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에베르트의 동료인 필리프 샤이데만Philipp Scheidemann은 국회의사당 발코니 위에 서서 "공화국이여, 영원하라!"라고 외친다. 샤이데만은훗날 그저 자신의 믿음을 고백했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그 외침을 독일이 사실상 민주공화국이 되었다는 선언으로 받아들인다. 국회의사당에서 동쪽으로 8백여 미터 떨어진 왕궁에서는 급진적인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독일이 ‘사회주의 공화국‘이라고 선언한다. 이때가되자 빌헬름 2세가 드디어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다. 늦은 오후, 막스 대공은 에베르트와 마지막 회의를 벌인다. 이번에는 에베르트가 대공에게 일종의 섭정을 해달라고 요구한다. 막스 대공은 "당신이 독립당(사회민주당보다 더 급진적인 독립사회민주당)과 협정을 맺기 직전이라는 걸 압니다. 난 독립당과는 함께 일할 수 없어요"라고 단호하게 거절한다. 회의 자리를 나서면서 막스 대공은 고개를 돌리더니 "에베르트 - P47
씨, 독일제국을 당신이 지켜주세요!"라고 마지막으로 한마디 한다. 에베르트는 "아들 둘이 이 제국을 위해 죽었습니다"라고 침통하게 대답한다. 1918년 11월 9일이다. 이틀 후, 독일 정치인들과 연합군 장교들이 협상한 휴전협정의 효력이발생한다. 1차 세계대전은 끝난다. 대부분의 독일인은 패전을 갑작스럽고 놀라운 일로 받아들인다. 전투에서 독가스 공격을 받은 후 베를린에서북동쪽으로 12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포메른의 작은 마을인 파제발크의병원에서 회복 중이던 한 부상병도 마찬가지다. "모두 헛수고였다. 모든 희생과 손실, 2백만 명의 아까운 죽음이 허사가되었다. 조국을 형편없는 범죄자 무리 손에 넘기려고 병사들이 싸웠다는말인가?" 어머니 장례식 이후 운 적이 없던 젊은 남자는 비틀거리며 병동에 돌아와 "빠개질 것 같은 머리를 담요와 베개 사이에" 묻는다. 그는 아돌프 히틀러 일병이다. - P48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이마르 공화국과 관련된 거의 모든 일이 사실 1차세계대전과 관련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교적 짧은 기간에 사상자가 그렇게 많이 발생한 전쟁은 한 번도 없었다. 4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독일 병사 170만 명이 사망했다. 러시아를 - P48
제외하면 독일의 전사자가 제일 많았다. 여성을 포함해 민간인들이 군수산업 같은 전시 노동에 그렇게 많이 동원된 적도 없었다. 전쟁 중이었기때문에 국가는 어느 때보다 많은 노동과 희생을 국민에게 요구했다. 그래서 계속 대중의 지지를 받는 게 중요했다. 새로운 대중매체가 등장하면서국가가 전쟁을 ‘팔수‘ 있는 가능성이 엄청나게 커졌다. 주로 갈등의 의미나 적의 본질에 관해 대체로 사실이 아닌 내용을 감정적으로 호소하면서전쟁의 필요성을 선전했다. 전시 선전은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독일 국민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1차 세계대전은 1914년 여름부터 1918 년 늦가을까지 질질 끌었다. 그중간쯤인 1916년 말을 앞두고 현실적으로 결정해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 전쟁에 참여한 나라들은 모두 전쟁 비용이 예상보다 너무 많이 들고, 국내 사정이 점점 더 불안해져서 깜짝 놀랐고,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완전히 승리하거나 교착 상태를 인정하고 평화 협상을 해야만 했다. 승리하려면 빛을 더 많이 지고, 사상자가 더 많아져도 상관하지 않고, ‘국내 전선‘ 이라고 불린 후방 국민에게 노동과 희생을 요구하기 위해 몇 배 더 노력해야 했다. - P49
아무리 무자비한 지도자라도 현대 총력전의 기본 요소를 바꿀 수는 없었다. 총력전을 하려면 모든 시민의 노동이나 전투력이 필요했다. 따라서시민들에게 국가를 상대로 협상할 수 있는 힘이 전례 없이 생겼고, 국가는 승리 후 멋진 신세계가 펼쳐진다고 더욱더 과장되게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영국은 조약의 신성함, 그리고 독일이 공격한 ‘작고 용감한 벨기에‘를 보호해야 한다고만 이야기하면서 전쟁을 시작했다. 하지만신성한 조약을 위해 수십만 명의 청년에게 죽으라고 또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라고 할 수는 없다. 때문에 1918년, 로이드 조지 총리는 우드로 윌슨 Woodrow Wilson 미국 대통령과 함께 ‘국제연맹‘을 만들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싸움을 "전쟁을 끝내려는 전쟁" (영국의 과학소설 작가이자 사회평론가인 허버트 조지 웰스H. G. Wells가 처음 한 말)이라고 표현했다. - P50
전쟁 때의 다른 상황들을 보면 미래가 더 불길하게 보였다. 독일 정부는승리하면 제국이 새롭게 위엄을 보인다고 국민에게 약속했다. 독일이 벨기에와 프랑스를 합병하고, 러시아 제국의 서쪽 땅을 더 많이 차지해 유럽의 지배적인 세력이 될 것이라고 했다. 1918년에 러시아가 전쟁을 중단하고, 독일이 지금의 폴란드·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벨라루스 우크라이나를 직간접적으로 지배하면서 그 약속은 잠시 현실이 되었다. 1917년에 새로 결성된 독일조국당(조국당)은 독일이 국내의 온건파를 무너뜨리고, 유럽의 지배자로 자리매김하고, 인도의 문 앞까지 가면서완전한 승리를 거둘 때까지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언론재벌로 조국당 당원이었던 알프레트 후겐베르크Alfred Hugenberg는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주류 기성 우익 정당인 국가인민당을 이끌게 된다. 뮌헨의 도구제작자이자 자물쇠 제조공이던 안톤 드렉슬러 Anton Drexler 역시 조국당 당원이었다. 드렉슬러는 1919년, 조국당의 비전을 되살리기 위해 독일노동자당이라는 당을 설립했다. 다음 해, 젊은 참전용사인 아돌프 히틀러가들어온 후 독일노동자당은 ‘민족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으로 이름을 바꾼다. 나치라고 불린 당이다 - P51
그래도 정치의 중심은 흔들리지 않고 굳건할 수 있었다. 1917년 7월, 가장 민주적이고 합치면 제국의회 의석의 거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세 정당(사회민주당, 독일민주당, 중앙당)이 합병이나 강제 배상금 없는 평화 협상에찬성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결의안이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를구속할 수는 없었지만, 겁줄 수는 있었다. 제국의회의 과반수가 곧 독일인 과반수의 생각을 대변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두 장군은 결의안이 통과된 직후, 조국당 결성을 준비했다. 그들은 또한 정부를 책임지던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 Theobald von Bethmann-Hollweg 총리를 해임했다. 제멋대로인 제국의회의 민주주의자들을 다루기에는 너무 약하다고판단해서였다. - P52
1918 년 가을, 독일 군대는 유럽 여기저기를 차지하고 있었다. 여전히벨기에 대부분과 프랑스 북부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동유럽의 드넓은땅도 지배하고 있었다. 반면 적군이 점령한 독일 영토는 전혀 없었다. 2차세계대전 때와는 달리 항공기와 폭탄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연합군의공군이 독일 도시에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없었다. 독일 언론은 전쟁 중에검열을 심하게 받았기 때문에 승전보와 희망적인 약속밖에는 실을 수가없었다. 민간인 중 지식이 풍부하거나 통찰력이 탁월했던 사람만 독일이패배하기 직전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러한 사람들 눈에도 지도자들이 너무 갑자기 휴전을 요청했다. 독일인 대부분이 독일이 왜 패배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던 건 당연했다. - P53
20세 이상의 모든 남녀가 최소 4년마다 선거로 의원을 뽑아 국회를 구성하는 게 새로운 헌법의 핵심이었다. 선거의 놀랍고 혁신적인 요소는 비례대표제였다. 비례대표제에서는 영국과 미국의 하원의원 선거처럼 유권자들이 각 지역의 한 후보에게 투표하는 게 아니라, 각 정당의 후보 목록을 보고 정당에 투표한다. 그러면 각 정당은 국민에게서 표를 얻는 비율만큼 의석수를 얻는다. 13오늘날 유럽에서는 비례대표제가 흔하다. 독일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유권자의 선택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의회를 만들 수 있다는 게 비례대표제의 장점이다. 반면 영미의 선거 같은 다수대표제는 40% 정도의 표를 얻을 수 있거나, 득표율이 특별히 높은 지역이 따로 있는 정당에 아주 유리하다. 반대로 전국 각지에서 비슷한 득표율을 보이는 정당에는 불리하다. 보통 두 정당이 싸우는 미국의 국회의원 선거조차 의석수가 득표율을 반영하지 않을 때가 많다. 비례대표제의 단점은 군소정당을 포함해 수많은정당의 의원들로 의회가 구성되어 정부가 불안해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이 문제로 심하게 골치를 앓았다. - P57
1919년 11월,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독일이 패배한 원인을 조사하려고 만든 국회 위원회의 청문회에 함께 출석했다. 두 사람은 모두 군복을 입지 않았다. 군복을 입고 나타나면 증언을 들을 국회의원에게 지나친 존경을 보여줄까 봐 그랬다고 그들은 공개적으로 설명했다. 게오르크고타인Georg Gothein이라는 위원회 위원장이 힌덴부르크에게 질문하려고했지만, 힌덴부르크는 그를 무시하고 루덴도르프가 초안을 작성한 성명서를 읽었다. 고타인이 이를 중단시키려고 했지만, 힌덴부르크는 차분하게 계속 읽었다. "적이 병력이나 군수물자 모두 우월했지만, 우리는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었다. 그런데 정당들의 각기 다른 당리당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쟁에 대한 우리의 의지가 금방 무너졌다. 붕괴는 불가피해졌고, 혁명으로 마지막 희망도 사라졌다." 힌덴부르크의 성명서는 "독일 군대는 등을 찔렸다"라는, 오랫동안 기억될 말로끝을 맺었다. - P66
군대의 최고사령부는 전쟁에 패배한 책임은 민주주의자들에게 있고, 베르사유 조약은 민주주의자들이 군대를 상대로 음모를 꾸민(등을 찌른)결과라는 개념을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거짓말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민족주의자들은 민주주의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그러한 개념을받아들였다. 민주주의자들은 역사학자 제프리 버헤이 Jeffrey Verhey 박사가썼듯이, "이성적인 사람들이 엄청난 불합리성과 맞닥뜨렸을 때 느끼는불신"으로 대응하는 편이었다. 그렇지만 수백만 명의 독일인은 어쨌든국내 세력에 등을 찔려 패전했다고 믿었다. 그게 합리적인 생각인지 아닌지 상관하지 않았다.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이념이나 세계관과 맞았고, 어쩌면 그들의 심리적인 욕구와 맞을지도 몰랐다. 독일인들은 그러한 생각을 믿고 싶었다. 전쟁에 왜 패배했는지 그리고 전후 협상에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해 전혀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던 점이 독일이 처음 경험한 민주주의의근본적인 문제였다. 전쟁 결과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자원, 병력과 해군력이 풍부했던 연합군이 독일을 제압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영국과 미국의 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전후 세계를 좌지우지했다. - P67
전체주의 사회는 루덴도르프가 딱 원한 사회였다. 만약 후방 국민의 규율이무너지는 바람에 독일이 전쟁에서 졌다면, 그런 일이 다시 벌어질 수 없도록 사회를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게 나라를 위한 첫 번째 과제였다. 그러려면 반대 의견을 무자비하게 짓밟아야 한다. 산업 현장에서 일하는 군복무를 하든 전쟁 준비를 위해 모든 국민을 어떤 식으로든 동원해야 했다. 사상 통제와 효과적인 선전은 필수적이었다. 독재국가만이 이 모든일을 할 수 있었고, 그러니 전후의 세계 질서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민족주의자들에게 민주주의는 독일이 결코 선택해서는 안될 제도였다. 루덴도르프의 참모였던 막스 바우어는 "통치한다는 것은 지배한다는뜻이다"라고 이를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321920년대 초, 루덴도르프는 파제발크 병원에서 부상병으로 전쟁을 마쳐야 했던 아돌프 히틀러와 협력하며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 P69
나치의 선전부장 요제프 괴벨스가 쓴 소책자가 도마에 오를 때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른다. 당원을 새로 모집하기 위해 나치 이념을 간단히 소개하는 소책자다. 소책자에는 나치가 선거로 권력을 잡을 수 없으면 "그때 우리는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 그때 우리는 의회를 완전히 쫓아내고독일인의 주먹과 독일인의 두뇌로 나라를 세울 것이다!"라고 약속하는내용이 들어 있다. 히틀러의 정당이 합법적이라면 정당의 선전 책임자가어떻게 그런 글을 쓰고 또 공식적으로 발간할 수 있었을까? 오전에 히틀러는 정당이 그 소책자를 승인한 적이 없다고 부인하면서 질문을 회피한다. 하지만 리텐이 점심시간 동안 괴벨스의 집회 그리고 당의 모든 책방에서 아직 그 소책자를 판매한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히틀러가 이를 설명할 수 있을까? 히틀러는 설명하지 못한다. - P75
아돌프 히틀러는 줄곧 거짓말을 했다. 그렇지만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있는지, 어떻게 할 계획인지 분명하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것이 아돌프히틀러의 본질적인 역설이다. 우리는 히틀러와 가까웠던 사람들의 기억을 통해 그 역설이 어떻게 작용했는지 알 수 있다. 변호사이자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에서 총독을 지낸한스 프랑크 Hans Frank는 1920년에 히틀러 연설을 처음 들었을 때 "이 사람은 자신이 완전히 믿지 않으면 남을 설득하려고 하지 않는, 진심으로 말하는 사람이다"라고 느꼈다고 기억했다. 사회민주주의 사상을 가진 기자이자 중요한 히틀러 전기를 처음으로 썼던 콘라트 하이덴Konrad Heiden은 뮌헨에서 기자로 일할 때 히틀러 연설을 여러 차례 지켜봤다. "연설이절정에 이르면 그는 자기 자신에게 매혹된다. 그리고 순수한 진실을 이야기하든 거짓말을 이야기하는 그 순간에는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표현하 - P77
면서 말한다...… 거짓말을 할 때조차 진정성이 넘쳐흘렀다"라고 하이덴은 기록했다. 한편 히틀러 정권의 재무부 장관이었던 루츠 슈베린 폰 크로지크Lutz Schwerin von Krosigk 백작은 "그는 가장 친한 친구에게조차 정직하지 않았다. … 내 생각에 그는 거짓말이 너무 몸에 배어서 거짓과 진실의 차이를 더는 깨달을 수 없었다""라고 평가했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자신이 정직하지 않다고 놀랄 만큼 솔직하게 말했다. 정치적 메시지는 정직하지 않을수록 좋다고 히틀러는 썼다. 그에 따르면 정치인은 작고 사소한 거짓말을 할 때 실패한다. 작은 거짓말은 쉽게 들키기 때문에 정치인으로서 신뢰가 무너지게 된다. ‘큰 거짓말‘을 하는 게 훨씬 낫다. 왜 그럴까? "큰 거짓말 안에는 언제나 뭔가 신뢰하게 하는 요소가 있다." "많은 사람이 머리보다는 마음 깊은 곳에서더 쉽게 무너질 수 있어서다. 그들 마음속 원초적인 단순함 때문에 작은거짓말보다 큰 거짓말에 더 넘어가기 쉽다. 그들 자신이 때때로 작은 거짓말은 하지만, 수치스러워서 너무 큰 거짓말은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라고 히틀러는 설명했다. - P79
"국민 대부분은 게으르고 겁쟁이다" 라고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썼다. 관세나 조세 규모 혹은 외국과 조약을 맺은 자세한 내용에 관한 복잡한 메시지로 국민과 소통하려고 애써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 그렇게 하려고, 박식하고 무미건조한 정책 강의를 늘어놓는 게 바로 ‘부르주아지(중산층 자유주의자)‘ 정치인들이 실수하는 점이다. 평범한 사람은 복잡한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굳이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보통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들어가려면 메시지가 간단해야 한다. 지적이지 않고 감정적이어야 한다(증오심이 잘 먹힌다). 그리고 끊임없이 반복해서 말해야 한다는게 히틀러의 생각이었다. - P79
물론 이러한 일들로 모든 독일인이 우익으로 전향하지는 않았다. 독일민주주의가 이미 실패할 운명이었다는 뜻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민주주의와 전후 질서에 대한 환멸이 퍼지기 시작했다. 1920년 국회의원 선거결과는 그러한 현실을 보여준다. 사회민주당의 득표율은 39%에서 21%로거의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 사회민주당에 등을 돌린 유권자들은 대체로독립사회민주당과 독일공산당으로 옮겨갔고, 자유주의를 내세운 독일민주당에 표를 던졌던 유권자들은 더 우파인 독일인민당과 훨씬 더 우파인국가인민당으로 옮겨갔다. f독일인에게 전쟁 경험은 히틀러가 빈에서 보낸 시간과 정말 비슷하게작용했다. 계속 오락가락 바뀌던 의미가 나중에 벌어진 일로 인해 규정된다. 1919년에는 혁명과 강화조약의 조건 때문에 전쟁 경험에 더 암울하고분열적인 의미가 생긴다. - P92
영국의 외무부 장관이었던 오스틴 체임벌린 Austen Chamberlain은 훗날슈트레제만과 브리앙을 "피투성이 폐허에서평화의 신전을 다시 건설하려고 노력했던 위대한 독일인과 위대한 프랑스인"으로 묘사했다. 슈트레제만은 자신과 브리앙이 인간적으로 통한다는 점을 알아차렸고, 정치적으로도 똑같은 과제를 안고 있다는 점도 알았다. 국내의 강경한민족주의자들의 구미에 맞게 화해해야 한다는 과제였다. 슈트레제만은1926년에 한 회의를 한 후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브리앙은 우리 대화를 프랑스식 표현으로 묘사했다. ‘우리 영혼이 흰 산 위의 눈처럼 하얗다‘라고 말했다"라고 썼다. 슈트레제만과 브리앙은 와인 네 병을 나눠 마시면서 다섯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슈트레제만은 "우리 둘 다 빙하들을 극복해야 해"라고 덧붙였다. 브리앙에게는 보수적인 민족주의자로 그의 맞수였던 레몽 푸앵카레Raynond Poincaré가 빙하였다. 브리앙은 주로 레몽 푸앵카레 총리 밑에서 외무부 장관을 맡았다. 슈트레제만에게는특히 알프레트 후겐베르크가 빙하였다. - P104
슈트레제만 시대가 히틀러에게는 힘든 시기였다. 자신을 정치적 굴욕과 경제적 어려움의 희생자라고 느끼는 사람들의 분노를 이용하는 게 히틀러의 가장 큰 재능이었다. 히틀러 스스로 그 일에 분노를 느꼈기 때문에 그 일을 정말 잘할 수 있었다. 히틀러는 위태로운 시기에 강한 정치인이었다. 시대에 맞춰 자신의 어조를 조절할 수 없었다. 공화국이 1923년의 끔찍했던 상황에서 점차 회복되던 1925년 12월에도 히틀러는 "독일이붕괴하고 있다""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7년이 지난 때에 그는 뮌헨 청중에게 "우리는 점점 더 침몰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1926년 4월, 그는 "쇠약해진 산업 분야에서 실업자가1200만 명에 이릅니다"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해 어느 때에도 실업자가200만 명을 넘은 적이 없었다. ‘로카르노 정신‘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도 - P108
히틀러는 계속 국제 문제로 독일인이 고통을 겪는다고 주장했다. 도스 플랜과 로카르노 조약은 그저 독일의 굴욕 그리고 다른 강대국들에 종속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라고, 슈트레제만은 반역자일 뿐이라고 그는말했다. 777비어홀 폭동이 실패하면서 히틀러는 경찰·군대와 등을 돌리는 게 아니라 손을 잡아야만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헌법을 지키고 선거에서 이기면서 공화국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의미였다. 아마도 그는 그때 이미 기성 보수 세력을 속인 후 뒤집어엎을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후겐베르크와 손잡고 영 플랜에 맞서는 게 첫 번째 단계로효과적이었다. 그러나 히틀러를 위해서는 독일이 1929년 가을보다 훨씬 더 나쁜 상황에 빠져야 했다. 다행히도 그렇게 될 조짐이 보였다.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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