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봄, 릴라는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내게 금속으로 만든 상자를 하나 맡겼다. 상자에는 공책 여덟 권이 들어 있었다. 남편이 읽을까봐 집에 둘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별다른 말 없이 상자를 받았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칭칭 묶어놓은 상자의 상태에 대해서 내가 놀리듯 두어 마디 던졌던 기억이 있다. 당시 우리 관계는 최악이었는데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가끔 마주쳐도 릴라는 전혀 어색해하지 않았고 나를 여전히 다정하게 대했다. 예전처럼 모질게말하지도 않았다. - P15

릴라는 내게 절대로 상자를 열지 않겠다고 맹세하게 했고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기차에 몸을 싣자마자 나는 공책을 꺼내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일기는 아니었다.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부터 릴라에게 일어난 일상적인 일들이 상세하게 적혀 있기는 했지만 일기라기보다는 혼자 고집스럽게 써온 작문 연습의 흔적 같았다.
릴라의 글은 묘사력이 뛰어났다. 한 줄기 나뭇가지, 저수지와 돌멩이, 하얀 잎맥이 도드라져 보이는 나뭇잎 한장, 집에서 사용하는냄비, 모카포트의 부품, 화로, 석탄 덩어리와 부스러기, 동네 뜰의 - P15

세밀한 지형도, 큰길과 저수지 너머로 보이는 녹슨 철제 구조물, 동네 공원과 성당, 철길을 따라 잘려나간 나무와 새로 지은 건물과 친정집, 페르난도 아저씨와 리노가 구두를 수선할 때 사용하던 연장과 그들이 작업하는 모습이 세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색채에 대한 묘사가 인상적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사물의 색상을 잘표현하고 있었다.
릴라의 글이 처음부터 끝까지 서술형은 아니었다. 이따금 사투리나 표준어로 한 단어만 툭 던져놓은 곳도 있었다. 어떤 단어에는 아무런 설명 없이 동그라미를 쳐놓기도 했다. 라틴어와 그리스어 번역을 연습한 흔적도 있었다. 동네 상점과 상점에서 파는 물품, 야채와과일을 가득 싣고 노새의 굴레를 잡아끌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이 길저 길을 돌아다니며 장사하는 엔초의 수레를 영어로 묘사한 문장도있었다. 교구 성당에서 본 영화와 읽은 책에 대한 감상문도 많았다. - P16

교구 성당에서 본 영화와 읽은 책내파스콸레와 토론한 내용이나 나와 대화를 나누면서 펼쳤던 주장에 대한 이야기도 많았다. 물론 글의 전개방식이 일관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떤 주제가 되었든 릴라가 다루면 중요하게 느껴졌다. 11, 12세 남짓 된 나이에 썼는데도 유치하게 느껴지는 문장은한 줄도 찾을 수 없었다.
모든 문장이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 구두점도 세심하게 썼고 올리비에로 선생님이 가르쳐준 우아한 필체도 그대로였다. 그러다가어느 순간, 마약에라도 취한 것처럼 스스로 만들어낸 나름의 질서를무너뜨릴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문장이 열에 들뜬 듯 숨가쁘게 전개되면서 구두점마저 사라지곤 했다. 대개는 얼마 안 있어 본래의여유 있고 명확한 전개 방식을 되찾았지만 가끔 글을 갑작스럽게 중단하고 뒤틀린 나무며 연기가 자욱한 거친 산, 음침한 표정의 얼굴 - P16

그림으로 나머지 페이지를 채우기도 했다.
나는 릴라의 글에서 느껴지는 질서와 혼란에 매료되었다. 읽으면읽을수록 속았다는 기분도 들었다. 몇 년 전 이스키아 섬에 머물던내게 편지를 보내기 위해 그녀는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었던가. 그렇기에 그때 릴라의 편지가 그토록 훌륭했던 것이다. 나는 공책을상자에 집어 넣고 다시는 들춰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 다짐을 저버리고 말았다. 릴라의 공책들은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했다. 어린 시절부터 릴라가 그랬던 것처럼. 고향 동네 전경과 자기 집 식구들, 솔라라 집안사람들, 스테파노에 대해서 쓴 글도 있었다. 사물과 사람에 대한 릴라의 묘사는 냉혹하게 느껴질 정도로 정확했다. - P17

혹하게물론 나에 대한 글도 있었다. 릴라는 내 말과 내 생각,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 내 외모에 대해서 나름대로 판단을 내렸다. 릴라는 자신의 삶에서 결정적이었던 순간들에 대해서 거침없이 써내려갔다. 릴라의 공책에는 자신의 첫 작품 『푸른 요정』을 완성했을 때의 성취감과 담임인 올리비에로 선생님의 침묵과 무시로 인해서 맛보았던 그에 못지않은 고통도 적혀 있었다. 내가 자신은 안중에도 없이 혼자만 중학교로 가게 되었을 때의 아픔과 분노, 구둣방에서 일을 배우면서 느꼈던 희열, 자신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에 구두를 만들기로마음먹었을 때의 심정, 오빠와 함께 처음으로 구두를 완성했을 때의기쁨도 적혀 있었다. 아버지 페르난도 아저씨가 남매가 애써 만든구두가 완벽하지 않다고 했을 때의 고통도 기록되어 있었다.
공책에는 릴라가 겪은 일과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녀의글을 읽고 있자니 솔라라 형제에 대한 증오심과 그 가문의 장남인마르첼로를 가차 없이 거부하기로 마음먹었을 때의 결연한 의지, 성 - P17

격이 온순한 스테파노와 약혼하기로 결심했을 때의 확고한 마음이느껴졌다. 릴라는 스테파노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가 처음으로 만든 구두를 구입하고 평생 간직하겠다는 맹세를 했다고 했다.
열다섯의 나이에 처음으로 부유하고 우아한 숙녀가 된 기분을 만끽하면서 예비 신랑의 팔짱을 꼈을 때 그녀는 얼마나 큰 성취감을 느꼈던가!
스테파노는 오직 릴라에 대한 사랑으로 그녀의 아버지와 오빠가 운영하는 구둣방에 거대 자금을 투자한 것이다. 그러고는 연달아 좋은 일만 일어났다. 릴라의 상상에서 시작된 구두 제작이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고 신시가지에 신혼집을 마련한 데다 열여섯의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호화롭기 그지없는 결혼식이었다. 그러던중 마르첼로가 그의 동생과 함께 피로연장에 나타난 것이다. 스테파노가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그 구두를 신고서.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남편 스테파노가 말이다. - P18

릴라는 대체 어떤 인간과 결혼하게 된 걸까? 스테파노는 목적을이루자 기다렸다는 듯이 가면을 벗고 흉측한 본모습을 드러낸 것이아닐까? 릴리는 비참한 상황에 대해서 꾸밈없이 써내려가면서 질문을 던졌다.
나는 몇 주에 걸쳐 릴라의 글을 매일 읽고 또 읽었다. 어찌나 꼼꼼히 읽었는지 특별히 마음에 드는 부분은 달달 외우게 되었다. 릴라의 글은 때로는 나를 흥분시켰고, 매혹시켰으며, 비참하게 했다. 릴라의 글은 자연스러웠지만 어딘가 인위적이었다. 그 인위성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결국 어느 11월 저녁, 나는 넌덜머리가 나서 상자를 들고 집을 나섰다. 이미 나폴리에서의 삶을 접은 지 오래였고 나름대로 많은 사 - P18

람의 존경을 받고 있던 시기였다. 그런데도 릴라가 내 몸과 마음을지배하는 것 같은 느낌을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솔페리노 다리에 멈춰 서서 차가운 안개 속에 희미하게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다 다리 난간에 상자를 올려놓고 천천히, 아주천천히 상자를 밀었다. 마침내 상자가 강물 속으로 떨어졌다. 릴라의 말과 생각, 자신에게 상처를 준 주변의 모든 이에게 아픔을 되갚고야마는 독한 근성, 사람, 물건, 사건, 지식 할 것 없이 나를 포함해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모든 것을 장악하는 능력을 담은 상자는 그자체가 릴라인 양 강물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책과 구두, 달콤한 추억과 폭력으로 인한 상처, 결혼식과 신혼 첫날밤, 신혼여행 후 라파엘라 카라치 부인으로서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 일어난 모든 일과함께. - P19

그제야 비로소 나는 책을 대하는 릴라의 태도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깨달았다. 릴라는 책을 약간 두려워하게 된 것 같았다. 예전처럼자신의 속도에 맞춰서 나를 이끌어나가지 않았다. 전에는 몇 문장만읽어도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하고 글을 완전히 장악하여 내게 "이부분이 가장 중요한 곳이니 여기서부터 읽으면 돼"라고 말해주곤했다. 그런데 이제는 책을 읽다가 내가 틀렸다는 생각이 들면 릴라는 "내가 이해를 잘못한 것 같은데 네가 다시 한 번 살펴봐"라고 말하거나 다른 이런저런 변명을 들어가면서 내게 잘못된 부분을 조심스럽게 알려주려 했다.
아직까지도 별로 힘들이지 않고 글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잃지 않았다는 사실을 릴라 자신은 모르는 듯했다. 하지만 릴라에게여전히 그런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 수 있었다. - P73

릴라는 철학책 반 페이지만 읽어도 아낙사고라스가 세상을 구성하는 혼돈에 부여한 질서와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 간의 놀라운 연관관계를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는 릴라 스스로 자신이 불필요한 재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인상을받았다. 자신의 판단이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의도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그녀 자신이 너무몰입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 함정에라도 빠질 뻔한 것처럼 뒤로물러서면서 중얼거렸다. - P74

"지겨워 죽겠어. 매일 같은 소리잖아. 작은 것 안에 있는 더 작은것이 밖으로 나오려고 몸부림치고 큰 것 밖에 있는 더 큰 것은 안에있는 것을 가둬두고 싶어 해. 나는 가서 음식이나 만들어야겠어."
내가 공부하던 내용은 큰 것이나 작은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릴라는 자신의 뛰어난 학습 능력에 짜증이 나서, 아니 두려워서어디론가 숨어버리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릴라가 숨을 곳이 어디란 말인가?
릴라는 저녁 준비를 하고 집 청소를 하고 내게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볼륨을 낮추고 텔레비전을 보거나 역사를 바라보는 일상적인일에 자신을 감추었다. 오가는 기차와 베수비오 화산의 희미한 윤곽, 나무도 없고 상점도 아직 들어서지 않은 신시가지의 길, 간간이 - P74

지나다니는 자동차들과 장바구니를 들고 치마에 착 달라붙은 아이들을 데리고 걸어가는 여인네들을 바라보았다. 릴라는 가끔 스테파노가 시킬 때나 그가 함께 가달라고 부탁할 때만 개업 준비 중인 식료품점을 보러 갔다.
언젠가 나도 함께 가본 새 가게는 릴라네 집에서 불과 50미터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곳에 가면 릴라는 진열장과가구를 만들기 위해 목수들이 쓰는 줄자로 공간을 재곤 했다.
그게 다였다. 그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나는 릴라가 처녀 때보다 더 외롭다는 것을 눈치챘다. 나는 가끔 카르멘, 아다. 질리올라와 어울려 다니기도 하고 학교에서는 같은 반이나 다른반 여자아이들과 친해져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포리아 가에서 만나기도 했다. 그런데 릴라가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시누이 피누차밖에 없었다. 릴라가 약혼했을 때만 해도 남자아이들은 그녀와 몇 마디 정도는 주고받았는데 막상 결혼식을 올리자 길에서 마주쳐도 가벼운 고개 인사만 할 뿐이었다. 릴라가 그렇게나 아름다운데도. - P75

그 후 몇 달에 걸쳐 일어난 소소한 일들은 내겐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지금도 그 일들을 순서대로 열거하려니 힘겹다. 나는 애써 자신감 있게 행동하고 자기 관리를 철저히 했지만 결국은 시도 때도없이 밀려오는 슬픔의 물결에 고통스럽게 승복하며 몸을 내맡겼다.
그때는 정말이지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다시 열심히 공부하기시작했지만 학교에서는 예전처럼 뛰어난 성적을 받지 못했다.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생기 없이 보냈다. 학교에 가는 길도 릴라네 가는길도 안토니오와 밀회를 나누기 위해 저수지로 향하는 길도 흐릿한배경 같았다. 나는 언제나 긴장한 상태였고 의기소침했다. 나도 모르게 내 모든 문제를 안토니오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 P81

의 눈에 어느나고 초라하게 느껴져 먼저 자리를 떠나고위로를 받고 싶은 마음에 릴라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나는 내가릴라에게도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바보 같은 짓을 했다. 릴라에게 스테파노와 함께 사진을 찾으러 갔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체 왜 그랬던 걸까. 스테파노가 제안한 중재자 역할에 도취돼서? 레티필로로 가는 길에 들은 이야기를 숨겨야만 의뢰받은 임무를 더 잘 수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스테파노의 신뢰를 배반하지 않으려다 나도 모르게 릴라를 배신하게 된건가?
나는 생각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사실 꼭 숨기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불안한 마음에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가 애써 별일아니라고 생각하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다음에는 시간이 너무많이 지나서 말해봤자 상황만 복잡해질 뿐이라고 생각했다.
실수하기란 정말 쉽다. 신빙성 있는 변명거리를 찾아내려고 했지만 내 자신에게도 빈약하게 느껴졌다. 애당초 내 의도가 순수하지못했다는 생각에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P120

그리고 같은 반 친구들 같은 내 또래 여자아이들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막상 멜리나나 주세피나 아주머니, 눈치아 아주머니나 마리아아주머니의 몸을 제대로 바라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오랜 시간을 두고 날이 갈수록 커지는 불안감과 함께 지켜봐온 것은 오직내 어머니의 육신밖에 없다. 절뚝이는 어머니의 모습이 나를 옥죄어왔고 끊임없이 나를 위협해왔다. 내 모습에서 갑자기 어머니의 모습이 나타날까봐 언제나 두려웠다.
그날은 우리 동네 모든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나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들은 신경질적이고 남편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는 존재들이었다. 입을 꾹 다물고 구부정한 자세로 있거나 아니면 성가시기 짝이 없는 자식들에게 끔찍한 욕설을 퍼부었다. 눈과 볼이 움푹들어가고 너무 삐쩍 말랐거나 거대한 엉덩이와 부어오른 발목에 가슴이 축 처져 뚱뚱했다. 손에는 장바구니를 들었고 안아달라고 보채는 어린아이들을 치마에 달고 다녔다. - P137

지금 생각해보면 놀랍게도 그때 당시 이들의 나이는 기껏해야 나보다 열 살에서 스무 살 정도 많은 정도였다. 그런데도 여성스러운매력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소녀 시절에 옷이며 화장으로 그토록 뽐내고 싶어 했던 여성성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어머니들은 남편과 아버지와 남자 형제들의 육신에 잠식되어 날이 갈수록외모까지도 그들을 닮아갔다. 그렇지 않더라도 육체적 노동으로 노쇠하거나 병을 얻어 여성성을 잃어갔다.
그런 변화가 시작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가사 일을 시작하면서부터인가? 아니면 임신을 하면서 남편에게 얻어맞기 시작하면서 릴라도 눈치아 아주머니처럼 흉측해질까? 그 아름다운 얼굴에서 결국은 페르난도 아저씨의 모습이 튀어나오게 될까? 그 우아한 걸음걸 - P137

이가 두 팔을 한껏 벌리고 양반걸음으로 걷는 리노의 걸음걸이처럼변하게 될까? 그렇다면 내 몸도 망가져서 언젠가는 내게서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모습까지 나타나게 되는 게 아닐까? 그렇게되면 학교에서 배운 것은 모두 사라지고 우리 동네 사람들의 거친억양과 태도가 다시 나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유물론 철학자인 아낙시만드로스와 내 아버지, 시인 폴고레와 돈 아킬레, 화학 원소가와 저수지, 그리스어 문법의 부정과거법, 헤시오도스와 솔라라 형제의 무례하고 저속한 언어가 모두 시꺼먼 진흙탕에 뒤섞이게 되지 않을까? 따지고 보면 지난 수천 년 동안 혼란스럽고 천박한 도시에서 으레 일어났던 일이 아닌가. - P138

문득 나도 모르게 내가 릴라의 감정을 이해하고 여기에 내 감정을 덧씌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릴라가 그다지도 낙담한표정이었던 걸까? 작별인사라도 하듯이 다리와 엉덩이를 쓰다듬었던 것일까? 멜리나나 주세피나 아주머니의 육체에 잠식당한 자신의육체를 느끼기 위해 그들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자신의 몸을 만졌던걸까? 육체가 잠식당했다는 사실에 두려워하고 역겨워하면서? 어떻게든 대응해야겠다는 생각에 옛 친구들을 찾았던 걸까?
어린 시절 교단에서 넘어진 올리비에 선생님을 망가진 인형처럼 바라보던 릴라의 눈빛이 떠올랐다. 큰길을 걸어오며 가게에서 산부드러운 비누를 입에 넣던 멜리나의 모습을 바라보던 릴라의 눈빛이 생각났다. 어린 시절 구리로 된 냄비를 타고 피가 흘러내리는 돈아킬레 살인 현장을 우리들에게 묘사하던 릴라의 모습도 떠올랐다.
릴라는 돈 아킬레의 살인자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고 주장했다.  - P138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감정이 복받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릴라가 그런 아이였던가. 원래부터 나처럼 고집스러울 정도로 성실했던 게 아니었던가. 이때껏 오직 내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 그토록 많은 생각을 하고, 구두를 만들고, 글을 쓰고, 이야기를 하고, 복잡한 계획을 짜고, 분노하기도 하고, 새로운 것을 창작해낸 것이었단 말인가. 그녀가 이토록 방황하는 이유는 그런 목적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인가 신부복 차림의 사진에 한 작업도 다시는 재현할수 없는 건가. 릴라가 이루어낸 모든 일이 실은 매번 자신이 처했던혼란스러운 상황의 결과물이었단 말인가.
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 오래전부터 간직해온 고통스러운 긴장감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촉촉이 젖은 릴라의 눈과 섬약해 보이는미소에 나는 마음이 약해졌다. 하지만 그런 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릴라는 버릇대로 손을 이마에 갖다 대고 후회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 P195

나중에 릴라가 공책에 쓴 내용을 읽고 나서야 그녀에게 그날 저녁 파티가 얼마나 큰 아픔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릴라는 자기가 먼저 나서서 나와 같이 가겠다고 한 것은 인정했다. 단 하루라도 가게일을 잊어버리고 나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고 했다.
내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를 경험하는 순간을 함께하고 갈리아니 선생님을 만나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고 했다. 언제나처럼 청년들이 자신을 좋아할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입도 벙끗할 수 없었다고 했다. 자신이 볼품도 없고 특별하지도 아름답지도않게 느껴졌다고 했다.
릴라는 모든 일을 상세히 기록했다. 둘이 나란히 서 있는데도 모두들 내게만 말을 걸어왔다고 했다. 내게만 과자를 권하고 음료를가져다주었고 아무도 자신에게는 신경써주지 않았다고 했다.  - P219

그날 저녁 이후 우리는 처음으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결별을 했고오랜 기간의 결별로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시작되었다. 나는 도무지 마음을 추스릴 수 없었다. 물론 그때까지 서로 신경전을 벌인 적이 한두 번은 아니었다. 릴라의 불행과 그녀의 지배 본능 때문에 속상했던 적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내게 그토록 노골적으로 수치심을 준 적은 없었다.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당장 식료품점에 발걸음을 끊었다. 릴라가 교과서를 사준 데다 학교 성적을 걸고 함께 내기까지 한 상태에서 학년 말 전 과목 평균 8점에 두 과목에서는 9점을 받았을 때도 릴라에게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 P223

몹시 무더운 날이어서 우리는 오랜 시간을 물속에서 보냈다. 릴라는 물에 떠 있는 연습에 몰두하면서 도움이 필요한 상황을 대비해내게 자기 옆에 대기하고 있으라고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내게 계속해서 심술궂게 굴었다. 종종 나에게 투정을 부리면서 내 수영 실력을 믿은 자기가 잘못이라고 했다. 사실 나도 수영은 잘 못했다. 그런 내가 어떻게릴라를 가르쳐줄 수 있었겠는가. 도나토 사라토레의뛰어난 강습 능력을 그리워하며 다음 날 당장마론티로 돌아가자고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연습을 하다 보니 수영 실력이 좋아졌다.
릴라에게는 모든 행동을 기억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런 식으로 구두 만드는 법도 배웠고 햄과 프로볼로네 치즈 등을 썰어 능수능란하게 무게를 속이는 법도 익혔다. 릴라는 그렇게 타고났다. 릴라라면금 세공사의 손놀림을 옆에서 지켜만 봐도 세공법을 익혀서 기술자보다 더 뛰어나게 금 세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P276

집 안은 고요했다. 눈치아 아주머니는 이미 잠자리에 들었고 스테파노와 릴라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침실에 들어갔다. 옷이며 신발, 가방이 엉망으로 흩어져 있었다. 의자 위에 『히로시마그 이후』라는 제목의 책이 놓여 있었다. 내게 묻지도 않고 가져간것이다. 마치 내 것이 다 자신의 소유인 것처럼. 내가 이 정도 위치에오른 것이 자기 덕택이라도 되는 것처럼. 갈리아니 선생님이 내게특별히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사실은 자기가 무심한 태도로 생각나는 대로 한 말에 내가 영감을 받아 쓴 글 덕분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덕분에 내가 선생님께 특별 대우를 받게 됐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한순간 책을 가져갈까 고민하다가 창피한 생각이 들어서 마음을 고쳐먹고 그냥 내버려두었다. - P302

릴라가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에 대해서 책을 읽은 것을 과시할때의 상황도 이와 비슷했다. 그때 릴라와 니노는 꽤나 열띤 논쟁을벌였다. 니노는 전반적으로 미국을 비판하는 쪽이었다. 특히 나폴리에 미군 부대가 있다는 사실을 싫어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미국인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매료되었고 더 알고 싶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릴라가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행위는 전쟁범죄라는투로 말하자 언짢아했다. 릴라는 더 나아가 사실 이 경우 전쟁 그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면서, 미국인들의 행위는 전쟁범죄를 넘어선 교만에 의한 범죄행위였다고 했다. - P311

나는 진주만 공습이 뭔지 몰랐는데 릴라는 알고 있었다. 릴라는 진주만공습과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는 비교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진주만은 사악한 전쟁범죄였지만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는 경솔하고 잔인하기 그지없는 끔찍한 보복 행위로 나치의 대량학살보다 저질스러운 행위라고 말했다.
"미국인들은 싸잡아서 범죄자 중에서 최악의 범죄를 저지른 죄인처럼 처벌받아야 해. 사람들을 겁에 질리게 해서 복종하게 하려고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범죄자들처럼 말이야."
릴라가 결론을 내렸다. 그녀가 어찌나 격렬하게 말을 쏟아부었는지 니노는 반론에 나서는 대신 침묵을 지키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니노는 릴라는 아예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내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문제의 본질은 원자폭탄 투하의 잔혹성이나 그 행위가가지는 보복성이 아니라고 했다. 당시 미국이 직면했던 가장 시급한과제는 인류 역사상 제일 잔인했던 전쟁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향후에 있을 모든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기위해서 그 끔찍하기 짝이 없는 신무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했다. - P312

너무 멀리 나아가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만 해도 흥분하여 머릿속에 그려둔 가상의 안전선을 이미 넘어선 상태였다. 평상시에는몇 번의 팔동작만으로도 다시 해안으로 돌아갈 수 있을 정도로만 나갔었다. 사실 릴라도 평소에는 그 이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지금 릴라는 니노와 경쟁을 벌이면서 평소보다 훨씬 더 멀리 나아가고 있었다. 니노에 비해서는 경험이 많지 않았지만 뒤처지고 싶지않은 마음에 무리해서 점점 더 멀리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릴라가 힘이 빠지면 어떻게 하지. 갑자기 몸에 무리가 가면? 수영 실력이 뛰어난 니노가 있으니 도와주겠지. 그렇지만 니노마저 발에 쥐가 나거나 지치면 어떻게 하지? 나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조류에 몸이 왼편으로 밀려가고 있었다. - P319

여기에서나는 나도 모르게 아래쪽을 쳐다보았는데 실수였다. 바다 위로는눈부시게 빛나는 햇살에 수면이 반짝이고 하얀 구름이 하늘을 실처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런데 수면 아래로는 파란 물이 갑작스럽게짙푸른 빛을 띠었다가 이내 칠흑 같은 밤처럼 캄캄해졌다. 깊은 바다의 어두운 심연이 느껴졌다. 몸을 기댈 수 있는 곳 하나 없이 오로지 액체로만 구성된 그 심연이 망자의 시체가 쌓인 구덩이처럼 느껴졌다. 그곳에서 갑자기 뭔가가 튀어나와 피부를 스쳐 지나가다 내몸을 잡아 그 날카로운 이빨을 내 몸에 박아 넣고는 바닥으로 잡아끌 것만 같았다. - P319

나 자신도 되돌아봤다. 나는 잘못된 판단을 했고 착각에 빠졌다.
나같이 작고 통통하고 성실하기만 할 뿐 똑똑하지도 않은 데다 교양이 있는 척, 아는 것이 많은 척만 하는 안경잡이를 니노가 좋아할없지 않은가. 비록 짧은 여름휴가 동안이지만. 그러고보니 니노가나를 정말로 좋아해주기를 바라긴 한 걸까. 내 행동을 세밀히 되짚어 보았다. 아니다. 나는 내 욕망을 정확히 몰랐다. 다른 사람들에게내 감정을 애써 숨겨왔을 뿐 아니라 나 자신조차도 내 감정에 회의적이고 확신이 없었다.
왜 릴라에게 한 번도 니노에 대한 내 감정을 고백하지 못했을까.
지금도 그렇다. 한밤중에 나를 찾아와 털어놓은 릴라의 고백이 내게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느냐고 왜 소리치지 못한 것일까. 왜 그녀에게입 맞추기 전에 니노가 내게도 입 맞춘 적이 있다고 말하지 못한것일까. 나는 대체 왜 항상 이모양일까. 너무나 간절하게 부와 명예와 칭찬과 성공을 갈망하는 본심이 두려워서 오히려 내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려는 것일까.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 그 간절함이 마음속에서 폭발하여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될까봐 두려운 것일까.  - P330

그 입맞춤은 니노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 예기치 않게 일어난 사건이었다. 게다가 릴라는 나와는 다르게 사건을 일으키는 데 탁월한재능이 있지 않은가.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니노와 한 약속에나가서 함께 에포메오 산을 올라야 하나 아니면 오늘 저녁에라도 당장 스테파노, 리노 일행과 떠나야 하나. 어머니가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편지를 보냈기 때문이라고 하면 그만이다. 릴라를 사랑하고 그녀에게 키스했다는 것을 알게 된 마당에 어떻게 그와 함께 태연히산에 오르겠는가. 매일 어떻게 둘이 함께 해변에서 점점 더 멀리 헤엄쳐 나아가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겠는가.
나는 진이 빠져서 깜빡 잠이 들었다. 화들짝 놀라 눈을 떴는데 하도 생각을 많이 해서인지 고통이 조금 덜하기에 약속장소로 뛰쳐나갔다. - P332

나는 그날 밤 릴라의 방에서 문을 닫고 불은 끈 채 꽤 오랫동안 릴라의 말을 들어주었다. 릴라는 침대 안쪽에 누워 있었다. 목덜미까지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카락과 허리에서 엉덩이까지 이어지는 곡선이 달빛 아래 빛났다. 나는 평소 스테파노가 눕는 침대 바깥쪽에누워 생각에 잠겼다.
스테파노는 주말마다 바로 이 자리에 누워서 잠을 자고 밤낮으로릴라의 몸을 끌어안는다. 릴라는 그런 침대에 누워서 지금 내게 니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니노 생각에 릴라는 모든 것을 잊고 남편과 나눈 사랑의 흔적을 침대 시트에서 말끔히 지워버렸다.
니노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릴라는 니노를 이곳으로 소환했다. 지금 이 순간 그와 함께 있는 상상 속에 빠져 이미 자기 자신마저 잊어버렸기에 부부간의 의무를 저버렸다는 생각도, 죄책감도 들지 않는것이다. - P356

릴라는 나를 너무나 믿은 나머지 차라리 혼자 비밀로 간직했으면좋았을 법한 이야기까지 털어놓았다. 내가 평생 원해온 바로 그 사람을 자신이 얼마나 갈망하는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릴라는 내가 무디고 눈치가 없어서, 자기가 알아챈 것을 나는 알아채지 못해서 이때까지 니노의 뛰어남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의 진정한 모습을보지 못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있는 것이다.
릴라가 나를 속이는 건지 아니면 본심을 감추려는 내 성향 때문에정말로 내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눈 먼 봉사이자 귀머거리처럼 니노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고 이제야 자기가 도나토 사라토레아들의 매력을 발견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추측이 가증스러워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나는 릴라에게 그만하라고 말하지 못했다. 방으로 돌아가 한밤의 고요속에서 비명을 지르지도 못했다.  - P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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