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나 페란테 Elena Ferrante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출생한 작가로, 나폴리를 떠나 고전 문학을 전공하고 오랜 세월을 외국에서 보냈다는 사실 외에 알려진 바가 없다. ‘엘레나 페란테‘라는 이름조차도 필명이다.
작품만이 작가를 보여준다고 주장하는 페란테는 어떤 미디어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서면으로만 인터뷰를 허락한다. 이탈리아에서는 여전히 작가의 정체와 관련된 여러 가지소문이 떠돌지만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다.
1992년 첫 작품 『성가신 사랑』을 출간해 이탈리아 평단을놀라게 한 페란테는 2002년 『홀로서기』를 출간한다. 에세이집 라 프란투말리아』(2003)와 소설 『어둠의 딸』(2006), 『밤의 바다』(2007)를 출간한 뒤 2011년 ‘페란테 열병‘ (#Ferrante-Fever)을 일으킨 ‘나폴리 4부작 제1권 『나의 눈부신 친구』를출간한다. 이어서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떠나간 자와 머무른자』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까지 총 네 권을 출간해 세계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
‘나폴리 4부작‘은 이탈리아와 영미권을 비롯해 프랑스, 스페인, 독일 등 총 43개국에서 번역·출간되고 있다. 2014년 ‘나폴리 4부작‘ 제2권으로 국제 IMPAC 더블린 문학상에 노미네이트되었고, 2015년에는 이탈리아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문학상 스트레가상의 최종 후보로 선정되었다. 2016년에는 ‘나폴리 4부작‘의 제4권으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최종 후보에 올랐으며, 『타임』지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가운데 한 명으로 엘레나 페란테를 선정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릴라를 만난 것은 5년 전 2005년 겨울이었다.
그날 우리는 비교적 이른 아침에 만나 큰길을 따라 산책했다. 벌써몇 년 전부터 둘이 함께 있는 것이 예전처럼 편하지 않았다.
그때도 나만 혼자서 일방적으로 떠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이야기를 하는 동안 릴라는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자신을 본체만체지나가는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따금 감탄사를 내뱉으며 내말을 끊곤 했는데 그마저도 내 이야기의 맥락과는 별 상관없는 반응이었다.
그동안 좋지 않은 일이 너무 많았다. 끔찍한 일도 있었다. 서로에게 속내를 털어놓으면 예전의 믿음과 친밀감을 되찾을 수 있었겠지만 당시 내게는 그럴 기력조차 없었고릴라는 기력은 충분한 것 같았지만 그럴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릴라를 매우 아꼈다. 나폴리에 들를 때마다되도록 릴라와 만나려고 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릴라가조금 두렵기도 했다. - P15

그제야 나는 고향 동네와 나폴리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빈곤은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끊임없이 흘러들었다. 고향에 돌아올 때마다 나는 나폴리가 계절의 변화마저 감당할 수 없을정도로 취약한 곳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폴리는 더위에도 추위에도약했으며 특히 폭풍에 약했다.
나폴리에서는 연이어 사고가 일어났다. 가리발디 광장의 기차역이 물에 잠기는가 하면 박물관 앞의 아케이드가 무너져 내리기도 했다. 산사태가 나서 도시 전체가 정전이 된 일도 있었다. 온갖 위험이도사리고 있는 음침한 길과 통제할 수 없는 혼잡한 교통, 엉망진창인 포장도로와 여기저기 파인 거대한 물웅덩이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 P19

하수구가 넘치는 바람에 더러운 물이 하수구 밖으로 튀거나 넘쳐서 흘러내렸다. 부실한 신축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선 언덕에서 폐수와 오물과 박테리아가 뒤섞인 물이 용암처럼 바다로 흘러가거나 땅속으로 스며들어 지하 세계를 침식했다.
사람들은 위정자들의 무관심과 부패와 탄압으로 죽어가면서도선거철이 되면 자신들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드는 정치인들을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인데도 나는 나폴리에 갈때마다 기차에서 내리면 언제나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나도 당신들과 같이 이곳 사람이니 해치지 말아달라는 의미로 언제나 사투리를쓰려고 애썼다. - P19

차라리 떠나라고 말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서 멀리, 영원히 도망가라고. 모든 것을 이룰수 있고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그런 곳에 자리를 잡으라고 말하고싶었다.
나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나는 그때 내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실은길이가 길어질수록 고리가 커지는 사슬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향 동네는 나폴리와, 나폴리는 이탈리아와, 이탈리아는 유럽과 유럽은 전 세계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제야 나는 생각한다. 병든 것은 우리 고향 동네가 아니라, 나폴리가 아니라 지구 전체다. 유일한 우주 또는 무수히 많은 우주가 모두 병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조차 사물의 본질을 숨길 줄 아는 능력이다. - P22

그날 이후 삶은 한순간도 나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몇 개월이 흘렀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나는 니노 생각에 잠겨 나폴리로 돌아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않았지만 우리의 만남을 잊을 수 없었다. 때때로 릴라에게 달려가고싶은 생각이 들곤 했다. 그녀가 퇴근하기를 기다렸다가 상처받지 않을 내용만이라도 이야기해주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렇지만이내 릴라가 니노 이름만 들어도 가슴 아파할 것이라고 생각해 그만두기로 했다.
릴라는 릴라의 길에, 니노는 니노의 길에 들어섰고 나는 나대로 - P50

하지만 나도 모르게 내 감정에 형태를 부여하고자 하는 노력에 집중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노력의 결과물이었고 그 안에는 내가 있었다. 책장에 꽂혀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는 나 자신을보니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비단 내 책뿐만 아니라 소설에는 나를홍분시키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소설에는 날것 그대로 요동치는 심장이 있었다. 아주 먼 옛날 릴라가 내게 함께 이야기를 지어보자고했을 때도 그런 터질 것 같은 감정을 느꼈었다. 그런데 내가 정말로그런 일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정말 이 일을 원했던가. 나는 글쓰기를 원했던 것인가. 우연에 의한 결과물이 아니라 지금까지 써온 글보다 더 좋은 글을 쓰고싶은 건가.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에 대해 연구하고 그것들이 어떻게소설로 작용하는지 이해하고 세상에 관한 모든 일을 배우려는 이유도 결국에는 나 말고는 그 누구도 만들어낼 수 없는 인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가 아닐까. 릴라에게 같은 기회가 주어졌더라도 나보다더 잘 해낼 수 없게 말이다 - P60

나는 이제 돈을 벌기 시작했고 앞으로도 꽤 많이 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지난날에 놓친 것을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다. 그러기에는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떤 면에서는 지나치게 교육을 많이 받았고 어떤 면에서는너무 무지했다. 나 자신을 통제하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다른이들의 사상과 사건을 머릿속에 꾸역꾸역 집어넣느라 열정 없는 인생을 사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게다가 결혼과 안정적인 삶이너무 빨리 시작될 예정이었다. 한마디로 나는 그곳에서 이미 몰락해버린 기존의 질서 체계 속에 너무 깊이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두려워졌다. 어서 이 자리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들의 행동 하나 말 한마디가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노력에 대한 모독이었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나는 사람들로꽉 찬 강의실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 P85

내 책 때문에 얻게 된 자유로운 여성이라는 명성 때문일까. 내가했던 정치적인 발언 때문일까. 그 발언이 그저 나의 논리를 과시하기 위한 어법이나 내가 남자들만큼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유희에서 끝나지 않고 나라는 사람을 전체적으로 정의내리는 기반이 되었기 때문일까. 그 때문에 내가 성적으로 개방되었다는 인상을주게 된 것일까.
그 사내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 방에 들어온 것은 마리아로사가조금도 거리끼지 않고 프랑코를 자신의 방으로 이끈 것과 같은 행동인가 아니면 그날 대학 강의실에서 느껴지던 성적 흥분감에 감염되어 나도 모르게 그런 기운을 방출하게 된 것일까.
생각해보면 피에트로를 배신하고 니노와 사랑을 나누고 싶은 욕망을 느꼈던 것도 밀라노에서였다. 하지만 니노에 대한 열정은 오래전부터 가슴에 품고 있었던 감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성적으로 갈망하고 피에트로를 배신할 생각까지 한 것이었다. 오히려 성관계 자체, 적나라한 오르가슴에 대한 욕구는 나를 흥분시키지 못했다. 나는 그런 욕구에 준비가 덜 된 상태였고 그런 욕구가 역겹게 느껴지기도 했다. - P103

"미르코가 정말 니노의 아이야?"
"그래"
실비아는 하품을 참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니노는 매력적이야. 여자들은 그를 가지지 못해 안달이지. 여기저기에서 그를 유혹해. 다행히 요즘은 시대가 좋아져서 원하면 누구와도 관계를 가질 수 있지. 게다가 니노는 함께 있는 사람을 기쁘게하고 움직이는 힘이 있으니까 인기가 더 많은 거고."
마리아로사는 학생운동에 니노 같은 사람이 꼭 필요하며 그런 사람을 잘 돌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잘 성장시키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한다고 했다. 마리아로사는 그렇게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소시민적 민주주의자나 전문 기업인, 맹목적인 현대화 신봉자의 본능이 숨어 있기 때문에 그들을 잘 이끌어야 한다고했다. 우리는 함께 보낸 시간이 부족했음을 아쉬워하며 다음 기회를기약했다. 나는 호텔에서 가방을 찾아 나폴리로 향했다. - P109

니노는 결국 릴라와 나를 모두 배신했다. 둘 다 그에게 굴욕당했고 그를 향한 사랑을 되돌려 받지 못했다. 니노는 재능은 뛰어났지만 결국은 경솔하고 깊이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땀과 체액을 흘리고 다니는 동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여성의 뱃속에 잉태되어영양을 섭취하고 형태를 갖춰가는 살아 있는 생명체를 부주의한 쾌락의 잔여물처럼 남겨두고 다녔다.
나는 몇 년 전 니노가 나를 찾아 동네까지 왔던 때를 생각했다. 우리가 뜰에서 대화를 나눌 때 창문에서 니노를 본 멜리나는 그를 그의 아버지와 혼동했었다. 도나토 사라토레의 옛 정부는 그때까지만해도 내 눈에는 보이지 않던 부자간의 유사성을 감지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멜리나가 옳고 내가 틀렸다.
니노는 자기 아버지처럼 되기 싫어서 도망친 것이 아니었다. 니노는 원래 자기 아버지와 똑같은 사람이었다.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뿐이다. - P110

그날 오후는 끔찍했고 저녁에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식사가 이어졌다. 나와 피에트로는 두 집안의 어색함을 없애려고 애를썼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었다. 식사를하면서도 종종 기나긴 침묵이 흘렀다. 아이로타 집안사람들이 내 어머니가 억지로 떠안긴 엄청난 양의 남은 음식을 가지고 떠나가자 순간 모든 것이 잘못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의 가정에서, 피에트로는 자기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났다. 우리 몸속에는 서로 다른 조상들의 피가 흘렀다.
우리의 결혼은 어떻게 될까. 어떤 미래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공통점으로 차이점을 극복할 수 있을까. 나는 또 다른 책을 쓸수있을까. 대체 언제 무엇에 대한 글을 쓴단 말인가. 피에트로는 나를 지지해줄까. 시어머니 아델레와 시누이 마리아로사도 나를 지지해줄까. - P128

아마도 이번이 릴라에 대해 자세히 쓸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것이다. 그날 이후로 릴라는 내게서 멀어져갔고 그만큼 이야기를 쓰는 데 필요한 자료도 빈약해졌다. 그만큼 우리 둘의 삶이 전혀 다른방향으로 전개되어 서로에게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도시에 살게 되어 서로 거의 만나지 못하는 동안 언제나 그랬듯이 릴라는 좀처럼 내게 자신의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나는 나대로 릴라의안부를 묻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았다. 그렇지만 릴라의 그림자는멀리서 나를 자극하기도 했고 우울하게 만들기도 했다. 자부심을 한층 고취시켰다가 어느 순간 위축시키기도 하면서 나를 도무지 가만내버려두지 않았다. - P135

내버려두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그런 자극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지금 이 순간 릴라가 나와 함께하기를 원한다. 이 글을쓰는 목적도 바로 그것이다. 나는 릴라가 내 글의 내용을 삭제하거나 덧붙이기를 원한다. 릴라가 마음 가는 대로 이야기에 그녀의 지식과 말과 생각을 덧붙여 우리 이야기를 완성하는 데 도움을 주기를 원한다. 파시스트가 된 지노와 마주쳤을 때의 이야기, 갈리아니선생님의 딸 나디아를 만났을 때의 이야기, 오래전 자신이 환영받지못한다고 느꼈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가에 있는 갈리아니 선생님댁을 다시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 자신의 성경험을 적나라하게 되돌아봤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원한다. 그날 저녁 릴라의 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느꼈던 민망함과 아픔, 내가 릴라에게 해준얼마 되지 않는 몇 마디 말에 대해서는 나중에 생각해봐야겠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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