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아가서 향은 일반적인 사치품을 넘어 종교적인 물품으로 격상됐다. 몰약은 영생永生의 준비를 위해 미라를 만드는 데에도 쓰였고,유향은 종교 제의에 필수품이었다. 유향을 태우면 미묘한 연기가천천히 원을 그리며 하늘로 올라간다. 고대인들은 상상 속에 이 연기가 하늘에 닿아 좋은 냄새와 아름다운 형상으로 신들에게까지 즐거움을 선사하리라고 믿었다. 초기 유대교도들은 제단의 향로에서 피어올린 자욱한 향 뒤에 신이 현현해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먼 과거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재 우리의 사고를 넘는역사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 P16
개인 집에 욕실(sathroom이 등장한 것은 먼 훗날이었으므로 대개 침실에서 목욕을 했다. 공중목욕탕이 사라진 것은 나체를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는 종교적 가르침도 작용했다. 실제로 목욕탕은 매춘이 빈번히 일어나는 장소였다. 또 여러 사람이 모이고 물을 함께 쓰는 것이전염병을 옮기는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고대 로마제국만큼 중세 이후 유럽 문명이 체계적으로 물을 관리하지 못한프라‘의 문제가 배후에 있었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베르사유 궁에 화인장실과 욕실이 없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그러니 급한 사람은숲으로 뛰어가서 해결해야 했고, 근엄한 왕족과 대귀족 사람들의 청결상태는 매우 의심스러운 수준이었다. 문명의 핵심은 물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다. - P20
심지어 왕궁도 난방 문제에서는 전혀 나을 것이 없었다.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는 양쪽 벽에 각각 하나씩 벽난로가 있었지만 이 거대한 공간을 따뜻하게 데울 수는 없었다. 1695년 2월 3일,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루이 14세가 식사하는 모습에 대해 한 궁정인은 이렇게 썼다. "왕의 식탁에서 유리잔 속의 물과포도주가 얼었다." 당시 실내의 난방 시설이 어떤 수준에 처해 있었는지를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사례도 드물 것이다. 중세 사회의 실상을 설명하는 한 역사가는 돌로 지은 성의 추운 방에서 덜덜 떨며 살던 귀족보다는 초가집 방에서 밤에 돼지를 껴안고자던 농민들이 더 따뜻하게 겨울을 났으리라고 추정한다. 그들이 온돌에서 온몸을 지지며 자는 우리 조상들을 봤으면 꽤나 부러워했을것 같다. - P23
그런데 수세식 변기의 보급은 도시의 위생을 개선했을까. 초기에는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식수원인 템스 강으로 오물을 직접 흘려보내악취가 극심하게 됐고, 만조 때에는 오물이 낡은 하수도관을 타고 가정집의 지하실로 역류하기도 했다. 당연히 수인성 질병이 만연했다. 특히 여러 차례 콜레라가 발병하여 엄청난 피해를 불러일으켜, 이것이 위생 상태의 근본적인 개선을 요구하는 계기가 됐다. 영국의 변호사이자 사회 개혁의 선구자인 에드윈 채드윅 Edwin Chadwick(1800~90)이 영국 노동 계급의 위생 상태에 대한 보고서」를 통해 도시 빈민들의 비위생적인 환경을 개선하자고 역설한 덕분에 완전히 새로운 상하수도 시스템이 마련됐다. 하수도관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거주지로부터 먼 곳에서 하수를 처리할 수 있게 된 다음에야 수세식 화장실이 제 기능을 다할 수 있게 됐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수세식 변기는 오랜 세월에 걸친 각고의 노력의 산물이다. - P26
그때가 되면 새로운 통제소를 통해 원격 조정이 가능한 최첨단 상수도 시스템의 시대가 열리게 될 것이다. 뉴욕 시만이 아니라 미국 내 모든 주요 도시들이 뉴욕 시와 비슷한종류의 기반시설 문제에 직면해 있다. 미국 내 급수 시스템의 핵심 시설인 112만 6,540킬로미터에 달하는 노후한 상하수도관과 정수장 및기타 시설들을 개선하는 데 향후 20년간 2750억 달러에서 1조 달러의비용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된다. 전 세계적인 수자원 기반시설 수요는 이보다 훨씬 규모가 크다. 아마도 전 세계 도시에 공급되는 식수의절반 가까이가 가정에 공급되기 전에 소실되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갑자기 서울이나 부산 같은 우리나라 도시의 땅 아래 사정이 궁금해진다. - P30
우리나라는 일찍이인쇄술이 발달해 있었다는 점을 자랑한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光大陀羅尼」(706~751)은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로 알려져 있고,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1377)은 구텐베르크 Johannes Gutenberg(1397~1468)의 발명보다 수십 년 앞서 있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물이다. " 이처럼 ‘역사상 최초‘라는 점도 의미가 크지만,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인쇄술이 지식의 보급이라는 면에서 어떤 공헌을 했는가다. 우선어떤 책이 얼마나 출판됐으며, 또 그것들이 당대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 읽혔는지를 연구해야 한다. 이 점과 관련해서 유럽에서 금속활자의발명 이후 일어난 책의 출판과 지식의 보급에 대한 연구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 P31
책만이 아니라 신문의 발행 역시 주목할 만하다. 1605년에 상업 관련 기사를 실은 정기적인 신문이 창간됐고, 1693년에는 영국에서 최초의 여성 잡지가 보급됐으며, 1702년에는 최초의 일간신문이 발행됐다. 1753년에 영국의 출판업자들은 매일 2만 부의 신문을 판매했다. 에스파냐 왕실은 1476년부터 국가의 공식적인 결정 사항들을 신속하게 전달하기 위해 인쇄기를 적극 활용했지만 오스만 제국과 무굴제국 등 아시아의 대국들은 계속 필경사에 의존했다. 무슬림 국가들은 신성한 『쿠란』을 인쇄기로 찍는다는 것을 신성모독으로 치부해서오랫동안 인쇄술을 거부했다. 1450년 이후 인쇄술을 적극 활용한 유럽은 지식과 정보 면에서 세계의 나머지 지역과 확연히 구분됐다. 아마도 이것이 근대에 유럽이 앞서간 중요한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 P33
다소 놀라운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원래 낙타는 북아메리카가 원산지다. 진화 초기에는 토끼만 하던 이 동물 Protylopus이 어떻게 해서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동물로 변했는지는 미스터리다. 지금부터 약 1만 3천 년 전까지 지속됐던 소빙하기에 해수면이 현재보다 크게 낮아져서 오늘날의 베링 해협이 베링기아Beringia 라 불리는 육로가 되어 알래스카와 시베리아 동부 지역이 연결됐을 때 낙타가 시베리아 쪽으로들어왔다. 이때 낙타의 모습이 어땠는지, 예컨대 혹이 하나였는지 둘이었는지는 불확실하다. 아마도 원래 쌍봉낙타camel였다가 그중 더운지방으로 들어간 것들이 단봉낙타(dromedary로 진화해가지 않았을까생물학자들은 추론하고 있다. 그 후 정작 북아메리카에서는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동물들이 많이 있지만 그 가운데 특기할 만한 사례로 낙타를 들 수 있다. - P34
19세기에 기차가 등장하기 전까지 유라시아-아프리카 대륙의 문명권들과 그 주변 지역을 연결하는 일은 ‘사막의 배‘라고 불리던 낙타가없이는 불가능했다. 게다가 더운 사막 지역에서는 단봉낙타가 추운스텝 지역에서는 쌍봉낙타가 적응하여 일을 하는 ‘세계적인 낙타의 분업‘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니, 사람들은 이를 신의 섭리로 해석했다. 현재의 관점에서는 한 마리당 약 50킬로그램 정도(과거 역사 시대의 단봉낙타의 경우)에 불과한 수송량이 가소로운 정도로 보이지만, 아랍 지역 · 인도·중국·북아프리카·중앙아시아 등 여러 지역 간의 경제적 혹은 문화적 교류가 진행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낙타 덕분이었다. 낙타는 우리 역사와는 큰 인연이 없었지만,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보았을때 여러 문명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나가는 데에 결정적인공헌을 했다. - P37
소금은 사람의 생명유지에 필수불가결한 물품이다. 사막을 건널 때물 부족만큼이나 위험한 것이 소금 부족이라고 한다. 그래서 낙타를 몰고 사하라 사막을 건너는 대상은 물이 나는 곳과 함께 암염이 나는곳 혹은 소금을 숨겨둔 곳을 잘 기억하고 여행을 해야 한다. 바닷가에서 먼 내륙 지방에 사람들이 거주하는 경우에는 암염 광산이 가까이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소금 장사꾼들이 닿을 수 있어야만 한다. 과거의권력 당국은 이처럼 소금 공급이 필수불가결하다는 사실을 이용해 세금을 걷었다.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소금 거래에 소비세를 부과하는 것만큼 손쉬운 징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 P45
도시에서 사용되는 용수도 거의 재활용되지 않고 있다. 주택의 3분의 2가 하수 처리 공장과 연결되어 있지 않아 하수오염물질이 표층 지하수에 흘러들어가 그렇지 않아도 심각한 물부족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이런 속도로 진행될 경우 빠르면 2025년에 아라비아 반도의 대수층은 바닥을 드러낼 것이다. 서서히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황금 시대의 종말이 가까워오고 있다. 석유 채굴이 한계에 도달하면 사우디아라비아인들은 석유보다는물이 인간에게 훨씬 중요한 자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난 시대에 우리는 석유가 한 방울도 나지 않는 나라에 산다고한탄했지만, 조만간 물이 풍부한 우리나라야말로 실로 복 받은 나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 P50
중국의 역대 왕조는 안정 단계에 들어서면 늘 대규모 치수 사업을벌였다. 남수북조 공정 역시 그러한 고대 제국의 논리를 연상시킨다. 이 사업의 아이디어는 1950년대에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이 처음제안했다. 당시 마오쩌둥은 "남부에는 물이 풍부한 반면 북부엔 물이부족하니 가능하다면 남부 물을 조금 빌려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90년대에 중국이 극심한 가뭄 피해를 입은 후 이 아이디어가 되살아나 논의를 거친 끝에 본격 추진하게 됐다. 그러나 이 거대 사업은사회적·환경적 영향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이루어져서 과연 어떤결과를 초래할지 관심 있게 지켜보아야 할 일이다. - P54
로마 제국은 왜 멸망했을까. 이것은 역사학의 고전적인 질문이지만, 사실 로마 제국이 왜 멸망했는지 묻기보다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망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는지 묻는 것이 더 타당할지 모른다. 신화상의시대나 왕국은 차치하고 로마 공화국부터 따지면 고대 로마는 약 500년 정도 공화정으로 존속했고, 아우구스투스 이래 다시 500년 가까운세월 동안 제정으로 존속했으니, 무려 1천 년 가까이 유지된 것이다. 제국 말기에는 유럽 대륙과 아프리카 북부 지역을 포괄하는 거대한영토를 지배했는데, 당시 교통수단이나 인구 수준을 고려하면 똑같은 크기의 영토라 하더라도 오늘날에 비하면 훨씬 더 관리하기가 어려운 광대한 제국이었다. 그러니 이 공룡과 같은 거대 제국이 말년에 심각한 중병을 앓으면서도 그토록 오래 버틴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할 수 있다. 하여튼 사망진단서에 기록할 만한 구체적 사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설이 제기됐다. 노예제 대농장(라티푼디움)의 비효 - P55
율성과 노예 공급의 중단으로 경제가 전반적으로 불황에 빠진 기점, 독교를 비롯한 외래 종교의 전파로 군인들의 강건한 상무정신精神이 쇠퇴한 점, 국가 기구가 비대해진 데다가 과도한 세금과 인플레이션으로 민생이 파탄난 점 등이 흔히 거론되는 요소들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망국의 원인들의 목록에 한 가지 특이한 요소를더할 수도 있다. 미국의 한 학자가 시민들의 납중독을 중요한 요소로 거론한 것이다. 로마의 상층 계급 사람들은 음식을 조리하는 데청동 그릇 대신 납으로 된 그릇을 사용했고, 배수관과 물 단지도 납으로 만들었으며, 화장품·약·염료를 만드는 데에도 납이 많이 들어갔다. 특히 포도주를 잘 보존하고 단맛을 더 내기 위해 내부를 납으로입힌 단지 속에 포도즙을 넣고 끓여서 맑은 액을 건져내어 포도주에첨가했는데, 이런 과정에서 상층 계급 사람들은 상당히 많은 양의 납을 흡수하게 됐다고 한다. - P56
체내에 하루 1밀리그램 이상의 납이 흡수되면 변비와 식욕 감퇴, 수족 마비부터 시작해서, 남자들의 불임, 임신부의 유산 등이 유발될 수있다. 그리하여 몇 세대에 걸쳐 서서히 집단적으로 납 중독에 걸린 상층 계급이 높은 사망률과 낮은 출생률을 보이게 됐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동부의 권력 핵심 지역인 라벤나 같은 곳에서 이런 현상이 특히심했다고 한다. 변방에서 이민족의 압박이 점차 거세졌지만 사회 지도층 인물들이 서서히 사라져가면서 로마는 내부의 활력을 상실해갔고 그 결과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4세기 말에 이르면 밀라노 주교인 암브로시우스Ambrosius(340?~397)는 주변에서 볼 수 있는것이라고는 "반쯤 파괴된 도시들에 널린 시체들뿐이었다고 한탄했다. 납 중독이라는 하나의 요소로 로마 제국의 멸망을 전부 설명할 수는없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무시할 수도 없어 보인다. 복잡다기한 역사현상의 이면에는 이처럼 예기치 않은 흥미로운 측면들이 숨어 있다. - P57
개인이든 사회든 고립 상태가 계속되면 지체와 퇴보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문명과 문화는 지속적으로 외부 세계와 만나고 상호 교류를 해야발전을 기할 수 있다. 홀로 고립될 경우 아무런 자극을 받지 못하고정체하기 십상이며,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의 고립 끝에 갑자기 외부세력과 접촉할 경우 식민 지배를 받거나 심하면 절멸당하는 사례가 많다. 지구적인 시각을 가지고 세계의 흐름을 잘 타야만 발전할 수 있다. - P63
유럽인들에게는 희망이었을지 모르지만 원래 이곳에 살던 코이산족khoisan("호텐토트‘라는 말은 네덜란드인들이 경멸적으로 붙인 이름이다) 같은 현지인들에게는 이런 일들이 불행의시작이었다. 아시아와 유럽 사이 원거리 항해 중에 선원들이 휴식을취하고 보급품을 충전하는 중간 정박지로서 좋은 여건을 가진 이 지역은 1652년에 네덜란드인들이 조직적인 정착을 시도하여 곧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위한 보급기지가 됐고, 후일 케이프타운으로 발전했다. 그 후 프랑스계 신교도들(위), 독일인, 영국인 등이 차례로 들어와 주변 지역으로 팽창해가면서 전쟁과 약탈, 인종차별의 복잡한 역사가 전개됐다. 1815 년에 영국의 식민지가 되자 네덜란드계 사람들(즉 보어인들이 영국 식민 지배를 피해 주변 지역으로 확산해나가서 새로운 정치 단위들을 형성했다. 이 과정에서 21캐럿짜리 다이아몬드 원석이 발견되어 이 지역이 다이아몬드 생산지라는 것이 알려졌고, 금도 - P65
발견되어 더욱 해외 세력의 유입이 증가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잔혹한 식민지 전쟁인 보어 전쟁의 무대가 됐다. 20세기에는 세상에서 유례를 찾기힘든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및 인종차별)의 역사가 진행됐다. 희망봉으로 명명된 이 지역의 역사는 대부분의 시대에 절망적인 암흑의 역사였다. 드디어 1994년 넬슨 만델라NelsonMandela (1918~ )가 대통령으로집권한 이후 오랜 비극의 역사는 일단 진정됐다. 태즈메이니아가 외부 세계와의 고립 때문에 역사 발전의 흐름에서뒤처져 몰락했다면, 남아프리카 희망봉 지역은 아무런 대비 없이 외세의 침략을 받아 고통을 당했다. 결국 철저한 대비를 한 연후에 세계의흐름을 타는 것이 핵심 과제가 될 터다. - P66
17~19세기에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개체 수가 많은 새는 나그네비둘기 passenger pigeon (여행비둘기라고도 한다)였다. 당시의 기록들을 보면이 새가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예컨대 1854년 미국 뉴욕주의 웨인 타운에서는 "며칠씩이나 새들로 하늘이 뒤덮일 때가 있고, 새 떼가 안 보이는 시간은 반나절도 안 됐다." 하늘을 덮은 이 새 떼의 무리는 1.6킬로미터 폭에 길이가 500킬로미터에 이르기도 했다. 나무 한 그루에 심지어 100개 가까운 새 둥지가 만들어졌다가 그 무게때문에 가지가 부러지거나 뿌리가 뽑히기도 했다. 새 떼를 향해 총을한 발 쏘면 30~40마리가 떨어졌고, 언덕에서 나뭇조각만 던져도 쉽게 잡을 수 있었다. 인디언들은 막대기로 이 새들을 때려잡았고 따라나선 아이들도 새 모가지를 쉽게 비틀어 잡았다고 한다. 학자들은 한창때에 이 새의 개체 수가 최소 수십억 마리에서 많게는 10조 마리까지였을 것이라고 추산한다. 어떻게 한 종의 개체 수가 이토록 많을 수 있을까. - P67
생태학자들과 역사가들은 아마도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에 도래한이후 생태계를 교란시킨 결과 이런 비정상적 현상이 일어났을 것으로추론한다. 그 이전에는 이 새가 생태계 내에서 다른 종들과 적절한 균형 상태에 있었으나 어떤 이유에선지 생태계가 통제력을 상실한 후 비정상적으로 수가 늘었다는 것이다. 가능성이 큰 가설 중 하나는 기술적으로 불을 지르며 숲을 다스리던 인디언들이 몰락하자 생태계의 변화가 유발됐다는 것이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왔을 때 그들은 이곳의 자연이 인간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본래의 상태 그대로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유럽인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강에는 어살이 있었고, 인공 둔덕들이 있었으며, 숲도 많이 변형된 상태였다. 특히 인디언들은 불을 질러 숲을 통제하여 어떤 곳에서는 원하는 과실수들이많이 자라도록 만들어놓고, 어떤 곳에는 원하는 사냥감들이 많이 모이도록 해놓았다. 이럴 때 사람은 말하자면 이곳 생태계의 핵심종(다른 - P68
많은 종들의 생존과 개체 수에 영향을 미치는 종)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럽인들의 도래 이후 인디언들의 수가 줄어들자 생태계의 균형이깨졌고, 그때 일어난 이상 현상 중 하나가 특별한 종의 동물 수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난 것이다. 나그네비둘기의 수가 엄청나게 많았던 것만큼이나 이 새가 사라져간 것도 극적인 일이다. 삼림 황폐화로 인해 이 새들의 먹잇감인 도토리, 밤 같은 것들이 크게 줄어들었다. 게다가 19세기에 이 새는 대랑 포획의 대상이 됐다. 초기에는 한 해에 약 25만 마리를 잡았는데, 이 정도만 하더라도 멸종 위기에 몰릴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 곧 사냥꾼들과 상인들이 회사를 만들어 이 새를 무차별 포획하여 대도시에새고기를 공급했다. 이것은 노예들과 빈민들의 식량으로 많이 쓰였다. 1860년 7월 23일자 이 회사의 기록을 보면 하루에 23만 마리 이상의새를 잡아서 동부로 보냈다. 이런 정도의 남획이 지속되자 그 많던 새들도 결국은 사라져갔다. 드디어 1914년 9월 1일, 미국의 신시내티 동물원에서 ‘마사Martha‘라 불리던 마지막 나그네비둘기가 죽음으로써 이새는 지구상에서 영구히 사라졌다. 2011년 초에 새들이 떼죽음을 당해 하늘에서 떨어지는 일들이 자주벌어졌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새들의 서식지 환경이 변화했기 때문이아닐까 추정된다고 한다. 암만해도 인간이 다른 동물들에게 너무 큰폐를 끼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P69
지진의 발생을 예측할 수 있을까. 지진 예측이 가치가 있으려면 지진이 일어나는 장소와 시기, 규모를정확히 맞혀야 한다. 학교와 공장의 문을 닫고 주민들을 대피시키는데에는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한 지진학자는 유용한 지진 예측은 "50퍼센트는 맞아야 하고, 하루 정도의 정확도를 가져야 하며, 50킬로미터 이내로 맞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수준의 예측은불가능하다. 그동안 지진 발생을 예측한 사례가 많이 있었다. 1990년 아이벤 브라우닝ben Browning (1918~91)이라는 생물학 박사가 12월 1일에서 5일사이에 미국 미주리 주의 세인트루이스에서 강력한 지진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 시기에 태양, 지구, 달이 일직선을 이루는데, 이때강해진 중력이 일으킨 조수력에 의해 뉴마드리드 단층 지역의 스트레스가 한계 이상으로 올라가 지진이 일어난다는 설명이었다. 미국 중동부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패닉 상태에 빠졌고, 사회 전체가 엄청 - P70
난 혼란에 빠졌지만 지진은 일어나지 않았다. 1970년대 후반에 일본의 과학자들은 일본 중부에 대지진이 엄습한다고 경고했다. 이들의 추론은 매우 단순했다. 지진이 일어나는 전형적인 간격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지역에서 지진이 일어난 뒤에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곧 다음 지진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의견을 받아들인 일본 당국은 조기경보체계를 만들고, 지진 데이터에 조금만 이상이 있어도 즉시 조사위원회를소집하여 원자로, 고속도로, 철도, 학교와 공장을 닫을지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비상시 대피 훈련을 계속했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도록 그런 지진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이나 일본처럼 지진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국가에서는 그동안막대한 자금을 투입해서 지진 예측을 위한 연구를 수행했다. - P71
특히 큰지진이 일어나기 직전에 나타나는 특별한 징후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지구물리학자들이 100년 넘게 연구를 했음에도불구하고 현재까지 믿을 만한 전조 현상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누구는 큰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땅에 이상한 전류가 흐른다고 주장했고, 누구는 개나 소가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고 했다. 혹은 날씨가 아주변덕스럽거나 이상한 빛이 난다고도 했다. 그러나 도쿄대의 지구물리학자인 로버트 겔러는 이런 식으로 지진의 전조 현상을 찾아냈다고 주장하는 연구 논문을 700편 이상 검토했으나 어느 하나 신뢰성이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왜 지진의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힘든 것일까. 지구물리학자들은 "지진의 에너지 방출 규모와 발생 빈도 사이의관계는 멱함수(power function) 형태를 띤다"고 이야기한다. 이말은 사람이 느낄 수도 없는 아주 작은 지진이나 아이티 대지진이나 - P71
모두 똑같은 원인으로 일어나, 다만 작은 지진이 큰 지진보다 일정한 비율로 더 자주 일어나는 것을 뜻한다. 예컨대 1999년 8월 30일캘리포니아의 여러 지역에서 조사한 지질측량국의 기록을 보면, 지진이 22회 일어났다. 그러나 규모 3에 도달한 것은 1회뿐이다. 그 나머지 규모 3 이하의 지진은 창에 앉은 파리도 꿈쩍하지 않는 작은 흔들림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이것 역시 개념상으로는 분명 지진이다. 말하자면 거의 매일같이 작은 지진들이 발생하고 있지만 워낙 미미한 정도라 사람들은 그것을 지진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따름이다. 크고 작은 지진들이 무수히 일어나는데, 그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지진의 강도와 빈도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있다는 것뿐이다. - P72
1987년에서 1996년까지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일어난 지진들의 데이터를 분석해보면 에너지 방출이 두 배가 되면 빈도는 네 배로 줄어든다. 즉 우리가 거의 느끼지도 못하는 아주 작은 지진들은 수없이 많이 발생하며, 규모가 커질수록 일정한 비율로 줄어든다. 그래서 사회에 큰 충격을 주는 정도의 큰 지진은 매우 적게 발생한다. 이런 사실의 의미는 큰 지진이라고 해서 특별한 원인이 따로 있지 않으니 특별한 징조도 없고, 따라서 큰 지진이 언제 어디에서 일어날지 전혀 알 수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지진 예측이 아니라 다른 일일 수밖에 없다. 예측할 수 없는 지진 발생은 하늘의 뜻이라고 하더라도 지진에 대한 대비, 그리고 지진이 일어났을 때의 복구 사업은 전적으로 인간 사회의 몫이다. 저명한 역사가 에릭 존스의 주장처럼 선진국이란 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충격에 대한 대비를 충실히 하는 국가를 말한다. - P72
요루바족은 ‘말하는 북alking drum‘ 을 사용한다. 성조언어(소리의 높낮이를 달리하여 서로 다른 뜻을 전달하는 언어)인 아프리카어의 특징을 살려 북소리의 높낮이를 조절하여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다. 예컨대 북소리만으로 누가 오는지도 미리 알 수 있다. 마을 어귀에 있는 사람이북소리로 마을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해주는 것이다. 이들이 춤을 출 때 춤꾼과 고수는 북소리로 대화를 나눈다. 고수가 원하는 춤동작을 북소리로 지시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감탄하는 춤꾼은고수의 지시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사람인데, 말없이 북소리로만 의사를 전달한다. 아프리카 열대우림 지역에서는 긴 나무를 재료로 음량을 키운 북을사용하여 마을과 마을을 잇는 연락망으로 왕국의 소식을 전달하기도한다. 아메리카에 노예로 끌려간 사람들은 플랜테이션에서 일하다가정기적으로 밤에 모임을 가지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때 노예들이 가장 신경을 쓰며 기어이 빼앗으려 한 것도 북이었다. 노예들이 북을 치며 흥을 돋우는 것이 단순히 노는 정도를 넘어 위험한 수준으로 응집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북을 치며 소리 지르고 노래하고 춤추는 행위는 인간을 서로 엮는핵심적인 행위다. 그렇게 보면 가무는 일종의 ‘문화적 페로몬‘이라고할 수 있지 않을까. - P86
해마다 4월 말이 되면 네덜란드의 하를럼 시 주변 지역은 지평선 끝까지 튤립으로 덮여 장관을 연출한다. 이 아름다운 튤립이 한때 광란에 가까운 투기의 대상이었던 적이 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강렬하고 다양한 색상을 가진 튤립이 큰 인기를 끌면서 가격이 급등했다. 이를 이용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데생각이 미치자 수많은 사람들이 전 재산을 털어 텃밭을 사고 튤립 구근을 키웠다. 이는 곧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투기 현상으로 이어졌다. 값이 오르리라고 예상되는 구근을 10퍼센트의 선금만 지급하고 미리 확보해놓는다. 수확기가 되면 잔액을 지급한 다음, 값이 훨씬 올라 있는 이구근을 다른 사람에게 되판다. 이렇게 되면 소액의 선금만 이용해서큰 이윤을 남길 수 있다. 사실 이런 방식은 우리에게는 아주 친숙하지만, 당시에는 꽤나 충격적인 것이었다. 허황된 방식으로 돈을 번다고해서 이런 거래를 ‘바람장사vinchance)‘라고 불렀다. - P87
콜럼버스의 생각대로라면 현지 주민들의 언어는 언어도 아니고, 기독교가 아닌 종교는 종교도 아니다. 그들을 지배하고 노예로 삼으면될 것이며, 우선 그중 몇 명을 짐승 잡아가듯 맘대로 잡아다가 통역겸 앞잡이로 키우면 좋을 것이다. 이것이 유럽인들의 태도였다. 실제로이 이후 일어난 일들은 ‘인디언‘이라고 잘못 명명한 이 사람들에 대한착취와 노예화, 학살이었다. 이날 일어났던 일 가운데 아마도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콜럼버스 일행이 보여준 칼을 현지인들이 움켜쥔 일이다. 칼을 처음 본 현지인들은 어디가 날이고 어디가 칼등인지 몰라 날 - P91
을 잡았다가 손을 베고 만다. 조만간 이들은 서양의 무력 앞에 상처를받고 굴복하게 될 것이다. 소위 지리상의 ‘발견‘이나 식민지 ‘개발‘의 실상은 이런 것이었다. 그동안 콜럼버스를 영웅으로 기리던 미국 학교에서도 점차 실상을 숨김없이 가르치고 있다. 최근 신문지상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의 한 초등학교 4학년 학생들이 콜럼버스를 피고로 해서모의재판을 열었는데, 그 결과는 "에스파냐 왕실을 빙자하여 절도를한 혐의로 무기징역이 선고됐다고 한다. 일부 국가나 지역에서 ‘콜럼버스의 날‘을 다른 이름으로 기념하는것도 이런 흐름과 통하는 일이다.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 P92
칠레, 멕시코는 이날을 ‘인종의 날Dia de la Raza‘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유럽인과 아메리카 주민이 처음으로 만난 것을 기념하는 의미다. 미국에서도 사우스다코타 주는 이날을 ‘아메리카 원주민의 날Native Americans‘ Day‘로, 하와이 주는 폴리네시아인이 하와이를 처음 발견한 날이라는의미로 ‘발견자의 날Discoverers‘ Day‘로 바꾸었다. 과거 역사 인물 중 콜럼버스만큼 격정적인 논쟁의 대상이 되는 인물도 드물 것이다. 그는 이제 ‘신대륙을 발견하고 새로운 세상을 연 인물이라기보다는 침략자, 학살자로 그려지는 경향이 있다. 역사를 보는시각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이처럼 시간이 흐르면서 크게 바뀌어간다. - P93
1886년 미국 대법원의 수석재판관인 모리슨 웨이트는 미국 수정헌법 제14조에 근거하여 회사는 사람과 똑같은 권리를 가지는 존재라고판결했다. 회사는 적어도 법적으로는 실제 사람과 똑같은 존재인 법인이 되어서, 그 자신의 이름으로 사업을 운영하고 자산을 취득하며 노동자를 고용할 뿐 아니라 법원에서 자기 권리를 옹호하게 됐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회사는 어떤 성격의 존재였던가. 캐나다의법률가이자 작가인 조엘 바칸Joel Bakan 은 저명한 심리학자 로버트 헤어Robert D. Hare 박사가 창안한 심리검사 기준을 적용하여 회사(법인)가실제 사람(자연인)과 같은 존재라고 가정하면 과연 어떤 성격의 사람인지 분석해보았다. 회사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른 모든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는 ‘무책임한 태도를 보인다. 여론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조종‘ 하려고 하며, 자신이 늘 최고라고 주장하는 ‘과대망상‘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자신 때문에 희생하는 사람들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 ‘동 - P105
정심 부족‘과 ‘비사회적 태도‘라는 특징도 보인다. 회사가 위법 행위를하다가 발각되면 약간의 벌금을 물고는 다시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점에서 ‘자기 행동에 대해 책임감이 없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존재다. 회사는 일반 대중에게 자신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려는 의도로만 관계를 맺으려고 하므로 대인관계는 언제나 ‘피상적‘이다. 실제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은 다름 아닌 사이코패스, 즉 폭력성을 동반한상심리 소유자다. 지금까지 많은 회사는 분명히 이런 성격의 존재였다. 예컨대 멕시코 만에 엄청난 원유 유출 사고를 일으킨 영국의 글로벌 석유회사 BP아모로의 행태를 보면 그런 분석에 공감하지 않을 수없다. - P106
그러나 현대 사회경제 역시 진화를 거듭하여, 이제는 과거와 같은행태를 고집하기가 쉽지 않다. 현대 마케팅 이론의 대가인 필립 코틀러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csk(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을 다하는 ‘착한 기업만이 살아남는다고 주장했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은 소비자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전달하기 때문에 소비자들은 그 회사제품을 더 사려 하고, 회사는 더 좋은 인재를 유치할 수 있으며, 협력회사로부터는 더 유리한 업무 협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익을위해서는 온갖 악행도 마다하지 않는 천민자본주의식 기업은 큰 장사를 못한다. 기업의 선행은 단순히 위장된 쇼가 아니라 국내외 경제 환경에서 다 - P106
른 사람들(자연인이든 법인이든)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데 필수적 요소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물론 기업들에게 천사 같은 박애주의자가되라고 할 수는 없다. 기업의 1차 목표는 결국 돈 버는 일이다. 다만이 사회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며 선한 방식으로 돈을 버는 성숙한 인격자가 되어야 마땅하다. - P107
세계의 대학 입학제도 가운데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프랑스의 바칼로레아가 있다. 이것은 중등교육과정을 잘 수료하여 대학에 입학할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는지 검정하는 시험으로, 우리의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리세lycée 마지막 학년에 치른다. 이 제도는 나폴레옹 시대인1808년에 처음 도입됐으니, 무려 2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바칼로레아는 프랑스의 사회 변화를 반영하며 진화를 거듭해왔다. 초기에는 대학 입학이 상층 계급의 전유물이어서, 1808년 첫해에는 과학 영역 바칼로레아 한 종류만 있었고, 구술시험을 통해 31명의 자격자 bachelier만 배출했다. 제1차 세계대전 전야만 해도 여전히 자격자는7천 명에 불과할 정도로 소수였으나, 1960년대에 이르러 큰 변화가찾아왔다. 이때까지 대학은 대부분 도시 상층민에게만 문호가 개방되어 있었고, 농촌 지역에서는 초등교육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1960년대에 이러한 사실상의 구분이 사라져서 전국의 모든 학생이 바칼로레아를 거쳐 대학에 가는 길을 택하게 됐다. - P108
여기에 베이비붐의 영향이 더해졌다. 청소년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이들 중 많은 수가 교육을 더 많이 받아 사회 상층으로 상승하려는욕구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바칼로레아 응시자가 크게 늘어날 수밖에없었다. 1960년에 5만 명이었던 자격자는 5년 안에 10만 명에 육박했다. 이때는 또한 소위 ‘68년 혁명‘의 시대였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낭테르 대학(파리 10대학) 학생 시위를 우파 정권이 진압하면서 시작된 학생과 시민의 항의 시위는 5월 13일 무려 100만 명의 파리 시민들이 길거리에 나서서 행진하게 됐고, 그 후에는 무려 1천만 명이 넘는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 초유의 사태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사회·정치적 변화에 맞추어 대학 체제에도 변화가 찾아왔고(예컨대 단기공과대학 만들어졌다) 그런 변화에 맞추어 바칼로레아 체제 역시 조정됐이다. 1985년에 세 번째 영역인 전문 분야 바칼로레아가 만들어져 이제학생들은 자신의 진로에 맞춰 일반·전문·기술 세 영역의 바칼로레아 - P109
중 한 가지를 선택하여 응시한다. 프랑스 교육당국은 한 연령층 학생중 80퍼센트가 바칼로레아 자격자가 되도록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자격 미달인 학생들이 많아 오늘날 그 수치가 대체로 65퍼센트정도에 머물고 있다. 영역에 관계 없이 모든 응시자들이 치르는 철학시험에서는 광범위한 독서와 독창적 사고를 요하는 논술 문제가 출제된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한가", "우리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을진리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식의 문제들은 응시자만 아니라 전국민이 한번쯤 이야기하는 화제가 되곤 한다. 이 제도 역시 여러 문제를 안고 있고 많은 개선 요구에 직면하지만, 장구한 기간 큰 틀을 유지하는 가운데 사회의 민주화와 다양화를 반영하면서도 동시에 품위와 권위를 누린다는 것은 정말로 큰 장점이다. 말로는 교육이 백년대계라고 하면서도 쉴 새 없이 제도를 바꾸면서 그때마다 수험생들과 학부모들을 고통 속에 밀어넣는 우리나라의 현실과는 얼마나 대조적인가. 앞으로도 또 어떤 새로운 대입제도가계속 나타날지 궁금하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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