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저명한 경제학자 송병락 선생이 저서에서 ‘행복 경제학‘에 대해 설명하면서 인용한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한 아홉 가지 사항이다. 한번 깊이 생각해볼일이다.


1.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비하하는 말을 하지 말라. 그리고 자신이나 남에 대하여 건설적이지 않은 비판은 하지 말라.
2. 현재의 불행, 좌절 또는 실패는 위장된 행복일 수 있다.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라.
3.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가까운 친구를 잘 사귀어라.
4. 자신의 강점과 특성을 잘 살리고 성공과 행복에 대해서는 자신의공을 인정하라.
5.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취미 활동을 개발하라.
6. 과거, 현재 및 미래의 일을 균형 있게 하라.
7. 생각, 행동의 사회적 기준을 알고 자신의 경우를 판단하라.
8. 곤경에 처할 때에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라.
9. 도저히 감정을 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 자리를 피하라. P296, 297



파리의 고급 호텔에 자리를 잡은 그는 각 지점에 6~7개 언어로 편지를 써서 사업 지시를 하고 직접 돌아다니며 감독을 했다. 그러는 동안 시를 쓰고 한편으로 프랑스의 소설가인 빅토르 위고와 사귀어 그로부터 ‘백만장자 방랑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양편 모두에 군수물자를 팔며 큰돈을 벌었지만,
그의 마음이 편치는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을 인간혐오자라고 생각했다. 그의 마음은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이상주의와 비관적인 시니시즘 사이를 오갔다. "한순간에 양쪽 군대가 서로를 몰살시키는 게가능한 날이 오면 문명국들은 공포심을 느끼며 전쟁을 후회하게 될것이다." 이런 글을 쓰는가 하면 자기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자신이죽으면 시체를 뜨거운 황산에 녹여버리라는 비탄조의 말을 했다. "1분 - P182

만에 시체가 녹을 겁니다. 거기에 석회를 섞으세요. 황산과 석회가 섞이면 버릴 것 하나 없는 훌륭한 비료가 되니까요."
그의 장례식을 그렇게 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그의 재산을 스웨덴과학아카데미에 맡겨 노벨상을 제정했다. 그의 사후 창설된 재단은매년 물리, 화학, 의학, 문학 분야의 수상자에 더해서 평화상 수상자도 선정했다(노벨 경제학상은 1968년에 추가되어 1969년도에 첫 수상자가나왔다.
von노벨은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귀족 부인인 베르타 폰 주트너Berthacutner(1843~1914)를 사랑했는데, 그녀는 이 죽음의 상인이 내면에 품고 있던 이상주의를 존경해 마지않았다. 어느 날 노벨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파괴력이 너무나 엄청나서 오히려 그 때문에 더이상 전쟁이 불가능하게 되는 어떤 물질이나 총을 만들어낼 수 있으면 좋겠소." 실제 그런 무기들이 속속 개발됐지만 여전히 전쟁은 지속되고 있고, 누구는 그 기회를 이용해서 큰돈을 벌고 있을 것이다.
1921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바 있는 아인슈타인은 1945년 노벨상 수상식 만찬에서 노벨이 가공할 파괴 수단을 만든 데 대한 양심의가책으로 이 상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하긴 아인슈타인 자신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원자폭탄을 만들라는 편지를 쓰지 않았던가. - P183

"바닷물 닿는 곳에 화교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화교들은세계 각지에 퍼져 있다. 타이완에서 발표된 공식통계中華民國 僑務統計에 따르면 세계의 화교는 3600만 명이 넘는다.
화교들이 아시아 각지로 이주해간 것은 대체로 남송시대인 12세기부터로 잡는다. 장사를 하기 위해 해외로 떠난 경우도 있고, 흉년이 들어 먹고살기 어려워지자 생존을 위해 나간 경우도 있다. 화교의해외 진출에서 큰 전환점을 이룬 계기 중 하나는 명대 초에 시행된해금정책이다. 명나라 조정은 허락 없이 바다로 나간 자들을 사형에 처할 정도로 민간인의 해외 진출을 강력하게 억압하려 했다. 그러나 정부의 정책이 그렇다고 해도 몰래 해외로 빠져나간 사람들은계속해서 일본, 필리핀, 자바 섬 등지에 거류지를 형성했다. 그렇지만모국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나니 화교들은 늘 불안정하고 위험한 상태에 놓이게 됐다. 예컨대 마닐라에서는 16~17세기에 약 2만~3만 명의화교들이 집단학살을 당하는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 - P196

서 그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친족들 간의 상호 협력 시스템을구축하고 이를 이용해서 사업을 확장해나갔다.
화교들은 그들이 정착한 사회에서 소수 인종이라 하더라도 막강한경제력을 행사하곤 한다. 예컨대 인도네시아에서는 화교가 인구의 4퍼센트에 불과하지만 전체 경제 부문의 80퍼센트를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총인구의 29퍼센트가 중국계 후손이며 이들이 상장 주식의 1퍼센트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 화교가 말레이시아 행정 · 경영 부문의 전문 인력 중 60퍼센트나된다. 화교는 동남아시아 인구의 10퍼센트에도 못 미치지만 역내무역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으며, 동남아시아 거부의 86퍼센트가 화교라고 한다. 현재 전세계에서 화교들이 운용하는 자본은 적게 잡아도 2조 달러가 넘는다. 화교는 유대인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인종집단ethnic group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 P197

화교들은 중국인으로서의 혈연적·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현지 사회에 동화되어갔다. 역사적으로 모국의 보호를 받지 못했던까닭에 더더욱 그들을 받아들인 사회 속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런 사정 때문에 화교네트워크는 세계화 시대에 가장 유리한 조직으로 자라나게 됐다. 화교들은 대부분 여러 나라에 가족과 친척들을 두고 있어서 자연스럽게국제적인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있다. 꼭 친척 관계가 아니라 하더라도 화교들 간에 공동체 의식이 매우 강해서 이들의 총체적인 인적 유대와 자본력은 막강하다. 그와 동시에 이들은 지역 통치자나 관료들과 공식적·비공식적 노력을 통해 협력 관계를 맺어놓고 있다.
물론 이들의 사업 방식이 항상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사업을 공개 - P197

하지 않고 증권시장에 상장하지도 않은 채 자기네들끼리 관계를 이어가는 것은 지난 시대에는 장점일지 모르지만 앞으로도 계속 긍정적인효과를 낼지는 의문이다. 심지어 상표가 없는 기업도 많은데, 이런 태도도 앞으로 변화가 필요한 부분일 것이다. 가부장적인 경영 관행이나 아들에게 소유권과 경영권을 넘기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지난날과는 달리 이제 화교 기업인들은 중국 정부와 손잡으면서 더욱 막강한 경제적 힘을 행사하게 됐다. 앞으로 더욱 강력한 힘을 행사하게 될 중국, 그리고 이미 막강한 자본과 사업 능력으로 전 세계적 네트워크를 조직한 화교의 결합을 더욱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 P198

이상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중국에서는 화약이 발명됐지만 무기로 사용되지 않았고 단지 불꽃놀이 용도로만 쓰였다고 믿고 있다.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중국에서는 적어도 13세기 말 이전에 총포가 널리 쓰였고, 14세기에는 초보적이긴 하지만 많은 화포가다. 예컨대 명나라 건설 과정 중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인 1363년의 포양 호 전투에서 주원장(후일의 명나라 태조)은 군 지휘관에게 이런 명령을 내린다.
"적선에 접근하면 우선 총을 쏘고 다음에 활을 쏴라."
14세기의 전투 유적지에서 발굴된 수십 문의 철제 대포는 이 시대에공성전이나 수상 전투에서 총포가 많이 사용됐다는 증거다. 다만 그다음 시대에 총과 화약이 주변 지역에 전해져서 크게 발전할 때정작 본산지인 중국에서 상대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더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문제다. - P227

1789년 7월 14일, 파리 시민 약 8,800명이 바스티유 앞에 운집했다.
바스티유는 원래 중세에 파리 시를 수비하는 성채로 건설됐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파리 시 자체가 팽창하는 바람에 이 성채가 시내 한복판에 위치하게 됐고 용도도 감옥으로 바뀌었다. 대개는 일반 범죄자들이수용됐지만, 금지된 책이나 팸플릿을 인쇄한 출판인 혹은 유명한 문인들이 갇히기도 해서, 그러지 않아도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던 이 건물은 자유를 억압하는 전제정치의 상징이 됐다.
파리 시민들은 이곳에 갇혀 있다고 믿고 있던 자유의 투사들을 구하고 동시에 화약과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공격을 감행했다. 전투 과정에서 공격하던 시민 98명과 수비대원 1명이 죽었다. 오후에 수비대의 방어선이 뚫리고 시민들이 성안으로 난입해 들어갔다. 수비대가 항복을 선언했지만 흥분한 군중들은 이를 무시하고 린치를 가했다. 그들은 바스티유 소장이었던 드로네를 시청 앞으로 끌고 가서 그를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 논쟁을 벌였다. 그동안 수도 없이 맞은 드로네는 - P235

"그만하고 차라리 나를 죽여!" 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가까이 있던 사람의 가랑이를 걷어찼다. 그러자 흥분한 군중들이 달려들어 칼로 찔러댔고 곧 톱으로 그의 목을 잘라 머리를 창에 꽂고 거리를 행진했다.
수비대 장교 세 사람도 살해됐다.
그러나 이렇게 큰 전투를 벌여 함락한 바스티유 요새에 실제로 갇혀 있던 사람은 7명에 불과했고, 그나마 그들은 자유의 순교자와는거리가 멀었다. 위조범 4명, 정신병자 2명, 그리고 행실이 부정한 귀족한 명이 전부였다. 유명한 사드 백작이 열흘 전까지 이곳에 있다가 다른 곳으로 이감됐는데, 만일 이 역사적인 날에 바스티유에 있다가 구출됐다면 또 하나의 신화가 만들어질 뻔했다. 이렇게 하여 혁명은 논격적으로 막이 올랐다. 오늘날 7월 14일은 프랑스혁명 기념일이 됐다 - P236

혁명 당시의 국왕 루이 16세에 관해서는 몇 가지 에피소드들이 전해진다. 그는 파리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베르사유 궁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가 당시의 정세에 대해완전히 무심했다고 할 수는없지만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혁명이 시작된 그날, 국왕은 일기에 딱 한 단어만 썼다.
Rien(Nothing). - P237

이는 루이 16세가 그날 사냥을 나갔는데 짐승을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는 뜻이라고 한다.
한편, 국왕의 편에 서서 그를 지켜주기 위해 노력하던 라 로슈푸코리앙쿠르 공작은 바스티유 함락 이틀 전인 7월 12일에 국왕을 찾아가파리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고 경고했다. 국왕은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반란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러자 공작이 답했다.
"전하, 반란이 아니라 혁명입니다." - P237

구데리안과 롬멜Erwin Johannes Eugen Rommel(1891~1944) 장군은 원래의 작전에 따라 전진을 멈추라는 독일군 지도부의 명령을 어기고 독단적으로돌진해갔다. 결국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이것은 지극히 위험한 태도였다. 실제 전격전과 가장 비슷하게 사전 준비된 소련 침공은 오히려 실패로 끝났다. 전격전은 이론적인 바탕이 없고 다시 반복할 수 없다는점에서 모델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는 개념이라는 것이 군사 전문가들의 견해다.
전격전 개념이 사후적으로 합리화된 것은 냉전이 극성이었던 1950년대 초에 서독 군대를 재창건하기 위해 전직 나치 장군들의 협력이 필요했던 시대 상황과 무관치 않다. 구데리안과 그의 탱크 부대는1945년 5월 10일 미군에 투항했다. 그는 미군 포로로 구류 상태에 있다가 1948년에 석방됐는데, 소련과 폴란드 쪽의 항의에도 불구하고뉘른베르크 재판에 전범으로 기소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영국에서 과거의 적들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 전투에 대해 분석하는 일을 자주 했고, 1950년대에는 서독 연방군 Bundeswehr 창설과 발전을 위해 일했다.
역사 해석이 경우에는 차라리 역사 왜곡은 시대 상황에 따라달라지게 마련이다. - P240

한때는 불가피한 것으로 체념하고 감내하던 폭정도 일단 그것에서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즉시 더 이상견디기 어려운 억압으로 여겨지게 된다. 왜냐하면 일부 폐단이 시정될경우 아직 시정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폐단은 더욱 참기 힘든 것으로돋보이게 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람들은 고통을 덜 받는 만큼 감수성이 더욱 예민해지는 것이다. 봉건제는 절정기에 있을 때 오히려 해체기의 경우보다 프랑스인들에게 증오감을 덜 불러일으켰다. 마찬가지로루이 16세의 사소한 권력 남용이 루이 14세의 혹독한 전제정치보다 더참기 힘든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보마르셰의 짧은 투옥 기간이 드라고 - P248

나드Dragonnades 사건 때보다 훨씬 엄청난 동요를 파리에서 불러일으키지 않았던가.

-A. 토크빌, 이용재 옮김, 구체제와 프랑스혁명, 일월서각, 1989, 220쪽.



드라고나드란 루이 14세 통치 초기인 1681년에 있었던 신교도 박해 사건이다.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이지만 앙리 4세 때 낭트 칙령을통해 신교도들에게도 사실상 예배의 자유를 허용했다. 그런데 루이 14세는 자신의 힘을 과신해서 ‘하나의 국왕 하나의 종교‘라는 원칙을 선언하고 신교도의 종교적 자유를 다시 억압했다. 그 방식이 매우 억압적이고 졸렬해서 기마부대kdragoon 병사들을 신교도 집에 기숙시켜 피롭히도록 했다. 집 주인이 신교를 버리고 가톨릭으로 전향하든지 프랑스를 떠날 때까지 군인들이 그 집에 숙영하며 온갖 행패를 부리도 - P249

록 국가가 사주한 것이니, 있을 수 없는 학정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때에는 생각보다 저항이 크지 않았다. 그런데 혁명기에 세비야의 이발사』, 『피가로의 결혼』 같은 극작품으로 유명한 보마르셰Pierre-AugustinCaron de Beaumarchais Beaunmarchais (1732~99)가 며칠 동안 투옥된 사건은엄청난 동요를 일으켰다.
우리의 역사가 바로 이런 경우로 볼 수 있다. 분명 민주화와 경제성장 면에서 북한보다 훨씬 진전된 남한 사회에서 오히려 불만과 항의가 더 격렬한 것도 이런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 이미 많은 것을 얻었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많은 것을 원하게 되는 것이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성향이다.
계속해서 가혹하게 억누르는 데 성공하면 장기간 체제가 지속될 수있다. 그렇지만 어쩌면 북한에서도 작은 변화가 대격변을 초래할 수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 P250

고문 기술자로 악명을 떨친 경관은 자신을 안중근 의사에 비유하며 애국자라고 강변했다. 그는 한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고문기술자가 아니고 굳이 기술자라는 호칭을 붙여야 한다면 ‘신문 기술자‘가 맞을 것"이라면서 "그런 의미에서 신문도 하나의 예술"이라고주장했다.
미국도 다를 바 없었다. CIA가 9.11 테러 용의자들에게 고문을 가한 사실이 만천하에 밝혀진 것이다. 한 용의자에게는 무려 183차례나물고문을 가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에 대한 논란을 지켜보면 오늘날미국이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알 수 있다. - P256

부시 행정부 시절 CIA 국장이었던 마이클 헤이든은 이런 정보들이밝혀지는 것이 국가 안보를 위험하게 한다고 오바마 정권을 강력하게비난했다. 전직 CIA 국장들은 용의자를 천장에 매달아놓고 잠을 재우지 않을 수 있는 시간은 최장 7일로 제한하며, 좁고 어두운 박스에용의자를 감금했을 경우 하루에 6시간 이상은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는 식의 규정을 두었다며, 결코 야만적인 고문을 한 것은 아니라고 강변한다.
세계의 패권hegemony을 차지하는 것은 단지 군사력과 경제력이 강하다고만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를내세우고 그것을 지켜야 한다. 예를 들어 노예무역과 해적 행위로 엄청난 이익을 누리던 영국이 19세기에 스스로 그런 것들을 포기하고 더나아가서 다른 국가들에 대해서도 금지시킨 것은 이 나라가 유럽의일개 강대국에서 한 차원 높은 수준의 제국으로 상승했다는 표시라 할 수 있다. 반대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목청껏 소리치던 미국이 야만적인 고문 행위를 옹호하고 나선 것은 이제 이 나라가 세계의 패권국가가 아니라 그저 여러 강대국 중 하나로 격이 떨어져가는 징후로 보인다. - P257

그러나 페히터처럼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사람도 적지 않다. 모두1,245 명이 서쪽으로 탈출을 시도하다가 사망했고, 그 가운데 장벽 바로 근처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만 136명이나 된다. 장벽을 넘다 총에 맞아 죽은 마지막 사례는 1989년 2월 6일에 있었던 크리스 구프로이Chris Goulffroy 다. 죽음은 면했으나 탈출을 기도하다가 체포된 사람도6만 명에 이르는데, 이들은 평균 4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해야 했다.
통일 이후 1990년에 페히터가 죽은 자리에 새로 세워진 기념물에는이런 글이 쓰여 있다.


그는 오직 자유를 원했을 뿐이다……er wollte nur die Freiheit. - P267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곧이어 9월 17일에 소련은 폴란드 정부가 더 이상 자국 영토를 통치할 능력이 없으며 따라서 모든 외교협정도 무효화됐다고 선언한 후 곧바로 폴란드 영토를 침공했다. 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진격해 들어간 소련의 적군은 수십만 명의 폴란드 군인과 경찰을 포로로 잡았다. 이들 가운데 사회 지도자급 인사 수만 명이소련 비밀경찰인 내무인민위원회NKVD에 넘겨져서 수용소에 갇혔다.
1940년 봄에 이들 가운데 2만 명이 넘는 사람이 조직적으로 학살당했다. 가장 큰 규모로 학살이 자행된 곳이 스몰렌스크 인근의 카틴이라는 숲이었기 때문에 ‘카틴 숲 학살 사건‘이 주로 거론되지만, 사실은 이 시기에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학살이 이루어졌다. 당시 카틴 숲에서 살해된 사람만 해도 해군제독 1명, 장군 2명, 대령 24명, 중령 79명, 소령 258명을 비롯해서 폴란드군의 장교 절반이 넘었고 대학교수20명, 의사 300명, 그리고 100명이 넘는 작가와 저널리스트, 수백 명 - P272

의 변호사, 엔지니어, 교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한 나라의군의 핵심 멤버들과 지식인들을 조직적으로 제거하려 한 것이다.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한 이후인 1943년 4월에 한 독일 병사가 거대한 시체 구덩이를 발견하고 나서야 학살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사실을 보고받은 나치 독일의 선전장관 괴벨스Goebbels(1897~1945)는소련을 비난하기 좋은 소재로써 카틴 숲 학살 사건을 이용했다. 그러나 소련은 역으로 나치독일이 학살을 자행한 것이라고 공격했다. 오랫동안 이 학살 사건이 정말로 두 악마 중 누구의 소행이었는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었다. 냉전 시기에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 상대편을 비난할 뿐이었다. 아마 1950~70년대라면 소련 사학자 중에 이것이 스탈린의 소행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도 과연그 사실을 발표할 수 있었을지 의심이 든다. 사실상 소련의 통제하에있었던 폴란드 역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언급할 사정은 못됐다. 폴란드 역사학계에서 카틴 사건은 금기 주제였다. - P273

소련은 전후 나치에 대한 군사재판 과정에서 사실을 왜곡했다.
1945년 12월에 레닌그라드 군사법정에서 열린 7명의 독일군에 대한 재판에서 아르노 디레 Arno Diere는 자신이 카틴 숲에서 구덩이를파고 약 2만 구의 시체를 매장했다고 자백했다. 그는 기관총으로민간인을 살해한 죄로 기소됐는데,
이 자백 덕분에 사형을 면하고 15년 중노동형으로 감형됐다. 이는아무리 보아도 의심이 가는 자백이었다. 실제로 그는 나중에 자신 - P274

이 소련 쪽의 회유와 협박 때문에 허위 사실을 자백했다고 말했다.
진실이 밝혀진 것은 1989년에 소련의 역사가들이 폴란드인 학살 관련 문건을 찾아내 공개하면서다. 내무인민위원장 라브렌티 베리야가제안하고 스탈린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서명한 이 문건은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여러 캠프에서 25만 700명의 폴란드인을 처형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90년에 소련은 내무인민위원회가 학살을주도했고 그동안 소련 당국이 이를 은폐하려 했음을 공식 인정했다.
2010년에 카틴 숲 학살 사건 70주년 추모행사에 참가하러 가다가비행기 사고로 폴란드 대통령 내외와 국가안보국장, 참모총장, 육·해·공군 사령관, 중앙은행 총재, 다수의 역사학자들이 사망했다. 폴란드의 비극은 언제 끝날 것인가. - P274

라파엘 씨가 이야기를 마쳤을 때 그가 설명한 유토피아의 관습과 법가운데 적지 않은 것들이 아주 부조리하게 보였다. ……………우리가 나중에 시간을 내어서 이 문제들에 대해 더 깊은 의견을 나누고 조금 더 자세한 사실들을 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실 언젠가 그런 기회가주어지기를 지금도 고대한다. 비록 그가 의심할 바 없이 대단한 학식과경험을 가진 것은 분명하지만, 나는 그가 말한 모든 것에 동의할 수는없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유토피아 공화국에는 실제로 실현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어쨌든 우리나라에도 도입됐으면 좋겠다고 염원할 만한 요소들이 많다고 본다.
- 토머스 모어, 주경철 옮김, 『유토피아』, 을유문화사, 2007, 155쪽.


결국 『유토피아』라는 작품이 흥미로운 것은 저자가 생각하는 이상사회의 답을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게 아니라, 과연 이상적인 사회란어떠해야 하는지 계속 질문을 제기하는 데에 있다.
요즘처럼 힘든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선 새로운 미래를꿈꾸는 능력인 것 같다. 그 꿈은 실현 불가능한 황당한 꿈이어서는안 되고 무엇보다 현실에 대한 예리한 비판에서 출발한 지성적인 꿈이어야 한다. 물론 거기에는 꿈을 현실로 만들고자 하는 실천 의지가 따라야 한다. - P282

려운사고하고 있었으니 심란할 수밖에 없다.
과거에 ‘행복‘과 비교적 유사한 기능을 했던 단어는 ‘안심‘이나
‘안락‘이라고 한다. 행복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감이 잘 안잡히지만 ‘안심‘과 ‘안락‘은 훨씬 더 가깝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 사회와 나 자신이 안심하고 안락하게 사는 것이 매우 중요한 기준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더라도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일을 피할 수는 없다. 일단 심리학자들의 충고를 참고해보도록 하자. 다음은 저명한 경제학자 송병락 선생이 저서에서 ‘행복 경제학‘에 대해 설명하면서 인용한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한 아홉 가지 사항이다. 한번 깊이 생각해볼일이다. - P296

1.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비하하는 말을 하지 말라. 그리고 자신이나 남에 대하여 건설적이지 않은 비판은 하지 말라.
2. 현재의 불행, 좌절 또는 실패는 위장된 행복일 수 있다.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라.
3.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가까운 친구를 잘 사귀어라.
4. 자신의 강점과 특성을 잘 살리고 성공과 행복에 대해서는 자신의공을 인정하라.
5.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취미 활동을 개발하라.
6. 과거, 현재 및 미래의 일을 균형 있게 하라.
7. 생각, 행동의 사회적 기준을 알고 자신의 경우를 판단하라.
8. 곤경에 처할 때에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라.
9. 도저히 감정을 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 자리를 피하라. - P297

독립국가가 되기 전 네덜란드는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왕실의 지배하에 있던 속주에 불과했다. 경제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에스파냐가심한 압박을 가하자 네덜란드의 17개 주 중 북부 7개 주가 반기를 들고일어나 80년에 걸친 독립전쟁이 시작됐다. 이 전쟁의 결정적 전환점중 하나가 1573~74년에 있었던 전략 요충지 레이던 시의 포위 공격이었다.
에스파냐가 파견한 진압군을 이끌고 네덜란드에 들어온 알바 공은 1573년에 1차로 레이던 시를 포위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다음 해 2차 포위 공격 때에는 진압군의 규모가 압도적으로 큰 데다가 식량이 떨어져가고 있었기 때문에 레이던 시민들은 더 이상 지탱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하여 항복을 고려했다. 이때 네덜란드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이며 오늘날 이 나라의 국부로 추앙받는 오라녀공 빌렘Oranje Willem (1533~84. 흔히 영어식으로 오렌지 공이라고 부름)은 전령 비둘기를 날려 보내 석 달만 버텨줄 것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 P323

전했다. 그가 생각해낸 최후의 방책은 이 도시 상류에 위치한 제방을터뜨려 이 지역을 물바다로 만들어 진압군을 곤경에 빠뜨리고, 바다로부터 시내로 직접 선박들을 들여보내는 방식으로 군사를 투입시키자는 것이었다.
이럴 경우 레이던 시가 엄청난 피해를 입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라녀 공은 비밀리에 시민 대표들과 연락을 취하여 차후에 보상을 해주기로 약속하고 공격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5월에 시작된 이반격작전은 몇 달이 지나서야 끝났다. 그동안 여러 차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식량 부족에 시달리던 수천 명의 시민들이 굶어 죽었다.
마침내 1574년 10월 3일, ‘바다의 거지들Gueux de mer ‘이라는 특이한 별칭으로 불리는 네덜란드 해군이 넘치는 물을 이용해 보트를 타고 시내로 진격해 들어갔다. 시내에서는 시민들이 낫을 들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에스파냐군과 백병전을 벌였다. 격렬한 공방전 끝에 마침내 - P324

에스파냐군을 몰아내기는 했지만 국토의 많은 부분이 해수면 아래에위치한 이 나라에서 제방을 터뜨린 결과는 실로 참담했다. 모든 것이진흙탕에 묻혀버린 것이다.
시에 진군한 구원군은 우선 굶주리는 시민들에게 흰 빵과 청어를제공했다. 에스파냐군은 퇴각하며 성벽 가까이에 스튜를 끓이는 커다란 솥을 남겨놓았다. 오늘날에도 이날의 승리를 기념하는 축제일Leidens onzet(10월 3일)에는 시청에서 이 솥에다 비프스튜를 끓이고 흰빵과 청어를 무료로 나누어준다.
한편, 막대한 피해를 입은 레이던 시에 보상을 하고 싶었던 오라녀공은 시민들에게 원하는 것을 물었다. 시민들은 대학을 설립해달라고부탁했다. 그리하여 1575년 네덜란드 최초의 대학이 레이던 시에 설립됐다. 이것이 자유로운 학풍으로 유명한 레이던 대학의 기원이다. 이대학은 흐로티위스Grotius(그로티우스, 1583~1645)와 다니엘 하인지우스 - P325

Daniel Heinsius(1580~1655) 같은 걸출한 학자들을 배출했고,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을 출판했으며, 유럽 최고의 동양학 연구센터가 됐다.
레이던 대학과 관련된 또 한가지 의미 깊은 고사는 나치 독일이 네덜란드를 점령했을 때 일이다. 나치는 네덜란드를 점령한 이후 유대인들을 공직에서 내쫓고, 초등학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학생과 교사,
교수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레이던 대학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서유대계의 저명한 법학 교수인 메이여르스E M. Meiers를 쫓아냈다. 그러자 1940년 11월 26일 법대 학장인 클레베링아Rudolph Pabus Cleveringa교수가 공개적으로 이 일을 비판하는 강연을 했다. 그는 곧바로 체포되어 끌려갔고, 대학은 조만간 폐쇄됐다. 다행히 클레베링아 교수는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왔다. 그는 레이던 대학의 모토가 ‘자유의 요새Praesidum libertatis‘라는 것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 P326

일본의 저명한 문예평론가이자 사상가인 가라타니 고진行人의책 『일본 정신의 기원』을 읽다가 흥미로운 내용들을 발견했다. 그는일본 사상의 특징에 대해, 모든 외래 사상들이 일본에 들어올 때 결코억압되는 적 없이 기존의 것들과 잡거한다는 점을 든다. 불교든유교든 혹은 서구 사상이든 적당히 변조되어 신토에 포용된다는것이다.


외부에서 도입된 사상은 결코 억압되는 일 없이 단지 공간적으로 잡거할 뿐이다. 새로운 사상은 본질적인 대결이 없는 상태에서 보존되고, 또 새로운 사상이 오면 갑자기 꺼내진다. 이렇게 해서 일본에는 뭐든지있게 된다. ...... 근대 서양과 접촉하면 아시아 국가들, 특히 중국에서는반동적인 저항이 있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자연스럽게 근대화를 이루어냈다. - P336

그는 일본이 주변부 섬나라이며, 또 한번도 군사 정복을 당하지 않았다는 데에서 그렇게 된 근본 원인을 찾는다. 역사 전체가 근본적으로 뒤집어지는 경험이 없었고, 또 그로부터 강력한 억압과 그에 저항하는 주체 같은 것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또 일본이그처럼 군사 정복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그이유를 한반도의 존재로 설명한다.
중국, 몽골,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한반도가 있어 이곳에서 침입이일차적으로 저지됐다. 14세기에 중국에서 아라비아에 이르는 지역을순식간에 정복한 몽골도 한반도를 완전히 지배하는 데에는 30년이나걸렸다. 몽골이 일본 정복을 단념한 이유는 흔히 몽골 정복군을 몰살시킨 태풍 때문이라고 설명해왔다. 일본에서는 말하자면 신이 지켜주었다는 의미로 이를 가미카제라 부른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암만해도 문제가 있다. 그처럼 강력한 세력이라면 태풍 때문에 원정이 실패했다 하더라도 다시 준비를 하여 재침을 시도할 수 있다.  - P337

그런데 몽골이 다시 일본을 침략하지 않은 것은 고려의 저항에 힘을 소진해버렸기 때문이다. 고려는 결국 몽골에 지배당했지만, 다른 국가들과는달리 매우 오랜 기간 강력하게 저항했기 때문에 몽골로서도 다시 힘을모아 바다를 건너 공격하는 데에 힘이 부쳤던 것이다.
그 반대로 일본의 힘이 엄청나게 강해져서 대륙의 지배로 향할 때그것이 좌절된 것 역시 한반도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16세기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臣秀吉(1537~98)는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명나라를정복하겠다고 나섰다. 당시 일본의 군사력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일부 학자들은 서구의 총포를 들여와개량한 후 수십만 정을 생산한 일본군의 화력이 당시 세계 최강이라 - P337

주장하기도 한다. 전통적인 사무라이 세력에 이처럼 강력한 화력이 더해졌으니 중국을 정복하겠다는 것이 반드시 허무맹랑한 이야기만은아니었다. 사실 명나라 쇠퇴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왜구라는 점은 많은 역사가들이 인정하는 바다. 그런데 이런 강력한 해양력이 대륙을 향해 팽창하려다가 한반도에서 좌절되고 만 것이다.
단지 군사 문제만은 아니다. 일본에 원리적이고 체계적인 것에 의한억압이 없었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그러한 체계적인 억압이 강했던조선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이민족 침략의 거듭된 경험이 ‘억압‘과 ‘주체‘를 강화해왔다. 중국에 인접해 있으면서 정치적·문화적 압박에 노출된 조선은 중국보다 오히려 더 원리적이고 체계적이려는 경향이 생겨났다. 조선에 들어온 주자학이 그런 사례 중 하나일 것이다.
정통에서 벗어나는 경향에 대해서는 사문난적이라는 꼬리표를달아 아예 박멸하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던가. 원산지보다 본래의속성이 더 강해진다고나 할까. - P338

문예비평가의 예리한 견해를 통해 동아시아 역사의 특성에 대해 새삼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한국과 일본, 중국 등 각국의 역사는 결코홀로 성립되지 않는다. 각국의 역사만 따로 떼어서 보면 많은 것을 놓치기 쉽다. 역사 교육을 강화하려 한다면 ‘우리만의 역사‘를 고집할 것이 아니라 ‘세계사 속의 한국사‘를 가르쳐서 학생들이 넓은 시야를 갖추도록 해야 할 것이다. - P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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