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이따금씩 본심을 숨기기 위해서 무의미한 말을 하거나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할 때가 있다. 돌이켜보면 나도 다른 때 같으면처음에는 망설였을지라도 결국에는 브루노의 유혹에 넘어갔을 것같다. 물론 그는 내가 좋아할 만한 타입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따지자면 안토니오도 특별히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남자들과는 천천히 정이 드는 법이다.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이상적인 남성상에그다지 부응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때 브루노는 정중하고 관대했다. 상황이 달랐다면 쉽게 내 애정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를 거부한 이유는 그가 보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릴라의 행동을 막고릴라와 니노의 관계에 장애물이되고 싶어서였다. 그녀의 행동 때문에 나와 그녀가 처하게 된 상황을 똑바로 인식시키고 싶었다. - P375

우리는 오랫동안 함께 고민했다. 릴리는 정신이 멀쩡했다. 그녀는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속삭였다. 니노를 사랑하고 원한다고 내게 속삭였다. 그렇다. 릴라는 ‘사랑한다‘는 표현을 썼다. 소설이나 영화에 나올 법한, 우리 동네에서는 아무도 사용하지않는 표현이었다. 나도 속으로 생각할 때만 쓰는 표현이었다. 우리동네에서는 ‘좋아한다‘는 말이 더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릴라는 아니었다. 릴라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릴라는 니노를 사랑하는 것이다. 결국에는 송두리째 없애버려야 할 감정이었지만.
릴라는 실제로 그렇게 할 생각이라고 했다. 스테파노가 돌아오는토요일 저녁부터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릴라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내게 자기를 믿어달라고 했다. 대신 이제 얼마 남지않은 시간은 오롯이 니노에게 바치고 싶다는 것이었다. - P381

영리한 거짓말을 생각해냈다는 만족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공범으로서의 희열은 사라지고 분노가 되살아났다. 나는 왜 이렇게 릴라를 도와주고 그녀를 감싸고 있는 건지 자문해보았다. 남편을 배신하고 성스러운 결혼의 언약을 어기고 아내라는 짐을 던져버리려는릴라를 말이다. 스테파노가 알게 되는 날이면 릴라의 머리를 박살내려 할 것이다. 불현듯 릴라가 신부복을 입은 자신의 사진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나서 속이 뒤틀렸다. 지금도 그런 식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이번에는 그 대상이 사진이 아니라카라치 부인 자신이었다. 이번에도 릴라는 자신을 도와달라고 나를끌어들였고 니노는 도구인 것이다. 그렇다. 니노는 가위나 풀, 페인트같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망가뜨리는 데 필요한 도구였다. 릴라는내게 무슨 짓을 시키려는 걸까. 왜 나는 매번 그녀에게 휩쓸리고 마는 걸까. - P387

이에 비해 릴라가 침묵하는 이유는 그녀가 할 말을 잃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릴라가 무념무상의 백지 상태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니노와 헤어지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그에게 남겨두고 온 것 같았다. 무슨 일을 겪었고 지금은 어떤 심정인지 설명할 수 있는 능력까지도.
나는 우리 둘의 차이를 깨닫고 우울해졌다. 릴라는 고통과 행복이 뒤섞인 혼미한 상태였다. 지난밤 일을 되짚어볼수록 내 경험이 릴라의 경험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바라노 마론티 해변에 남겨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곳에서 눈을 뜬 내 새로운 자아마저도 그곳에 남겨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자신의 일부분을 남겨둔 채 이별한 이에게 당장이라도 되돌아가 재결합하고싶은 절박한 마음도 없었던 것이다.
릴라는 달랐다. 나는 릴라의 시선과 반쯤 열린 입, 꼭 쥔 주먹에서 돌아가고자 하는 갈급한 심정을 읽어 내릴 수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내가 더 당당하고 동요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막상 릴라 곁에 서니 물을 잔뜩 먹은 흙처럼 질척이는 느낌이었다. - P412

릴라의 공책을 나중에 읽게 되어 다행이었다. 공책에는 그날 니노와 지냈던 일이 여러 장에 걸쳐서 묘사되어 있었다. 릴라가 쓴 내용은 내가 다룰 수 없는 영역의 글이었다. 릴라는 육체적 쾌락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쓰지 않았다. 그녀의 경험을 나의 경험과 비교할만한 내용이 전혀 없었다. 대신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묘사를 했 - P412

는데 그런 그녀의 글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미처 깨닫지 못했을 뿐릴라는 결혼식 이후 이스키아 섬에 오기 전까지 자신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고 했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던 당시의 느낌을 세세히 묘사했다. 갑자기 기운이 빠지면서 졸음이 쏟아졌고뇌와 두개골사이에 공기방울이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머리가 무거웠다고 했다.
모든 것이 다급히 움직이면서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고 너무나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과 사물에 몸이 부딪쳐 상처받는 느낌이었다고했다. 배와 눈이 정말로 아팠다고 했다.
릴라는 언제나 감각이 둔한 상태였다고 했다. 온몸이 탈지면에 꽁꽁 싸여 있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현실세계가 아닌 자신의 육체와자기를 감싼 탈지면 틈새에서 상처가 빚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했다. 곧 죽게 될 거라는 상상은 너무나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 아무것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 P413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이 사라졌다고 했다. 아무것도소중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모든 것이 망가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불현듯 극단적으로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격렬한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했다고 했다. 멜리나처럼 미쳐버리기 전에, 대로변을 가로지르다 트럭에 치여 끌려가기 전에. 그런 릴라를 변화시킨 것이 바로 니노였던 것이다.
그는 릴라를 죽음에서 구해냈다. 처음 갈리아니 선생님 댁에서 함께 춤추자고 했을 때부터 그랬다. 그때 릴라는 그가 내민 구원의 손길이 두려워 춤을 거부했었다. 그러나 이스키아섬에서 함께 시간을보내면서 니노가 내민 구원의 힘은 강해졌다. 그는 릴라에게 감성을되돌려주었다. 무엇보다도 자존감을 부활시켰다. 그랬다. 말 그대로부활시켰다. - P413

릴라는 여러 장에 걸쳐 부활의 의미를 다루었다. 부활이란 무아지경에 빠지는 것이다. 기존의 모든 구속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형용할수 없이 기쁜 새로운 구속에 얽매이는 것이다. 다시 생명을 얻는 것이자 기존 현실을 뒤집는 봉기이기도 한 것이다. 니노와 릴라, 릴라와 니노는 함께 인생을 다시 배우게 되었다. 인생에서 독기를 제거하고 오직 사유와 삶의 즐거움만으로 재구성하게 된 것이다.
릴라의 글은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물론 릴라의 표현은 훨씬 더아름다웠고 나는 그녀의 글을 요약했을 뿐이다. 그때 차에서 내게이런 심정을 털어놓았다면 그녀의 충만함에 내 공허함이 비교되어나는 더 괴로웠을 것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감정, 내가 니노에 대해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던 감정을 릴라가 경험했다는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나는 실은 그런 감정을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나중에 그런 감정을 느끼더라도 결코 릴라처럼 강렬하지 않고 미약할 것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 P414

니노와의 사랑이 그저 여름휴가 동안의 불장난이 아니라는 사실을, 릴라의내면에서 그녀를 깊이 동요케 할 격렬한 감정이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각자 금기를 깨뜨린 후 눈치아 아주머니가 기다리고 있는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언제나처럼 자격지심과 릴라가 쟁취한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에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릴라에게 지고 싶지 않아 내가 밤하늘 아래 바닷가에서, 마론티의모래사장에서 처녀성을 잃었다는 말을 해버리고 싶은 충동이 불쑥불쑥 찾아들었다. 상대가 니노 아버지였다는 사실만 감추면 된다고생각했다. 선원이나 미제 담배를 파는 밀수꾼이었다고 하면 된다.
그러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얼마나 멋진 경험이었는지 이야 - P414

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내게 일어난일과 내가 느낀 쾌락을 릴라에게 들려주고 싶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나는 이내 깨달았다.
나는 그저 릴라에게서 이야기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내 이야기를하려는 것이었다. 그녀가 니노에게 얻은 쾌락에 대해서 듣고 나의쾌락과 비교해서 우월성을 느껴보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다행히 나는 릴라가 내게 자기 이야기를 절대로 하지 않을 거라는 걸 눈치챘다. 말해봤자 멍청이처럼 나만 모든 일을 떠벌리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릴라처럼 침묵을 지켰다. - P415

나는 그런 상념을 떨쳐버리고 내 자신과 한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니노와 릴라가 없는 미래를 계획하고 그들 때문에 고통받지 않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모든 일에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 법을 익히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감정 소모를 최소화하는 법을 습득했다. 서점 주인이 내 몸에 손을 대도 분개하지 않고 조용히 밀쳐냈고 진상 손님들에게도 선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어머니와 대화를 나눌 때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나는 매일같이 되뇌었다.
‘이렇게 생겨먹은 이상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어 사투리를 쓰고 돈은땡전 한 푼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그러니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가질 수 있는 만큼만 가지자. 참아야 할 때는 끝까지 참자. - P427

실은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아는 체하기 싫어하는 나의 또 다른자아는 릴라가 어디로 튈 줄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한시라도 빨리 그 집에서 나오고 싶었다. 대체 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 끔찍한 이야기와 마르첼로의 소심한 복수가 나와 무슨 상관인가. 돈, 자동차, 좋은 집, 가구와 장식품을 잃고 돈이 없어서 휴가를 못 가게 될까봐 안절부절못하면서 서로 다투는 것이 나와는 무슨상관이란 말인가. 이스키아 섬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 니노와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릴라는 또다시 카모라 집단과 거래를 벌일생각을 했단 말인가.
나는 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무 시험이나 봐서 합격해야겠.
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이 지저분한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
최대한 멀리 떠날 수 있다. 그러는 사이에 마리아 아주머니가 팔에아이를 안고 내 앞으로 다가오자 마음이 풀어져서 나도 모르게 말했다. - P440

니노가 이성을 되찾았다는 소식에 마음이 놓였지만 한편으로는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영화와 소설과 예술이라고? 사람이 변하는것은 정말이지 한순간인가보다. 관심을 보였던 분야도 감정도 쉽게변하는가보다. 번지르르한 말을 또 다른 번지르르한 말로 대체하면그만이다. 시간은 겉으로 보기에만 연계성이 있는 단어들의 흐름일뿐이고 결국에는 말이 많은 사람이 이기게 되는 것이다.
내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나는 니노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좋아하는 것을 포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래. 현실을 받아들이고이제 각자의 길을 걷도록 하자. 마리사가 니노에게 나를 만났고 내가 그에 대해서 물었다는 이야기를 전하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 후부터 알폰소와 이야기할 때도 니노와 릴라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 - P442

이렇게 해서 나는 처음으로 나폴리를, 캄파니아 주를 벗어나게 되었다. 모든 것이 두려웠다. 기차를 잘못 탈까봐, 화장실에 가고 싶은데 화장실을 찾지 못할까봐, 날은 저물었는데 생면부지의 도시에서길을 잃을까봐, 강도를 만날까봐 두려웠다. 수중의 돈을 어머니처럼모두 브래지어 안에 넣었다. 몇 시간을 불안한 경계심과 시간이 갈수록 커져가는 해방감이 공존하는 미묘한 상태로 보냈다.
시간이 지나자 기분은 좋아졌지만 시험 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을 것 같았다. 하늘색에 가까운 은발의 선생님은 이 시험이 고등학 - P455

특히 라틴어가 정말 어려웠지만 그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시험은 전반적으로 난도가 높았다. 교수님들은 모든 과목에서 내 지식을꼼꼼하게 검증했다. 나는 더듬더듬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답은아는데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척했다. 이탈리아어 교수님은 내 목소리마저 거슬리는 듯한 태도로 나를 대했다.
"학생은 글을 쓸 때 논리적으로 주제를 전개하지 않고 논지가 흔들리는군요. 내가 보기에 학생은 비판적인 논리전개 방식을 적용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 지식이 없는 분야에 무모하게 뛰어드는 것 같아요.
나는 절망했다. 내가 하는 말에 자신감을 잃었다. 교수님은 이런내 상태를 알아채고는 비웃듯이 바라보면서 최근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해보라고 했다. 분명 이탈리아 작가들의 작품을 뜻하는 것이었을 텐데 순간 미처 이해하지 못하고 떠오른 생각 중에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주제를 골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야기했다.  - P456

나는 펑펑 울었다. 정신을 놓고 있다가 가장 전도유망했던 내일부분을 어딘가에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절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정말로 뛰어난 아이가 아니란 것은 이미 알고있지 않았던가. 그래, 진정 뛰어난 것은 릴라지. 진정 뛰어난 것은 니노야, 나는 그저 오만방자했을 뿐이야. 이번에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른거야.
그런데 의외로 나는 시험에 합격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내 방과매일 폈다 접었다 할 필요 없는 침대와 책상과 필요한 모든 책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수위의 딸인 나 엘레나 그레코는 태어나고 자란 우리 동네를, 나폴리를 19세의 나이에 혼자서 떠나게 되었다. - P457

노르말레 대학교에서 보낸 시기는 릴라와 나의 우정을 떠나 내 인생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처음 대학교에 도착했을 때 나는 수줍음 많은 촌뜨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표준어를 쓸 때 내 말투가 자칫 우스꽝스럽게 들릴 수 있을 정도로 문어체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애써서 생각해낸 문장을 말하다가 표준어로 적당한 단어가생각나지 않아 사투리를 표준어화해서 만들어낸 단어로 문장을 메울 때 가장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이런 말투를 고치는 데 꽤나 애를 먹었다. 일반적인 에티켓에 대해서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하고 음식을 씹을 때도 쩝쩝거렸다. 다른 사람들이 민망해하는 것을 눈치채고서야 그러지 않으려고 주의했다.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대화를 끊기도 하고 잘 알지도못하면서 문외한인 분야에 끼어들기도하고 상대방을 가리지 않고 지나치게 친밀한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나중에야 문제를 깨닫고 친절하되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려고노력했다. - P464

무엇보다도 나는 적을 만들지 않았다. 여학생 중에서 적의를 보이는 아이가 있으면 상냥하면서도 조심스러운 태도로 상대방을 공략했다. 친절하면서도 겸손한 자세로 대하면서 상대방의 태도가 누그러져 그쪽이 오히려 나를 찾게 될 때도 항상 같은 태도를 유지했다.
교수님들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교수님들을 대할 때는 더신중한 태도를 취했지만 목적은 같았다. 그들에게 인정받고 호감과애정을 얻고 싶었다. 엄격하고 다가가기 힘든 교수님은 헌신적인 자세와 평온한 미소로 대했다.
나는 시험에 성실하게 임했고 예의 그 혹독한 자제력으로 공부했다. 힘들기는 하지만 지상낙원같은 이곳에서 성적 때문에 쫓겨날까봐 두려웠다. 나만의 공간에 전용 침대,책상,의자, 수많은 책이있는 곳. 나폴리 촌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곳. 주변은 언제나 공부를하고 공부한 것을 토론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 가득한 곳. 내가 어찌나 무섭게 공부했는지 어떤 교수님도 차마 내게 30점 이하의 점수를 주지 못했다. 1년 후 나는 학교에서 가장 전도유망한 학생 가운대 한 명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 P465

시간은 평온하게 흘러갔고 중요한 사건들도 공항 컨베이어벨트 위에실린 여행 가방처럼 지나갔다. 하나씩 순서대로 들어 올려서 페이지위에 옮겨다놓기만 하면 그걸로 끝이다.
그동안 릴라에게 일어난 일을 되짚어보는 일은 이렇게 쉽지 않다.
릴라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면 컨베이어벨트의 속도가 갑자기 느려지거나 빨라진다. 급커브를 돌기도 하고 경로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그러면 여행 가방이 떨어지고 가방이 열려 안에 든 것들이 여기저기흩어지게 되는 것이다. 흐트러진 물건이 내 짐과도 섞여버려서 결국에는 릴라의 물건을 주워 담기 위해서 막힘없이 술술 써내려갔던 내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지금까지 너무 요약해서 썼던 이야기를 다시풀어써야 했다. - P470

만약 릴라가 나 대신에 노르말레 대학에 입학했다면 릴라도 나처럼 힘든 상황에서도 언제나 최선을 다했을까. 로마 출신 여학생의뺨을 때렸을 때, 나는 릴라의 영향을 얼마나 받은 것일까. 멀리 떨어져 있는 릴라가 어떻게 내 가식적인 온화함을 걷어내고 내게 필요한결단력을 주었으며 욕설까지 퍼붓게 만들었을까. 나는 어디까지 릴라의 영향을 받은 것일까. 망설임과 두려움 속에서도 결국은 프랑코의 방에서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 것도 릴라의 과감함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프랑코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와 내말라붙은 감성에 대해 깨달았을 때의 불만도 릴라가 진정한 사랑이란 어떤것인지 보여주지 않았다면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내 글쓰기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바로 릴라다. 나는 평생내게 일어난 일이 릴라에게 일어났다면 어떻게 됐을지 끊임없이 상상해왔다. 릴라에게 내게 일어난 것과 같은 행운이 따랐다면 릴라는어떻게 행동했을까. 릴라의 삶은 계속해서내삶에 투영된다.  - P47

내 말에서는 릴라가 한 말의 메아리가 느껴지고 내 결연한 행동은 릴라의 행동을 재각색한 것이다. 내 부족함은 릴라의 과함 때문이었고내과함은 릴라의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함이었다. 릴라는 굳이 말하지 않고도 내게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힌트를 주었고릴라에 대해전혀 몰랐던 사실도 나중에 릴라의 공책을 보고 알게 되었다. 그러니 이 모든 사건을 서술하면서 어느 정도의 여과와 시간차, 부분적인 진실과 반쪽짜리 거짓말 등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언어라는 불확실한 도구를 기반으로 힘들게지난 시간을 측정한 결과물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나는 릴라의 고통을 전혀 몰랐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릴라가 니노를 차지하고 그녀만의 비밀스러운 기술로 스테파노가 아닌 니노의 아이를 가졌기에 나는 릴라가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 P471

릴라가 우리가 자라온 환경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짓을 하려고 했기에, 그러니까 사랑 때문에 남편과 손에 넣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부유함을 버리고 애인과 뱃속의 아이와 함께 자신의 목숨마저 위험에 빠뜨리려 했기에 나는 릴라가 그만큼이나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설이나 영화, 만화에 나올법한 격정적인 행복감을 느낄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부부간의 행복은 내 관심 밖이었다. 내 관심은 열정에 의한 행복이었다. 내가 아닌 릴라를 찾아온 선과 악이 뒤섞인 극단의 혼동 상태와 같은 행복이었다.
그렇지만 이제 내가 틀렸음을 안다. 스테파노가 우리를 데리고 이스키아 섬을 떠날 때를 돌이켜볼 때 배가 해안에서 멀어지는 순간릴라가 느꼈을 아픔을 이제는 실감한다. 릴라는 당장 다음 날부터매일 아침 해변에서 니노와 만나고, 토론하고, 대화를 나누고, 사랑 - P471

을 속삭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함께 수영도, 키스도, 포옹도, 사랑도 나누지 못할 거라는 걸 깨닫고 격렬한 아픔을 느꼈을것이다.
며칠 지나지 않아 카라치 부인으로서의 그녀의 인생은 사라져 진정성을 잃고 말았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를 쓰고 전략을 짜고 전투를 벌이고 전쟁을 준비하거나 동맹을 맺는 삶. 짜증스런 공급업자들과 고객들, 무게를 속여 계산대 서랍에 돈을 쌓는 데 전념하는 삶은 의미를 잃었다. 그녀의 삶에서 구체적이고 진실한 존재는니노뿐이었다.
릴라는 그런 니노를 갈망하고 있었다. 단 한순간도 그를 원치 않은 적이 없었다. 밤이면 어둠에 잠긴 침실에서 잠깐이라도 그를 잊어보려고 남편에게 매달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그 순간 니노에 대한 욕망이 오히려 더 강렬하고 생생하게 느껴져 스테파노를처음 본 사람처럼 밀어냈다. 릴라는 침대 한구석에서 울면서 욕설을퍼부으며 그를 거부하거나 욕실에 들어가 열쇠로 문을 잠가버렸다. - P472

평생 릴라는 ‘경계의 해체‘ 현상이 사물보다 사람에게 더 심각하게 나타날 뿐만 아니라 그 형태가 허물어져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가장 두려워했다. 지난날 가족 중에서 가장 사랑했던 오빠의 경계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고 기운을 잃었고 스테파노가 약혼자에서남편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망가지는 것을 보고서도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릴라의 공책을 보고서야 첫날밤 경험이 릴라에게 얼마나 큰상처로 남았는지 알게 되었다. 내면의 욕망과 분노 때문에 또는 음흉한 계획이나 비열함 때문에 남편이 기형적인 모습으로 변할까봐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알게 되었다. 밤에 눈을 뜰 때마다 남편이 변형된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을까봐 두려움에 떨었다. 남편이 물집같은 것으로 변할까봐 두려워했다. 체액으로 꽉 차서 물집이 터지면살이 흐물흐물해져 흘러내릴 것을 두려워했다. 가구와 아파트와 스 - P496

테파노의 아내인 릴라 자신까지도 주변의 모든 것과 함께 부서져서살아 숨쉬는 더러운 그 물질에 흡수될까봐 두려워했다.
그날릴라는 등 뒤로 집 문을 닫는 순간 하얀 구름에 둘러싸여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릴라는 그 상태에서 지하철을 타고 캄피 플레그레이에 도착했다. 그제서야 형체가 없는 물체들이 점령하고 있는 물컹한 공간을 떠나서 드디어 자기가 온전한 상태 그대로 머무를 수 있는 곳에 도착한 느낌이었다. 자신도 자기 주변에 있는 사물도 망가지지 않을 곳이라고 생각했다. - P497

그때 릴라는 또 한 번 자기 자신을 지워버리는 행위에 대해 매력을 느꼈던 것 같았다. 과거의 릴라와는 안녕이었다. 익숙한 큰길도구두도, 식료품점도, 남편도, 솔라라 형제도, 마르티리 광장과도 이제 끝이었다. 나와의 관계도, 신부이자 부인이라는 사회적 신분도 흩어져 사라졌다. 기존의 릴라에서 오직 니노의 연인이라는 모습만 남겨두었다. 니노는 저녁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니노는 매우 감동했다. 릴라를 껴안고,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갑자기 누가 들이닥칠까봐 걱정이 되는지 문이란 문과 창문이란 창문을 꼭꼭 잠갔다. 포리오에서 보낸 밤 이후 처음으로 둘은 침대에서 사랑을 나누었다. 그런 다음 니노는 일어나서 공부를 했다. 불빛이 너무 약하다고 불평을 하면서.
릴라도 침대에서 일어나 니노의 복습을 돕기 시작했다. 일 마티노지에 보낼 기사까지 함께 검토한 다음에야 새벽 3시에 함께 잠자리에 들어서 껴안은 채 잠이 들었다. 밖에는 비가 내렸고 바람에 유리창이 흔들렸다. 새로운 환경이 아직 어색하기는 했지만 릴라의 마음은 평안했다. - P498

그랬던 그가 대학교에서 쫓겨나 그의 명성이 사라지자 나도 그 후광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좋은 가문 출신의 학생들은 이제 일요일마다 나를 그들의 파티나 소풍에 초대하지 않았다. 몇몇은 다시 내나폴리 억양을 놀려대기 시작했다. 프랑코가 내게 선물했던 모든 것은 이제 유행이 지난 한물간 물건이 되어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내 삶에 들어온 프랑코의 존재가 내 현실을 잠시 가려 주었을 뿐 전적으로 바꾸어놓은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다른 이들과 완전히 동화된 것이 아니었다. 기를 쓰고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얻어내고 어느 정도의 호감과 존중을받기는 했지만 당당한 태도로 터득한 지식에 대한 최고의 결과를 보여주는 학생 축에는 속하지 못했다.
나는 평생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말을 잘못 할까봐, 너무 과장된 어조로 말할까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을까봐, 옹졸한마음을 들킬까봐, 흥미 있는 아이디어를 내놓지 못할까봐 평생 두려움에 떨며 살아갈 것이다. - P563

"북대서양조약기구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지켜보겠어요."
"우리 입장은 언제나 반전주의였다. 제국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고."
"기독교민주당과 협력하면서 반미주의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이런 식의 문장들이 빠르게 오갔다. 둘 다 이런 토론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래전부터 익혀온 습관 같았다. 두 부녀를바라보면서 내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을 평생 가지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뭐라고 딱 꼬집어서 말하지는 못하겠다. 사회 문제를 아주 사적인 문제로 만드는 일종의 훈련이라고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회 문제를 그저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정보로 과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정말 현실적인 문제로 인식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모든 것을 개인적인 문제나 실력을 인정받기위한 이용 수단으로 축소하지 않으려는 사고방식이었다. - P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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