집에 오면 네게 그 자식을 죽여버리라고 할 테니까. 나는 절망해서 웃는 거야. 평생 이토록 수치스러웠던 적이 없어. 내가 얼마나 비참한지 너는 상상조차 못할 거야. 지금 이 순간 너무 아파 기절할 것 같아서 웃은 거야." - P347

실제로 나는 힘이 없었다. 내 마음은 이미 죽어버렸다. 갑자기 다른 사람이 아닌 안토니오를 내게 보내준릴라의 배려에 고마움을 느꼈다. 안토니오는 그 순간 나에 대한 애정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는유일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의 깡마른 몸과 큼지막한 뼈, 짙은 눈썹과 투박한 얼굴은 내게 너무나 친숙했다. 나는 그런 안토니오에게 혐오감도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내가 말했다.
"저수지에 있을 때면 추워도 춥지 않았지. 몸이 떨려. 네게 가까이가도 될까?"
안토니오는 나를 불안하게 바라보았지만 나는 그가 허락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토니오의 무릎 위에앉았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 몸에 닿을까봐 두려워 팔을 벌려 소파의 양끝으로 떨구었을 뿐이었다. 나는 그에게 몸을 기댔다.
안토니오의 목과 어깨 사이에 얼굴을 기댔다.  - P347

"맞아. 하지만 나는 지금껏 그 누구도 그때 너를 원했던 것처럼 간절히 원하지 않았어. 니노마저도."
나는 오랫동안 말을 했다. 내가 안토니오에게 한 말은 진실이었다. 그 순간의 진실이자 먼 옛날 저수지에서 사랑을 나누던 시절의진실이었다. 안토니오는 내게 처음으로 성적인 흥분을 경험하게 해준 사람이었다. 안토니오 덕분에 배 속의 구덩이가 뜨거워졌다가 열리기도 했고 액체가 되어 뜨거운 나른함을 느끼기도 했다. 프랑코와도 피에트로와도 니노와도 그런 느낌은 받지 못했다. 도중에 발을헛디뎌 결국은 한 번도 그런 만족감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것은 분명치 않은 대상에 대한 기다림이기 때문이었다. 충족하기 가장 어려운 쾌락에 대한 희망이기 때문이었다. 안토니오의 입에서 나는 맛과그의 욕구가 내뿜는 냄새와 그의 손과 허벅지 사이에 꼿꼿이 선 그의 커다란 성기는 비교 불가능한 ‘이전‘을 상징했다. ‘이후‘는 결코 - P348

통조림 공장 폐허에 숨어서 보내던 오후 시간과 비교할 수 없었다.
비록 삽입도 하지 않고 오르가슴을 느끼지도 못할 때가 많았지만 말이다.
나는 표준어로 안토니오에게 복잡한 이야기를 했다. 안토니오에게라기보다는 내가 저지르려는 일에 대해 나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내 행동이 안토니오에게 믿음을 주었는지 그는 만족스러워했다. 안토니오는 나를 껴안고 처음에는 어깨에 다음에는 목에 마침내 입술에 키스했다. 나는 평생 다시는 그런 사랑을 하지 못했다.
그날의 사랑은 20년도 지난 예전의 저수지와 타소 가의 방과 소파와 바닥과 침대를 이어주었다. 그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쓸어가버렸다. 우리를 갈라놓은 모든 것을 없애버렸다. 나라는 사람을구성하는 모든 것을, 그라는 사람을 구성하는 모든 것을 없애버렸다. 안토니오는 때로는 부드러웠고 때로는 거칠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분노와 불안감 속에서 그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고 그도마찬가지였다. 규율을 어기고 싶은 욕망이 내 마음속에 그토록 강하게 존재했는지 나는 미처 몰랐었다. 마지막에 안토니오는 경이로움에 정신을 잃었다. 나도 그랬다. - P349

농담삼아 한 말인데 안토니오는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안토니오는 사투리로 말했다.
"나는 아무도 배신하지 않았어. 내 아내는 ‘지금 이 순간 전‘에는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모호한 말이었지만 나는 그 의미를 이해했다. 안토니오는 자기도내 생각에 동의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정상적인 시간의흐름 밖에 또 다른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자기 나름대로 내게 설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인 현재의 시간이아니라 20년 전에 해당하는 어느 날 중에서도 아주 짧은 시간을 살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키스하고 속삭였다.
"고마워."
나는 안토니오에게 우리가 격정적인 섹스를 하게 된 각자의 잔혹한 이유를 눈감아줘서 고맙다고 했다. 우리의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는 필요성만을 봐줘서 고맙다고 했다. - P350

나는 자랑스러웠다. 순식간에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내 글에 대해 어린아이처럼 열광적으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나는 헤프게 웃으며 내 글에 대한 칭찬을 제대로 듣고 싶은 마음에 편집장을 집요하게 심문했다. 나는 이내 그가 내 글을 일종의자서전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폴리에서 가장 빈곤하고 가장 폭력적인 곳에서 겪은 내 경험을 소설의 형식을 빌려 표현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내가 고향에 돌아가서 좋지않은 영향을 받을까봐 걱정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 결국 내게 도움이 되었음을 인정해야겠다고 했다. 나는실은 그 책을 수년 전 피렌체에서 썼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거친 소설이야."
편집장이 강조했다.
"남성적인 소설이지.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섬세한 측면도 있어. 자네 정말 장족의 발전을 했어."
편집장은 기획적인 부분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 P359

"나폴리 공기가 자네 재능을 꽃피우게 해주었나보군."
전화를 끊고 나니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기분이 완전히 달라졌다. 나는 특히 아이들에게 다정해졌다. 출판사에서 남은 계약금을 지급했기 때문에 주머니 사정도 나아졌다. 갑자기 나폴리, 특히 고향 동네가 무시해서는 안 되는 존재 정도가 아니라 좋은 글을 쓰기위해 필수적인 내 삶의 중요한 일부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스스로에대한 불신으로 가득 차 있던 감정이 순식간에 기분 좋은 만족감으로도약했다. 파국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던 일로 되레 문학적 수준을 인정받았을 뿐 아니라 이는 내 글의 문화적·정치적 성향을 특징 짓는결정적인 선택이 되었다.
편집장은 이러한 사실을 권위 있는 말로 인정해주었다.
"출발점으로 돌아간 것이 자네에게는 일보 전진의 계기가 되었군."
물론 나는 편집장에게 피렌체에서 그 책을 썼다는 사실을 말하지않았다. 나폴리로 돌아간 것이 그 글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 P360

스토리상의 전환점도 고향에서 일어났다.
나의 전 시어머니에게는 그런 사실을 이해할 만한 감수성이 없었고그렇기 때문에 내 글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해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아이로타 집안사람들 모두 그랬다. 니노도 마찬가지다. 그는 나를 다른 여자들과 별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명단에 있는 여자들가운데 한 명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것은 릴라도 내 글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릴라는 내 원고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혹독하게 비판했다. 내 원고를 좋지 않게 평가해 내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게 되자 릴라는 그녀로서는 드물게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나는릴라가 우는 것을 원치 않았다. 오히려 릴라가 틀려서 기뻤다. 어린시절부터 나는 릴라를 지나치게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이제야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 들었다. - P361

드디어 나는 나고 릴라는 릴라라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내게는 이제 릴라의 권위가 필요하지 않았다. 나만의 권위가 생겼으니까. 나는 나 스스로 강해졌음을 느꼈다. 이제는 내가 출신의 피해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내 출신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출신에 어떠한 형태를 부여하고 나와 릴라를 비롯한 모두를 위해서 우리의 출신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날 나를 나락으로 끌어내리던 것이 이제는 나를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게 해줄 바탕이 되었다.
1982년 어느 날 아침 나는 릴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좋아. 너희 집 위층을 얻을게. 고향으로 돌아갈게." - P361

그때는 내 자신에 대한 자긍심과 행복으로 충만했던 시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나의 친구를 있는 그대로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뚜렷하게 느꼈다. 나는 릴라의 장점과 단점을 있는 그대로 좋아했다. 릴라가 세상에 내놓은 그 작은 생명체에게도 똑같은 애정을느꼈다. 티나는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뭐든 단숨에 익혔고 어휘력이풍부한 데다 놀라울 정도로 손재주가 뛰어났다. 나는 생각했다.
‘티나는 릴라랑 똑같네. 엔초는 별로 닮지 않았어. 눈을 크게 뜨는모습이나 가늘게 뜨는 모습도 그렇고 귓불이 없는 것까지 릴라를 똑닮았어.‘
나는 차마 내가 내 친딸보다 티나에게 더 이끌린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릴라가 자신의 능력을 다 뽐내자 나는 컴퓨터의 놀라운 기능에 대해 열렬한 반응을 보이고 엄마가 괴로워할 거라는 것을알면서도 티나에게 칭찬을 퍼부었다.
"우리 티나 정말 똑똑하네. 아유, 예뻐라. 말도 잘하고. 아는 것도많네."
나는 무엇보다도 내 책이 출간될 거라는 소식으로 불편해진 릴라의 마음이 누그러지기를 바랐기에 릴라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내 세 딸과 릴라 딸의 미래가 밝을 거라고 했다. - P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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