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꽤 지난 일이 되었지만, 내가 구주 가까이 병원에 입원해야 했던 때가 있었다. 뉴욕의 병원이었는데, 내 침대에서는밤이면 환한 불빛이 기하학적으로 밝혀지는 크라이슬러 빌딩의풍경이 바로 보였다. 낮에는 그 빌딩도 아름다움을 잃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서서히 여느 건물과 다름없는 그저 덩치 큰 건물이 되어갔고, 도시의 모든 건물들은 멀찍이 떨어져 침묵을 지키는 듯 보였다. 5월이 지나고 6월이 되었다. 창가에 서서 저 아래보도를 내려다보며 봄옷을 입은 젊은 여자들-내 또래-이점심시간에 돌아다니는 모습을 지켜보던 것이 기억난다. 대화를나누는 그들의 머리가 움직이는 것이 그들의 블라우스가 산들바람에 잔물결을 이루는 것이 보였다. 나는 퇴원하면 보도를 걸 - P9
을 때 나도 그렇게 걷는 사람 중 한 명이라는 사실에 감사하는마음을 절대 잊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고, 여러 해 동안 정말로잊지 않았다ㅡ병실 창문에서 내려다보았던 풍경을 떠올리며 내가 그 보도를 걷고 있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먼저 말해두지만, 이것은 단순한 이야기이다. 내가 병원에 입원한 것은 맹장수술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틀 뒤 병원에서 음식을 주었지만 넘어가지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열이나기 시작했다. 어느 누구도 어떤 박테리아 때문에 그러는지려내지 못했고 뭐가 잘못됐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어느 누구도못했다. 나는 한 튜브로는 수액을, 다른 하나로는 항생제를 맞았다. 튜브 두 개 모두 바퀴가 달달거리는 금속 링거대에 달려 있어 링거대를 밀면서 돌아다닐 수 있었지만 나는 대법에 지쳤다. - P10
나를 꼼짝 못하게 했던 그 문제는, 그게 뭐였든 간에 7월을 앞두고 사라졌다. 하지만 그때까지 내 상태는 매우 이상해서 말 그대로 열의 대기 상태ㅡ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집에 남편과 어린 두 딸이 있었다. 나는 딸들이 몹시 그리웠고, 그애들을얼마나 걱정했는지 그러다가 병이 더 심해지는 건 아닌지 겁이날 정도였다. 그러자 내 담당 의사ㅡ나는 그에게 깊은 애착을 느꼈다. 그는 군턱이 진 유대인으로 어깨에는 아련한 슬픔이 감돌았다. 그가 간호사에게 말하는 걸 들어보니 조부모와 친척 아주 - P10
머니 셋이 수용소에서 학살을 당했고, 뉴욕에 아내와 장성한 네아이가 있었다가, 이 사랑스러운 남자가 나를 안쓰럽게 여겼-는지, 내 딸들 각각 다섯 살, 여섯 살이 앓고 있는 병이 없다면 나를 보러 올 수 있도록 조치해주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의친구가 아이들을 병실로 데려와주었는데, 그 조그만 얼굴과 머리카락이 어찌나 지저분하던지 나는 링거대를 밀며 아이들을 샤워실로 데리고 갔다. 아이들이 나를 보고 외쳤다. "엄마, 완전 말랐어요!" 아이들은 정말로 겁을 먹은 것 같았다. 아이들은 내가수건으로 머리를 닦아주는 동안 나와 함께 침대 위에 앉아 있었고, 이어 그림을 그렸지만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 P11
다시 말해, 그림을 그리다 말고 시도 때도 없이 "엄마, 엄마, 이거 좋아요? 엄마, 내가 동화 속 공주를 그렸는데, 이 드레스 좀 보세요!" 하고 말을 붙이는 일이 없었다는 뜻이다. 아이들은 거의 말이 없었는데, 특히 둘째가 말이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둘째의어깨를 감싸안자 아이의 아랫입술이 삐죽 튀어나오면서 아래턱이 파르르 떨렸다. 그 작은 꼬맹이가 용감해지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그들이 떠날 때 나는 아이들이 우리 가족의 친구, 내아이들을 데려와주었고 자기 자식은 없는 친구와 함께 걸어가는모습을 창밖으로 내다보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남편은 집안일로 바쁘고 직장일로 바빠서 나 - P11
를 보러 올 시간을 잘 내지 못했다. 우리가 연애하던 시절에 그는 병원이 싫다고 말했었는데ㅡ그가 열네 살 때 아버지가 병원에서 돌아가셨다ㅡ나는 그제야 그 말이 진심이었음을 깨달았다. 내가 처음에 들어갔던 병실에는 죽음을 앞둔 노파가 있었다. 내 옆쪽 침대에 누워 있던 노파는 끊임없이 도움을 요청했다ㅡ죽는다고 고래고래 악을 쓰는데도 간호사들이 신경쓰지 않아 나는 깜짝 놀랐다. 남편은 견딜 수 없어했고ㅡ 그 병실로 나를 찾아오는 걸 견딜 수 없어했다는 말이다ㅡ나를 1인실로 옮겼다. 우리가 가입한 건강보험으로는 이런 호사까지 보장받을 수 없어서, 모아둔 돈이 하루하루 빠져나갔다. 그 가엾은 노파가 질러대는 소리를 듣지 않게 된 건 고마운 일이었지만, 그때 내가 느낀외로움의 크기를 누군가가 알아차렸다면 나는 창피함을 느꼈을것이다. 간호사가 체온을 재러 올 때마다 나는 조금이라도 그녀를 더 붙잡아두려 했지만, 간호사란 워낙에 바쁜 사람들이어서 한담을 나누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 P12
우리는 그러니까 우리 가족은 일리노이 주 앰개시라는 작은시골 마을에서도 별종이었다. 그곳의 집들은 허물어지기 직전인데다 페인트칠을 새로 한 집도 없고 덧창이나 정원도 없어 눈길을 줄 만한 아름다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집들이 한데모여 마을을 이루었지만, 우리집은 그런 집들과도 떨어져 있었다. 아이들은 자신의 환경을 일반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하지만, 비키 언니와 나는 우리가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운동장에서 다른 아이들이 우리에게 "너희 식구들한테서는 냄새가나" 하고 말하고는 손가락으로 코를 잡으며 달아났기 때문이다. 언니는 2학년 때-교실에서 아이들 앞에 서서-담임교사에게가난이 귀 뒤의 때에 대한 핑계가 될 수 없으며 비누를 살 수 없 - P18
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다는 훈계를 들었다. 아빠는 농기계 수리 일을 했는데, 사장과의 불화로 종종 해고를 당했지만 다시 고용되곤 했다. 그건 아빠가 일을 잘했기 때문에 다시 필요해져서였을 것이다. 엄마는 바느질 일을 했다. 우리집에서 도로까지 이어진 긴 진입로와 도로가 만나는 지점에 페인트로 바느질과 수선, 이라고 쓴 손글씨 간판이 있었다. 아빠는 밤에 우리와 기도를 올릴 때 우리에게 충분한 양식을 주심에 감사를 드리게 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종종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고, 당밀을 바른 빵으로 저녁을 때운 것도 여러 번이었다. 거짓말을 하거나 음식을낭비하면 늘 벌이 뒤따랐다. 이따금 예고 없이, 부모님이 충동적으로 사정없이 우리를 때리기도 했는데 때리는 사람은 대체로엄마였고, 대체로 아빠가 보는 데서였다―지금 생각해보면 우리의 푸르죽죽한 피부와 침울한 태도를 보고 그 사실을 눈치챈사람도 있었을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고립되어 있었다. - P19
무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그 적막한 느낌이 이를 데 없었다. 오랫동안 나는 그 나무를 내 친구로 여겼다. 나무는 내 친구였다. 우리집은 아주 긴 흙길을 걸어가야 나왔고, 록 강에서 멀지 않았으며, 근처에는 바람으로부터 옥수수밭을 보호해주는 나무들이 있었다. 그러니 우리집 근처에 이웃이 있을리 없었다. 우리집에는 텔레비전도 없었고, 신문이나 잡지, 책도 없었다. 엄마는결혼한 첫해에 그 지역 도서관에서 근무했는데, 그걸 보면 책을좋아했던 게 분명했다―오빠가 나중에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서관에서 엄마에게 규정이 바뀌어 적절한 교육을 받은 사람만 고용될 수 있다고 통보했다. 엄마는 결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엄마는 더는 책을 읽지 않았다. 엄마가 다른 지역의 도서관에 가서 다시 책을 빌려온 것은 한참이 지난 뒤였다. - P20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낸 건, 아이들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어떻게 인식하고 그 세상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문제 때문이다. 예컨대, 어느 부부에게 자식이 없는 이유를 묻는 것이 무례하다는 건 어떻게 배우는가? 테이블 세팅을 하는 법은? 알려주는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본인이 입을 벌리고 음식물을 씹는다는걸 어떻게 알겠는가? 집에 있는 거울이 부엌 개수대저위의 작은 거울 하나뿐인데, 혹은 어느 누구한테서도 예쁘다는 말을 들 - P20
어본 적이 없는데, 그런 말을 듣기는커녕 가슴이 커지자 친엄마한테서 피더슨 씨네 헛간의 젖소 같아지기 시작한다는 말을 듣는데, 자기 모습이 정말로 어떤지 어떻게 알겠는가? 비키 언니는 그걸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나는 지금까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언니와 나의 사이가 가까울 거라고 예상하겠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우리 둘 다 친구가 없었고, 우리 둘 다 멸시를 당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의 나머지 사람들을 쳐다볼 때 그랬던 것처럼 의심의 눈초리로 서로를 보았다. 지금은 내 인생도완전히 달라졌기에,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며 이런 생각을 하게될 때가 있다.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고. 어쩌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을 거라고. - P21
하지만 햇살이 내리쬐는 보도를 걷거나 바람에 휘는 나무 우듬지를 볼 때, 또는 이스트 강 위로 나지막이 걸린 11월의 하늘을 바라볼 때, 내 마음이 갑자기 어둠에 대한 앎1으로 가득차는 순간들이 예기치 않게 찾아오기도 한다. 그삶이 너무 깊어 나도 모르게 소리가 터져나올 것 같고, 그러면나는 가장 가까운 옷가게로 들어가 낯선 사람과 새로 들어온 스웨터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아마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도 이렇듯 반쯤은 알게 반쯤은 모르게, 사실일 리 없는 기억의 방문을받으면서 세상을 이런 식으로 어찌어찌 통과해나갈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공포라는 감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는 - P21
듯 자신만만하게 보도를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이 어떤 마음인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삶은 아주 많은 부분이 추측으로 이루어진 듯하다. - P22
종조부가 돌아가시자 우리는 그 집에 들어가 살았다. 더운물과 수세식 변기를 쓸 수 있었지만, 겨울에는 여전히 지독하게 추웠다. 나는 추위라면 늘 질색했다. 우리가 어떤 길을 택할 때 그길을 결정하는 요소는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그 요소를 찾아내거나 정확히 짚어내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다. 이따금 나는 어째서 내가 학교에 늦게까지 남아 있으려고 했는지를 생각해본다. 학교는 따뜻했고, 나는 그저 따뜻하게 있고 싶었다. 수위 아저씨는 늘 온화한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라디에이터가 쉭쉭거리는 교실로 나를 들여보내주었다. 나는 거기서 숙제를 했다. 종종 체육관에서 치어리더들이 연습하는 소리나 농구공 튕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을 테고, 음악실에서는 밴드부가. 연습을 하고 있었겠지만, 나는 따뜻하게 교실에 혼자 있었다. 숙제란하기만 하면 끝나는 거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그때였다. 숙제가 어떤 원리로 주어지는지도 그때 깨달았는데, 집에서했더라면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숙제를 마치면 나는 어쩔 수없이 교실에서 나와야 할 때까지ㅡ책을 읽었다. - P32
우리가 다닌 초등학교는 도서실을 갖추고 있을 만큼 크지는않았지만, 교실에 책이 좀 있어서 집으로 가져가 읽을 수 있었다. 3학년 때 어떤 책을 읽은 뒤로 나는 책이 쓰고 싶어졌다. 그 책은두 자매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그애들은 좋은 엄마를 두었고, 여름에는 다른 타운에 가서 지내는 행복한 아이들이었다. 처음 간그 타운에 틸리 - 틸리 ! - 라는 이름의 여자애가 살고 있었는데, 지저분하고 가난해서 이상해 보이고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자매는 틸리에게 잘해주지 않았지만, 그애들의 좋은 엄마가 잘해주라고 했다. 이것이 내가 그 책 『틸리』에서 기억하는 내용이다. 담임선생님은 내가 독서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내게 책을주었는데, 그중에는 어른들이 읽는 책도 있었다. 나는 그 책들을읽었다. 고등학생이 된 뒤에도 나는 여전히 따뜻한 학교에서 숙제를 했고, 숙제를 마치면 책을 읽었다. 그 책들 덕에 몇 가지 얻 - P33
은 것이 있다. 이것이 내 말의 요점이다. 책이 내외로움을 덜어주었다. 이것이 내 말의 요점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나도 사람들이 외로움에 사무치는 일이 없도록 글을 쓰겠다고! (하지만 그건 나만의 비밀이었다. 남편과 만나면서도 그 얘기를 바로 털어놓지는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을 진지하게 여길 수 없었다. 하지만 진지했다고 말하는 것이 진실이고, 나는 나 자신에 대해 혼자 남몰래-아주 진지하게 생각했다! 나는 내가 작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할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건 어느 누구도 모른다. 그러니 그건 중요하지 않다.) - P34
따뜻한 교실에서 보낸 시간 덕에, 그 시절의 독서 덕에, 숙제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충실히 하는 게 의미가 있다는 걸 깨달은덕에 이런 것들 덕에 내 성적은 점점 완벽해졌다. 고등학교졸업반 때 진로 상담 선생님이 나를 상담실로 불러, 시카고 외곽의 어느 대학에서 모든 비용을 다 대주는 조건으로 입학을 제의했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부모님은 이 이야기를 듣고도 별다른말을 하지 않았는데, 아마 성적이 완벽하지 않고 심지어 특별히좋지도 않았던 오빠와 언니가 속상해할까봐 그랬을 것이다. 오빠와 언니는 모두 대학에 가지 않았다. 찌는 듯 무더운 날에 나를 그 대학까지 차로 데려간 사람은 진로 상담 선생님이었다. 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보자마자 - P34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그곳이 좋았다. 학교는 어마어마하게 커보였고, 어디를 쳐다보건 건물이 있었다-내 눈에는 호수가 굉장히 커 보였다. 사람들이 강의실을 들락거리며 한가로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더럭 겁이 났지만, 흥분되는 심정에 비길수는 없었다. 금세 나는 사람들을 따라 하는 법을 습득했고, 대중문화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 부분만큼은 쉽지 않았다. 기억나는 일이 있다. 추수감사절이라 집에 돌아온 날 밤, 나는잠을 이루지 못했다. 대학생활이 꿈일까봐 두려웠고, 눈을 뜨면다시 이 집에서 영원히 머물게 될까봐 두려웠다. 그렇게 되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생각했다. 안 돼. 그 생각을 한참 하다 나는 겨우 잠이 들었다. - P35
누구는 늘 원했던 아이를 포기할 마음을 먹고, 자신의 과거나 옷에 대한 발언도 참아보려 하는데, 그 순간 그런 작은 말 한마디에 영혼의 부피가 줄어들며 이런 말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오그뒤로 나는 많은 남자와 여자와 친구가 되었지만 그들도 그비슷한 말을 했다. 늘 무심결에 진실을 드러내는 그런 한마디를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이 단지 한 여자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일은 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난다. 우리가 그런 한마디를 듣고 그 한마디에 주의를 기울일 만큼 운이좋다면 말이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나는 아주 이상했고 말할 때의 목소리는너무 컸던 것 같다. 대중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내가 잘 모르는 평범한 유머에는 어색하게 반응했을 것이다. 나는 반어라는 개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고, 사람들은 그 사실에 어리둥절해했다. - P38
아파트는 깨끗했고 가구가 많지 않았다. 자주색 아이리스 한 송이가 유리병에 꽂혀 하얀 벽 앞에 놓여 있었고, 벽은 예술작품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걸 본 순간 나는 그와 나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먼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내가 그 예술작품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짙은 색의 길쭉한 형체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추상에 가깝지만 완전히 추상이라고는 할 수 없는 구성들로, 나로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현학적인 세계의 징후라는 것만 알 수있었다. 우리 가족이 자신의 공간에 있는 것을 제러미가 불편해한다는 게 감지되었다. 하지만 그는 더할 나위 없는 신사였고, 이것이 내가 그를 그토록 좋아했던 이유였다. - P50
"이런 말을 하면 정말 안 되는 줄은 알지만, 나는 저들이 거의 부러울 지경이에요. 저 두 사람은 서로를 가졌고, 진정한 공동체로결속되어 있으니까요." 그러자 그가 나를 바라보았고, 그의 얼굴에는 진심 어린 다정함이 떠올라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내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내 겉은 풍족해 보여도 속은 외롭다는것을 알아차렸던 것 같다. 외로움은 내가 맛본 인생의 첫맛이었고, 늘 그 자리에, 내 입안의 틈 속에 숨어 있다가 자신의 존재를일깨워주었다. 그날 그는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리고그는 친절했다. "그러네요." 그는 그렇게만 말했다. 쉽게 이렇게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제정신이에요? 저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다고요!" 하지만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나를 에워싼 - P53
외로움을 이해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싶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 P54
에 뉴욕을 사랑했다. 나는 그녀 안의 슬픔도 보았던 것 같다. 내가 집으로 돌아온 뒤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을 때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아주 많이 웃었고, 그래서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빛났기 때문에, 그때는 그 슬픔을 보고도 몰랐을 것이다. 그녀는남자들이 보면 여전히 사랑에 빠질 법한 그런 여자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 P57
그럼에도 나는 그녀의 책이 좋았다. 나는 진실한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작가를 좋아한다. 내가 그녀를 좋아한 또다른 이유는, 그녀가 뉴햄프셔 주 작은 타운의 쇠락한 사과 과수원에서 자라 뉴햄프셔 주 시골 지역에 대한 글, 열심히 일하고 힘들게 살아가지만 좋은 일이 생기기도 하는 사람들에 대한 글을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그녀가 자신의 책에서조차 진정한 진실은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녀는늘 뭔가에서 멀찍이 비켜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자기 이름조차 제대로 말할 수 없지 않았나! 하지만 나는 그 점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P59
그다음날 아침 병원에서 이제는 꽤 지난 일이 되었다 내가 엄마에게 엄마가 잠을 자지 않아 걱정이라고 말하자, 엄마는자기가 잠을 자지 않는다고 내가 걱정할 건 없다고, 평생 쪽잠을자는 버릇이 들어 그렇다고 말했다. 그 순간 또다시 엄마의 말이조금 쏟아지는 듯하더니 엄마 안에 억눌려 있던 감정이 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날 아침 엄마는 갑자기 자신의 어린 시절에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내내 쪽잠을 잤었다는 이야기를. "안전하다고 느끼지 않으면 그런 버릇이 생겨." 엄마가말했다. "쪽잠은 언제든 앉은 채로 잘 수 있으니까." 나는 엄마의 어린 시절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 P60
이상한 일은 아닌 것 같다. 구체적으로 아는 것 말이다. 요즘은 조상에 대한 관심이 크지만, 그 관심은 이름과 장소와 사진과 법원기록을 의미한다. 하지만 삶의 날실과 씨실이 어떻게 엮여갔는지는 어떻게 알아낼 수 있는가? 우리가 그런 문제에 관심을 갖는순간이 올 때 말이다. 청교도였던 우리 조상은, 내가 아는 다른문화와는 다르게, 대화를 즐거움의 원천으로 삼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아침 병원에서 엄마는 농장에 가서 지낸 여름에 대해 이야기할 만큼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 P61
트럭. 이따금 그 트럭이 깜짝 놀랄 만큼 선명하게 떠오른다. 흙먼지로 줄무늬가 그려진 차창, 비스듬한 앞유리, 계기판에 낀땟자국, 디젤 냄새와 썩어가는 사과 냄새, 그리고 개들 냄새. 내가 트럭에 갇힌 게 몇 번이었는지 그 횟수는 나도 모른다. 처음이 언제였는지, 마지막이 언제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아주 어렸을 때였고, 마지막으로 갇혔을 때도 아마 다섯 살이 되지않았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나는 하루종일 학교에 있었을 테니까. 내가 그 안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던 건 오빠와 언니는 학교에 갔고-지금 생각해보면 그렇다-엄마 아빠 둘 다 일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라면 별로 갇혔을 것이다. - P72
소리를 지르면서 차창 유리를 탕탕 두드렸던 것도 기억난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것 같지는 않다.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던 것 같지는 않다. 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닫고,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는 걸지켜보고, 추위가 살을 파고드는 걸 느끼던 그때 내게 들었던 감정은 그저 공포였다. 나는 언제나 소리를 지르고 또 질렀다. 숨쉬기가 힘들어질 때까지 울었다. 이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나는지쳐서 우는 아이들을, 가끔은 그저 심술이 나서 우는 아이들을본다. 전자도 진짜고, 후자도 진짜다. 하지만 이따금은 절박하기이를 데 없는 소리로 우는 아이들을 보기도 하는데, 나는 그것이 아이가 낼 수 있는 가장 진실한 소리의 하나일 거라고 생각한다. - P73
그런 순간에는 내 안에서 심장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같다. 탁 트인 내 유년의 들판에서-조건이 정확히 맞아떨어질때 - 옥수수가 자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중서부 출신들조차 옥수수 자라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고내게 말했지만, 그들이 잘못 안 것이다. 내 심장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고, 그게 사실인 것은 나도 알지만, 내게 옥수수가 자라는 소리와 내 심장이 부서지는 소리는 분리할 수 없는것이다. 나는 아이의 절박한 울음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타고 있던 지하철 칸을 옮긴 적도 있다. - P73
내가 트럭 안에 갇혀 있었을 때 내 마음은 매우 이상한 곳으로 가곤 했다. 어떤 때는 한 남자가 다가오는 것을, 또 어떤 때는괴물을 본 것 같았고, 또 한번은 언니를 본 것 같기도 했다. 그러면 나 자신을 달래면서 소리 내어 혼잣말을 했다. "괜찮아, 아가야. 곧 마음씨 고운 아줌마가 올 거야. 너는 정말로, 정말로 착한아이고, 그 아줌마는 엄마의 친척인데 혼자 사는 게 외로워 같이살 착하고 귀여운 여자애를 찾고 있어서, 너를 데려가 같이 살고싶어할 거야." 나는 이런 상상을 하곤 했고, 그 상상이 내게는 정말로 진짜처럼 느껴져 그 덕에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나는춥지 않은 곳을, 깨끗한 시트와 깨끗한 수건을, 고장이 안 난 변기를, 볕이 잘 드는 부엌을 꿈꿨다. 나는 이런 방법으로 천국에들어갔다. 슬슬 추워지고 해가 저물면 나는 또다시 울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훌쩍거리던 울음이 점점 걷잡을 수 없어졌다. 러면 아빠가 나타나 잠긴 문을 열어주었고, 가끔은 나를 안아서데려갔다. "울 일이 뭐가 있어." 이따금 아빠가 말했다. 아빠의따스한 손이 내 머리 뒤쪽에 닿았던 것이 지금도 기억난다. - P74
나는 말하고 싶었다오, 이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한번은 그 안에 저하고 아주아주 긴 갈색 뱀하고 같이 있었는데 그것도 기억 안 나요? 나는 묻고 싶었지만 그 단어를 도저히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지금도 차마 말할 수 없기에 내가 긴갈색의 그것과 함께 트럭 속에 갇힌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무서웠는지도 말할 수 없다 게다가 그건 정말로 잽싸게 움직였다. 정말로 잽싸게. - P82
캐럴은친구들도 한편으로 만들려고 아이들을 쳐다보며 그 동작을 하고 있었다. 헤일리 선생님의 얼굴이 붉어졌고, 선생님이 이렇게 말한것이 기억난다. 너희가 다른 누구보다 더 잘났다는 생각은 절대하지 마라. 내 교실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이곳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잘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방금 몇 명의 얼굴에서 다른 누구보다 더 잘났다고 생각하는 표정을 읽었는데, 내 교실에서는 절대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캐럴 다를 흘끔 쳐다보았다. 내 기억에 그애는 잘못을 지적받아 속상한 듯했다. 나는 조용히, 완전히, 단박에 이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지금 그가 어디에 사는지, 아직 살아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나는여전히 이 남자를 사랑한다. - P84
헤일리 선생님은 그해 말에 떠났다. 내 기억으로는 입대를 했는데, 시절을 감안하면 틀림없이 베트남에 갔을 것이다. 나중에워싱턴 D.C.의 참전용사기념비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봤지만 없었다. 내가 그에 관해 더 아는 건 없지만, 내 기억에 캐럴 다는 그뒤부터 그의 수업 시간에는 내게 못되게 굴지 않았다. 무슨말인가 하면, 우리 모두 그를 좋아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그를 존경했다. 이것은 열두 살짜리들의 학급에서 한 남자가 이루어내기에 절대 작은 업적이 아니다. 그는 이루어냈다. - P86
|