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회 집단이 나치에 투표할 가능성이 높았는지 돌이켜 보는 게 중요하다. 1930년에는 뚜렷한 흐름이 나타났다. 앞에서 말했듯 나치는 중산층신교도 진영을 넘겨받았다. 가톨릭 진영 표를 약간 가져오고, 사회주의진영에서 약간 더 가져왔지만, 신교도 진영에서 가져온 표가 훨씬 더 많았다. 그래서 나치를 뽑은 유권자는 기본적으로 농촌 지역, 특히 독일 북부와 동부의 농촌 지역 신교도와 도시에 사는 중산층 신교도였다. 가톨릭신자와 노동자는 대부분 자신들의 전통적인 진영에 남아 있었다. 독일 신교도들이 바이마르 공화국을 싫어할 만한 종교적·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신교도는 인간 본성을 비관적으로 생각했고, 권위주의 국가만이 인간의 죄악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느꼈다. 권위주의 국가는 하나님 - P166
의 도구이고, 혁명은 하나님에 맞서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프로이센에서는 1817년에 루터파와 칼뱅파 교회가 통합되면서 프로이센 교회 연합이만들어졌고, 1918년 이전까지 프로이센 왕이 이 연합의 수장이었다. 독일수도사 마르틴 루터가 로마 가톨릭 교회에 맞선 1517년 이래, 독일 개신교가 극도로 민족주의적으로 된 일은 자연스러웠다. 훗날 주교가 된 오토디벨리우스Otto Dibelius 목사는 "교회는 정치적으로 중립이지만 국가인민당에 투표한다"1" 라고 말했다(그는 모순을 의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신교도가 싫어하는 요소들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1918년 이전에 신교도들은 강력한 군주제가 정치를 넘어서는 국가 기관으로서 도덕적인 사회생활을 보장한다고 생각했다. 정당이 권력을 가지고 세속적인 민주주의 국가인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서자 신교도들은어찌할 줄 몰라 했다. 타협과 부패로 얼룩진 정치가 국민 생활을 지배하고, 오랫동안 확고했던 도덕이 사라졌다고 여겼다. - P167
게다가 혁명으로 새 국가가 들어섰고,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헌법을 만들고, 가톨릭을 대변하는 중앙당이 매우 중요한 정당으로 자리잡았다. 중앙당은 중도인 데다 선거에서도 표를 많이 얻어 바이마르 공화국의 어떤 연정에서도 중요 위치를 차지했다. 1932년까지 모든 프로이센주정부와 연방정부 구성에 참여한 정당이었다. 신교도는 그렇게 정치적힘을 얻은 가톨릭을 질투하며 화를 냈다.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같은 사람들은 보수주의 정당과 자유주의 정당들을 한데 모아 개신교적인 대안을만들어 균형을 잡으려고까지 했다. 독일 신교도 세계관으로는 전쟁을 끝내고 혁명을 일으킨 일을 반역으로 보는 게 당연했다. 한 신교도는 사회민주당이 "쓸데없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바보 같은 혁명을 일으켰"을 뿐아니라, "그저 자기 당이 집권하려고 나라를 배신했다"라고 말했다. - P167
새로 들어선 공화국은 현대적이고, 세속적이고, 도시적이고, 물질주의적이었다. 신교도들은 이 모든 특징이 불쾌했다. 한 신교도 신학 교수는 "물질주의적인 개화와 민주주의와의 결합은 보통 문화민족이 쇠퇴할 때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 이라고 말했다. 공화국에서는 가톨릭뿐 아니라 유대인의 세력까지 강했다. 민족주의 우파는 1919년 헌법의 기초를 만든 사람이 유대인 법학 교수 후고 프로이스라는 점을 항상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독일인이 이제 "유대인의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는 시가 베를린에서 돌아다녔다. 오토 디벨리우스는 자신이 항상 반유대주의자였다고 자랑했다. 그는 "현대 문명의 타락을 보여주는 온갖 현상에서 유대인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앞에서 보았듯 ‘유대인 문제는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독일인의 태도를 결정하는 문화코드였다. - P168
신교도들은 자신들이 경멸하는 공화국에 맞서 저항할 전략을 세웠다. 개신교 공동체 구축 후 20세기의 대중 정치에 동원할 ‘국민교회 Volkskirche‘ 를 만든다는 생각이었다. 국민교회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나라에서 개신교와 독일의 가치관(신교도는 둘을 똑같이 생각했다)을 지킬 방법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많은 신교도는 그런 구상이 나치가 민족 통합을 위해 내세운 ‘민족공동체(폴크스게마인샤프트)‘ 개념과 아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오스나브뤼크 출신 목사로, 유명한 신학자 카를 바르트의 친구인 리하르트 카르벨Richard Karwehl은 바이마르 신교도의 생각을 잘 보여줬다. 카르벨은 나치에 반대했고, 나치 이념을 예리하게 비판했다. 그렇지만 바이마르 공화국도 좋아하지 않았고, 신교도들이 왜 나치에 끌렸는지 이해할수있었다. 카르벨은 신교도들이 나치와 함께 ‘진정한 의미의 국민교회‘를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하나님은 각각의 독일인을 - P168
‘우리 국민‘ 속에, 그리고 ‘우리 조국‘의 땅에 두셨다고 한다. 카르벨이 느끼기에는 나치는 개인이 공동체에 속한다는 사실을 재발견했다. 반면 공한국은 ‘현실과 동떨어진 개인주의적 합리주의‘ 그리고 ‘서로 간섭하지않는 문학적 지식인‘을 내세웠다. 나치 운동에는 "이러한 부자연스러운현상, 현대 문화에서 타락하고 후퇴한 측면‘에 대한 근본적인 분노가 있다고 카르벨은 생각했다. 한편 카르벨이 나치즘의 어떤 면을 좋아하지 않았는지(주로 나치의 인종차별주의)를 보면, 독일 신교도들이 나치즘에 반대할 수 있었다는 걸 알수있다. 민주주의·관용·다원주의를 받들어서가 아니라 그저 나치의 절대주의와 상반되는 또 다른 절대적인 이념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는 나치에반대한 신교도들의 세계관에서 정말 중요한 요소였다. 수년 후 신교도레지스탕스 헬무트 야메스 폰 몰트케Helmuth James von Moltke 백작이 나치 인민법정에서 반역죄로 재판을 받을 때 롤란트 프라이슬러Roland Freisler 판사가 "기독교와 민족사회주의(나치즘)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어요. 둘 다전인적인 인간을 요구하죠"라고 말하자 폰 몰트케 백작은 전적으로 동의했다. - P169
목사이자 나치에 저항했던 영웅 마르틴 니묄러Martin Niemöller는 그리스도가 "세상을 위해 전체주의 제도를 요구했다"라고 전쟁 후에 말했다. 카르벨은 나치즘과 자유주의가 근본적으로 비슷하기 때문에 나치즘이 절대 자유주의를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치즘은 그저 자유주의에서 나타나는 ‘개인의 오만‘을 ‘민족의 오만‘으로 바꾸려고 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어느 이념도 하나님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고, 이것이 두 이념과 개신교의 아주 중요한 차이였다. 그렇지만 분명 많은(결국, 아마도 대부분) 신교도들이 카르벨보다 훨씬 더나치에 마음을 빼앗겼다. 1931년, 루터교 단체 ‘내적 선교 Innere Mission‘ 모 - P169
임에서 연설자마다 나치에 대해 열변을 토해 ‘우레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나치가 종교에 관해 아직 입장을 정하지 않았을 때, 한 나치 고문은모임에서 "그리스도, 주의 사람, 주의 말씀, 주의 일을 중심에 두고 ・・・ 어느 편을 들지 정하자! 볼셰비즘과 맞서 싸우자! 복음주의 교회는 본질이나 역사를 볼 때 독일 민족주의와 가장 가깝다!"라고 말했다. 신교도가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에 품은 적대감이 공화국의 운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그렇게 증명된다. 가톨릭 교회도 공화국을 그리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샤를 모라스의 반공화주의 단체 ‘악시옹 프랑세즈‘처럼, 가톨릭 권위주의가 목소리를 높이던 시류에 발맞춘 우파 민족주의 가톨릭 단체가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 유럽 곳곳에 많았고 독일에도 있었다. 그렇지만 독일 가톨릭은 중앙당이라는 확고한 정치적 보금자리가 있었다. 중앙당은 공화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정당이었기때문에 가톨릭 신자가 반민주적이더라도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 P170
바이마르공화국의 중산층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평등주의 정치를 원하면서도 민족주의자였다는 증거는 많다. 나치로 옮겨간 한 독일 유권자는 "옛날 정당들은 국민들을 제대로 대하지 않고 기꺼이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다"라고 설명했다. 포퓰리즘적인 정치 운동은 거의 언제나 사회개혁과 민족주의가 결합한 형태로 나타난다." 아마 중산층은 자신이 추구하던 바를 사회민주당에서 찾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노동자층과 중산층이 사회적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중산층이 사회 개혁과 사회 복지를 원할수도 있지만,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은 사회주의가 어떻게 될 수 있는지보여준 무시무시한 경고였다. 또 중산층 중 누구도 자신이 노동자층의 일원이라고 느끼고 싶지 않았다. 이러한 중산층은 절대 사회민주당에 투표하려 하지 않았고, 물론 공산당에도 투표하지 않았다. 어쨌든 슐라이허같은 중산층 대부분은 사회민주당은 민족주의자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독일은 또 다른 유럽 국가와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당시 유럽에서는 민주주의가 발달한 곳에서만 파시즘이 고개를 들었다. 중산층이 두려워할 정도로 사회주의 좌파가 약진했기 때문이었다. - P171
나치의 지도자 대부분은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이라 자신들이 내세우는사회적 의제의 강력한 사례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은 분명 특정층의 이익을 옹호했다. 예를 들어 25개조 강령은 특별히 소작농과 영세 상인의 이익을 옹호했다. 하지만 나치는 항상 ‘폴크스게마인샤프트‘라는 민족공동체를 들먹이며 호소했다. 폴크스게마인샤프트는 ‘1914년 신화‘를 바탕으로 한 개념으로, 결국 나치의 정치적 자산이 된다. 나치는 모두가 자기 자리를 가지고,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사는 독일을 건설하겠다고 약속했다. 최소한 유대인과, 부끄러움을 모르는 마르크스주의자를 뺀 모두였다. 나치의 민족주의는 자세히 살필 필요가 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세계화라는 단어를 아무도 쓰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러한 현실에 너무나 익숙했다. 나치는 무엇보다 세계화에 맞선 민족주의 저항운동이었다. - P172
다음 구절들은 오늘날 읽어도 놀랍다. 시대를 뛰어넘어 요즘 이야기처럼느껴진다. "독일 국민은 독일 금융그룹과 독일 선박회사가 상하이에 이른바 자회사를 설립해 중국 노동자를 고용하고, 외국산 철강을 사용해 중국 배를 - P172
만드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독일 회사는 그렇게 해서 이익을 거두겠지만, "매출이 해외로 빠져나가면서 독일 국민은 계속 손해를 볼 것이다." 자본가가 경제와 정치를 좌지우지할수록 이렇게 외국에 설립하는자회사가 점점 더 많아지고, 독일인은 점점 더 외국에 일자리를 빼앗길것이다. "지금은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고 웃을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30년이 지나면 유럽에서 빚어진 결과를 보고 한탄할 것이다" 35라고 히틀러는 썼다. 히틀러가 그렇게 쓴 건 1928년 출간되지 않은 《나의 투쟁> 속편에서다.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를 언급했다. - P173
그는1920년대 말에 히틀러는 세계 경제 및 금융 체제에서 독일의 취약한 위치를 주로 들먹이면서 독일 국민, 특히 나치의 기반이 된 신교도 집단을정치적으로 동원했다. 농민들은 무역협정에 분노해서 시위를 벌였다. 캐나다, 미국과 아르헨티나가 엄청난 양의 농산물을 수출해 세계 농산물 가격이 내려가던 시기에 들려온 수입 농산물 관세 인하 협정이었다. 히틀러는 알프레트 후겐베르크의 영 플랜 반대 운동에 참여하면서 사회적으로인정받으려고 했다. 후겐베르크는 배상금을 모으는 데 참여하는 독일 관리를 처벌하는 법률을 채택하자고 주장했다. "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은 여러 면에서 독일이 통제할 수 없는 국제적인역학 관계의 희생물이었다. 영국과 미국은 자유무역과 금본위제를 바탕으로 세계 경제 체제를 재편해 부와 권력을 누렸다. 영국과 미국은 이러한 부와 권력으로 1차 세계대전에서 이겼고, 독일이 헤쳐나가야 하는 세계를 계속해서 좌지우지했다. - P173
베른하르트 폰 뷜로 국무장관은 ‘적국 국민‘들을 ‘계몽‘하면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브뤼닝 총리는 독일이 자유를 되찾는게 ‘평화의 길‘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수입·수출·해외 투자를 전혀 하지 않고 세계 경제와 완전히 관계를 끊으며, 자국 자원에만 의존해 경제적으로 자급자족하는 국가를 만들자는 더 급진적인 주장도 나왔다. 사실 독일은 이러한 정책에 맞지 않았다. 중앙은행의 한스 루터는 정통적 견해를 밝히며 "독일 국민은 자급자족할 수 없다. 공산품을 외국에 팔고, 그 돈으로 농산물을 수입해야 한다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라고 설명했다. 루터의 말이 사실이라면 독일의 정치·경제 지도자는 ‘독일 국경 너머에서도 신뢰를 얻어야 했다. 그러나 이는 독일 국민이 세계 경제 질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가능한 결론이었다. 독일 국민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자급자족 국가에 찬성하는 반대하는 모든 독일인은 국가의 경제 정책이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 P176
자급자족 국가는 나치 정치 유세의 핵심이었다. 적대적인 세계에 의존하던 독일을 해방한다는 주제는 확실히 유권자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나치의 약삭빠른 선전부장 요제프 괴벨스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공간과천연자원을 확보하지 못하는 나라는 어쩔 수 없이 "외국에 의존하면서자유를 잃게 될 것"이라고 1932년에 썼다. 1차 세계대전의 결과와 전후세계의 본질이 이를 확실히 보여줬다고 괴벨스는 주장했다. "그래서 독일 주위에 두꺼운 벽을 쌓아야 할까?"라고 그는 묻고 적었다. "우리는 분명히 벽, 보호 장벽을 쌓고 싶다." 1930년대 초에 독일인이 정말 많이 공감한 정치 연설이 자급자족 국가를 주제로 다룬 연설이었다. 이는 나치 안에서 괴벨스의 팽팽한 맞수였던그레고어 슈트라서의 연설이었다. - P177
슈트슈트라서는 나치의 틀에 잘 들어맞지 않는 나치 지도자였다. 빡빡 밀은머리에 목소리는 멋진 데다가 몸집이 큰 남자였고, 언제나 정적과 싸울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예술가·작가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했고, 쉴 때는 호머나 다른 고전 작가들의 책을 읽었다. 슈트라서는 감성적이면서 다정했고, 나치 지지자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존경한 유일한 나치지도자였다. 영국 대사는 그를 "가장 유능한" 나치 지도자라고 불렀다. 회의주의자인 미국 기자 휴버트 렌프루 니커보커H. R. Knickerbocker는 슈트라서가 총리가 될 자질이 있다고 생각했고, 비관적인 역사학자 오스발트슈펭글러Oswald Spengler는 자신이 만난 사람 중 슈트라서가 사업가 후고 슈티네스 다음으로 "가장 똑똑한 친구"였다고 말했다. - P177
슈트라서가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후 1932년 5월 10일에 나치의원총회에서 한 연설을 보면 왜 정적(예를 들어 빌헬름 회그너)조차 슈트라서를 경멸하지 않았는지 알수 있다. 그날 연설은 한 구절 때문에 유명해지면서 두고두고 이야기되었다. 슈트라서는 "오늘날 우리 국민의 95%는 아마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자본가에게 반감을 품고 있을 것"이라고 연설했다. 자본주의를 향한 이러한 반감이 "타락한 경제에 맞서는 국민 저항"에 이를 것이라고 슈트라서는 전망했다. 독일이 "악마의 금금본위제, 세계 경제, 물질주의와 관계를끊고 수출 통계나 중앙은행 대출금리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게 국민의 요구"라고 그는 말했다. - P179
슈트라서는 나치가 농촌 경제를 살리고, 농촌 주민들이 도시로 쏟아져들어오는 일을 막아 "폐쇄경제를 확고히 다지면서 내수를 늘리고자 한다"라고 주장했다. 슈트라서는 약간 간접적인 반유대주의를 섞어서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나치 기준으로는 조심스러운 표현이었지만, 반유대주의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슈트라서는 금융계 지도자들이 "자급자족 경제가 시작될까봐 걱정하는데, 이는 "대규모 국제 금융거래로 쉽게 ‘레바흐 Rebbach 하던 시대는 끝났다는 뜻이다"라고 말했다. 레바흐는 유대인 언어로 ‘떼돈을 벌다‘라는 뜻이다. 슈트라서가 어떤 금융인들을 말하는지는 의심할 여지 없이 알 수 있었다. " 53독일인은 국제 금융 외에도 외부의 다른 적대적인 힘들에 대항할 수 없다고 느꼈다. 독일과 폴란드 사이에 길고 구불구불한 국경이 새로 생겼다. 1차 세계대전 전에는 독일 영토였던 땅(슐레지엔 일부와 서프로이센)이강화조약으로 폴란드에 넘어갔다. - P179
히틀러는 ‘생존 공간‘을 더 넓게 확보하는 게 "유일한 해결책"이자 "우리에게 선견지명으로 보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 ‘생존 공간‘은 유럽, 그중에서도 동쪽, 소련과 우크라이나 흑토지대 쪽에서 찾을 수 있었다. 히틀러는 집권 전 공개 선언에서 그런 생각의 전체 의미를 부드럽게 밝혔다. 다만 프리트와는 달리, 히틀러는 독일이 장악한 중부 유럽과 동유럽 국가의 연합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소련을 정복해서 독일 경제가 근본적인 자급자족을 이루는 것이 히틀러의 전체 계획이었다. 그러려면 큰 전쟁을 치러야 하고, 독일 국민은 지난 전쟁에서 교훈을 얻어야 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참모였던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1919년부터 1935년까지펴낸 여러 책과 글에 이러한 교훈이 가장 명확하게 적혀 있었다. 독일이총력전을 하려면 이전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국민을 동원해야 한다. - P182
군인이나 산업 역군으로 헌신하도록 국민들을 쥐어짜야 한다. 사기가 꺾이지 말아야 하고, 반체제적 좌파가 반대하거나 외국인인 유대인이 내부에서 배신하는 일(루덴도르프와 히틀러 모두 이 점을 중시했다)이 생기지 말아야했다. 총력전을 하려면 정부의 철권통치가 꼭 필요했고, 국민이 육체적으로도 강인해져야 한다. 반체제 인물뿐 아니라 정신적 혹은 신체적 장애인도 총력전에서 싸울 수 없다. 독일은 자국민뿐 아니라 세계를 향해 더 효과적으로 선전해야 한다. 히틀러는 루덴도르프의 해결책을 완벽하게받아들였다. - P183
나치즘은 세계화에 저항한 혁명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혁명의 일부이기도 했다. 히틀러와 나치는 전 세계에서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분명 터키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1차 세계대전 때 터키 북서부의 겔리볼루갈리폴리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물리친 군 지휘관으로 명성을 떨치고, 전쟁 후 수립된 터키 공화국의 첫 번째 대통령이된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독일에서 열렬히숭배하던 인물이었다. 히틀러는 무스타파 케말을 "빛나는 별"이라고 불렀다. 1924년에 히틀러는, 전에 쿠데타를 시도했던 비어홀에서 최근 혁명 중 무스타파 케말의 혁명이 가장 위대했고, 그다음으로는 무솔리니의혁명이 위대했다고 말했다. 한참 뒤인 1938년, 히틀러는 평소와 달리 겸손하게, 무스타파 케말이 위대한 스승이라고 말했다. 무스타파 케말의 첫번째 학생은 무솔리니, 두 번째 학생은 히틀러였다. - P183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연합국이 오스만제국을 압박하는 수단이었던 세브르 조약을 떨쳐버릴 수 있었던 무스타파 케말을 나치는 존경했다. 터키인이 독립전쟁이라고 부르는 조약 반대 운동은 1923년에 훨씬 호의적인 로잔 조약으로 다시 체결하게 했고, 무스타파 케말을 앞세운 근대 공화국을 수립시켰다. 특히 무스타파 케말 정권이 세브르 조약에 서명한 터키 사람들을 매국노로 몰면서 시민권을 빼앗았기 때문에 나치가 어느 부분에서 자신들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느꼈을지 쉽게 알 수 있다. 나치는 또한 오스만 정부가 최소 75만 명에서 최대 150만 명으로 추산되는 아르메니아 사람들을 죽인 1915년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을 알고있었고, 찬성했다. 로잔 조약의 조건에 따라 터키에서 그리스인을 내보낸일 역시 찬성했다. 나치는 강력하고 번영하는, 그들이 감탄하는 터키를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그러한 민족 청소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 P184
히틀러는 처음부터 독일의 ‘생존 공간‘을 찾는 과정에서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무솔리니가 지원한다면 기꺼이 정치적으로 큰 대가를 치르려고 했다. 그 대가는 오스트리아 영토였다가 1918년에이탈리아로 넘어간 티롤 남부 지역과 관련이 있었다. 그곳 주민 대부분은독일어를 사용한다(지금도 마찬가지다). 독일 민족주의자들은 언젠가 오스트리아와 통합하고 싶었기 때문에 티롤 남부도 독일 영토라고 여겼다. 그렇지만 무솔리니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던 히틀러는 티롤 남부를 기꺼이 이탈리아에 그대로 남겨두려고 했다. 한편으로 히틀러는 온갖민족주의자들(그리고 기회를 엿보던 사회민주당도)이 독일의 이익을 외국 세력에 팔아넘기는 배신 같은 자신의 행동을 두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리란사실도 알았다. - P186
브뤼닝은 관세동맹 계획으로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가 나빠지고, 결국프랑스 차관이 무산되리란 사실을 잘 알았다. 원하던 결과였다. 브뤼닝이차관을 거절하기는 정치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와관세 동맹을 추진하면 불황을 이용해 배상금 부담에서 벗어나려는 전략을 잃지 않으면서 민족주의자들에게 점수를 딸 수도 있었다. 그러면서도브뤼닝은 오스트리아와의 관세 동맹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않았다. 덕분에 프랑스와 영국에서 브뤼닝의 평판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나빠지지는 않았다. 이 일에서 두 가지가 명확하다. 첫째,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 유럽에서 금융 협상이 얼마나 안보, 특히 독일을 단속하는 일과 밀접한 관련이있는지 알 수 있다. 배상금과 금본위제로 꼼짝 못 할 동안에는 독일이 이웃 나라들을 위협할 수 없었다. 독일이 이 장애물들을 피할 수 있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었다. " 둘째, 브뤼닝은 불황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다. 대통령 내각의 총리라서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만 설명하면 됐기 때문이다. - P192
브뤼닝이 세계 경제 상황과 씨름하는 동안, 독일 도시들에서는 불황 때문에 정치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베를린을 위한 투쟁 Kampfum Berlin》이라는 직설적인 제목이 달린 책에는 "물고기에 물이 필요하듯 베를린에는 자극이 필요하다. 이 도시는 자극으로 먹고 산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어떤 정치 선전이든 목적을 이루지 못할 것" 101 이라는 직설적인 문장들이 나온다. 나치에서 떠오르는인물인 36세의 요제프 괴벨스가 이 책의 저자였다. 1926년에 히틀러는 괴벨스를 베를린에 보내 나치 조직을 이끌게 했다. 베를린에서 나치를 홍보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베를린은 노동자들의도시,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요새였다. 또한 베를린은 17세기 말,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신교도 위그노 16-17세기경 프랑스의 칼뱅 신교도를 쫓아낸 - P197
이후 줄곧 박해를 피해 도망친 난민을 포함해 이주자들의 터전이었다. 위그노들은 베를린에 여러 방식으로 흔적을 남겼다. 프랑스어 영향을 많이받은 베를린의 독특한 사투리, 베를린을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인 ‘불레테‘라는 완자 요리, 위대한 작가인 19세기 소설가 테오도어 폰타네TheodorFontane에서 위그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한편 다른 이주민의 물결도 잇따랐다. 프로이센 왕인 프리드리히 2세는 습지대의 물을 빼려고 네덜란드 기술자들을 데려왔다. 그들은 ‘오라니엔부르크‘처럼 베를린과 베를린주위 많은 지역의 이름에 ‘오렌지‘를 붙였다. 1880년대부터는 유대인이러시아 제국의 박해를 피해 베를린으로 와, 1918년 이후에는 물밀듯이 들어왔다. "진짜 베를린 사람은 슐레지엔 출신이다"라는 유명한 속담도 있다. 독일 기준으로 볼 때 베를린은 분명 민족적·종교적으로 굉장히 다양하게 뒤섞여 있는 곳이었다. 베를린은 독일의 지적·문화적·경제적 수도이자 언론의 수도였다. 나치는 농촌의 신교도 집단에 뿌리내린 당이라 베를린을 근거지로 삼기가 가장 어려웠다. - P198
괴벨스가 베를린에 왔을 때 나치 추종자는 거의 없었고, 아무도 나치를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괴벨스는 베를린 사람들에게 처음 연설할때 나치가 아무 관심도 끌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덕분에 "훗날 나를 항상 규탄하던 유대인 신문도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라고 했다. 그 신문은 "괴벨스 선생이란 사람이 익숙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라고만 보도했다. 102베를린이 나치와 잘 맞지 않은 도시였다면, 괴벨스는 숙적인 그레고어 슈트라서와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나치 당원이 아니었다. 정치계에 들어오기 전, 문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유대인 교수들 밑에서 공부했다. 정치 광신도로는 아주 드물게 반짝이는 지성과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 P198
노이쾰른, 프리드리히스하인, 베딩, 샤를로텐부르크의 일부 같은 베를린의 특정 지역은 가장 가난한 노동자들의 본거지였고, 따라서 공산당의요새였다. 괴벨스가 들어온 다음에는 공산당과 싸우는 게 나치의 전략이었다. 돌격대는 노동자들이 사는 지역에서 한 선술집을 찾아냈고, 매달어느 수준 이상의 맥주를 마시겠다고 주인에게 약속했다. 주인은 돌격대가 선술집을 본부로 사용하게 해 주기만 하면되었다. 그러자 그 선술집은 ‘돌격대 선술집‘으로 불리게 되었다. 돌격대는 그곳을 보통 밤에 공격할 공산당원들을 찾으러 나가기 전에 모이는 기지처럼 활용했다. 나치와공산당 사이에 격렬한 싸움이 벌어질 때가 많았고, 때때로 다른 정당의준군사조직이 끼어들기도 했다. 1930년대 초에는 베를린과 다른 독일 도시들이 내란과 비슷한 상태에 이르렀다. 나치의 전략은 여러 면에서 효과적이었다. 나치는 조금씩 베를린의 험악한 동네들을 장악해 나갔다. 그래서 그들이 선거운동을 하고, 포스터를붙이고, 집회를 열기가 더 쉬워졌다. 무엇보다 언론에 실리는 점이 정말 결정적이었다. - P200
괴벨스는 돌격대의 폭력이 언론의 관심을 끈다는 사실을 알았다. 대부분 나치가 싸움을 걸면서 폭력이 시작되었지만, 나치는 항상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했다. 또한 폭력적이고 복수심에 불타는 공산당원들이 언제나돌격대원들을 맹렬하게 쫓고 있다고 끊임없이 선전했다. 펠제네크 주말농장을 습격해서 프리츠 클렘케를 죽인 일도 그러한 사례였다. 나치는 그일을 한 공산당원이 숨어 있다가 돌격대원들을 공격한 사건이라고 선전했다. 많은 중산층 언론, 경찰, 검사, 심지어 형사법원까지 그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말도 안 되는 선전일 때가 많았는데도 사람들에게 통했다. 법을 준수하는 중산층 독일인은 돌격대원들이 다소 거칠기는 해도 선량하고 애국적인 청년들이며, 공산주의자들을 막을 만한 배짱을 유일하게 가졌다는 결론을 점점 내려갔다. - P201
1931년과 1932년에 내란과 같은 상황이 계속 심각해지면서 바이마르공화국 정부가 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졌다. 브뤼닝이 경제 안정을 포기하면서까지 민족주의자들의 정치적 목표를 추구했던 것처럼, 안정을 유지시키지 못하는 무능력이 많은 국민 눈에는 민주주의 국가의 정당성을 좀먹는 걸로 보였다. 폭력이 점점 더 일상이 되면서 국민들은 훗날 나치가 저지르는 국가 폭력도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다고 나치가 권력을 잡기 쉬워졌다거나, 1931년이나 1932년에 집권할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는 뜻은 아니었다. 1923년 비어홀 폭동에 실패한 후 히틀러는 군대와 경찰의 반대에 맞서면서 권력을 절대 잡을 수 없다는 교훈을 배웠다. 1931년과 1932년을 거치는 동안 히틀러가 아무리 적극적으로 노력해도 기득권력의 문은 잘 열리지 않는 것 같았다. - P202
집단들이 하나의 세력으로 정말 잘 통합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는 후겐베르크의 꿈이지, 히틀러의 꿈은 아니었다. 히틀러와 나치는 사실 후겐베르크와 협력하면서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고 가능한 많은 홍보 효과와 정당성을 얻고 싶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모임직전에야 히틀러와 헤르만 괴링의 편지를 처음 받았다. 나치가 국가인민당과 협력하면서 사실 히틀러 운동이 존중받는다는 인상을 주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나치는 아직 보잘것없었지만 전혀 정중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거리 행진에서 돌격대가 지나가자 다른 집단의 행진은 보려고도 하지 않고 곧장 자리를 떴다. 괴벨스는 국가인민당과 협력은 순전히 전략적 목적으로, 합법적으로 집권할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사설에서 단언했다. 바트 하르츠부르크 행사에 대한 괴벨스의 개인적 생각은 더 냉 - P203
혹했다. 특히 국가인민당 원내 대표인 에른스트 오베르포렌Ernst Oberfohren이 잘난 척한다며 싫어했다. "오, 우리 야만인이 얼마나 더 나은 사람들인지!"라며 "그를 보면 토할 것 같다"라고 덧붙일 정도였다. 연합하든 말든나치가 드디어 권력을 잡으면 "보수주의자들을 가능한 한 빨리 내쫓는게 목표다. 우리 혼자 독일의 주인이 될 것이다"라고도 말했다. 그러나 나치가 독일의 주인이 되려면 다른 사람들이 필요했다. 나치를지지하는 유권자들, 연합을 제안하는 보수 세력, 권력의 문을 열어주는힌덴부르크 대통령이 필요했다. 이 중 누가 나치를 위해 행동해 줄지가1932년의 문제가 된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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